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물론 문학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란 공간을 문자서사로서 만든 세계이다. 그런 세계가 나오는 것이 현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도 문학에서도 현실적 조건을 기반으로 만들게 된다. 단지 신화라는 것은 문학에서도 인간이 보이지 않은 욕망을 토대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런 적나라한 인간의 욕망을 현대적 신화로서 재미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라이트노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에는 보통 현실적 리얼리티가 존재하기보단 환상이란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도 계속 내가 강조하는 것은 제 아무리 환상세계고 몽상으로 가득한 망상공간이라도 그것은 현실에 기반 하여 만들어진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을 토대로 작가가 새롭게 보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은 것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욕구불만 내지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간이란 물리적으로 현실에 속해 있으며, 제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하여 그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상태라도 그런 상상조차도 현실의 육체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제 아무리 컴퓨터의 능력이 뛰어나 인간을 초월한 연산능력을 갖추어도 인간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은 없다. 단지 환상에 지나치게 열중한다는 것은 현실과 자신의 존재성이 격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할 수 자신의 존재성이 격리된 것이라 볼 수 다.

 

자신이 속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에 젖어 거기에 매진하는 것이고, 그런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신이 현실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남은 것은 선택은 제한적이다. 억지로 사회에 적응하든지 혹은 사회와 단절하든지 아니라면 어중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현실과 환상 모두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어중간한 선택과 비슷하기도 하나 그것은 아니다. 어중한 것은 자신에 대한 명확한 위치를 잡지 못한 채 이래저래 흘러나가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작가의 글은 결국 작가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고, 그런 글이야 말로 작가가 위와 같이 작가 자신이 세상과 대하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딱 좋다 내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다양한 이야기와 기발한 소재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단지 작가가 스토리텔링으로 라이트노벨을 보여준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작가의 라이트노벨 속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독자가 있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고, 독자가 글을 읽는다면 서로 직접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으로 통해 서로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독자가 어느 작가의 글을 보고 나서 그것에 대해 공감을 한다면 작가와 독자는 서로 교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에서 미묘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라이트노벨이란 것은 재미와 오락요소를 위해 만들어진 경소설이다. 경소설이라고 해도 문학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문학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심도 있는 세계관을 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다고 하여 라이트노벨이 우리 독자에게 뭔가 작은 의미를 넘어 큰 감동을 주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를 읽는 순간 재미와 더불어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조금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주부가 혼자서 아들과 딸을 키우는데, 남편은 14년 전에 병으로 죽고 아들은 부족한 살림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남편 없는 주부란 참으로 가혹하다. 아무리 설정이 17교에 입교하면 17세의 외모와 신체적 조건을 가진다고 해도 그 대가란 자신의 수명이다. 자신의 생명을 줄여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의 눈이 되는 주인공 타카시는 매우 상식적인 인물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집안일도 돕고 게다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받아 가계에 도움을 준다.

 

때로는 상식을 떠나 그가 매우 어른다운 사고를 지닌 것도 알 수 있다. 자신의 할머니가 준 1만 엔의 가치를 그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1만 엔은 13시간이란 노동으로 통해 얻어지는 대가라는 것을 말이다. 왠지 노동에 대한 가치를 고등학생의 입으로 나올 것이라 내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야말로 고등학생이면서 청춘을 누리지 못하고, 힘들게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에게 본 작품의 히로인인 어머니 카즈미의 자식사랑은 왠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 27년 전에 인기 아이돌이던 카즈미, 그녀는 어느 계기로 인해 아이돌을 그만 두고 타카시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타카시의 아버지는 평범한 청년이었고, 단지 어머니를 아낀 분이었으나 카즈미는 타카시에게 아버지에 대해 별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없는 어머니, 그것은 외로움과 괴로움의 연속이다. 카즈미가 왜 17세로 되어 아이돌이 되었을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정주부와 아이돌뿐이었다. 아들인 타카시가 집안일을 거들어주어도 타카시와 유카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거기에 따라 가계지출은 늘어간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이른 카즈미에게 더 이상 일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17세가 된 이유는 2달 전에 일자리에서 나간 것이 계기라고 볼 수 있다.

 

타카시의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17세 소녀로, 그것도 몸매가 아주 좋은 아이돌로 갔다는 것은 환상적 세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환상이란 공간을 단지 환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이란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환상이 아닌 현실적 벽에 의해서였다. 아이돌이 되면서 자식이 아닌 타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카즈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팬이 아니다. 자신의 팬에게 3번째로 사랑한다고 선포하는 이유는 바로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사랑이었다. 타카시와 유카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그 가족이 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27년 전에는 자신이 힘들어서 아이돌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자신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가족이 있기에 아이돌로 있을 수 있었다. 처음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은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17세 미소녀로 변한다면 과연 남자주인공인 아들은 성적인 충동이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까? 물론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타카시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혼자 방안에 박혀 있는 유카의 속옷과 맨살을 보면 얼굴을 붉혀지면 고개를 돌리는 부분이 나온다. 정말 여동생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면 봐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여성이란 점을 인식하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

 

타카시를 보면서 카즈미는 만일 여동생에게 욕정을 품는다면 대신 자신에게 그 욕정을 풀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17세가 된 어머니로 인해 타카시는 미묘한 상황에 놓인다. 근친상간에 대한 욕정은 없어도 그런 상황에 내몰린 그에게 학급 동급생인 메이코는 새로운 해방구이면서도 걸림목이다. 이 작품에서는 감추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작가 스스로 감추고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발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메이코는 유카가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한다. 메이코의 아버지는 유명한 대기업을 운영하는 부자나, 메이코의 어머니는 병으로 별세한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옆에 17교의 입교로 새로운 여자가 자신의 새어머니로 들어와 메이코와 아버지의 부녀관계를 모두 망쳐놓았다.

