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1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1. 마왕과 용사에 대한 서사

마왕(魔王)과 용사(勇士)에 대한 서사적인 요소는 우리 인류의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마왕이란 거대한 힘을 가진 자와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용사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용사라는 존재로 통해 마왕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을 부여한다. 용사라는 존재는 단순히 용기를 지니 자가 아니라 상당한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의 존재적 가치는 모든 인류가 합하여도 이겨낼 수 없는 마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나 마왕과 용자의 관계에서 왜 계속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일까? 우선적으로 내가 생각했지만,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에서도 마왕과 용사는 어느 한 세계를 패권을 다투는 존재다.

 

그들 중에서 마왕은 오래된 자고, 용사는 새로 나오는 자다. 마왕을 쓰러지면 그 세계의 패권은 용자에게 주어지게 된다. 용사가 주어지는 특권 중에는 왕이 되거나, 혹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종교적인 경외감을 받거나 또는 미인을 얻게 된다. 용사의 과업에 대한 성취는 하나의 서사로서 과업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한 숙제가 부여되었고, 단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극복이란 플롯이 배치함으로써 재미를 준다. 따라서 용사가 이미 마왕을 퇴치해야 하는 조건일 때 이미 극은 마왕은 죽거나 패배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왕의 존재란 과연 용사에게 무조건 쓰러져야 하는 조연인가? 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마왕과 용사에게 등장하는가? 기본적으로 마왕은 40~50대의 남성이고, 용사는 10~20대의 남성이다. 즉 나이를 비교해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적당하다. 아버지가 가진 권력이 결국 아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되면 아들은 2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는가? 인류학의 명저 중에 하나인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이나 혹은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이란 서적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관점이 생긴다.

 

특히 <황금가지>에서 어느 남자가 나무 아래 칼을 잡고 살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지른다. 그는 결코 미치지 않았다. 그가 미친 듯이 발악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부족이나 무리의 우두머리고, 그에게 달려드는 자는 젊고 혈기가 왕성한 젊은 사람이다. 만약 그 자리에서 결투가 일어나서 우두머리가 승리하면 그는 오늘 목숨을 부지하여 권력을 유지하였음을 증명하고, 대신 패배를 하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죽인 젊은 사람은 그 무리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어 언젠가 새로운 도전자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

 

마왕과 용사는 결국 새로운 권력자가 기존의 권력자에게 대항하여 생기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피하거나 혹은 새로운 승리자의 관점을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 역사는 사실성과 객관성이 필요로 하겠지만, 적어도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은 사실성과 객관성보다는 승리자의 초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최후의 왕국이던 조선에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자이나, 이에 반해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고려의 무신이며 위화도 회군의 주역이던 이성계에 의해 망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왕의 존립과 기존의 왕이 사라지는 순간, <황금가지>에서 보인 기존 우두머리의 몰락과 새로운 우두머리의 탄생은 마왕과 용사라는 구조를 대입하면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라이트노벨에서 신화와 <황금가지>에 대한 요소를 대입하는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일단 라이트노벨은 기본적으로 경소설이라고 하고, 만화책과 소설의 중간이라고 한다. 소설이 문학에서 나온 것이므로, 최초의 문학은 인간이 아닌 인간의 욕망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신화(神話)라고 한다. 신화에 나온 신은 인간이 현실에서 드러내지 못한 욕망과 억압 그리고 숨어있는 무의식적인 요소를 내민다. 그런 점에서 용사와 마왕의 관계에서 마왕의 존재가 결코 좋지 않은 점은 여실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그리스신화를 들여다보면, 신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우스의 가계에서, 제우스의 할아버지격인 우라노스는 자신의 아들인 크로노스에게 당하고,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인 제우스에게 당한다.

 

그리고 크로노스와 제우스는 아들이 중에서 맏형이 아니라 막내였다. 막내가 아버지를 물리친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의 패권을 자식에게 양보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죽도록 만들었다. 우라노스의 경우 자신의 아내인 가이아와 막내아들 크로노스에게, 크로노스는 자신의 어머니인 가이아와 막내아들 제우스에게 권좌를 빼앗긴다. 가이아의 경우 지구의 대지를 가리키는 여신으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벨 때, 가이아가 준 것이다. 즉 가이아는 자연의 흐름이고 인간은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남성의 존립성에서 권력을 다투는 것은 문명의 세계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문명도 자연의 흐름에 따라야 하는 점이다.

 

마왕과 용사의 이야기는 결국 새로운 세계를 제패하려는 젊은 사람의 영웅담이다. 그리고 그 영웅담은 신화적인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아버지를 대신 아버지를 차지하려는 아들, 하지만 차지하더라도 기존의 남은 사람들은 계속 남아있어야 하므로, 용사에게 항상 마왕이란 아버지를 응징할 수 있는 명제가 필요했다. 라이트노벨에도 마왕과 용사의 대립은 최근까지 계속 나오는 주제이다. 그렇다면 마왕과 용사의 관계가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마왕과 용사는 반드시 둘 다 남자이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마왕과 용사는 모두 남자인 것이 20세기 전까지의 흐름이었다. 마왕이 여자로 변하고, 용사도 심지어 여자로 되어 나온 점은 그래 오래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만약 여자와 여자라면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드러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면,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드러낸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마왕과 용사가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이런 요소가 해체되어버렸다. 라이트노벨 내지 만화 등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마왕용자 마오유우>, <알바 뛰는 마왕>,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를 살펴보면 기존의 마왕과 용사관계가 전혀 다르다.

 

이들의 용사와 마왕에서 2사람 모두 젊다는 것과 2사람 다 같은 성별이 아니다. 오히려 <마왕용자 마오유우>와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용사와 마왕이 적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기존의 관념에서 절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관점이 바로 마왕과 용사가 서로 동맹하거나 화합을 하는 것을 지나 연애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발상은 다양한 관점이 있으나, 용사와 마왕의 관계가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승리를 하고 다른 한쪽은 무조건 패배해야 한다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그런 설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던 시절부터 있었으며, 특히 중세유럽의 경우 십자군과 같이 기독교(가톨릭)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충돌이 있었기에 신의 가호를 받은 용사, 그리고 그것에 반대되는 자들은 응징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한 용사에 대한 이야기는 20세기 까지 이어져 왔으며, 개인적으로 마왕과 용사의 이분법적인 관계가 해체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다. 용사가 가는 마왕의 영지는 위험이 천만하고, 정보가 전혀 없는 미지의 세계다.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용사가 바로 세계를 구한다는 점이다. 용사가 검이란 것은 하나의 상징이며, 검은 다르게 해석하면 남근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단순히 신체적 조직보다는 사회적 권력으로 볼 수 있다. 남근이 검이라고 보는 점에서 검은 결국 무기이고, 무력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용사, 그렇다면 용사나 마왕이 하나가 여자라면 어떻게 되는가?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이성으로 보게 된다는 조건이 성립된다.

