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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의롭게" 

이책 표지를 들추면 보이는 유시민의 말이다. 말 그대로 "자유로운 시민들과 정의로운 국가"라는 개념은 사실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 왔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정치로서의 역사'라고 할 만큼, 그 과정에서 자유와 정의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책에서 유시민이 들려주는 국가 이야기는 멀게는 홉스로부터 가까이는 MB정부의 '은총(?!)'까지 이어진다. 결국 이것은 유시민 자신의 '국가론' - 까지는 아니겠지만, 이것을 단순히 정치가로서의 자기보론이라 하기도 뭣하니 그냥 넘어가자 - 비슷한 것이라 할 만한데, 국가는 '왜'(혹은 어떻게) 이러(해야) 하는지, 혹은 왜 이러는지(?)에 대한 이야기들과 맞물려 한국사회의 청사진들이 골고루 담겨 버무려진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참'의 명제("시민이 자유로우면 국가는 정의롭다" or "국가가 정의로우면 시민은 자유롭다")가 역사 속에서 거의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판단 주체의 몫이긴 하지만, 어떤 '국가'에서도 자유롭지 않은 '시민'이란 존재했다.(그러므로 여기서 시민사회 이전의 역사는 모두 폐기된다.) 더불어 혹여나 좀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라는 이름을 공공연히 획득하지는 못했다.(그것은 대부분 자유로운 시민들로부터 '혁명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러므로 유시민이 말하는 저 올바른 명제는 아무래도 그의 이상향, 혹은 대부분 '시민들의' 이상향으로 머무는 듯싶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역 혹은 대우명제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민이 먼저냐 국가가 먼저냐 하는 근본적인radical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유시민이 고민하는 문제도 이와 밀접하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여러 사상가들과 국내 인물들의 사유를 좇아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엽합정치이다. ...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아마도 여기서 그가 자유주의 진영으로 지칭하는 것은 민주당일터, 이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한지 벌써 수개월이 흘렀다. 아직도 연합정치의 '플랜'이나 로드맵은 구체적으로 짜여지지 않은 채, 오갈데 없는 한량처럼 정치권의 '유령'으로 변모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마지막에 언급하듯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 연합정치라는 점이다. 연합정치를 통해 대선에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투표권'을 획득하여 집권세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그의 목표라면, 결국 이것은 진정 시민의 자유에서 출발하는 정의로운 국가이기보다는, (자유+진보세력의 '섞임'을 통한) '정의로운' 정치권력으로부터 도출되는 '자유시민'에의 약속이다. 그래, 뭐 국가(정치권력)이 시민보다 우선시되어야 마땅하다는 날선 논리를 차치하고라도, 그리고 진보대연합, 연합정치 운운하는 세력들의 (전략적) 정당성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형상'이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는 낙담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고진이 맑스의 재-독해를 통해 언급했듯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보로매오의 매듭'에 대해 총체적인, 그리고 근본적인 분석을 통해 사유하지 않고서는, "진보는 사회주의다" 라는 (김상봉의) 말을 조금 더 변주하여 사유해보지 않고서는, 어떤 공동체의 구성이 정의로운 국가의 탄생을 예고하리라는 그의 아름다운 바람이 실현되기는 좀 힘들어 보인다. 

어쨌든 약간 김빠지는 결론과 조금은 주관적인 보론격의 이야기들을 제외하자면, 국가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의(유시민이 바라보는) '(한국이라는)국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싶은 이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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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라 논픽션,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

  이 걸작이 조명받지 못하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렇다고 필자가 이 글을 읽어봤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걸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책을 설명하는 문구가 너무도 화려하여 마치 이 책을 걸작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책이 없지 싶어서 하는 말이다.)  

비교적 유치찬란한 표지에 속지 말지어다. 무려 우주의 미스터리와 고대를 읽는 발칙한 상상력, 그리고 '구라 논픽션'이라는 위대한 장르를 탄생시킨 저자는 분명 천재임이(?!) 틀림없다.  

누가 필자에게 외계인을 믿냐고 물어온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함." 이게 뭔 소린고 하니,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니 외계인이라는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생물이며(따라서 외계인의 존재를 믿을 것이며), (인간의 사고와 지금까지의 천문학으로는) 도저히 존재함을 판단할 수 없는(없었던) 상상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리고 책을 친히 읽은 (무려 그 쿨&시크하다는) 딴지총수가 하는 말에 의하면, 이쯤 되면, 외계인은 존재해줘야 되는, 그런 상황이란다.