 

그런 과거를 가진 메이코가 타카시와 유카 관계에 들어와 마치 메이코가 증오한 새어머니와 같은 위치를 자신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신화에 인용한 엘렉트라콤플렉스로 딸이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사랑(육체적인 관계도 포함)하고 싶은 심리로서 그 자리를 새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거세(멀어지게) 된 것이다. 유카에게 아버지는 14년 전에 별세했으니 유카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오빠인 타카시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셈이다. 아빠와 오빠라는 단어에서 우리 인간은 어느 점을 바라보는 것인가?

 

물론 다 그렇지는 않으나, 여자들 중에서 어린 시절 자신은 아버지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혹은 아버지(대신 그 아버지는 그 딸에게 매우 좋은 분이야 하나)와 닮은 사람에게 결혼가거나 또는 이끌리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남자라면 자신의 어머니와 닮은 여자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 특별한 정신적 외상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7세의 어머니가 등장한 점에서 유카는 어머니가 외적 조건으로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조건이 17세이기에 오빠랑 동갑이기에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환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그 환상에서 현실의 도덕에서 오빠가 그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말이다. 다행히 카즈미는 일에 바쁘고, 대신 메이코가 그 자리를 차고 왔으니 유카로서는 불만이 아닐 수가 없다. 유카는 작품 내에서 어머니에게 질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카즈미가 타카시와 둘이서 찍은 셀카가 유카의 메일로 오자 유카는 잘 씻지 않은 자신의 몸을 정리하면서 타카시와 셀카를 찍는다. 그래서 만약 메이코가 들어오지 않고, 카즈미를 이어 타카시의 할머니인 우메노가 17교로 입교하지 않았다면 타카시의 일상은 수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만든 <MM>이란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남자주인공 사도 타로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가 자신을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남자로 보고 계속 성적 구애를 하자, 여기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성적으로 큰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전개한다. 어머니인 카즈미는 아이돌이 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사회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 도덕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은 그런 점에서 환상이란 설정 뒤에 매우 현실적인 요소가 녹아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17세로 된 것도 그러나 메이코가 17세의 여사장이란 설정도 환상적인 설정 중에 하나다. 그래도 제대로 잘 설정한 것은 몸이 비록 17세가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조차도 17세가 된 것은 아니다. 카즈미는 17세의 아이돌로서 활동하나 모성애가 매우 강한 사람이고, 우메노는 17세의 소녀가 되어도 옛날 말투와 옛날 복장을 하고 다닌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적 요소를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점이다. 그리고 할머니 우메노에 대해 생각하면 이 라이트노벨은 전형적으로 일본의 유미주의 요소가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

 

유미주의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라질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늙어서 병든 노인이다. 며느리인 카즈미는 혼자서 두 자식을 키우고, 타카시는 고등학교 청춘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마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자 자신의 남편이 살아생전 타카시와 유카를 많이 옆에서 보살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옆에서 짐이 된다는 생각에 우메노 자신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고, 카즈미에게 카즈미의 남편 대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사는 “몰골스레 죽기는 싫었단다.”였다.

 

노인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약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 스스로 의지할 수 없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한다. 병으로 인해 노환이 겹치면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될 것이고, 가족에게 힘이 되지 못한 것도 모자라 힘들게 한다면 어떨까? 몰골스레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서 병이 들어 죽는 것보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에게 슬픔을 주는 것이 싫어서 아닐까 싶다. 게다가 우메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17교에 입교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 가족들과 건강한 모습으로 미소 짓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소원이다.

 

작가가 결혼했는지 아니면 했더라도 가정을 꾸린 가장인지는 전혀 모른다. 적어도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인 것 같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어떻게든 타키시와 유카를 지키기 위해 17세의 아이돌이 된 카즈미는 분명 환상적인 존재이나 그 존재성에 대한 현실적인 요소는 큰 공감이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현대에 들어와 가족이란 이른바 해체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그 옛날 대가족을 이룬 시대와 달리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 간의 사랑은 중요하다. 일본의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을 보면 가족이 단절된 경우(혹은 다른 가족들이 등장하지 않거나)가 허다하나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한 설정을 지닌 작품이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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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슬롭스키(Kieslowski)의 세 가지의 색은 아주 유명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색이란  '자유·평등·박애'를 의미하는 블루, 화이트. 레드의 의미다. 프랑스 국기를 보면 삼색기가 같은 면적을 가지고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프랑스의 상징이면서도 프랑스의 가치이기도 하다. 물론 프랑스 모두가 저런 자유주의, 평등사상, 박애정신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나, 17897월 프랑스대혁명이 삼색기로부터 1830, 1848, 1871년에도 프랑스의 삼색기의 정신은 유효하다. 아니라면 19685월 프랑스 혁명 그렇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프랑스인이 생각하는 삼색기의 정신처럼 키에슬롭스키(Kieslowski)의 세 가지의 색에서도 저런 정신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형식주의 내지 상징적인 요소로서 보여주는 것보다는 어느 인간들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매우 특별하다고 볼 수 없으며, 단지 조금 다른 누군보다 특별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블루에서 주인공 줄리는 어느날 남편과 딸하고 같이 도로를 달리는 도중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줄리 한 사람이었다. 줄리는 자신의 가족이 죽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정부는 남편의 아이마저도 임신하였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이 사라지고, 그 가족과 함께 나눈 추억마저 배신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줄리는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조용히 혼자 살려던 줄리에게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감을 느끼게 되면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자유는 혼자만의 자유이지, 그 자유 안에서 고독과 방랑이라는 이름까지 얻는다.