 

3.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는 마왕은 장수족인 인간형 마왕인 루리는 이제 막 마왕의 직함을 받은 존재이고, 용사로 새로 직함을 받은 린은 여자인데도 용사가 된 사람이다. 이때까지 48회까지의 용사들은 모두 남자로 뽑혔다. 이제 새로 등장한 용사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엘렉트라 콤플렉스처럼 어머니와 딸의 적대관계는 형성되어야 하는 것인가? 문제는 이제 마왕이 된 루리나 용사가 된 린은 서로 자신의 권위를 위해 싸우기가 애매모호한 조건이었다.

 

마왕의 외모는 겉보기에 8~9살 정도의 어린아이, 물론 기본적으로 마족이란 점에서 보통 인간보다 강한 육체적 조건이나, 용사나 용사의 동료, 심지어 대회에 나간 후보자에 비해 열등하게 약하다. 루리가 처음 마왕성을 나와 인간계로 온 이유는 자신의 세력들이 너무 약하고, 마족 중에서도 자신의 위치가 약한 편이란 점이다. 마왕의 선택은 강력한 힘에 의해서 결정되나, 오히려 제일 약한 사람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용사는 린이란 개인적 조건으로 본다면 전혀 두려워할 수 없고, 단지 린보다는 마왕이란 정치적인 권좌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주인공이면서도 독특한 길을 선택한 론을 살펴보자. 론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도전한 용사대회 48회 우승자이며, 40년 전의 마왕을 죽인 최강의 용사다. 게다가 당시 용사와 동료들은 너무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마왕군은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멸했다. 론이 나올 쯤에는 마왕군은 세력이 이미 쇠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론이 살고 있는 대륙에 인간세력이 30%, 마족세력 10%, 둘 다 속하지 않은 몬스터들이 60%이다. 이미 마족의 세력은 쇠약하여 더 이상 인간에게 대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론이 린과 같이 마왕성을 찾아갈 때 마왕성처럼 보인 돔을 찾아 주변에 이종족이 있는지 확일 할 때 반경 7㎢ 내외로 이종적이 검출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족의 세력은 쇠퇴한 것이고, 마왕이라고 여기던 문지기마저 용사일행에게 처치된다. 그러면 48회 용사의 손자인 론은 자신이 목표로 하던 용사와 마왕처단이 처음부터 엇갈린 길이었고, 심지어 자진하여 마왕의 간부로 등록되기를 선택했다. 앞선 용사의 후손에 강한 힘을 가진 론이 인간이 아닌 루리를 선택한 이유에서 이미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는 공식처럼 여긴 용사와 마왕이야기가 아닌 점을 명백하게 해준다.

 

론이 억지로 마왕이 된 루리를 도와준 이유는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내지 상식 또는 도덕에 대한 절대적인 관념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족은 무조건 나쁜 종족이고 토벌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오히려 마족이 나쁜 존재로 알았지만, 실제로 알고 보니 아니라는 점이다. 루리는 남에게 겁을 주거나 위협하기는커녕 눈물이 많은 어린아이였고, 자신이 좋아하는 루나라는 언니를 감싸기 위해 대신 마왕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너무 어린 육체에 힘까지 약했기 때문에 인간세계의 왕에게 평화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결국 상대방이 어느 것에 묶여 있는 것보다 상대방 그 자체로서 대하였기에 론과 루리는 친구가 된 것이다. 용사를 꿈꾸던 론이 살던 세계는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봉건주의 국가이고, 그 세계에서 왕은 48회 용사인 론의 할아버지와 동료였으며, 그 업적으로 통해 왕이라는 직함과 권력을 손에 넣었다. 용사의 동료라는 점에서 왕은 상당히 국민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으며, 왕의 명령 아래 마족토벌과 마왕처단은 모든 국민들을 하나로 모우는 명제였다. 그리고 용사를 뽑는 대회는 그 나라의 매우 성대한 축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왕은 인간세계에서 최고의 적이고, 마왕을 잡는 행사가 왕과 귀족들의 지배계급으로서 위치하는 것이 하나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의례와 같다.

 

결국 왕과 귀족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용사대회로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용사의 후손이 마왕을 돕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용사후보자인 론은 요사가 아니게 되나, 다른 관점으로 용사가 되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로 통해 적용되는 사회의 도덕관념은 어느 대상이나 행위에 대해 윤리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도덕관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도덕관념은 실제 그것이 잘 되었는지 혹은 못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는 것으로 잘 되었었거나 못 되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론이 그 도덕관념에 의해 충실하게 반응했다면 마왕소녀인 루리는 이미 론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칼은 루리의 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루리의 목을 향하여 오는 것에 대해 반격하는 것이다. 칼이란 것은 강력한 무력을 의미한다. 세상의 적인 마왕대신 세상을 적으로 돌린 론의 모습에서 언젠가 론의 최후의 적은 할아버지의 동료이던 왕이란 점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론의 가계와 그리고 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정치사회적인 요소로 통해 론과 할아버지의 관계를 보면 분명 용사는 40년에 1번을 뽑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40년마다 1번인가? 물론 40년에 1번 나온 용사는 그 마왕에 대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용사가 40년에 1번이란 점은 론의 입장에서 분명한 의미를 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용사이던 론의 할아버지가 론에게만 용사교육을 시켰지만, 론의 아버지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이런 말을 듣는다. “손자와 할아버지는 친구가 되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고 말이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은 아니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권좌를 놓고 다투어야 한다. 론의 아버지가 용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평범한 포도밭의 농부로 살던 이유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들이었기에 48회 용사이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 아버지를 평범한 인물로 길러야 했다.

 

만약 아버지가 용사교육을 받는다면 론의 할아버지는 론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자리에 대해 압박을 받을 것이고, 또한 론이 론의 아버지가 용사로 되었다면, 자신이 굳이 먼 길을 떠나 용사대회에 참가할 이유는 없다. 보통 용사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없거나, 있어도 살해당하거나 은퇴하거나 또는 행방이 묘연한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지나치게 명성이 높으면 아들인 용사는 활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40년의 용사대회의 개최란 바로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이란 3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용사탄생의 딜레마가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 왜 인간들은 마왕을 제거하고 마족을 토벌하려는 것일까?

