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이나 혹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나보다 더 앞 전 시대라도 이 노래 가사는 알 것이다."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의 주제가 구절로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영화에서 아주 인상깊은 구절이다. 그래서인가? 영화를 보러 극장가에 왔는데 제법 나이가 있는 분들도 관람하러 오셨다. 대략 30대 내지 40대의 여성분들이 친구끼리 오거나 혹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같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 중에 남성은 나 홀로라는 사실은 조금 서글프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영화를 다시 본다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알 것 같기도 하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은 지난 날을 다시 조우하는 것은 가슴이 뛰면서도 한편으로 조금 슬프기도 하다. 그 만큼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세상의 혼잡함에 덧칠하였기 때문이다. 극장 안에서 보는 내내 그 때의 그 감정이 새롭새롭 떠오르니 정말 네버엔딩 스토리인가보다.

 

<빨간머리 앤>은 본래 TVA로 나온 작품이다. TV에서 장편으로 방연한 프로그램으로 사실 아주 예전에 나온 작품이라 캐릭터 디자인이나 배경 등은 매우 과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작화를 보면 마치 거리와 자연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수채화적인 영상과 애니메이션이란 하나의 표현주의적 양식을 고려하면 지금 다시 봐도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감독은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같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끄는 다카하타 이사오로서 <평성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나 <추억은 방울방울> 등과 같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을 보면 자연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그 자연적인 요소를 의 서정성을 반영하여 메말라 비틀려버린 인간의 감수성을 다시 되살린다. <빨간머리 앤>을 보면 앤은 이런 질문을 매튜 아저씨에게 한다. 주변에 강이 있냐고 말이다. 자신의 꿈은 강이 주변에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 이것은 우리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단순히 맑은 물과 공기는 인간의 건강만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매튜 아저씨와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마을 어귀에 벚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길이 나온다. 벚나무가 마치 태양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뻗어 꽃잎이 터널처럼 연결된 그 길은 너무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는 순간 마음 한편에 뭔가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 벚나무에 피어난 벚꽃들이 사실은 꽃잎만이 아니라 요정이 같이 숨어 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황홀한 연출이 아닐 수가 없다.

 

왜 인간은 자연과 같이 생활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늘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게다가 불모지로 만들었다. 대지란 모든 생명을 품고 있으며, 그 생명으로 통해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어가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와 착취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으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고 착취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마저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되어 버린다. 자연을 아낀다면 그 모든 것이 소중한 법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언제나 말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앤, 앤의 그런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종종 오해하거나 혹은 그녀를 알게 되면 재미있어 한다. 그녀의 순수한 매력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빨간머리 앤>은 잊혀진 우리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주는 느낌이었다. 작품은 TVA 장편에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편집하여 극장판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초록지붕 집에 와서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만나고, 그리고 평생 친구인 다이애나를 만난다.

 

학교에서 길버트와 만나 싸우고, 이후 라이벌로서 계속 학교 내에서 만난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주요 장면을 넘기고 나서 이 작품의 최후의 클라이맥스인 매튜 아저씨의 운명이 나온다. 매튜 아저씨는 앤을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고, 거기다가 학교에 보내준다. 앤은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여 상급학교에 입학하고,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자랑스러운 가족이 된다. 그래서일까? 매튜 아저씨가 죽기 얼마 전에 앤과 같이 목장을 걸을 때, 앤에게 한 말이 인상 깊다.

 

"앤, 넌 내 딸과 같다", 마릴라 아주머니도 "앤, 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와 같다.", 참으로 감동적인 대사였고, 매튜아저씨의 죽음 역시 슬픔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작화와 지금의 작화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성우의 연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애니메이션 안의 무생물인 앤이 정말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성우분들의 그 진심어린 연기와 매튜아저씨의 죽음이 많은 관객들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지 어느 분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남성 나홀로 있어서 같이 동조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가슴 속에 뭔가 아련하고 잔잔한 파도가 일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앤은 작품에서 공부를 잘하여 좋은 대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학업을 이끌어갈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록지붕의 집에서 마릴라 아주머니를 돕고 그녀를 보살피며 같이 살기로 결심한다.

 

나이로 인해 실명이 올 정도로 건강이 나쁜 마릴라 아주머니를 앤은 못본 채 하지 않고, 그녀와 같이 매튜아저씨의 죽음을 슬퍼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것을 결정한다. 자신의 성공이란 출세보단 소중한 사람과 같이 있기를 선택한 앤에게서 우리 인생이란 서로와 서로를 보담아주고 위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한자어 중에 사람인 人이란 글자가 있다. 저 한자가 왜 ㅅ자 모양인 것을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은 서로 받쳐주며 같이 살아가야 하기에 사람인자라는 한자어가 생겼다고 한다.

 

가족과 친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도 없이 모두 소중하기에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작은 것에서 행복과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이 어째보면 우리의 행복일지 모른다. 출세도 물론 중요하나, 출세하여 마지막 혼자만 만족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쓸쓸하고 허무한 일은 없을 것이다. <빨간머리 앤>은 아주 오래된 작품이고, 추억의 만화영화로 나오지만, 거기에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모습은 영원할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거만 대사가 참으로 아름답다. 풍부한 감정과 다양한 표현, 대사 하나 하나가 모두 시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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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4-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댓글은 없군요. 무플방지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4-28 14:45   좋아요 0 | URL
역시 곰발님이십니다. 그려~
그런데 공감은 6개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