 

인간의 자유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나, 태어나면서사회가 있기에 그 사회에 의해 구속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줄리를 보면 루소의 자연주의적 사상에 따라 그녀는 인간 원초적인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자유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독신생활은 오히려 슬프고 외로우며 때로는 낯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보면 어느 푸른 수영장에 혼자 빠지는 줄리를 보거나 혹은 혼자 넓은 집에 푸른색 상들리에 조명을 받는 그녀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푸른 색으로 물든 수영장에 혼자 빠지는 줄리의 모습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처럼 보이나 그것으로 통해 진실한 자유는 볼 수 없었다. 어두운 밤에 방에서 푸른 상들리애 조명이 비추지만 그것 역시 자유보다는 고립에 가까워 보였다. 블루라는 하늘색은 바다와 같고 하늘과 같은 색이다.

 

바다와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인간은 그저 자연 속에 하나이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위대하다. 하지만 바다와 하늘은 우리 인간 모두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므로 모두 인간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 혼자라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서로 협조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대하여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인간관계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것이다. 아무리 줄리가 모든 것을 체념해도 그녀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줄리가 느낀 세상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분명히 자유이다. 때로는 그런 자유가 남에게 이타적인 가치로 돌아온다. 작품에서 시골이 아니라 도심지 작은 아파트에 살 때 아파트 주민들이 어느 서명서를 줄리에게 건넨다. 아파트 한 가구에 어느 젊은 여성이 사는데, 그녀는 온전한 직업이 아니라 성인클럽의 쇼걸이란 이유이기 때문이다. 줄리가 그녀의 퇴거를 원하면 그녀는 집에서 내쫓겨 갈 곳이 없어지게 되나, 줄리는 세상과의 단절로 인해 그녀가 무슨 직업을 가지든 말든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다며, 서명을 거부한다. 나중에 그 젊은 여자가 찾아와 줄리와 같이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서 대화를 하고, 그 여자는 줄리에게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한다.

 

그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이 여기서 일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에는 별로 슬프지 않지만,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고 있을 대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얼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자유의지가 있고, 직업의 선택과 유지에서 천하든 귀하든 그 선택자의 자유고 책임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냉소는 너무 슬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줄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과 자신의 남편의 친구가 사실 줄리를 좋아하던 것이다.

 

그는 계속 줄리에게 구원했고, 작곡가인 남편의 악보를 가지고 와서 다시 작업을 하여 줄리와 같이 완성시킨다. 남편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모든 흔적을 지우려던 줄리, 세상과의 단절과 체념을 원한 그녀에게 그의 등장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다. 본 작품은 19세 미만이라 다소 성적묘사(그런다고 노출이 드러나지 않는다)가 나오는데, 줄리와 그가 죽은 남편의 악보작업을 마치고 침대에서 서로 사랑을 나눌 때, 그녀는 이때까지 느끼지 못한 인생의 행복함을 느낀다. 어찌보면 자유라는 것은 혼자만이 고립되어 타인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같이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어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유라는 것은 단지 그 상태가 독단적이어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이면서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의 시민에게 연설하기를 자유라는 것은 혼자만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야 비로소 자신도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군가 의지하고 서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계약적인 요건에 따라 구속당할 수 있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구속과 억압이 시작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서로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 정치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포용력은 어디까지 있을까? 줄리는 남편의 정부에게 찾아갔을 때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던 딸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남편이 바람핀 여자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사실이다. 남편의 정부는 줄리에게 매우 미안하다고 하나, 자신의 뱃속에 아이에 대해 줄리에게 자비를 구하려 한다. 자유의 포용력에서 아무리 남편이 바람피우고, 그 남편에게 사과와 해명조차 듣지 못했지만, 새로 자라나는 어린 생명에겐 아무 죄가 없다. 그런 생명조차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 부정하게 태어나더라도 생명자체는 천부인권을 보장받을 자유, 그것이 블루에서 말할 수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물론 기본적인 자유는 고립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교감이란 사실은 중요하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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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틸 어쌔신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AnZ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기존의 김월희 작가의 라이트노벨을 읽는다면 세계관 자체가 역시 디스토피아적인 요소가 강하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과 <중2병 데이즈>도 그렇다. 세상은 과연 한 개인에게 친절한 곳인가? 그것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세상은 개인에게 가혹하고 잔인하고 심지어는 환상의 세계에 있는 곳과 같다.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환상적인 요소에 재미와 오락요소를 집어넣은 하나의 콘텐츠다. 콘텐츠라는 미디어로서 하나의 자본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상품이다.

 

그런 상품적인 가치가 라이트노벨과 부합되므로 라이트노벨은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재편집 되어 상품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국의 기존 라이트노벨을 아직까지 많이 읽은 편은 아니나, 마치 이것을 영화 내지 애니메이션에 접목하면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 영상연출 기법에서 몽타주(대립되는 것을 상반되어 보여주거나, 또는 같은 장면을 계속 보여주는 방법 등)와 같은 표현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흔하지 않을 것 같다. 한국 라이트노벨은 액션적인 요소보다 일상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사 액션이 강한 요소라도 역동감이 넘치는 글은 많지 않다.

 

이번에 김월희 작가의 신작인 <블랙스틸 어쌔신>은 그런 점을 조금 뛰어넘을 느낌이 든다. 작가 후기에도 그러나, 여러 가지 영화나 게임의 장면을 하나의 모티프로 삼아 작품 내의 상황이나 묘사를 잘 적용했다. 내 개인적으로 작품을 보니 마치 홍콩영화 중에서 느와르 장르를 소설로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스포츠카로 고속도로 위를 전력 질주하여 총을 발사하는 스타일은 미국 할리우드 스타일이나, 여자 주인공인 유나의 전투를 보면 오히려 홍콩영화에 더 가깝게 느낀다.