이미 48회의 용사와 동료들은 마족들이 다시 재결성하는 것을 매우 힘들게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주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마족에 비해 매우 짧다. 주인공인 루리는 80~90세를 살았지만, 외관은 아직 어린 소녀에다가 힘이 약한 것은 이미 밝힌 바이고, 루리와 가깝게 지내는 다른 마족도 나이가 매우 어려 보인다는 점이다. 심지어 루리의 언니인 루나조차도 200세 가까이 되는 나이지만, 루리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지닌 점에서 아직 어린 소녀로 나오고, 론에게 선물을 주는 마족 역시 매우 어린 아이들이었다.

 

결국 48회 용사대회 이후로 마족들 중에서 전투력이 제법 높은 마족들은 모두 사망할 가능성이 높으며, 마족이 더 이상 인간에게 대결할 이유도 없으며, 특히 인간과 마족의 경계 사이 분포된 몬스터들도 마족의 밑이 아니기에 마족이 억지로 인간세계를 침범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론과 린의 일행들이 마왕성을 찾아 떠날 때 어느 작은 마을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붉은 여우 일족이 사는 마을이 모두 폐허로 변한 것이다. 살아있는 생존자는 전혀 없고, 모두 해골이란 비참한 모습만 나타났다. 게다가 어느 해골은 어린아이 것으로 보일 정도로 왕이 보낸 군대는 매우 잔인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과거 마왕에 협조한 것과 보통 인간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것이었다. 환영을 만들며, 다른 종족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을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도 모두 죽일 이유는 없다. 그러면 왜 이들은 죽어야 하는가? 왕은 이미 48회 용사대회 이후 마족들의 전력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49회 용사대회를 열어 용사가 등장해도 그 용사가 마족을 쉽게 쓰러드릴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용사대회는 인류의 멸망을 결정하는 대회가 아니라 오히려 갖은 정치적 이권과 경제적 이윤이 오고가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용사가 여자이고, 상당한 미인에 화려한 의상을 입은 점으로 상인들은 어떤 전략으로 장사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며, 용사의 인벤토리 안에 담긴 물품들은 각종 스폰서가 제공한 것들이 있었다.

 

그 제품들은 겉으로 듣는 것과 달리 효용이 뛰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면 용사대회는 결국 진짜 인류를 구하기 위한 인류의 대표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구경거리로 되었을 뿐이다. 또한 용사대회는 하나의 의례이고, 국민들을 하나로 모우는 행사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마족의 토벌과 마왕의 처단만을 생각하지 그 이상에 대해 생각하지를 않았다. 그것을 알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건 서머너인 티나를 보면 알 수 있다.

 

티나는 본래 전쟁고아로 갖은 고생과 위기를 겪은 여자다. 그녀가 솔직히 건 서머너로 활동하면 자기 자신의 생계를 충분히 즐기고도 남을 수익이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도둑질을 하고, 보물사냥꾼으로 활동하는 이유는 자신처럼 어렵게 살고있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고아들의 형편은 말도 안 되게 처우가 열악했고, 자신이 어린 시절 힘들게 살아온 것처럼 고안들의 미래에는 좀 더 좋은 세상을 살기 바란 것이다. 그녀가 훔친 보석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내져 운영비로 사용되었다.

 

결국 인간세계는 마왕이 없더라도 혹은 마족이 날뛰지 않더라도 계속 인간세계에는 분쟁으로 인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아무 힘도 없이 고통 받는 고아들이 계속 늘어나는 점이었다. 전쟁에 의한 살해도 문제지만, 살아남는 것도 문제인 것은 역시 생계수단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 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하여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자체가 왕과 정부를 두고 생각해보면 내정이 바르지 못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티나를 가르친 스승 역시 이상한 계약서를 쓰게 하여 티나에게 나쁜 짓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마족만이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악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티나의 스승은 상당히 실력이 높은 건 서머너라고 한다. 그 자에게 재물을 훔쳐도 금방 재물을 쌓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분명 도둑질은 범죄이나,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티나의 개인사정과 사회구조에서 왕이 다스리는 세계란 과연 용사의 동료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활약한 용사의 동료로서 정의로운 지도자인가에서 대답은 NO로 갈 확률이 높다. 이미 붉은 여우 일족의 죽음에서 상당히 높은 영력을 갖춘 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악령이 된다고 한다.

 

악령이 되어 마족, 인간, 몬스터에게 해를 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악령이란 악적인 존재가 된 것은 정말 악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부당한 고통에 의한 증오였다. 용사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구원의 대상은 자신이 속한 인간일까? 아니면 그 이상인 것인가? 용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더 이상 용사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용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용사가 존재하는 세계는 매우 어려운 일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용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세계가 어려운 일들이 있기보다는 어려운 일들을 계속 유지하거나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하자면, 용사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성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이고, 그 뒤로는 갖은 이권과 이익을 나누는 부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마족을 토벌하고 마왕을 처단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하나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한 수단으로 최고의 책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기존에 살고 있는 영역을 넘어 계속 넓히려고 한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 거주지와 농경지가 필요하고, 기존의 인간세계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5. 용사와 마왕 세계에서의 자연과 문명

기본적으로 마왕이 살고 있는 곳은 미지의 세계이며, 그곳에는 누가 있고, 어떤 위험이 있는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거기는 인간이 아닌 마족과 몬스터가 항상 인간을 위협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이 미지의 세계에 침범하지 않으면 이유 없이 마족과 몬스터들이 인간세계 올 이유는 없다. 결국 인간의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른 세계와 충돌하게 되며, 그것은 결국 전쟁 내지 재해로 이어진다.

 

마족과 몬스터 중에서 특히 몬스터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매우 사납고, 덩치도 큰 맹수와 같은 존재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인간세계와 마족세계가 아닌 곳에 많이 살며, 때로 마족에 의해 조종되기도 하나, 대부분 자연의 상태에 존재한다. 그리고 마왕을 찾으러 가던 린, 스팅은 자신들의 가문이 매우 부유하고 드높은 귀족집안인 점을 이용하여 마족과 몬스터들이 거주하던 곳을 자신들의 새로운 식민지로 개척하려고 한다. 결국 마족과 몬스터들의 제압은 단순히 인간세계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같이 연결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와 동료들이 임무에 성공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물품들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많이 구매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스폰서해준 상인들은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린과 스팅이 그런 식민지 건설에 관련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티나는 보물을 탐내는 사냥꾼이다. 인간세계에 보물은 존재하기 어렵다. 이미 보물은 누가 소유하여 자신의 재산이 되었기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직접 돈으로 구매하거나 아니라면 법을 어겨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낯선 곳에 가서 보물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단지 발견한 사람의 것이다. 옛날 유럽에서 황금의 섬을 찾아 모험가들이 떠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보물은 본래 발견해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왕성에 찾은 보물은 본래 마왕 내지 마족의 것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뺏은 보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것을 그렇게 장식한 것이란 점이다. 마족에게 마족만의 문명이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새로운 자연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 문명의 도래는 결국 정복이란 이름 아래 실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론이 이미 마왕의 정체가 아무런 악의도 없는 연약한 소녀라는 점이고, 그들은 더 이상 인간과 전쟁할 여유나 의지도 없는 평화로운 자였다. 그런데도 강자의 입장인 인간들에게 마족은 역시 두려움과 제거의 대상이다.

