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파리의 아침은 얼마나 맑고 싱그러웠는지. 당신은 인생의 첫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이 거머쥔 영광은, 이후로도 줄곧 당신 곁에 머물렀지요.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50년 뒤에 우리가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겠지요. 곧 당신의 뼛가루는 마라케시 정원에 마련된 묘지에 안장될 테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

-이제 곧 서로 헤어져야 하는데, 나로서는 그 방법을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우리는 서로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죠). 비록 더는 아그달 정원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함께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한 폭의 그림, 한 점의 조형물 앞엣허 함께 감상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해도 말입니다.

-당신에게 빚진 것들을 내가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언젠가 모로코의 종려나무 밑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리라는 것도 말입니다. 당신을 보내며, 이브, 당신을 향한 찬탄과 깊은 존경과 나의 사랑을 전합니다.

-세기의 경매건 뭐건,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모든 작품들이 이제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될테니까. 내 나이쯤 되면 이제 가벼워질 줄 알아야겠지. 너는 천재였고, 나는 너와 함께하는 방법을 알았어.

-50년 동안 나는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이면서 네 곁에 있었어. 만약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의 삶과 작품도 지금 같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재능, 누구에게서도 부여받지 않은, 오직 너만의 재능이야.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넌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 쇼에 참석한 이들이 동시에 일어나 갈채를 보낼 때 느꼈던 행복만 기억했으면 해. 애석하게도 그때의 그쁨, 그 한순간의 기쁨은 빠르게 사그라지고 이내 슬픔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어느 날, 신을 만난 것처럼, 낯선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바로 그때 너를 만났고 말이야. 나는 늘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너는 내 말을 들었고, 모든 방면에서 나를 맹목적으로 신뢰했어. 또한 내 시각을 더 날카롭게 벼리고, 내 취향을 예리하게 다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해줬지. 오브제들, 특히 그림들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니까. ;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근본적으로, 이 편지에는 단 한 가지 목표가 있었지.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것. 네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 요컨대 네게도 수없이 이야기했던 나의 추억에 불을 밝히는 것. 너와 함께해서, 그리고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여주는 것. 그리고 바라건대, 이 글이 너의 재능, 너의 취향, 너의 명민함, 너의 단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순수함, 너의 아름다움, 너의 시선, 너의 청렴함, 너의 정직성, 너의 고집과 욕구를 보여주기를. 너를 걸을 수 없게 했던 그 '거인의 날개'를.

-이것이 마지막 편지이지만 결별의 편지는 아니야. 어느 날 다시 너에게 글을 쓰게 될지 누가 알겠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 50년 동안 너는 나를 매혹적인 모험으로 데려갔지. 가장 광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뒤섞이고, 현실으 거의 자리하지 않는 꿈속으로. 오늘,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생의 한 장이 끝났음을 너의 죽음이 알려준거야.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마법으로 나를 사로잡았지.

-나는 나의 모든 추억과 함께 홀로 남았지. 어둠이 내리고, 먼 곳에서 음악이 들려와. 그러나 나는 그곳에 갈 힘이 없네.

 

 

이브 생 로랑.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에 기존의 스타일을 탈피한 여성복 컬렉션, 그리고 날카로운 얼굴에 어울리는 뿔테와 수트까지.

이브 생 로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함께 그의 영화, 인터뷰, 다큐멘터리 등이 생각난다.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책은 그와 50년을 함께하 연인, '피에르 베르제'가 쓴 아름다운 편지다.

이브 생 로랑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고 아쉽거나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브 생 로랑의 파트너이자 재단의 대표, 책의 저자이자 회화에도 능한 '피에르 베르제'의 편지를 읽다보면 시보다 더 시같고, 편지보다 더 편지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그와 그의 연인의 이야기가 애틋하고 아름다우니까.

한 손에 들어오는 책의 사이즈와 함께 마치 옷을 만지는 듯한 표지의 재질, 그리고 "YSL"을 필기하고 있는 이브 생 로랑의 멋진 사진까지.

완벽한 그의 성격만큼이나 완벽하고 예쁜 표지를 책 읽기 전부터 한참 바라봤다.

표지도 예뻐서 그런지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품절 대란도 겪어서 그 인기를 실감했다.

그리고 '피에르 베르제'의 문학적인 편지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 번역도 정말 좋았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

5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긴 세월동안 함께 겪고 이겨내고 아파하고 사랑한 일들이 많았다.

처음 회사를 설립하고 컬렉션을 열고 소장품을 모으고 각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운명처럼 이 둘은 함께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순간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피에르 베르제는 차마 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이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에 담았다.

사실 이 책은 이브 생 로랑 장례식장에서 낭독한 추도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은 이브 생 로랑 1주기에 낭독한 추도문으로 끝이 나고.

절제된 감정에 덤덤한 문체,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체념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그의 편지에는 이별보다 더 깊은 사랑이 묻어난다.

아침, 저녁으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들고 다니며 시를 읽듯이 아끼듯 한 줄씩 읽어나갔는데 어느 새 하루가 다 지났다.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슬픈 글이 아닌데 마음이 먹먹하고 한동안 쉬었다가 읽기를 반복했다.

이브 생 로랑을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이 둘의 만남과 이별과 죽음은 커다란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젠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름, 이브 생 로랑. 그리고 이 한 권의 책으로 피에르 베르제도 더 많이 알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만나면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많았겠지만 서로를 채우고 완성시켜주는 둘의 존재만으로도 많은 영감을 주고 이 편지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P.S. 너의 1주기에 생로슈에서 낭독한 글이야.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이곳에 남겨."

이 글은 이브 생 로랑 1주기에 낭독한 추도문으로 곧 끝이 나지만 둘의 인생과 만남과 이름은 영원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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