 

좁은 건물에 더러운 계단에서 보는 세상에서 미국식보단 차라리 홍콩식이 가깝게 느껴진 것이다. <블랙스틸 어쌔신>의 제목처럼 흑철의 살인자, 살인자를 의미하는 어쌔신은 미국 할리우드보단 오히려 홍콩이나 일본하고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객, 그 자객은 혼자이고, 세상과 싸우는 고독한 자다. 그들에게 조력자는 없고, 강력한 적들과 싸워 나가야 한다. 김월희 작가 작품에서 <중2병 데이즈>가 있는데, <중2병 데이즈>에서는 주인공 연오는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중2병 학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작품은 자신이 중2병 환자로 낙인이 찍힌 것을 주인공 자체가 인식하고 있으며, 그 인식 자체가 라이트노벨 자체가 중2병에 대한 내용인 만큼 세계관은 오히려 중2병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설정 자체는 작품 내의 화자인 주인공이 1인칭 시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스틸 어쌔신>은 중2병적인 요소를 매우 강하게 반영했다. 정의가 불의의 악이란 대결하여 결국 패배하여 모든 세상은 악으로 물들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서 정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정의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정의가 하나의 가치관으로 옳고 그릇된 것을 판단하여 그 정의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가치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정의라는 이름에는 철학적 가치가 뒤따르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나, 사실 현실에서 보는 정의라는 이름은 단지 자신들의 입맛과 상황에 적당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황된 명분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 즉 희망이 없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세계에서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라이트노벨에서 그런 설정은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암울한 현실에 영웅이 나타나 역경과 시련을 겪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거기서 마주치는 불의와 현실의 타협에 상처받고 때로는 좌절도 하나, 끝까지 밀고 간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신화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개봉되는 영화 <헤라클레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만약 악에 대해 악으로 처단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블랙스틸 어쌔신>에서 주인공인 유나와 레이는 악에 대해 빛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악으로 싸우는 모습이 나온다.

 

작품에서 암살 5대왕에서 가장 높은 자가 레이가 가진 칼을 생각하면서 그 칼에 대한 은근한 암시가 나온다. 왜 악은 악을 공격하는 것일까? <블랙스틸 어쌔신>에서 나오지만, 암살자 집단들이 암살행위를 하고 세상에 공포를 안겨주는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런데 그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영역이 어느 순간 가득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고착될 수밖에 없는 포화상태에 이른다. 유나는 처음에 악과 선의 이분법적인 대결에서 악이 이겼다고 한다. 하지만 악이 이겼다고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악이 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에 군림할 뿐이다.

 

그 군림하는 자들에게 밸런스라는 것이 존재한다. 왜 흑철이란 저주받은 검이 레이에게 잘못 배달되었지만, 처음부터 누가 유나에게 그 흑철을 배달해주었으며 그것은 어떤 이유로 하였는가? 유나는 세상에 자신을 도울 아군은 없고, 오직 혼자만 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그런 와중에 저주받은 검이 도착했다. 그 검은 세상의 모든 악과 적의를 품은 것이다. 악이 악으로 섬멸하는 것은 결국 그 악 자체 내부에서도 보이지 않은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흑철의 존재는 악에서도 하나의 시스템을 유지해주는 것과 같은 자동장치라고 생각한다.

 

파과점이라고 하는 일정 수위를 지나면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암살자 집단이 계속 활동을 하다보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공통된 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서로 자기 살을 깎아 먹게 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이런 유명한 속담이 존재한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공통된 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와 유나는 단순히 거대한 암살집단과 싸우겠지만, 암살집단 내부에서 가장 강한 자들만 골라 보내 싸운다면 간단하게 처리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정의라는 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져 있겠지만, 적어도 악이라고 불릴 자들도 그 나름에는 자신만의 정의와 가치가 있다. 악이란 존재가 추구하는 정의는 바로 자신들만의 이익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 현실에서 우리 인간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베푸는 이타적인 존재였는가? 나의 이익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나의 이익이 박탈당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모두 냉정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모인 집단세계에서는 그런 마음이 하나의 정의다.

 

<블랙스틸 어쌔신> 첫 장을 열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의 마지막 빛이라는 교만(驕慢)에 사로잡혀 싸우다가 어느새 깨닫는 거야. 나 역시 어둠과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이런 세계관에서 악이 이긴 세상이지만, 세상은 잘 돌아가고, 누군가 죽지만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런 세계가 이상하겠지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소 중2병 세계관이나 어떻게 보면 우리 현실도 이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고 스쳐가기에 중2병적인 세계관이 작품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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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 이 영화의 포스트를 보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왔다. 붉은 철근 앞에 보이는 한 여성, 붉은 드레스에 붉은 장갑까지 착용한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나의 페티시즘을 자극한다. 정열이 넘치는 붉은 색, 그것은 피와 같은 색이며, 프랑스의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박애도 의미한다. 그녀의 붉은 색은 정열과 피가 넘치며 또한 박애도 넘친다. 그녀 스스로 박애가 가득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넘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박애로 넘치는 이유는 그 욕망에 가려진 인간의 본능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박애롭게 보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부터 생각났다. 왜일까? 이미 포스터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자신만을 봐달라고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은 나로 하여금 그녀의 깊은 눈빛과 그 검은 머리와 붉은 장갑과 드레스에 모든 것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나의 성욕까지 사로잡았다. 그녀가 나온 영화는 그녀로 통한 현대사회에 연예인에 대한 미디어적인 욕망에서 그 부조리에 대해 폭로한다. 그 부조리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녀는 TV 앞에서 무조건 완벽한 여인이 되어야 했다.

