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리뷰와 달리, 다소 다른 글의 내용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아니 반드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작품을 리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담론이란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담론

 

을 하는지 어떤 계기로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번에 살펴보는 작품은 <이브의 시간>이나 단순히 <이브의 시간>만을 볼 수는 없다. 이것은 기존의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란 것이 표현주의 미학과 더불어 사실주의로부터 탈피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사영상이 리얼리즘의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니다.

 

최근에 일본 문화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 교수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과 같이 오타쿠와 같은 하위문화에서 게임과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 등에서도 리얼리즘이 등장한다. 단지 애니메이션학이나 영상학에서 다루는 리얼리즘의 영상요소와 달리 그 리얼리즘이란 것은 그 세계관에서의 리얼리즘이다. 안티-리얼리즘의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그 세계관 자체가 실사영화의 세계관과 반드시 어긋나 있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생각해보자? 미래의 암울한 인류상을 그리는 <이퀄리브리엄>이나 혹은 복제인간이 대두되는 <블레이드러너>와 같은 작품들은 차라리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니라면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을 실사영화보다는 오히려 존 할라스 감독 작품이 더 표현력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담론이란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영상에만 집착하여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그 세계관에 대한 개연성이나 필연성을 보는 것도 중요한 관찰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 한편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감정적인 여운이나 순간적인 만족만 준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 혹은 주장하는 바, 거기에 대한 비슷한 유형과 반대되는 유형까지 고려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이 리뷰를 적은 동기는 영화전문잡지 씨네21에서 나온 진중권 교수의 미학에세이에서 시작했다. 이 칼럼을 읽을 쯤에 딱 <이브의 시간>이란 작품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브의 시간>과 같이 씨네21에서 기고된 미학에세이에 눈을 돌리는 것인가? 우선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에서 하나의 미학을 가진 예술품이란 가정 아래서 시작해보자.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 미학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던 건국대학교 영상대학원에서 강의하는 김윤아 교수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에 나온 내용이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닮은 존재가 나오면 인간은 그 존재에 대해 혐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중권 교수의 미학에세이에서 시작되는 작품명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2기인 이노센스이다. 1기인 극장판 Ghost in the shell과 같은 경우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이 인형사와 결합하여 공안9과에서 무단이탈하는 것에서 끝나고, 이노센스에서는 본 모습이 아니라 섹스로이드의 몸을 빌려 나온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섹스로이드의 형상이 완전체에 가까운 성인보다는 10대 어린 소녀에 가까웠다.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작품을 보면 그 소녀 섹스로이드가 사람을 살해하는데, 아무리 기계라도 인간의 감정적 반응이 필요했다. 그 반응을 위해 유괴범이 소녀를 납치하여 그 아이의 감정을 프로그램으로 저장시킨 것이다. 겁에 질린 소녀가 가진 적대의식이 결국 살인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어째든 이노센스 메인을 보면 2가지 피사체가 나온다. 하나는 강아지 1마리와 어설프게 분해된 기계인간이다. 강아지는 공각기동대 남자주인공인 바트가 키우는 유전자 복제생물이다.

 

공각기동대를 보면 인간의 존재라는 관념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요소가 강하다. 쿠사나기 소령은 자신이 원래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스럽고, 자신의 의체조차 자신의 본래 신체가 아니다. 단지 전뇌로서 그 신체를 조정하고, 공안요원을 그만둘 경우 공안요원이란 사실조차 잊게 된다. 인간의 기억이 전자프로그램에 따라

 

조작되고 형성되고, 게다가 신체조차 자신의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2기 이노센스에서 실제 미국 급진적 페미니스티인 해러웨이를 오마주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 사람은 토구사의 질문에 “나는 미스도 미스즈도 아니오. 그저 해러웨이요”라고 답한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으로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를 거부한 그 해러웨이 교수로서는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셈이다. 그러나 그 원초적으로 돌이켜 본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 아니 생명에 대한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이 이미 없어진 것과 같다. 쿠사나기나 바토라는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 아니었는지, 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도 없다. 그들이 살아간 인간이란 세월조차 하나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유효하다. 실제 인간과 같은 모습이라도 인간이 아니니 말이다. 사이버펑크적 요소의 영화는 바로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부정한다.