그것은 그들은 정복되어야 할 대상이고, 그 정복에서 마족들은 인간에게 해롭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임을 인간세계에서는 도덕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도 이미 기존에 많이 나온 마왕과 용사이야기와 같이 그런 이분법적인 요소를 해체한 작품이다. 언제나 정복되어야 하는 세계에 있는 마족이 인간의 문명(자연의 파괴, 용사도 인간세계에서 문화의 하나)이란 거대한 파도 앞에 용사가 되어야 하나 용사의 길을 벗어난 용사 론에 의해 좌우되는 점에서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여 더 이상 착취하지 못하면 인간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미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쟁으로 나온다. 전쟁은 문화의 충돌과 인류문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6. 작품 내의 캐릭터 및 설정에 대해

작품을 읽다보면 상당히 세계관에 많은 설명을 넣고 있다. 용사대회에서 용사와 동료로 뽑히는 자들의 직업이나, 무기체계와 마법체계까지 말이다. 특히 요정에게 오리진을 제공하고 사용하는 마법의 종류와 레벨에 따라 분류되는 요소는 매우 상세하게 배치했다. 작가의 블로그를 확인한 결과 예전에 게임을 제작한 것으로 보아 던전장르를 바탕으로 하는 게임을 만든 것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라이트노벨을 게임세계관을 적용하고, 캐릭터들도 그에 맞추어 직업과 속성에 따라 장비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개인적으로 캐릭터 설정에서 판단하는 것은 여자주인공인 린과 티나에 대해서다. 이들은 히로인적인 요소와 더불어 용사일행에 속하는 인물로서 상당한 미인에 좋은 몸매를 가진 여성으로 나온다. 의상을 보더라도 다소 노출이 높고, 대부분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작품 내에서 린이 일어날 때 가슴의 크기에 상의의 단추가 견디지 못해 뜯어져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로서 전형적인 던전 게임에 나올 만한 인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히 린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작가가 남자라는 점, 그런데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은 여자라는 점이 독특한 배치를 만들어내었다.

 

유명한 게임을 애니메이션과 만화로 만든 <Fate Stay Night>란 작품에서 주인공 세이버는 아름답고 매우 강력한 여성으로 나온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리스신화에 등장한 아테나와 같다. 물론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린도 아테나와 같이 매우 강하고 아름다운 인물로 나온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테네는 아버지 그리스의 머리에서 나온 여신이며, 신화학에서 아테네는 아버지인 제우스, 즉 남성의 머릿속에 나온 여신이기에 그녀는 남성의 무의식적인 욕망에서 완벽한 여자로 등장한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린의 모습을 남성의 이상형적인 요건들을 잘 가지고 있다.

 

물론 작품 내에 등장인물에 대한 모에요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일러스트가 중요하냐면, 작가의 글에서는 여자의 가슴을 상당히 많이 신경 쓴 것이 보인다. 기록지를 가지던 황녀나 용사나 모두 가슴에 대해 본문에서 강조하는 느낌이 강했다. 일러스트로 확인해 보면 작가의 의도대로 린과 티나의 가슴은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가 여자라는 점에서 역시 골반이 넓게 그려져 있었고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면 매우 세심한 디자인이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골반의 넓이를 생각하면 마왕인 루리는 줄이는 게 조금 맞는 것 같았다. 9세이면 아직까지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에서 생식기 즉 제2차 성징이 도래하지 않았기에 비율이 조금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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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6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성실한 리뷰에 공감하나 없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만화애니비평 2014-03-06 19:25   좋아요 0 | URL
작가가 자신의 라이트노벨을 보고 리뷰쓴 사람에 대해 선정하여 2번째 것을 준다고 하여 응모 겸 리뷰 적었지요. 뭐 안 되고 상관 없지만, 오덕이란 무릇 진지해야 하는것이죠..ㅎㅎ
 

전에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다. 3모녀가 가난과 질병에 이기지 못해 마지막으로 방세를 봉투에 남긴 채 운명을 했다. 그들의 죽음에서 생각하는 바에서 단순히 이때까지 3모녀와 같은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드물었다면 문제가 덜 하겠으나, 저들의 죽음 이후 밝혀지는 죽음들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3모녀의 죽음은 이른바 사회의 제도 안에서 해결되지 못한 죽음이었다. 아무도 위탁할 수 없는 현실과 국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구원의 손길은 무리였다.

 

심지어 일을 하던 모친도 병으로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마저 상실했다. 그런 점에서 해고는 살인과 같다는 말은 바로 저러하다. 이 문제에 대해 논하자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경로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흔히 저런 사람들에 대해 평소에 문제의식이 없다가 언제 어느 순간 미디어에 노출될 경우 모두 아쉬워하며 그들의 입장을 가엽게 여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쓸데 없이 보이는 참견이나 오버일 수 있으나, 평소에 저런 사람들은 많이 있다는 점이다.

 

TV에 나와 성금 얼마 주고 나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이 기다리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의 이슈로서 몰려드는 시야에서 결국 그때이지 그 후는 아니다. 돈이 몇 천만원이 기부되어 들어가면 무엇하느냐? 결국 병치료와 생활수단으로 인해 어느 순간 금방 돈은 소비된다. 그래서 일회적인 차원을 떠나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결국 누가 할 것인가이다. "진짜 불쌍해!"라고 외치는 사람이라든, 혹은 "허허, 참 세상을 그렇게 떠나다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든, 또는 이렇게 글을 적는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을 거시다. 무관심한 자들은 몰라도, 만약 그것에 대한 사회적 이슈로서 문제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저들은 계속 일방적으로 관심갖고 도와줄 수 있는가?