 

드라마, CF, 모델 심지어 자기 가족까지도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이 있었다. 주인공 리리코가 유명인사가 될 때 리리코의 가족에게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리리코는 자신의 성형수술의 성공에서 자신의 여동생도 새로운 삶을 가기를 바란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무단한 현실이었다. 리리코의 기획사 사장은 리리코에 의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착복하고 있었다. 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말인가? 스펙타클이란 인간의 관계적인 여건에서 현실적인 인간관계보다 이미지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미지라는 것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처럼 실제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와 상관없이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다. 사실상 리리코의 모습을 스크린 안의 TV 속의 모습을 보면 정말 완벽하다. 미모의 그 완결성은 모든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고, 그녀의 잡지는 언제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재벌2세에게 구애를 받았다. 그녀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로 통해 모든 것을 사로잡은 것이다.

 

리리코의 모습이야 말로 완벽한 스펙타클이었다. 그 스펙타클이란 대중을 사로잡는 것에서 리리코의 존재야 말로 대중들이 바라는 신적 존재였다. 신이란 과거의 종교적인 한 완벽한 존재적 위치보단 차라리 TV의 연예인처럼 새롭게 숭배 받는 존재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미디어는 결국 정치적인 목적과 더불어 경제적인 요건도 중요하다. 그 경제적인 구조에서 리리코는 환상의 존재로 되어야 했고, 때로는 신과 찬양도 받아야 했다. 스포트라이트로 쏟아 치는 찬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는 그녀가 이미지로서 살아있는 여신이었다.

 

그러나 사실 카메라는 대부분은 남자의 손에 들려있고, 남자의 눈으로 보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 중에 하나 카메라의 눈은 남자이나, 그 카메라의 눈이 남자라는 것을 영화 내의 3인칭 카메라로 보고 있다. 영화감독이 나나카와 미카라는 여성이었다. 즉, 이 영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여자연예인이 어떻게 착취되고 망가져 가고 있는지 그 연예인이란 존재가 여성이란 점에서 외모와 관련된 자본주의 시장체계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그 비판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가지는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처음을 보면 리리코의 탄생이 나온다. 그녀는 붕대로 온 몸을 감긴 채로 점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데, 유방과 음부를 가린 채 푸는 장면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하게 만든다. 비너스의 탄생은 결국 최고의 미를 가진 아프로디테에 대한 것으로 미인의 탄생은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에 의해 생기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런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인간의 미에 대한 종교적 관념을 무시하는 미쟝젠 요소가 나온다. 그것은 리리코의 방의 장식이다. 일본 영화를 그렇게까지 많이 본 것은 아니나, 일본 여자감독을 보면 실사영상이든 애니메이션영상이든 모두 소품의 배치가 탁월하다는 점이다.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의 방을 잘 봐야 하는 이유에서 그녀의 방이 대부분 붉은 색이란 것과 동시에 천주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상이 보통과 다르다는 점이다.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의 종교는 알 수가 없다. 그녀의 방에 천주교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이 2가지 상을 보면 눈을 모두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이 탄생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는 태어나면서가 아니라 인조적으로 성형수술을 하여 재창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존재는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한 부정조차 부정하는 것에서 영화는 부정의 부정의 긍정이 아니라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영화 자체에서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 완벽한 리리코이나 그 리리코는 인간들의 욕망을 대표하는 신화적 존재다. 외모가 화려한 여성이 TV에 나와 대중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리리코의 이미지가 곧 일본 사회의 대표성이란 점이다. 리리코란 존재의 시뮬라크르는 결국 스펙타클로 전환된 것이다. 그런 욕망의 현상은 실재의 리리코를 대신하여 이미지라는 환상으로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다. 왜 그들은 그렇게 리리코에게 열광할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본연의 욕망, 즉 자신에 대한 욕망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대중문화에 내재된 전체적인 흐름에 자신을 맡기려고 하는 동물화적인 모습이다. 자크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리리코에 대한 욕망은 결국 대중문화에서 나오는 끊임없이 미디어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인간상이다. 문제는 그 본래의 인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망가지는 것이다. 리리코의 여동생을 본다면, 분명 리리코는 미인은 커녕 아주 못난 얼굴과 외모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녀가 처음 스포트라이트에 의해 유명해지자 그녀가 뒤로 하는 짓은 추악한 본능이었다. 어느 잘생긴 남자와 무대대기실에서 갑자기 섹스를 하고, 자기의 인기가 고즈에의 의해 위기를 받자, 그 스트레스로 인해 변태적인 섹스를 요구한다.

 

자신의 유능한 매니저인 하다의 남자친구를 보는 순간, 하다가 보는 앞에서 하다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하다에게 명령하여 하다와 하다의 남자친구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하도록 명령한다. 물론 그 이전에 하다에 대해 동성연애를 하는 리리코에게 그녀는 인간의 성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일탈된 행위로서 자신이 유지하고자 하는 완벽함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스트레스에 대한 기제적 반응이 결국 리리코로 하여금 변태적인 성적 도착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그것은 코즈에 대한 테러와 마약투여까지 실시한다.

 

그녀가 그렇게 비뚤어지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이다. 그것을 강조하고 마치 그런 사회적 구조를 비웃듯이 그녀가 선전하는 아이스크림 선전이 인상 깊다. 마치 남자의 성기인 것처럼 보이는 빨간 아이스 바를 핥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애무하는 펠라치오처럼 보인다. 처음에 리리코가 하다가 추후에는 코즈에가 한다. 대중문화는 리리코가 성형미인이든지 혹은 코즈에가 자연미인이든지 상관 없다. 단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신데렐라가 필요하다.