 

 

삶과 죽음이 같이 존재하는 실존주의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단두대 아래 목이 잘린 그 순간을 기다리는 그 새벽에서 자신의 실존성을 발견한다. 죽음이 있어야 내가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실존적 자세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존재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없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 교수의 에세이나 혹은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분명 타나토스로부터다. 한스 밸머의 망가진 인형을 보는 순간, 나는 공각기동대 이노센스부터 생각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파괴된 소녀인형에서, 인형은 원래 제의적 요소에서 왕에서 시작하여 왕을 대체하는 살아있음이 중요하지 않은 상징적 육체이다. 제의에서 왕의 시신이란 생물학적 정의가 아니라 제의적 정의가 중요하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다미엥이 루이15세를 암살 기도를 하다가 잡혀 사형선고에서 그는 신체적 죽음보단 신성성에 대항한 점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잔인하고 끝없는 고문이란 인간의 육체보단 정신을 먼저 죽이게 한다. 죽어도 그는 또 다시 죽어야 한다.

 

죽음의 요소에서 파괴에 대한 본능은 또한 점령이란 부분도 강할 것이다. 다미엥의 죽음은 루이왕권의 보존이고, 짐은 곧 국가라는 전제군주적인 요소에서 항상 희생양은 그만큼의 대가를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스 벨머가 살던 시절은 전제군주가 살던 시절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있었던 사회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은 패전국에서 다시 히틀러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을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라 하며 타 민족을 열등하게 보았으며, 이때 등장한 수용소의 잔혹함은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시기에 한스 밸머는 반나치적 인물이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협력자이기에 그는 독일수용소에 갇혀야 했다. 죽음에 대해 광기에 젖은 사회에서 오히려 그것에 대해 빠져들기보단 자신의 광기를 지닌 자만이 더욱 인간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신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 거기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그의 죽음의 충동적인 파편들은 저 인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인형이란 살아있지 않으나 우리 인간의 모습에 딱 맞추어 인간의 취향에 맞게 만들었다. 인형이야 말로 오히려 제일 완벽한 존재일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죽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변하나 인형은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찢어지거나 부서지지 않은 이상 말이다.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될 수 있겠으나 잘 관리하면 부패되지 않는다. 인간에 삶과 죽음이 확실히 존재하는 만큼 변하지 않은 인형이란 인간에게 가장 완벽해도 한편으로 혐오적인 존재일 것이다. 특히나 어린 소녀의 모습이란 특이한 요건을 부여한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처럼 희생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 아버지 살해라면 후자로 가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이다.

 

그러면 누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고, 아버지 역시 자신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아들을 거세하지 못한다. 따라서 희생양은 점차 약하고 저항이 불가능한 인간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연약한 소녀이다. 대부분 비합리적이거나 미신적인 희생의식에서 가장 많이 죽는 존재는 소녀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육체와 영혼이란 점에서 희생이 되기 쉬운 점이다. 그래서 이때까지 이래저래 흘러간 글들을 다시 원점으로 모이면 공가기동대 2기인 이노센스에서 섹스로이드로 들어 가보자. 왜 많고 많은 기계 중에 왜 섹스로이드는 어린 소녀이고, 그것은 왜 메인 포스터에서 훼손되어 있는가? 한스 밸머의 작품과는 어떤 관계인가?

 

그런 희생된 모습을 그로테스크로서 보여주기에 우리에게 하나의 의구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다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을 읽으면 프랑크푸르트대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인 아도르노가 제시한 담론이 나온다.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 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나치의 파시즘에서 자신의 실존성을 지키는 것이 언캐니 밸리 이펙트를 만든 한스 밸머의 슬픈 모습이다. 인간이 아니 인형의 파괴, 하지만 인간은 정신적 파괴로 자신이 아닌 인형 같은 타인을 파괴한다. 나치수용소에서 실행된 호모 사케르, 즉 살해당할 수는 있지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존재들의 죽음이 오히려 그 사회에서는 당연시 되는 것에 대한 반발적 의식일 것이다. 곧 그것은 남을 인정하지 않은 배타주의적인 부도덕한 사회가 오히려 도덕적인 사회로 변함에 따른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에 대한 반발감과 더불어 좌절감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불편한 것에 대해 직시하기 보단 회피하려 한다. 신화의 탄생에서 은폐의 역사가 반드시 존재한다. 은폐하는 이유는 불편한 기억과 드러나지 않고 싶은 진실이 숨어있다. 신화라는 것은 그런 은폐로 숨어있는 희생이 있으며, 그 희생은 결국 폭력, 착취, 억압의 제공자들을 오히려 새로운 영웅으로 승격한다. 그것은 당시 그 희생을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의 거짓된 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인간이 자신도 인간이면서 타인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형의 부조리한 모습이다.