 

 2. 문학과 철학의 향연

 

 어느 학문이나 이른바 융합과 절합관계가 필요한 시대이다. 사실 문학과 철학은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다. 대학내(제도권)에서도 유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철학의 생사는, 오히려 철학과 자체가 아니라 국,영문/사회,정치,경제/영화,예술학과 등에서 목격되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맺기는 충분히 어떤 필연적(사회적/시대적) 요구와 맞물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과 철학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쓰여진 문학, 혹은 철학책이다. 혹은 그 둘 다일수도 있다. 그럼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사실 선택이란 크게 의미가 없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든, 독자들은 두 가지 모두를 보게될 테니까. 

 

 

 

 3.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슘페터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더불어 이론경제학자인 그가 분석하는 것은 무려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라니, 과연 이게 한 권의 책에 담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그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 '이후'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마르크스 '이전'의 사유들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마르크스 이후란, 마르크스 이전과, 마르크스를 경유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는 마치 마르크스와 다르지만 마르크스와 함께하는 동반자적 입장으로,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생존과 사회주의의 작동에 대해 고찰한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주의 자체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치혁명을 소거하고 경제혁명을 대치시킨 그의 생각들은 꽤 오묘하다.  

 

 

4. 혁명의 현실성 

 

 이 책에서 다루는 혁명의 사례는 총 다섯 가지이다. 저자들은 그러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일종의 '교훈'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 가까운 과거들의 교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단지 교훈에 대한 인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음이며, 또한 물음의 해답을 찾기 위한 실천의 촉구일 것이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고 있자면, 이러한 실천들은 하나의 물음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그것은 결코 '현실'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산다는 것. 삶의 문제와 혁명을 이중적 잣대로 구분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많은 문제들을 도처에 숨겨놓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빼앗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혁명에 대해 사유해야 하며, 혁명 자체가 가진 폭발력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연대의 문제에 대해서 재-사유해나가야만 한다. 

 

 

5. 기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다윈과 진화론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유인원에 가까운 필자는 진화론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는 아니고, 여튼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한10cm정도? 고정도?(.....) 움직였던 다윈의 고민들을 읽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서간체로 이루어져 약간 멍해질수도 있지만, 읽기에는 편하리라 생각한다.

 

 

 

  

덧. 몇몇 분들이 장정일과 정여울의 신간을 추천하셨는데, 아마 8월 출간 도서라 선정되기 힘들듯 해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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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 눈길이 가네요.. 경제서적으로 분류되어 아쉽기는 하지만요.

rainmaker_1201 2011-08-11 03: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슘페터의 책은 경제/경영 분야로도 들어갈 수 있지만 크게 보아 사회과학 > 사회사상 분야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추천했습니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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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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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치는 흔히 진실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점잖은 격언에 좌우된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꽤 자주 드는 격언이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을 이르는지 따져보지 않고서는 이 격언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 격언은 분명히 그릇된 것이다. A라는 남성이 근엄하고도 단호한 지혜를 가진 척하면서 이 격언을 들먹일 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를 가든 항상 자기 고향에서와 똑같이 행동하라는 점이다...(중략)" p.32 

 이 늦은 리뷰를, 아니 어쩌면 더이상 누군가가 다시(re-)들춰 보지도(view) 않을 이 글을 이 문구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경제적 고려'에 의해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충분히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당최 이 엉뚱한 이야기를 왜 갑자기 꺼내는가 하면, 바로 내가 그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태하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본성'이란, 한국사회의 경제적 고려에 의해 충분히 '무시'된다. 아니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러한 경제적 고려는 나태라는 본성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며, 파괴한다. 나는 남성 A가 되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태를 지키기 위한 정치다. 그리고 인류학적 상대성을 부정하는 정치다. 나는 이러한 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빈곤한 사유의 배설물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위로다. 