 

결국은 사회적인 제도아래 명확한 관리로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럴려면 결국 사회적 함의, 즉 일반의지로서 시행된느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야 하고, 그것을 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이른바 국민들의 대표자란 점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국민전원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를 처음에는 인정하다가 지금은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투표권을 시행하는 자들이 정말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 공공의 이익, 자신보다 처지가 어려운 이들을 위한 투표권을 수행하느냐이다.

 

대부분 옆에 들으면 그런 일반의지가 아니라 전체의지 내지 개인적 이익으로 통해 움직인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지연, 학연, 혈연이 강한 곳에는 도저히 실행되기 어렵다. 저런 자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려면 결국 국민들의 선택점이 달려있다. 그래서 나는 3모녀를 죽음에서 자살이 아니라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것과 같이 사회적 타살이고, 그 주범은 국민들이다.

 

국민들의 외면이 죄가 아니라, 그들을 궁지로 몰리게 만든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책임이다. 투표권의 시행에서 자신의 선택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과연 공공의 이익과 타자의 인권과 처우를 정당히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참고로 덧붙이면 자살한 3모녀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거나 혹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소시민이다. 그런 소시민들을 궁지로 몰아내면서 외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죽이는 사회와 대중들이 그들에게 보이는 눈빛에 대해 나는 한줌의 구역질과 가십감이 든다.

 

자신들이 3모녀의 죽음, 그리고 계속 터지는 비보 속에 안타까워 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위해 제대로 된 보장제도를 만드는 과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그런 감정을 품어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써 자신은 매우 인간적인 인간으로 착각한다. 그런 착각이야말로 가장 한심하다. 그 감정을 가지고 느끼는 것을 지나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정작 자신이 정의롭다면 평생 책임질 수 있는가? 소외독거 노인의 죽음과 입양아의 수치가 거의 올림픽의 메달순위권에 있는 나라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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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마법소녀라는 관념을 생각하자면, 1999년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발간된 <일본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 중 박인하(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교수)의 ‘일본애니메이션 장르 연구 -마법소녀 물을 중심으로-’를 참고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소녀들은 소구대상으로 한 마법소녀물은 현실세계에서 소녀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제약과 한계들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소년들이 로봇만화를 통해 권력과 힘에 대한 대리만족을 경험하는 것처럼 소녀들은 마법소녀들을 통해 변신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켰다. 학교나 가정에서 성적차별에 시달리는 소녀들은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되고 싶어 했다. 꿈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평범한 현실의 소녀에게 ‘힘’을 소유하는 소녀가 되고 방식으로 마법소녀물은 ‘마법’과 ‘변신’을 제안했다. 소녀들은 그 유혹을 받아들였고, 마법소녀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마법소녀라는 것을 정의하자면 현실에 있는 소녀들이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타파할 수 없으므로 마법소녀라는 힘을 얻어 결국 변신과 마력으로서 해결한다. 마법소녀들은 일반 소년만화처럼 “공적인 영역”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착한 일”에 대해서만 가능했다. 결국 이런 부분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능력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환상은 아직 어린 소녀이기에 어른이 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란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마법소녀물은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이나 <마법의 프린세스 밍키모모>의 경우 단순히 변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전자는 실루엣 뒤편으로 보이는 누드가 남성에게 성적인 호기심과 환상을 제공하고, 밍키모모의 경우 어린소녀가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 성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마법이란 여성의 신체의 변화를 의미하고, 그 변화는 아직 어린 소녀가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인 능력을 스스로 가지기를 바란 게 아니라 우연의 행운을 바라는 점이다.

 

이번에 읽어본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기존에 등장한 상식을 깨고 나온 작품이었다. 이때까지 마법소녀물들이 제시한 담론과 규칙에 대해 완전히 해체하고, 대신 새로운 모습으로 나왔다. 물론 마법소녀에 대한 공식에 대해 해체적인 요소를 지닌 것은 사프트사의 신보 아키유키 감독이 제작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었다. 마법소녀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거나 혹은 선이 아닌 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정한 악과 선의 차이는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작가인 온점의 글을 보고 난 후, 나는 작가가 그렇게 많은 철학적 지식이나 사유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직 1993년이란 점과 책을 2014년에 구매한 점에서 그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될 정도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이란 라이트노벨을 저술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그의 서적에 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저술한 내용에서 나는 분명 그가 깊은 철학이나 사유가 없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던 것이다.

 

철학자와 철학자가 저술한 철학적 사상을 이해해야 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존의 철학자란 세계의 단지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므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 대해 철학적인 요소로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미 여기서 철학적 요소는 등장했다. 왜 마법소녀가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하춘식은 왜 변신을 꺼리는지, 악이란 정말 무엇인지 등등을 말이다. 작가 분에게 그렇게 깊은 인문학적 배경이 없다는 것은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히로인이 분명 하춘식이어야 하나, 막상 표지의 일러스트에서는 주인공이란 인물이 히로인처럼 나온다.

 

주인공이 하춘식이 다니는 학교에 잠입하기 위해 의상을 구하는데, 이때 교복이 제일 좋았다. 교복을 입을 때 그는 남자이나 남학생 교복이 아니라 여학생의 교복을 입었다. 여학생의 교복을 입을 때 그의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가 하이라이트’란 부분이다. 인체해부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키와 몸무게 조건이 같다면 누구의 다리가 날씬하고 각선미가 좋은가에서 남성의 다리가 훨씬 좋다. 여성의 골격구조는 골반이 기본적으로 넓기에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가 나오기가 어렵다.

 

여성의 다리가 일자형이 되는 것은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란 무의식적 조건 즉 아니마라는 심리적인 요소에 의해서다. 그런 성적인 담론에서 이 라이트노벨의 재미요소를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처음 표지를 본다면 그것도 아무런 정보를 모른 채 단순히 출판사의 소개만 본다면, 하춘식이란 인물은 몽둥이리를 들고 드레스 복장으로 웃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그 뒤에 부끄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이가 악의 조직에서 활동하는 중간보스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이것은 단지 반전을 노린 것을 알게 된다.

 

마법소녀라는 여성이 오히려 남자 같고, 악의 조직의 중간보스인 남성이 오히려 여성 같이 보인다. 실제 말하는 투나 행동 역시 서로 간의 정체성에서 이탈했다. 생물학적인 성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외부로 보이는 이미지는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특히 주인공이 일하는 가게에서 많은 남자 손님들이 주인공의 외모를 보고 오고, 같이 일하는 선배도 주인공이 여자가 아닌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외적인 외모로도 남성성의 면모가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의상까지도 그렇다. 주인공의 의상은 체육복, 그러나 진짜 평상시의 의상은 여학생 교복이었다. 일하고, 살림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은 사회적인 여성적 모습까지 보인다.