 

 

특히 어린 소녀라는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희생양의 모습은 불완전한 신체적 구조를 지닌 인간이 완전한 인체를 지닌 인형 같은 존재를 만들면서 결국 그것을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그 인형의 낯설고 보기 싫은 모습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아니라면 인간이 타자에 대한 공감으로 통해 이해하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이런 대사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사고를 창출한 르네 데카르트가 알고 보면 딸의 슬픔으로 인해 인형을 마치 자신의 딸처럼 대했다고 한다. 이성 중심의 서구에서 데카르트가 분명 합리주의자이면서 가장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타인과 서로 나누기보단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포스터처럼 인형이나 개와 같은 애완동물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부분을 다르게 보는 작품이 바로 <이브의 시간>이다. 이브의 시간에서 말하는 언캐니 밸리 이펙트의 요소는 매우 대단하다. 만약 인조인간의 머리 위의 전자 링이 보이지 않으면, 진짜 인간과 구별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분명히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이 아니다. 오로지 주인에게 복종하고, 시키는 명령에 대답하고 행동할 뿐이다. 문제는 그런 기계인간에게도 인간과 같은 감정과 판단력이 있다는 것이다. 기계인간에게 이성은 있다. 주인의 명령을 바로 수행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기계인간에게 이성은 감수성이나 감정은 없는 것이 바르다.

 

 

아무리 합리적인 인간이라도 순간적으로 감정과 무의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기계인간에게 순간적인 충돌이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과 무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있다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기존에 공각기동대에서 원래 인간이었을 쿠사나기 소령이다. 전뇌를 가지고 있어도 쿠사나기 소령은 바토와 같이 스쿠버를 즐기고, 인형사에 대해 의문을 품고 같이 프로그램까지 공유한다. 그러나 이브의 시간은 다르다. 처음부터 인간형 로봇이 아니라 단순한 모양으로 생긴 로봇부터 시작하여 인간형까지 발달한다.

 

 

만약 작품을 보면 구식로봇인 카트란과 텍스의 경우 확연히 인간과 구별되는 로봇이다. 이런 로봇을 옆에 있다면 분명히 인간과 구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기능적 요소를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하고 완전히 닮고, 게다가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의상까지 착용한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마치 인간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의 편리함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분이 나쁘게 여기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진정으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똑같이 생겼기에 그들은 오히려 인간과 같이 지내는 모습과 더불어 외면당하기도 한다. 인간은 왜 인간과 같은 모양을 만들려고 하면서 그들을 외면할까? 고대신화에서 바벨탑을 보자. 인간은 신이 사는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오만을 상징하는 바벨탑을 건축하나 결국 신의 분노를 사고, 서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로 언어가 갈라졌다고 한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의 오만에 분노했을 것이다. 신의 형상은 항상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지, 아니라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이 인간의 영역 이상을 침범할 때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로봇을 창조한다. 신화라면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니, 이제는 인간이 기계인간을 창조했나이다. 게다가 그 기계인간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타적인 모습을 말이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정신은 타인을 위해 선을 제공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기계인간은 주인을 위해 그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거짓된 마음은 없고, 오로지 주인의 선(goods)에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런다고 그 역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형식적 요소다. 하지만 그 형식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브의 시간에서 보이는 갈등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리쿠오는 평범한 남자고등학생이다. 안경을 끼고 조용한 편이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항상 손에 핸드폰을 만지고 무엇을 관찰한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 있는 기계인간 사미의 활동기록이다. 사미는 젊은 여성처럼 생긴 기계인간이다. 그저 집에서 리쿠오의 가족들에 가사업무를 맡는다.

 

 

이브의 시간에서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기계인간들이 인간의 다른 영역보다는 가사업무를 맡는다는 점이다. 요리와 세탁, 심지어 비오는 날 마중가기도 한다. 또한 어린 아이를 돌보기도 한다. 이브의 시간에서 주요 배경이 되는 카페인 이브의 시간은 인간이나 기계인간이나 모두 차별 없이 머물 수 있다. 그 중에서 인간이 누구이고? 인간이 아닌 자는 누구인가? 오히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이 더 인간다워 보인다. 활발한 소녀 아키코,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 리나와 코지, 치에를 돌보는 시메이, 이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처럼 보인다. 아니라면 더 인간이 가지고 있을 따듯한 마음까지 지니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리쿠오와 그리고 사미를 보자. 사미는 본래 커피를 탈 때 있는 것으로 타다가 어느 순간 맛이 바뀐다. 우연히 사미가 이동경로가 명령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는 것을 알고, 리쿠오는 그 위치에 가서 우연히 그곳이 인간과 기계인간의 구분을 하지 않는 카페라는 점을 알았다. 거기서 마시는 커피가 집에서 마시는 커피맛과 비슷하다. 게다가 사미가 그곳에 온 것까지도 알았다. 사미는 왜 그곳으로 가서 커피를 받아 집에서 타줄까?