"스탈린은 처칠이 총선 결과에 승복하고 조용히 물러난 것을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못했다. 나는 대의민주제 정부의 가치를 확신한다. 대의민주제 정부는 정부의 활동에 반드시 요구되는 도량과 자제심을 지닌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대의민주제 정부의 필요조건인 타협과 양보를 전혀 훈련받지 않은 나라들에 당장 이런 정부 형태가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p.44 

재미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대의제의 도입이 가지는 의미가 러셀이 '우려하는' 바로 저 지점, '타협과 양보를 전혀 훈련받지 않은' 곳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들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젠 날라차기에 주먹질은 기본이잖나? 더불어 또 한가지는, (물론 나는 러셀처럼 대의제의 가치를 전혀 확신하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에서 '시민'에게 대의제란, 결국 '타협과 양보'라는 침묵하는 가치 속에서가 아니라, 투쟁과 혁명 속에서 비로소 꽃피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대의제의 필요조건이 타협과 양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조건은 분명 투쟁과 혁명이며, 이것은 결코 대의제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정치형태일 수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좌절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형법의 미덕은 도덕성으로 위장한 소심함 때문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출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충동을 발산할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전쟁 역시 똑같은 미덕을 가진다. 형법은 아무리 증오심이 끓어올라도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약간의 선전 활동만으로도 이런 증오심을 다른 민족에게 돌릴 수 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살해 충동은 애국적인 용맹성이 된다." p.77 

만약에 러셀이 지금-여기에서 가장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휴머니즘의 영역, 그러니까 이라크 파병과 미국중심의 세계화와 비정규직과 청년백수로 점철된 한국사회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휴머니즘이란 사상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에의 '개입'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가 '너무도 효율적으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으며, '먹고사니즘'은 결국 그 정치와 경제의 합작품으로 우리에게 非휴머니즘적 사회체계의 구조화를 돕도록 내몰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위장과 내 '나와바리' 지키기일뿐, 휴머니즘을 들먹이는 먹고사니즘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런 우리는 김연아와 박태환을 보면서 눈물을 쏟고, 해병대 사건사고를 관찰하며 불안에 휩싸인다. 이것은 러셀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형법'이다. 바로 그 형법적 미덕이야말로, 먹고사니즘이라는 '공격성'을 은폐하며 동시에 자신을 자폐의 길로 인도하는 '인도주의적 환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피히테는 교육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하며,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 교수들이 원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가 최상이라고 여겼던 제도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출현했다. 앞으로는 독재 체제하에서 이런 실패작이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규정된 식사와 주입식 수업, 훈계조의 명령이 결합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권위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성격과 신념이 형성되어 기성 권력을 비판하는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불행하게 살더라도 정부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p.145 

교육파트에서 러셀이 한 말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토막이다. 맑스와 같은 인물의 출현은 이제 불가능한 것일까? 권위에의 복종 혹은 신봉은 이제 '좌파'라는 개념의 '자리이동'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좌파 혹은 '좌빨'은, 우리가 알던 '왼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지구의 맨틀이 조금씩 움직이듯, 교육은 좌파의 지점을 옮겨놓고 있다. 보수집단에서는 교과서의 내용이 지나치게 좌빨이라고 몰아세우고, 그에 맞물려 대안교과서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학생들은 '공부'를 했고, 모 선생에게 훈계와 주입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좌파의 위치란 이제 386세대들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일종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 이제 좌파의 위치는 어디일까. 더 오른쪽으로 가버렷냐고? 글쎄. 내 생각에 그 위치는 약간 3차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어느 극점에서 다른 극점까지라는 하나의 선분 위에 고정적으로(그리고 절대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처럼, 3차원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이리저리 돌려지는 지구본처럼, 좌파의 위치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다들 알겠지만 그 지구본(구)의 이름은 '교육정책'이며, 그것을 굴리는 '보이는 손'은 정책 입안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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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에 대해서, 그의 사상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잠언이 비로소 그 효용을 담보하게 되는 순간은, 언어의 확장이 일어나게 되면서 비로소 발생한다.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실천으로 변모하게되는 순간 말이다. 물론 한 마디의 말로써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 언어의 무의식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열되어 있는 것은 인간 주체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러셀과 그의 삶, 그리고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대표작을 비롯한 원서의 착실한 번역이 더 요구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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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의 최근 '인기'에 대해 새삼 놀라고 있다. 알라딘에서만 현재 1900부 가량 판매중인데, 가히 놀라운 '업적'이다.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업적일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여하건 '이것'이 문화비평이라는데, 안 읽어보고 배길 자 없으리라. 재미있는 것은, 제목이 환기하듯 그간의 문화비평에 대해서 일종의 비평적 관점을 환기하고 있으니, 진정한 비평의 제목이라 할 만하다는 점이다. 철학/비평, 사회/정치, 그리고 문화/인물 사이에서 이택광이 펼쳐내는 사유의 제 2 악보를, 혹은 그 잔혹한 레퀴엠을 들어보도록 하자.