 

이미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이란 제목부터 이 작품은 기존의 마법소녀물을 해체했다는 의미를 잘 알게 해준다. 마법소녀가 언매지컬이란 사실은 피지컬이란 의미다. 현실의 소녀가 환상으로 통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운에 의해 해결한다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현실적 조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 마음속의 봉인을 스스로 푸는 장면에서 마법소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모습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법소녀보단 차라리 사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마법소녀란 무엇인가? 마법소녀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은 안타까운 것이 있다. 정의는 결국 어느 쪽의 관점과 입장, 그리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언론이란 사실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공정성이다. 사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정의라는 것은 결국 언론의 모습에서 보이는 조건이 따라 붙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악의 조직이면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조직은 악이라도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미 그런 담론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그런다고 니체를 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니체의 사상이 지금에 와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 결국 세상의 법칙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악의 갈림에서 하춘식이 본 잔혹한 마법소녀의 정의라는 것은 과연 정의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정의는 무엇의 조건에 따라 실행되어야 하는가? 마법소녀라는 이름은 거대한 힘과 권력을 가진 하나의 상징이다. 그 상징성에 의해 실행되는 모든 것은 옳고 합당한 것인가?

 

정의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큰 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만약 그것이 진짜 정의라면 그 정의에 대한 의구심과 합당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가? 즉, 정의라는 것은 거대한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에 악이라고 부를 그 무엇에는 정말 순수하게 악으로 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비밀이 숨어있는 하춘식의 과거와 주인공이 겪은 10년 전의 큰 소동은 분명 이 작품에서 하나의 모티프를 제공한다.

 

자세한 내막은 없어도 거대한 힘을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여 이룩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고, 또한 딥 블루라는 은퇴한 마법소녀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인공이 속한 에프 킬러의 우두머리인 총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이다. 아직 1권만 보았기에 그와의 지난 일은 모르나, 총장에 대한 딥 블루의 표정은 살기나 적의 대신 오 히려 잘 지내고 있었냐는 눈빛이다. 1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마법소녀와 악의 조직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큰 파장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악의 조직인 에프 킬러는 과연 나쁜 악의 조직으로 볼 수 있는가? 상당한 미모와 몸매를 자랑하는 점장은 게임만 하는 은둔형 폐인이고, 게다가 낯선 사람만 보면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한다. 조나단은 머리에 양동이를 쓰는 단순한 변태에 길거리 포장마차 장사꾼이며, 중간보스인 주인공은 일만 열심히 하는 소년가장이다. 그런 자들이 악의 조직이라 하여 과연 악인인가? 처음부터 악의 조직이라고 불리는 에프 킬러에 들어온 주인공의 동기가 이상했다. 그가 본 사진에서 무엇을 위해 강화인간이 되어 고생을 하는가?

 

그의 나름대로 정의라는 이름이 있지 않은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면 단순히 힘의 논리나 또는 소수를 배제한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란 공리주의적인 요건을 볼 수 없다.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타인의 입장을 위해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것으로서 사회적 규율인 법과 제도를 지키는 것을 떠나 그 이상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즉, 남에게 베풀지 않아도 되는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하나의 정의가 성립되는 것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정의의 기준은 아주 모호하게 만들었다.

 

악의 조직에서 매일 근면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을 무자비하게 패는 하춘식이 정의의 사도인 마법소녀라기에는 애매하고, 그런다고 악의 조직인 ‘늪’을 보면 악의 조직이 에프 킬러만큼 약해 빠진 존재가 아닌 것을 안다. 정의라는 것은 위에서 내가 언급한 것처럼 사실성보다는 공정성이고, 공정성에 대해 그 상황에 대한 조건과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라면 이 작품에서 진정한 악을 하춘식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악의 조직은 은행이라니까. 은행.”

 

또한 다르게 생각하면 악의 조직이라고 하지만 동호회 수준에 불과한 에프 킬러 역시 제일 큰 적은 하춘식이란 마법소녀보다 생계조건이 더 큰 적이었다. 주인공은 하춘식에게 심하게 맞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일을 한 후에 나오는 급여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보이는 세견의 적이란 돈이 없이 그저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은 지나가다 누군가에게 언제 사기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점장은 게임만 하여 세상물정을 모르며, 양동이를 쓰고 있는 조나단은 이미 자신의 얼굴을 가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와 드러낼 수 없는 존재, 드러내어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악의 조직인 에프 킬러의 현실이다. 악이라 불리는 자들은 과연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악인지 아니면 악으로서 규정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지가 바로 이 작품에서 보인 세계관에 대한 내 판단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가장 동의하는 부분은 마법소녀가 언제 마법소녀로 되지 않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소녀가 소녀로서 있을 수 없을 때, 결국 마법소녀이란 작품의 최종적인 목적은 소녀가 어른으로 되는 것이다.

 

딥 블루의 모습이 바로 마법소녀가 최종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이고, 그것은 성인여성이 누리는 행위에서였다.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로서 있는 이유가 최종적으로 사랑이란 것은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요소다. 자기가 품은 환상이 결국 환상이 아닌 현실일 때, 그들의 환상은 이미 깨져버린다. 대리만족으로 느끼는 것들이 결국 현실화로 되었다는 자체로 마법소녀의 임무는 완수다. 그때까지 마법소녀는 그 자신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딥 블루는 완벽한 마법소녀였고(현역시절 변신할 때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볼륨이 넘치는 몸매를 생각하면), 하춘식은 딥 블루와 다른 사신의 모습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간적인 모습이다. 불안정한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작가가 어떻게 기존의 마법소녀의 이미지를 어떻게 해체하여 재미를 유도하는지가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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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이다. 그의 도서 중에서 <철학에 대하여>,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프랑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의견과 더불어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새로운 방향이 나온 것에 대해 보았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는 분명히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상가였다. 그런데 그의 저서 중에 이런 도서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마키아벨리의 가면>이란 도서를 말이다.

 

제목만 봤지, 실제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후에 왜 그런가 싶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알튀세르가 <철학에 대하여>에 제기한 부딪힘에 대한 부분이었다. 관념론과 유물론, 그것이 어디서부터인가? 흔히 유물론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계몽주의 철학이 꽃피우던 18세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왜 마키아벨리에게 거슬러 갔는지 생각하면 그 해답이 있었다.

