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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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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치는 흔히 진실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점잖은 격언에 좌우된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꽤 자주 드는 격언이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을 이르는지 따져보지 않고서는 이 격언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 격언은 분명히 그릇된 것이다. A라는 남성이 근엄하고도 단호한 지혜를 가진 척하면서 이 격언을 들먹일 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를 가든 항상 자기 고향에서와 똑같이 행동하라는 점이다...(중략)" p.32 

 이 늦은 리뷰를, 아니 어쩌면 더이상 누군가가 다시(re-)들춰 보지도(view) 않을 이 글을 이 문구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경제적 고려'에 의해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충분히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당최 이 엉뚱한 이야기를 왜 갑자기 꺼내는가 하면, 바로 내가 그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태하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본성'이란, 한국사회의 경제적 고려에 의해 충분히 '무시'된다. 아니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러한 경제적 고려는 나태라는 본성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며, 파괴한다. 나는 남성 A가 되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태를 지키기 위한 정치다. 그리고 인류학적 상대성을 부정하는 정치다. 나는 이러한 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빈곤한 사유의 배설물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위로다. 

"스탈린은 처칠이 총선 결과에 승복하고 조용히 물러난 것을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못했다. 나는 대의민주제 정부의 가치를 확신한다. 대의민주제 정부는 정부의 활동에 반드시 요구되는 도량과 자제심을 지닌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대의민주제 정부의 필요조건인 타협과 양보를 전혀 훈련받지 않은 나라들에 당장 이런 정부 형태가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p.44 

재미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대의제의 도입이 가지는 의미가 러셀이 '우려하는' 바로 저 지점, '타협과 양보를 전혀 훈련받지 않은' 곳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들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젠 날라차기에 주먹질은 기본이잖나? 더불어 또 한가지는, (물론 나는 러셀처럼 대의제의 가치를 전혀 확신하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에서 '시민'에게 대의제란, 결국 '타협과 양보'라는 침묵하는 가치 속에서가 아니라, 투쟁과 혁명 속에서 비로소 꽃피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대의제의 필요조건이 타협과 양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분조건은 분명 투쟁과 혁명이며, 이것은 결코 대의제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정치형태일 수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좌절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형법의 미덕은 도덕성으로 위장한 소심함 때문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출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충동을 발산할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전쟁 역시 똑같은 미덕을 가진다. 형법은 아무리 증오심이 끓어올라도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약간의 선전 활동만으로도 이런 증오심을 다른 민족에게 돌릴 수 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살해 충동은 애국적인 용맹성이 된다." p.77 

만약에 러셀이 지금-여기에서 가장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휴머니즘의 영역, 그러니까 이라크 파병과 미국중심의 세계화와 비정규직과 청년백수로 점철된 한국사회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휴머니즘이란 사상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에의 '개입'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가 '너무도 효율적으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으며, '먹고사니즘'은 결국 그 정치와 경제의 합작품으로 우리에게 非휴머니즘적 사회체계의 구조화를 돕도록 내몰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위장과 내 '나와바리' 지키기일뿐, 휴머니즘을 들먹이는 먹고사니즘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런 우리는 김연아와 박태환을 보면서 눈물을 쏟고, 해병대 사건사고를 관찰하며 불안에 휩싸인다. 이것은 러셀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형법'이다. 바로 그 형법적 미덕이야말로, 먹고사니즘이라는 '공격성'을 은폐하며 동시에 자신을 자폐의 길로 인도하는 '인도주의적 환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피히테는 교육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하며,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 교수들이 원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가 최상이라고 여겼던 제도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출현했다. 앞으로는 독재 체제하에서 이런 실패작이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규정된 식사와 주입식 수업, 훈계조의 명령이 결합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권위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성격과 신념이 형성되어 기성 권력을 비판하는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불행하게 살더라도 정부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p.145 

교육파트에서 러셀이 한 말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토막이다. 맑스와 같은 인물의 출현은 이제 불가능한 것일까? 권위에의 복종 혹은 신봉은 이제 '좌파'라는 개념의 '자리이동'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좌파 혹은 '좌빨'은, 우리가 알던 '왼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지구의 맨틀이 조금씩 움직이듯, 교육은 좌파의 지점을 옮겨놓고 있다. 보수집단에서는 교과서의 내용이 지나치게 좌빨이라고 몰아세우고, 그에 맞물려 대안교과서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학생들은 '공부'를 했고, 모 선생에게 훈계와 주입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좌파의 위치란 이제 386세대들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일종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 이제 좌파의 위치는 어디일까. 더 오른쪽으로 가버렷냐고? 글쎄. 내 생각에 그 위치는 약간 3차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어느 극점에서 다른 극점까지라는 하나의 선분 위에 고정적으로(그리고 절대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처럼, 3차원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이리저리 돌려지는 지구본처럼, 좌파의 위치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다들 알겠지만 그 지구본(구)의 이름은 '교육정책'이며, 그것을 굴리는 '보이는 손'은 정책 입안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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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에 대해서, 그의 사상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잠언이 비로소 그 효용을 담보하게 되는 순간은, 언어의 확장이 일어나게 되면서 비로소 발생한다.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실천으로 변모하게되는 순간 말이다. 물론 한 마디의 말로써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 언어의 무의식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열되어 있는 것은 인간 주체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러셀과 그의 삶, 그리고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대표작을 비롯한 원서의 착실한 번역이 더 요구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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