 

 

 

 

2. 아렌트 읽기 

 

 아렌트는 친숙하지만, 동시에 낯설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기저를 파헤치던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자다 깬 우리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생경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경한 경험은 우리의 '현실'이다.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이미 한국사회의 정치-형식을, 생각-없음으로 정확히 치환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를 재-인식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충분하다.  

 

 

 

3. 헤겔 법철학 비판 

 

 

 

 사실 헤겔의 '법철학(강요)'를 먼저 읽어야 순서가 되겠지만, 꼭 그리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자명하다. 누군가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그의 추종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맑스는 헤겔비판을 위해 그의 작품을 이리도 '성실하게' 독해하지 않았던가. 그의 사상적 기초라고 볼 수 있는 '국가'와 '민주주의'에 관한, 그리고 넓게는 시민사회 전체에 대한 그의 사유를 탐독할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가 강유원이라는 점은 분명 플러스 요소다.

 

 

 4. 내 청춘의 감옥 

 

 

 6월은 '현대사'시간이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우리는 찾아서 배워야만 한다. 조국 교수의 추천사에서 '무형의 감옥'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표현을 접하고 바라본 이 책의 제목은 꽤나 섬뜩하다. 내 청춘은 과연 감옥속에 있지 않은가? 이러한 슬픈 자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자기-인식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썼던 신영복의 추천사가 절절이 다가온다. 

 

 

 

 5, 이상과 모던뽀이들 

 

 군 시절을 마무리하며 읽었던 이상의 <종생기>는 아직도 필자에게 '유효하다.' 종생동안 우리는 그처럼 제대로 된 종생기 한장 쓰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아직도 우리들 안의 '근대성'에 그대로 화석처럼 살아남아 있고, 탈근대성의 언저리마저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달 책들 중, 가장 흥미로운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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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데리다 평전 

 

 언젠가부터, 평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건 평전이라는 장르가 한 인간의 사상을 다루기 위하여 그의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가 (후기)구조주의자라면 그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의 작업을 위해 '유령'의 삶을 살았던 데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매력적인 하나의 기표다. 해석해야만 하는, 하지만 결코 표상된 해석의 자국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때로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그리고 그 (불가능한)해석의 충격 이후에도 여전히 이명으로 남아 귓가를 울리는. 

 

 

 

2. 한권으로 충분한 시간론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사람들은 시간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이건 물론 일종의 망상이다. 시간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는가, 시간이 '휘어진다'는 건 어떤 뜻일까? 시간의 흐름은 '조절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확실하게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재한 듯'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과연 '한 권으로 충분한' 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시간론'에 대한 쉬운 '입문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3.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 

 

평가단 책으로 선정하기(되기)엔 좀 어렵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젝의 신간이라 일단 추천해본다. 헤겔, 셸링, 피히테라는 독일 관념론의 핵심 인물들이 등장하며, 지젝과 가브리엘은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칸트'로의 회귀를 감행한다. 이것은 그들이 밝히는 대로, 현대철학 담론의 페티시즘과 결여된 자기반성적 모습을 위한 하나의 '처방'이다.  

 

 

 

 

4. 스피노자 

 

  이왕 데리다 평전도 추천한 김에, 스피노자까지 추천해본다. 데카르트-헤겔로 이어지는 흐름이 그동안 한국 철학계를 한번 휩쓸었다면, 최근에는 확실히 스피노지언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인것 같다. 그는 여전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호명할 때 큰 울림을 가지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지난한 개인의 삶에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큰 관심이 없지만, 스피노자를 지금-여기에서 읽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써 이 책을 읽어나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5.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 (출간일이 4월 말이라 긴가민가 하다가 포함시킴)

 

언제쯤 <자본>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은 참 반가운데, 동시에 여전히 '자본'에 대한 '정면돌파'는 아니라는 점에서 약간 불만이다. 어쨌든 결국은 넘어야만 할 '산'이라는 점에서 필자에겐 좋은 약이 되리라 생각한다.   

맑스는(혹은 그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들의 곁을 배회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경제'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노동'이라는 어렴풋한 의미(혹은 가치)에 대해서 탐구할 필요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

 (+6)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집   

 

이 책은 충분히 '인문학'적인 사유로 쓰여진 것이라 생각해서 추천한다. 하지만, 어차피 '에세이' 분야에서 선정되지 싶다. 이럴 때는 분야가 인문/사회/과학인 것이 왠지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그냥 (평가단이 아니더라도)추천도서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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