 

 

사미는 평소대로라면 가사 일만 하는 기계인간이나, 막상 이브의 시간에 가면 말이 없고 조용한 아가씨다. 머리모양도 긴 생머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옆쪽으로 묶는다. 집에서 가끔 머리모양을 보면 헤어밴드를 하거나, 의상도 바뀌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리쿠오의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작품을 보면, 사미가 직접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용모를 단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이 기계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사미는 기본적으로 여성형 기계인간이다. 하지만 기계인간에게 여성인가? 남성인가? 문제는 중요하지 않으나, 사미는 여성으로서 매력을 보여준다.

 

 

이브의 시간이란 가게에서 나기와 대화를 나눌 때, 리쿠오에 대해 걱정한다. 그가 어느날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는 것과 그 이후로 삶의 활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리쿠오를 위해 사미는 커피를 타주는 점에서 변화를 준 것이다. 기계인간이라면 프로그램이 있으나, 그것을 초월했다. 오로지 리쿠오라는 남자고교생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어느 점이 더 인간다울까? 집에서 리쿠오는 조용한 성격이고, 누나는 대학생이라 술을 마시며 늦게까지 논다. 어머니는 그저 쇼핑이나 TV보는 것을 좋아하며, 아버지는 항상 출장 중이라 집에 오지 않는다.

 

 

이 작품에 보이는 것은 가족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다. 심지어 나기나 리쿠오의 친구인 마사키조차 어린 시절 로봇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양육된 로봇에서  나기의 카트란은 그 이용가치가 다 되자 기억과 일련번호를 지워진 채 버려지고, 마사키는 아버지가 로봇혐오주의자에 따라 마사키와 대화조차 나눌 수가 없었다. 이런 2가지 엇갈림에서 나기는 이브의 시간을 만들고, 마사키는 차라리 만나 상처를 받을 바에 기계인간에 대해 부정하여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결국 로봇이란 타자성, 인간이 만든 인형에서 그 인형이 오히려 인간적이기에 그 인간적인 사랑을 받는 것만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이 나누어주는 것인가에서 가치관의 차이다.

 

 

그런 가운데, 리쿠오는 사미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며 나기가 가지는 기계인간에 대한 애정(집에서 누나가 리쿠오에게 기계인간에 빠져있는 사람 같다고 놀린다)과 더불어 기계인간에게 패배했다는(피아노 연주대회에서 기계인간의 연주에 졌다는 패배의식) 2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왜냐하면 기계는 정확한 연주, 즉 음의 높낮이와 더불어 박자만 정확한데, 리쿠오는 피아노를 치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피아니스트의 손맛을 그 기계인간에게 느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이 아닌데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연주를 한 것이다. 아니라면 원래 진짜가 아니기에 오히려 진짜이고자 하는 그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연주였을 것이다. 리쿠오에겐 그런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브의 시간이란 카페에서 보인 사미의 행동, 리쿠오에게 사미란 기계인간은 가사업무를 맡는 안드로이드에서 한 사람의 인간(여성)으로 보이기 시작한 점이다. 사미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거나 또는 사미의 정성에서 다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형에 대해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의 무서움이란 인간이 가장 원하는 대상을 만들었을 때 그 대상이 가장 무서운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봤을 때, 그저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인간이 만든 인형 혹은 기계인간에게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이면서 한편으로 낭만적일 수 있다. 없는 것에 대한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란 실존적 존재가 결국 유물론적인 부분에서 관념적인 부분으로 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이 딸이라고 여긴 르네 데카리트의 코키토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한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들어가면 존재의 있음을 존재가 바로 물리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인식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브의 시간을 보면 한국 rock밴드 부활의 곡 중에서 <인형의 부활>이란 가사가 생각난다.

 

 

 

 

한 마음과 한 곳만을 보며, 우는 모습이 무엇을 말하려하니.

마주보이는 그곳을 슬프게 보며, 말 못할 사연을 커다란 눈으로 나에게 말하려나!

말 못하는 너의 조그만 입이 너무 안타까워.

그 눈물은 이별 그리고 슬픔 그런 걸 거야, 무얼 말하려하니.

마주 보이는 너에게 슬픔이 보여.

말 못할 사연을(사랑과 이별을) 커다란 눈으로 나에게 말하려나.