 

신데렐라의 한계성은 그녀의 젊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그 젊음을 가지고 있어도 오래가지 않았다. 리리코의 데뷔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코즈에의 등장은 결국 대중들이 사로잡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부응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기 여배우는 철저하게 도구화 된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리리코가 방소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생일 이벤트에서 이상한 나비가 보이면서 결국 기절하는 모습이 나온다. 기절과 동시에 코즈에에게 해를 가하려는 하다의 모습은 몽타주로 나온 듯이 상반된다.

 

그리고 그 몽타주의 결말은 리리코의 패배이고, 그녀는 결국 많은 마이크를 앞에 선 데스크에 앉아 카메라만 가득한 무대 밖을 본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인간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고 단지 카메라만 눈 부신다. 리리코 스스로 자신의 눈에 칼을 찌르고 있을 때, 카메라가 순간 멈추나 아무도 그녀의 안전이나 위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리리코가 마약중독에 빠진 여배우라는 특종만 파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리리코는 눈물 대신 아주 빨간 피 눈물을 흘린다.

 

이 작품의 미쟝센의 조건에서 붉은색이 아주 중요하다. 붉은 색은 박애적인 의미도 되나, 결국 피를 의미하고, 그 피를 만든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리리코와 그 욕망의 조류에 타고 싶은 리리코의 욕망마저 이 시대의 도구에 불과했다. 이미지가 매개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리리코는 아주 뛰어나고 우월한 여배우로 알았으나 최후에는 버려지고 자신을 대체할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들 역시 물화되어버린 도구가 되는 것이다. 리리코의 성적욕망에 대한 부분에서 리리코 자신이 재벌과 하다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있으나, 위에서 지적하다시피 카메라를 기본적으로 남자의 눈이다.

 

그러한 남자의 눈으로 가득한 카메라 세계 이외에 욕망의 세계는 아주 심연적인 공간이 있다. 마지막에 리리코가 사라지고, 그것도 모두의 기억에 사라질 무렵에 코즈에는 무대촬영을 마치고 뒤풀이를 간다. 과격한 쇼가 이루어진 어느 클럽에서 코즈에는 리리코의 매니저인 하다를 본다. 하다를 보고 뒤따라 간 곳에는 리리코가 도도하게 미소짓고 있다. 그녀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리리코는 단순히 성형미인에 대한 것보단 성형미인으로 새로 태어나 대중문화에 등장한 신데렐라다.

 

대중들의 욕망이 미디어로 통해 나오는 것만 아니라 그 이면을 자신이 지배하고 싶다는 것이다. 리리코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이미지로 통해 하나의 소비기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뒤 세계로 보이는 클럽은 자신이 하나의 숨은 여왕이었다. 대중들이 항상 열광하는 곳은 이미지로 통해 욕망이 자신에게 투영된다면, 클럽에서 자신이 실제적으로 욕망을 조장하는 곳이다. 그래서 영화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가기보다는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로테스크한 요소에서 일관적으로 리리코의 시술 장면과 부작용, 하다와의 섹스관계이다.

 

특히 하다와의 섹스에서 리리코는 그저 성적욕망을 여성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거대한 기대의식과 코즈에에 대한 거세공포로 인한 방어기제다. 하다에게 성적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서 리리코가 흥분을 느꼈을 뿐이다. 자신의 음부를 하다에게 핥아 라고 명령하는 리리코와 그런 리리코의 음부를 핥는 하다, 리리코의 명령에 의해 같이 망가지는 하다와 하다의 남자친구의 모습에서 우리는 욕망이란 것이 결국 상대방에 의해 같이 심연의 세계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리리코의 어긋난 모습에 대해 그녀를 시술한 의사들의 대화가 기가 막힌다. 리리코의 수술에서 리리코의 몸은 귀와 눈, 그리고 음부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가 모두 제거되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대체되었다. 그 대체된 몸은 시체의 살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리리코의 살은 검게 부패되어가고, 그런 시술을 받을수록 자신은 더욱 추하게 변해간다. 그런 지저분한 모습은 결국 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르주아에 대해 해보자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결국 돈을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은 부정한 세력이 겉으로 나오지 않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에 대해 리리코로 통해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준다.

 

재벌2세에 대한 리리코의 연애 루머에서 보는 것에서 재벌2세가 결국 톱스타 미녀를 차지하게 되고, 결국 그 미녀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고깃덩어리 사실에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모두 거짓이고 속임수라는 것을 폭로한다. 물론 리리코 역을 맡은 사와지리 에리카는 본래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리리코의 연기에서 인간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세계와 달리 인간 본연의 실제성에서 이중적이고 더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리리코에 대해 더럽다고 하나, 그 더러움을 만든 것은 대중의 욕망이다.

 

대중의 욕망으로 탄생한 리리코, 결코 대중들은 자신들에 대한 문제보다 리리코에 대한 욕망과 가십거리만 찾을 것이고, 거기에 대체되는 또 다른 리리코만 찾을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러지 아니한가? 스펙타클의 전복은 또 다른 스펙타클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해 절규함>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기대감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리리코의 신화를 창조하고 파괴한다. 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대중이란 점이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이기에 끝도 없는 반복된 이야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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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조가 살던 시대적 배경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 및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는 이렇게 말했다.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대사상의 연구요, 조선 혼의 명암, 또는 전 조선의 흥망쇠멸에 관한 연구”라고 말이다. 또 일본의 학자들조차 “다산은 조선의 영광”이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살던 조선 후기는 곧 조선의 정치, 철학, 문학, 경제 등의 부흥이 일어난 르네상스와 같은 시기였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살던 시절은 정조임금이 군주로 있었던 시기고,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해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시기다. 따라서 <역린>이란 영화를 봤을 때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정약용 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때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회의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영화 <역린>에서 이런 역사적 조건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정조가 펼친 탕평책과 그 탕평책을 시도한 영조,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화 <역린>의 모티프와 세계관을 만들었다. 더 올라가, 영조 한참 이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을 가지고 노론과 남인이 대립했다. 남인은 조대비의 상복을 3년으로 하고, 노론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정치적 논쟁으로 휘말린 것이 예송논쟁이고, 이 논쟁으로 인해 노론과 남인은 피로 피를 씻는 숙청을 겪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배 내지 사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노론이 득세하고, 그 노론은 계속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영조시대에는 왕도 위협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2. 사도세자와 정조