 

16세기 전후 피란체에서 거주하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으로 적고, 또한 자신의 정치계에 복귀하기 위해 <군주론>을 집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가 교황이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이탈리아 바티칸에는 국가는 없으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의 지도자인 교황이 살고 있다. 교황이 지배하던 세기를 생각하면 중세유럽부터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서 교황은 거의 신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자였다. 그런 신의 이름이 횡횡하던 시절에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선상에서 신이란 이름을 어떻게 보는가였다.

 

승리를 여신의 미소가 변덕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운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노력과 근성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군주의 정치적 행보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운과 노력이 반반이라는 것은 운이라는 것이 신의 가호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이고,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란 유물론적인 요소다. 르네상스 시대가 다가온다고 해도, 결국 당시 유럽은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신이란 이름을 가지고 지배하던 시기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내가 맡은 직업적 소양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넓은 평야에 엄청난 비가 내려 그곳이 물이 잠기는 것이라도 만약 제방이나 둑을 쌓을 경우, 그 물들은 범람하지 않거나 혹은 범람하더라도 둑과 제방으로 충분히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천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홍수량과 홍수위를 미리 예상하여 하천은 폭과 제방의 높이 그리고 둑의 넓이를 고려하여 홍수피해를 저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호우가 너무 심하게 내릴 경우 모든 피해를 막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으로 막아 큰 타격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인간에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란 어떻게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사자와 여우를 모두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우의 민첩하고 예리한 사고력, 그리고 사자와 같은 강한 힘과 집행능력을 말이다. <군주론>을 읽다보면 분명히 이 책은 위험한 책일 수 있다. 절대적인 군주가 강한 통치력을 가지기 위해 갖은 모략과 전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딱히 위험하다고만 여길 수 없었다. 아쉽게도 <군주론>에선 군주가 견제해야할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명시했다.

 

그것은 자국을 위협하는 적국, 그 적국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일 때 같이 전쟁을 수행할 타국 원군과 용병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국가의 안전을 군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 그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나 용병은 자신의 국가가 아니기에 최선을 다해 싸워주지 아니하며, 타국의 원군은 결국 자신의 국가가 아닌 자신들만의 국가의 주군을 위해 싸워주므로 최후에 승리할 경우 모든 승리의 전리는 원군이 좌우를 결정하는 셈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에서 왜국의 침입에서 명나라를 조선에 합류하도록 했으나 갖은 노략과 패악질만 부렸다. 또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국의 운명을 외국에 넘긴 셈이 되었다.

 

광복 이후 독립국가가 아니라 신탁통치에 의해 북과 남으로 갈리어 전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하면 그 나라의 권력은 남의 국가에 의해 결정되고,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기가 곤란해진다. 설사 지킨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대가비용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문제를 이미 16세기에 지적을 했고, 로마의 공화정과 과두정, 혹은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비극이나 교훈을 찾아 <군주론>에 명시를 해놓은 것이다.

 

<군주론>에서 보이는 국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무엇인가? <군주론>을 읽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서구정치철학사에서 <군주론>을 통해 정치에서 철학이 분리되었다고 본다. 이전까지 정치적 요건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라는 철인군주가 존재했었다. 철인군주는 강력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진 군주로서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전사, 그리고 철학자이어야 한다. 군주라는 존재는 철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완벽한 존재, 미적인 존재였다. 이와 달린 <군주론>은 군주는 완벽한 미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인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군주가 아니라 계략군주가 되어야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매우 잔혹하고 끔찍할 수 있다. <군주론>에선 가차 없는 공포와 처벌을 가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유럽사회에서는 유럽대륙 내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인접했기에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한 순간 국가는 패망하고, 적에게 잡힌 그 나라의 군주와 귀족들은 어김없이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군주와 귀족은 죽더라도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그 나라에는 그냥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즉 국민들이 존재했다.

 

고대 중국에서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민(民)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명예롭게 보이기 위한 술책을 제공하나, 그것의 모든 시작점은 결국 국민이었다. 뒤로 갈수록 귀족과 국민에 대한 거리에서 귀족에게 환심을 사면서도 한편으로 국민에게 좋은 군주로 인식을 받아야 했다. 군주가 귀족에게 환심을 사야 하는 이유는 귀족이 자신만의 권력을 잡아 언제든 군주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환심을 사야하는 것은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타국의 원군도 용병도 설사 귀족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군주로 모셔주는 국민들에 의해서이다. 군주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점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고려하여 만든 서적이라고 한다. 이제 갓 운 좋게 독립을 한 자신의 나라에 언제 타국의 침입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그것이 단순히 왕족과 귀족 같은 정치적 권력자에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문제가 국민들에게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시하는 의견 중에 군주는 낭비를 삼가야 할 것이나, 만일 다른 나라의 국민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자국의 군인이나 국민에게 주는 것은 찬성한다.

 

생각하면 자신의 국가가 타국을 정복하는 것에 대한 이익을 생각한 만큼, 역으로 돌리자면 타국이 자국을 침입하면 자국의 국민들이 노략질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통해 이른바 마키아벨리주의를 만들게 한 인물이나, 그는 공화주의자란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공화주의자는 평화를 모두 조화롭게 나누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그런 자신이 엄격하고 교활한 군주를 앞세운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게 정복당하여 비참한 삶과 심한 피해를 받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군주가 되는 인물은 무릇 그 자신의 보위를 위해 결국 나라의 보위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만큼 마키아벨리는 군대가 바르게 운영되어야 하고, 법이 바르게 되어야 하는 것을 원했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최근 국내에서 사병자살로 인해 위로금을 간부들이 착복하거나 또는 각종 성범죄나 의문사고로 인해 군부대가 바르게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런 현실이 부딪히면 결국 군인이 되는 자, 그러니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은 국민인데, 그 국민들이 군인이 되어 적절한 관리를 받지를 못하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저하된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군주의 생명이 직결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사랑이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다.