(이제는 너에게도 생명이 있네, 인형아~)

 

 

 

 

아무리 가사를 봐도 리쿠오에 대한 사미의 마음이다. 아니라면 어린 시절 상처를 받은 사카이의 마음일 것이다. 자신을 돌본 구식로봇 텍스에서 말이다. 이 작품에서 성우진도 조금 보면 재미있는데, 리쿠오에게 한 마음으로 보는 사미의 성우가 다나카 리에이다. 다나카 리에의 배역 중에 CLAMP가 만든 <쵸빗츠>에서 역시 기계인간인 치이와 프레이야 역할을 맡았다. 거기서도 치이는 순진한 청년 히데키에 대해 인간과 기계인간의 사랑에 대해 그린다. 기계음성이 지닌 그 특유한 딱딱한 뒤에 숨어진 깊은 감성을 지닌 목소리도 이브의 시간을 감상할 때 주요 포인트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여 한스 밸머의 그로테스크한 파편화된 인형,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표지, 그리고 이브의 시간에서 보이는 사미, 나오는 배경적 차이는 분명하나 인간이 아닌 인간이 만든 존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실 인형이라고 하나 그 인형의 모습은 분명 인간이 상상하고 만든 존재이다. 하물며 애니메이션 영상조차도 작가와 애니메이터의 손길이 들어가 있다. 한편으로 이들의 공통적인 부분은 인간임에 대한 물음이다. 점차 갈수록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 긍정적 요소로 강해지면, 마지막엔 인간과 기계인간 사이에는 우정과 애정조차 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존재로서의 타자인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타자인지는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캐니 밸리 이펙트가 사실 인간이 만든 존재가 진짜 인간처럼 보여서 그렇다고 하나, 그것을 만든 것은 인간이다. 결국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해 그것이 자아든 타자이든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글을 적는 나라고 하여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되지 않기에 이런 글을 적어본다. 우리 인간 자체가 언캐니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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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전선 1
나이토우 야스히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혈계전선>을 읽다보면 전형적인 하드고어가 날뛰는 일본 만화의 한 장르다. 환상적인 세계와 현실의 공간이 뒤엉킨 세계, 그것은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관념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이 작품의 배경은 미국의 뉴욕이란 곳이다. 미국의 뉴욕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도시이다. 뉴욕이란 도시가 단순히 미국의 대도시라고 하여 그런 것일까?

 

미국 뉴욕에 월-스트리트라고 불리는 경제의 중심지가 있다. 월가라고 하면 주식의 무대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주식에 대한 경제적인 지식이 없지만, 적어도 미국의 월가라고 한다면 세계 금융의 중심이 오고가는 큰 요충지다. 현대사회는 이미 경제구조가 자본주의구조에 해당되며, 자본의 증식은 결국 자본에 의해서고, 수많은 자본가들이 움직이는 뉴욕의 월가는 그야말로 황금의 도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황금은 그 모두에게 열리지 않고, 오히려 가려진 채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인가? <혈계전선>의 주인공은 레오나르도 워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면 모르지만, 워치라는 것은 watch라는 시계라는 명사적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지켜보다 관찰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의 이름은 워치 즉 무엇을 지켜보고 관찰하는 존재이다. 관찰의 존재성에서 무엇을 관찰하고, 감시라는 점에서 무엇을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괜히 그런 이름이 붙인 것도 아니란 점에서 우연히 가족과 미국에 와서 산책을 하는 도중에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관찰자의 눈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라는 대답에 그 운명의 두 눈을 레오나르도가 받게 된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야 하는가?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그것은 Justice 정의로 이어진다. 왜 정의인가? 보고 관찰하는 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의 편에 일방적으로 드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정확하게 사물을 파악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본질은 인간이 가진 다섯 가지의 감각인 촉각, 미각, 청각, 후각, 시각 중에 시각만이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촉각, 미각, 후각은 무의식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쉽고, 청각은 감정에 의해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보는 것만은 관찰하는 것만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여 거기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판단기준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나, 자세하게 보고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정의로 이어진다. 워치의 두 눈은 정의로 이어지나, 그 정의의 수단과 방법은 폭력 내지 비폭력으로 이루어진다.

 

1권의 에피소드에서 음속원숭이와 반쪽 사신의 해결에서는 폭력적 수단에 대한 비폭력적 수단이 발휘하고, 인신매매단에 대해서는 폭력이란 하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방법은 비폭력적인 것은 요구하나, 반드시 비폭력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는 점이다. 왜 이런 것을 담고 있을까? 작가는 분명 일본인이나, 작품 배경은 미국 뉴욕이란 거대한 도시다. 그 도시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사는 만큼 온갖 부조리와 뒤틀림이 존재하는 법이다. 평소 눈에는 당장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지 않은 어둠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법이다.