보통 조선왕가의 군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양반가문의 규수로 선택하나,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었고, 그것이 하나의 콤플렉스로 된 영조는 평생 노론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다. 그것에서 왕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노론의 반대세력인 남인과 소론을 등용해야 했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런 남인세력 중에서 젊고 개혁적인 사대부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사도세자의 행동을 노론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영조는 정치적 힘이라는 대립관계에서 노론을 따르게 해야 했고, 사랑하는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굶주림과 목마름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정조는 영조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정치적 권력 관계에서 노론에 대한 복수심과 더불어 노론이 득세하면 조선이란 국가가 위험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노론이 예송논쟁에서 상복 1년의 착용과 남인이 상복 3년의 착용은 효종이란 군주에 대한 군주로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군주의 권력을 지지하는 남인, 신하의 권력을 지지하는 노론의 대립관계가 결국 붕당정치에서 대립관계를 보였고, 그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에서도 대립관계를 보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보는 벽파, 그의 죽음이 잘못된 것으로 보는 시파로 분리된다.

 

3. 남인과 노론

영화 <역린>은 그런 역사적인 조건과 흐름에 따라 스토리가 시작한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처음 정권을 잡던 시기, 정조에 대한 암살사건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대한 미수로 불발되었고, 그 사건에 대한 상상적인 스토리텔링을 불어 넣은 것이 <역린>이다. 실제로 정조는 홍국영과 연합하여 노론의 많은 세력을 죽였고, 후에는 홍국영도 죽이게 한다. 작품 내에 정순황후가 영조가 늙은 나이에 들어온 후처로, 그녀는 노론의 실세 중심이었고, 그녀의 가족은 정조에 의해 숙청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에서 남인의 씨를 모조리 마르게 한 여인이다.

 

그 정도로 당시 남인과 노론의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영화 <역린>에서 그런 모습을 잘 드러냈고 그 설정관계를 보이기 위해 왕의 강연을 하는 많은 신화들이 정조를 우습게보고 말장난을 치는 것이 나온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 위로 올라가는 출연진에서 중요한 2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하나는 심환지와 하나는 번암 체제공이다. 체제공은 조선의 3정승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영조에게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신하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충신이고, 정조에게는 정치적 지원군이고, 사도세자에게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주는 신하였다.

 

체제공의 등장에서 정조와의 친밀한 관계가 어전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에 대한 강조성이 없었다. 영화는 분명 정조 VS 노론의 형태이고, 그것은 정조 & 남인 VS 노론의 형태이어야 했다. 작품의 세계관 설정에서 다소 아쉬운 이유는 노론의 암살 작전에만 치중했지, 그것에 대한 반대전략을 제대로 보여주기보단 그저 정조와 홍국영이 대장군을 설득하거나 궁중 호위대와 암살대의 싸움에 치중하려는 것으로 정치적 대립관계를 강조한 것이 아쉽다. 소설 <역린>과 영화 <역린>의 차이는 자세히 알 수 없겠지만, 이런 갈등이 있었기에 <역린>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4. <역린>과 정조

정조는 어린 시절에 암살의 위험에 시달렸고, 새벽에 첫 닭이 울 때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항상 마음에 독을 품고 있었으며, 그 어떤 문신보다 학문이 출중하고, 왜만한 무신과 대등할 정도로 무술에 능숙했다. 실제 정조는 활을 잘 쏘았으며, 신하와 강연할 때도 자신이 직접 시험을 볼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너무 뛰어났기에 노론의 입장에서 계속 견제를 받아야 했다. 영화 <역린>에서 카메라 앵글이 참 중요한데, 이른바 편집과 편집이란 몽타주적인 기법보단, 영화는 미쟝센이란 카메라의 구도와 명암, 소품과 인물의 배치로서 상황을 보여준다.

 

정조가 나오는 장면에서 close-up이 자주 등장하여 정조의 심리적 상황에 대해 초점을 보여주었고, 정순황후를 비추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정면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보는 low-angle로 드러낸다. 그것은 밑에서 위로 보게 하여 피사체의 대상인물이 작품에서 권위가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다. 정조가 정순황후를 알현할 때 그녀는 발을 정돈하고 있었는데, 정조가 발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있었으며, 주변 궁녀들에게 그의 목숨을 가지고 농담 던지는 것도 정조의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역린>과 정순황후

하지만 암살이 실패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정조의 관점으로 정순황후가 스스로 유폐되는 것을 선택할 때 over shoulder shot(어깨너머로 보이는)로 연출한다. 카메라의 연출이 중요한 것은 정조와 정순황후의 정치적 대립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카메라의 대립관계는 정순황후 서재에 붙잡힌 혜경궁 홍씨인데, 정순황후의 자리는 높은 자리에서 곰방대를 피우고, 혜경궁 홍씨는 낮은 자리에서 결박당한 채 붙잡혀 있다. 카메라가 배우와 사물의 배치, 그리고 등장인물의 조명 등에서 그들의 상황과 인물의 속성을 보여준다.