 

군주는 너무 난폭하거나 흉악할 경우 밑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국민들에 의해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군주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도움이 되는 신하를 잘 뽑아야 하고, 그 신하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아이러니한 것은 마키아벨리는 거의 모든 인간에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결국 군주도 이기적이고, 국민도 이기적이라면, 신하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조건에서 신하의 충성을 위해 무엇을 바라는가? 군주는 무릇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신하 소수 어느 대상에게 의존해서 안 되고, 너무 많은 신하에게 의존해서도 안 되면, 출세와 이권을 위해서만 올라오는 신하도 견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정확히 선택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중간의 지점, 혹은 알튀세르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발생되는 우연처럼, 계속 부딪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부딪히기 전에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전에 미리 계산하여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적 조건에 내몰릴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하는 운이 누군가에게 행운이고, 누군가에게 불운이다. 그렇다면 그 운에만 맡기지 못하기에 평소 행실에서 드러난다. <군주론>에서 중요한 정치적 공략과 혹은 분리되어도 끝까지 남아있는 철학적 윤리는 절대로 국민에 대한 재산과 부녀자 강탈을 하지 마라는 것이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 순간 군주는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귀족의 견제와 더불어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것 자체가 바로 이것이다. 산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흥행하게 하는 점은 바로 군주를 위한 최고의 방법이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생각하면 <군주론>의 가치가 현실을 보면 조금 기분이 묘하다. <군주론>은 독재자의 것이 아니라 독재자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짜 군주로서 국민을 대하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주론>이 집필 시기는 중세유럽이고, 계급이 왕족과 귀족이 있어도 최하층의 농민이 있다는 생각하면, 정치적 판단력은 결국 일부에게 정해져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도시국가도 10%의 남자만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은 직접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병사로서 싸웠다. 중세에서는 기사라는 직업이 농민과 다르고, 오히려 국민들은 기사보단 일개 보병으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국민에게 군주가 의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지켜줄 자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만이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는 셈이다. 지금에 와서 <군주론>이 통치자 하나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대중문화라는 군중심리를 생각하면 미디어에 대한 부분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군주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통치자와 그 주변의 관료들은 조금 자신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가장 조심할 주변인물로는 아첨꾼이다. 아첨꾼이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것만으로 국가의 손해인데, 그들이 탐욕스럽다면 더욱 어려운 형국이 될 것이다.

 

아무튼 <군주론>을 읽으면서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고, 그 중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과 타인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아마 그런 자들이 마키아벨리가 가장 경계하는 내부의 적일 것이다. 과연 <군주론>을 읽으면서 강한 군주란 무엇인지 다시금 볼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21세기와 어울리지 않았던 이유는 이때는 왕정시대고, 왕은 주로 무력을 직접 통솔하는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국민들을 제대로 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통치자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않은 현실이다. 안 그러면 차라리 괴벨스와 같은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정치적 이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용하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현실을 속일 수 있어도 현실의 문제점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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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축구 이야기가 나왔는데, 외국 벨기에가 엄청난 축구강국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벨기에 선수들이 유럽의 명문강호에서 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면서 요새 생각해본 것이 경제성장이란 담론인데,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1차와 2차를 넘어 3차인 서비스직렬에서 공학 전공자인 나로서는 3차 서비스로서 엔지니어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 내의 국토개발은 많이 이룬 것이고, 더 이상 국토개발로 통한 경제활동은 좋지 못한 것 같다. 

 

특히 환경을 파괴하여 만들어 놓은 지난 한국경제는 오히려 재난이나 물부족, 대기오염 및 수질오염, 소음진동 및 일조장해 등과 같은 환경오염이란 막강한 적이 들어왔다. 결국 2차에 의한 공장이나 혹은 개발사업에 의한 국내 경제활동은 한계가 있다. 결국 국토개발은 보전 및 복원이란 환경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예전처럼 친환경적 개발이란 이름만 붙은 개발사업이 아니라 복원적인 요소로 환경사업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하천정비나 숲가꾸기 사업은 콘크리트화 된 하천이나 또는 자연환경을 원상복원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을 유로변경이나 준설, 숲에 있는 식물의 종을 멋대로 변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이제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접어야 한다.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점이다.

 

최근 국가경제의 말에서 이미 1차 산업인 농업은 거의 경고를 지나 생존위기인듯하고, 2차 산업에서 공정단계가 상당히 발전한 점에서 2차 산업 공업도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보인다. 3차 산업인 서비스도 거의 한계점을 보인다. 주택가들이 밀집한 마을에 길가를 지나가면 주변에 피자, 통닭, 토스트, 커피가게다. 이제는 이런 사소한 물품들도 대기업 자본이 들어와서 기존의 영세업체도 밀리는 판국이다.

 

4차로 보면 정보디지털인데, 이미 한국은 인터넷 보급은 세계 최고이니 이 방면도 다 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컴퓨터 핵심부품과 운영체계를 만들 수 없기에 한계성이 있다. 디지털강국이라도 결국 정보매체는 떠돌아다녀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는 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취약하기 작이 없다.

 

그런 5차라고 불리는 여가 및 취미는 어떨까? 내가 갑자기 잡담을 적는 이유는 바로 취미 및 여가의 활동으로 경제성장을 볼 수 있나다. 예전에 국민의 정부 시절, 대기업에서 1년 동안 파는 자동차보단 영화 쥐라기공원이 더 많은 경제활동결과를 낳았다. 문화산업이 결국 21세기의 갈 길이고, 젊은 취업준비생이나 혹은 실직자에게 좋은 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가시간이다. 한국은 여전히 일하는 시간이 많다. 누군가는 한국인이 일하는 시간을 너무 적게 주어 나중에 무엇을 할지 몰라 고민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최고의 인생은 자기의 여가시간을 내어 자기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취미라는 것이 딱히 좋게 볼 수 없고,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역시 취미가 예술적 요소를 기반한다고 하나, 지난 18세기에는 산업체계가 이미 농경사회라는 점과 농민의 집단적 노동이 놀이로서 형태를 드러난 바가 있다.

 

한국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이 모여 서로 노래를 만들어 같이 작업하거나 혹은 농악으로 축제를 열고 했다. 문제는 지금은 집단협력으로 통한 직업을 하는 게 아니라 분리된 공정과 조건으로 일을 하는 점이다. 아마 사무실에서 같은 팀에 있는 것보다 취미 생활로 모인 사람들이 더 많은 집단구성을 이룰 수도 있다. 취미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적 소비만이 아니라 능력개발, 자아발전, 사회유대관계도 확대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여가생활은 거의 최악이다. 개인적으로 TV 드라마 공화국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끔찍한데, TV 앞에 모여 드라마를 보고 마치 현실처럼 보이는 파생실재에 현실로서 받아들이거나 혹은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고 착각하는 중2병 내지 오타쿠보다 심각하다.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에 빠진다는 점은 점점 일원화적인 문화형태로 되어 결국 다양성을 만들지 못한다.

 

취미나 여가생활은 다양한 문화나 활동에 기반되어야 산업적인 요소가 된다. 이른바 스토리텔링화 한다는 문화산업에서 그것이 기반되는 콘텐츠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아주 좋은 말이 나온다. "상상력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문화산업의 기반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력이든 문화적이든, 스포츠든 여가공간이든 취미생활이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나 혹은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말해두고 싶은 게 있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20세기의 정신으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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