 

헬사렘즈 로트, 실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공간이나, 우리가 바라보며 느끼는 관념 안에서는 하나의 악마의 소굴과 같다. 처음부터 은행 강도가 등장하고, 미친 테러리스트가 존재한다. 미국에 은행 강도가 자주 일어나는 것도 그러하나 뉴욕에서 비극적인 테러가 일어난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그것이 하나의 불안감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처럼 볼 수 있다. 단지 만화라는 매체가 작가의 상상력에 스토리텔링으로 입혀질 뿐이다. 그런다고 만화는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 것이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헬사렘즈 로트에서 존재하는 것은 이형의 괴물체와 무서운 사건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비밀결사, 그렇지만 비밀결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 비밀결사에 조직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가 보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다. 주인공 워치로 보는 뒤틀려 버린 헬사렘즈 로트이나, 그것의 토대가 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상황이다. 왜 뉴욕이 그렇게 뒤틀려 보이는가?

 

뒤표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뉴욕 붕괴 후 하룻밤 만에 구축된 도시, 헬사렘즈 로트, 이계와 현계가 뒤섞인 이 마도에는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뉴욕은 현실에서 붕괴되지 않았지만, 이곳에 무엇이 뒤섞여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래 실천해야할 도덕적인 사회와 더불어 그렇지 못한 세계가 놓여 있고, 그 모순된 공간에서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이 작품은 나쁜 요괴 퇴치로 끝날 작품이라면 워치에게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줄 이유는 없다.

 

음속원숭이를 죽이는 것만 생각한 대다수 사람과 달리, 워치는 원숭이에 숨은 장치를 찾아내어 위기를 막는다. 위기를 막는다며 무조건 달려드는 것보다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파악하여 처리하는 것,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어두운 세계를 워치는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관찰하는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judgement라는 판결로 이어지나, 그는 육체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기에 옆에 동료를 의지하는 것이다. 물론 동료들도 그의 눈을 의지하여 그의 판단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눈이란 외부의 물리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것만 본다. 물리적 존재의 그 너머에 존재하는 그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판단은 눈으로 하지만, 눈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혈계전선이란 표지제목에서 보인 워치의 보스는 비밀결사를 운영하는 리더이나, 한편으로 그 무엇을 알 수 없는 깊은 살기를 가지고 있다. 정의의 수행이 정의로운 의지로서 이어지는 게 아니다. 처음 워치를 찾으러 온 사나이도 하는 짓이 건달에 민폐를 일삼는 사람이다. 민폐를 일삼는 사람이 정의 따위를 생각할까? 우연적인 기회로 통한 자신의 심심풀이 내지 기분전환으로 정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만화의 액션은 박진감이 넘쳐야 한다. 조용히 끝낼 상대도 아군도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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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더블유 Dimension W 1
이와하라 유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그것은 없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다소 종교와 철학을 넘나드는 담론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관념론적인 요소와 더불어 인간은 죽으면 단순히 시체와 같다는 유물론적인 요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전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이란 작품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1990년대로 하여 사이버펑크라는 장르가 흥행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는 그다지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본 <Dimension W>에서는 어떻게 나는 생각해야 할까? 우선 Dimension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단위를 나타내는 차원, 크기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W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 뒤표지에 보면 이런 단어가 나온다. “X·Y·Z에 이은 차원축 'W'의 비밀에 다가가는 운명의 만남?” 아무래도 W라는 것은 어느 공간이나 차원에서 그것을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라 볼 수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어느 지점과 지점의 포인트가 있어서 공간과 면적을 이루지만, 그것을 이루게 하려면 선이라는 하나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공간의 매개체라는 의미처럼 이 작품의 1권에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는 모른다. 단지 여기서는 먼 미래 세계를 그린 공상 과학적 요소와 더불어 사이버네틱스란 독특한 신체기관으로 풀어나간다. 여기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주인공 소녀인 미라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지닌 로봇이다. 그녀의 사이버네틱스적인 요소에서 단순히 기계인간이란 인공지능으로서 명령을 받아 그 명령에 대한 계산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처럼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한다.