 

살인청부업을 양성하는 노파가 처음 등장할 때 빛의 굴절을 이용하여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의 대비가 강하다. 영화에서 그가 위험한지 그가 얼마나 주도하고 있는지를 빛의 명암 대비로 보여준다. 또한 공간적인 요소로도 보여준다. 정조가 제대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존현각이고, 그의 처소는 군주의 자리를 생각하면 너무 초라했었다. 하지만 정순황후의 처소는 항상 밝은 빛이 들고 있고, 그녀는 자신의 권위를 잘 보여주기 위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맨발을 드러내고,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데 따뜻한 물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어야 할 정조와 너무 대비된 상황이었다.

 

6. 정조 암살 미수

정조는 국가의 왕이지만 왕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바로 정순황후와 그녀의 주변세력인 노론에 의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현실이었다. 그리고 <역린>은 영화와 소설로서 노론세력에 대항하는 정조를 보여준다. 군사와 인사권을 모두 노론이 잡고 있었고, 그들은 이권으로 결탁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한다. 남인과 노론은 각자의 세력들에게 혼인관계를 보내 친척관계와 더불어 학문적 스승과 제자로 유지한다. 그런 정치적 세력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단순히 누구 하나만 제거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단단한 카르텔을 해체해야지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

 

정조 암살사건이 미수하였더라도 한 나라의 왕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바로 신하들의 권력이 너무 강력했다는 점이다. 정조가 살인청부자 보스를 칼로 베는데, 그 보스가 말한다. 내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이다. 정치란 사실 어느 국가와 사회를 위해 조율 및 조정하는 것으로 정치를 펼치는 것은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여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영위할 수 있어야 해야 하나, 정치란 결정해야 하는 권력자가 필요하기에 그 입장과 상황에 따라 특정 세력에게 이권을 부여하게 된다. 이권의 유지는 결국 그 이권을 가져가는 만큼 누군가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 피해자는 1차는 왕과 그 반대세력이겠지만, 최종적으로 백성이어야 했다. 국가예산이 부족한데 계속 낭비하여 세금을 거두어야 하고, 세금을 계속 거두면 백성의 생계는 어려워지며, 백성의 생계가 어려워지며 민심이 흉흉하게 된다. 그런 상황이 누적되면 범죄가 일어나고 역모가 발생하며 나라의 변이 생기고 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관이 세워야 하나, 올바른 정치는 윤리도덕적 가치보단 자신들의 이익이 곧 도덕적인 가치로 변하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정조와 노론의 대립관계는 계속되는 것이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노론에서는 정조를 죽이는 편이 유리한 것이다. 어차피 노론의 사람인 정순황후가 정조의 할마마마로 있었고, 그녀가 왕의 책봉을 결정지을 수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왕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었다.

 

7. 영화의 명장면

이런 대립관계에 기반 하여 영화 <역린>은 명장면이 등장한다. 서로 반대되는 세력이 충돌이 일어날 때 찰나의 순간이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정조와 조정석의 대결, 암살집단과 호위무사의 대결, 홍국영과 구장군의 대화 등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보여준다. 또한 카메라에서 처음에는 왕궁을 멀리서 촬영하는 익스트림 롱 샷 → 롱 샷 → 풀 샷 → 클로즈업으로 연결되는데, 표적은 정조라는 것을 설명하고, 존현각이 유일한 정조의 공간이란 것을 보여준다. 실제 존현각의 정조는 적의 화살을 피하면서 적을 활로 공격하기 위해 문과 문 사이로 적을 교란한다.

 

위치적인 전략에서 정조는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취한 것이다. 생과 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조의 전투는 좋은 연출이었다. 그리고 정조가 조정석과 대결하면서 슬로우 모션을 이용하여 긴장감을 드높이고, OST와 주변배경소음을 이용하여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카메라의 영상구조가 빠르지 않고 느리므로 작품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는 수단은 소리와 카메라의 명암, 그리고 클로즈업과 롱 샷으로 처리한 것이다. 빗속의 대결과 위기의 순간은 바로 카메라 앵글과 OST로서 보여준 것이다.

 

8. 작품의 한계성

영화 <역린>은 주인공 정조를 맡은 현빈보다 주변의 조연들의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서 현빈의 모습이 많이 가려진 것이 한계성으로 보였다. 액션물이나 혹은 일반적인 배역이라면 어렵지 않으나 사극이란 특유의 장르이기에 정조의 현빈과 정순황후의 한지민의 한계성은 보일 수밖에 없다. 어느 특정인물을 겨냥하고 오는 관객에게 다소 좋은 서비스가 초반에 나왔고, 물론 그것은 정조가 평소 단련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모습이기도 하나, 캐릭터를 이용한 영화제작진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주가 작은 것으로부터 계속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분명하나, 일일이 군주가 동으로 서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작품의 전개가 산만해질 수 있다. 마지막에 정조가 백마를 탄 상태로 풀 샷으로 보여주나, 그것은 차라리 풀 샷보단 정조가 높은 곳에서 궁과 궁 너머의 한양을 over shoulder shot로 본다면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더 보여주기 좋았지 않았나 싶다. 작품은 카메라의 구도로서 모든 것을 잡아내려고 했기에 그런 부분이 아쉬웠다. 또한 상황적 조건이 너무 억지스러운 것과 부드럽지 못한 것도 그렇다. 등장인물마다 과거의 회상이 많이 차지한 점에서 작품의 세계관을 설명하기보단 그 개인의 입장만 밝히고 있었다.

 

영화제목이 <역린>이란 말처럼 역린(逆鱗)이란 단어가 나온 만큼 그 대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정조가 정순황후에게 말하는 피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단 그 피바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제목과 더 어울렸을 것이다. 아마 이것은 영화자체보다는 영화 시나리오근본이 되는 소설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역린의 대가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하나의 개연성을 더 강조한 점을 단지 살인청부업자의 보스를 참하는 것이 마무리 짓는 것은 <역린>이란 제목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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