 

로봇에는 단순히 논리라는 기계적인 요소만 있지, 윤리나 감정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미라는 그 감정과 윤리를 지니고 있었다. 기계를 전혀 의존하지 않은 마부치와의 만남에서 마부치는 기계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부치의 입장에서 마리라는 존재는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왠지 친하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이 만든 기계문명의 진화는 인간의 신체마저 기계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계로 인한 전 자동 시스템으로 일상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마부치는 자동차도 기계를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한다. 그의 생활요소는 21세기 초반에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는 21세기 초반이 아니라 먼 미래라는 설정이다.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경제 산업 기반은 기계를 다루게 하는 에너지, 즉 전기에너지인 셈이다. 작품 초반의 프롤로그에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만이 아니라 니콜라 테슬라라는 사람을 거론한다. 전기에 대해 자세히 모르나, 테슬라를 찾다보면 자기력선속 밀도의 단위라고 되어 있다. 자기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인간에겐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서 뇌에서 시작하여 중추신경을 타고 인체 전반에 이어진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신경의 전달에 의해서다. 신경이 전달될 때 뉴런이란 전기를 전달하는 세포가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은 전기적 신호에 의해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나 기계인간이나 전기적 신호로 움직이는 점에서 유사한 존재일 수도 있고 다른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처음에 <공각기동대>를 다룬 것은 인간의 신체적 조직을 제외한 순수 이성으로 본다면 만약 판단력을 가질 수 있는 지성과 감정만 지닌다면 인간이든 기계인간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런 사고의 방향은 주인공인 미라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기계인간이고, 살아온 역사적인 시간도 2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라는 자신이 기계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만든 박사 부부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로 여기고, 유리자키 박사가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미라가 돌보는 이유는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윤리와 이성에 의해서다. 어느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무튼 이 작품은 분명 사이버네틱스라는 인간과 기계의 이원화가 아니라 그 이원화의 해체지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사이버네틱스와 저항적인 의미를 가진 펑크(Punk)의 결합은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유리자키 박사의 아내와 친딸이 살해당한 시간에 미라는 그 범인의 흔적을 메모리장치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 영상장치에서 미라는 마로치와 일행들에게 범인의 단서를 알려준다. 첫 번째 미라의 진술에서는 ‘뉴 테슬라 차원관리국 DAB’과 미라의 영상장치에서는 ‘상대는 국가보다 더한 힘을 가진 세계 최대의 독점기업’인 'NT Energy'로 나온다.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이름이 거론된 점에서 사이버펑크 장르는 이미 형성된 것이다. 가령 <신세기 에반게리온>나 <아키라>와 같은 경우 그 사회의 주도층인 어른에 대한 반항이고, <공각기동대>는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휴머니즘(인간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요소를 보인다.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점에서 <Dimension W>의 소재에 대한 접근성에서 이 작품에서 부정하는 것은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처럼 그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횡포를 부리는 다국적기업과 거기에 기생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리의 아버지 유리자키 박사는 분명히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지만, 그 결과는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절망에 의해 세상은 어둠으로 물든다는 저주와 함께 사라진다. 그가 저주를 하던 세상은 무엇이 잘 못된 세상이고, 올바르지 못하며, 게다가 그런 문제점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은폐 및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라가 아버지 죽음에 대한 기사가 엉뚱한 것으로 나온 것을 보고, 이미 이 작품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투쟁으로 변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3차원이란 부피를 나타내는 X·Y·Z를 이어주는 W의 존재는 무엇일까? 각각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서로 연결해주는 마음이면 좋을까? 인간은 순간의 전율로서 짜릿함을 느낀다. 그 짜릿함을 느끼기 위한 마음, 그것이 W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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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단원고 비극에 대한 국민들이 느껴야 할 내용을 200자 정도로 적어보았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희생자를 생각하면 나는 그들이 죽어서 슬프기보다 그들의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다. 남들은 이상하게 여기나, 계속되는 비극이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기관에 대한 비판의 날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그러나 이것은 알아야 한다. 그 정부를 만든 당사자는 바로 국민들 자신이란 것을 말이다. 왜 정부는 비판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은 비판하지 않을까?

 

국민의 심판이 다음 선거라고 하나, 지금 이 비극이 터진 정부도 앞과 전의 선거로 탄생한 것이다. 그들을 선택하고 나서 이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국민들, 그것은 국민의 권리이나, 책임의식은 안 보인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그런 자신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역사는 계속 되풀이는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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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이나 혹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나보다 더 앞 전 시대라도 이 노래 가사는 알 것이다."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의 주제가 구절로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영화에서 아주 인상깊은 구절이다. 그래서인가? 영화를 보러 극장가에 왔는데 제법 나이가 있는 분들도 관람하러 오셨다. 대략 30대 내지 40대의 여성분들이 친구끼리 오거나 혹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같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 중에 남성은 나 홀로라는 사실은 조금 서글프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영화를 다시 본다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알 것 같기도 하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은 지난 날을 다시 조우하는 것은 가슴이 뛰면서도 한편으로 조금 슬프기도 하다. 그 만큼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세상의 혼잡함에 덧칠하였기 때문이다. 극장 안에서 보는 내내 그 때의 그 감정이 새롭새롭 떠오르니 정말 네버엔딩 스토리인가보다.

 

<빨간머리 앤>은 본래 TVA로 나온 작품이다. TV에서 장편으로 방연한 프로그램으로 사실 아주 예전에 나온 작품이라 캐릭터 디자인이나 배경 등은 매우 과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작화를 보면 마치 거리와 자연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수채화적인 영상과 애니메이션이란 하나의 표현주의적 양식을 고려하면 지금 다시 봐도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감독은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같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끄는 다카하타 이사오로서 <평성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나 <추억은 방울방울> 등과 같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을 보면 자연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그 자연적인 요소를 의 서정성을 반영하여 메말라 비틀려버린 인간의 감수성을 다시 되살린다. <빨간머리 앤>을 보면 앤은 이런 질문을 매튜 아저씨에게 한다. 주변에 강이 있냐고 말이다. 자신의 꿈은 강이 주변에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이것은 우리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단순히 맑은 물과 공기는 인간의 건강만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매튜 아저씨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마을 어귀에 벚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길이 나온다. 벚나무가 마치 태양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뻗어 꽃잎이 터널처럼 연결된 그 길은 너무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는 순간 마음 한편에 뭔가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 벚나무에 피어난 벚꽃들이 사실은 꽃잎만이 아니라 요정이 같이 숨어 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황홀한 연출이 아닐 수가 없다.

 

왜 인간은 자연과 같이 생활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늘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게다가 불모지로 만들었다. 대지란 모든 생명을 품고 있으며, 그 생명으로 통해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어가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와 착취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고 착취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마저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되어 버린다. 자연을 아낀다면 그 모든 것이 소중한 법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언제나 말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앤, 앤의 그런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종종 오해하거나 혹은 그녀를 알게 되면 재미있어 한다. 그녀의 순수한 매력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빨간머리 앤>은 잊혀진 우리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주는 느낌이었다. 작품은 TVA 장편에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편집하여 극장판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초록지붕 집에 와서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만나고, 그리고 평생 친구인 다이애나를 만난다.

 

학교에서 길버트와 만나 싸우고, 이후 라이벌로서 계속 학교 내에서 만난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주요 장면을 넘기고 나서 이 작품의 최후의 클라이맥스인 매튜 아저씨의 운명이 나온다. 매튜 아저씨는 앤을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고, 거기다가 학교에 보내준다. 앤은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여 상급학교에 입학하고,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자랑스러운 가족이 된다. 그래서일까? 매튜 아저씨가 죽기 얼마 전에 앤과 같이 목장을 걸을 때, 앤에게 한 말이 인상 깊다.

 

"앤, 넌 내 딸과 같다", 마릴라 아주머니도 "앤, 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와 같다.", 참으로 감동적인 대사였고, 매튜아저씨의 죽음 역시 슬픔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작화와 지금의 작화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성우의 연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애니메이션 안의 무생물인 앤이 정말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성우분들의 그 진심어린 연기와 매튜아저씨의 죽음이 많은 관객들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지 어느 분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남성 나홀로 있어서 같이 동조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가슴 속에 뭔가 아련하고 잔잔한 파도가 일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앤은 작품에서 공부를 잘하여 좋은 대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학업을 이끌어갈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록지붕의 집에서 마릴라 아주머니를 돕고 그녀를 보살피며 같이 살기로 결심한다.

 

나이로 인해 실명이 올 정도로 건강이 나쁜 마릴라 아주머니를 앤은 못본 채 하지 않고, 그녀와 같이 매튜아저씨의 죽음을 슬퍼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것을 결정한다. 자신의 성공이란 출세보단 소중한 사람과 같이 있기를 선택한 앤에게서 우리 인생이란 서로와 서로를 보담아주고 위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한자어 중에 사람인 人이란 글자가 있다. 저 한자가 왜 ㅅ자 모양인 것을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은 서로 받쳐주며 같이 살아가야 하기에 사람인자라는 한자어가 생겼다고 한다.

 

가족과 친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도 없이 모두 소중하기에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작은 것에서 행복과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이 어째보면 우리의 행복일지 모른다. 출세도 물론 중요하나, 출세하여 마지막 혼자만 만족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쓸쓸하고 허무한 일은 없을 것이다. <빨간머리 앤>은 아주 오래된 작품이고, 추억의 만화영화로 나오지만, 거기에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모습은 영원할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거만 대사가 참으로 아름답다. 풍부한 감정과 다양한 표현, 대사 하나 하나가 모두 시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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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4-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댓글은 없군요. 무플방지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4-28 14:45   좋아요 0 | URL
역시 곰발님이십니다. 그려~
그런데 공감은 6개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