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에 이 영화의 포스트를 보는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왔다. 붉은 철근 앞에 보이는 한 여성, 붉은 드레스에 붉은 장갑까지 착용한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나의 페티시즘을 자극한다. 정열이 넘치는 붉은 색, 그것은 피와 같은 색이며, 프랑스의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박애도 의미한다. 그녀의 붉은 색은 정열과 피가 넘치며 또한 박애도 넘친다. 그녀 스스로 박애가 가득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넘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박애로 넘치는 이유는 그 욕망에 가려진 인간의 본능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박애롭게 보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부터 생각났다. 왜일까? 이미 포스터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자신만을 봐달라고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은 나로 하여금 그녀의 깊은 눈빛과 그 검은 머리와 붉은 장갑과 드레스에 모든 것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나의 성욕까지 사로잡았다. 그녀가 나온 영화는 그녀로 통한 현대사회에 연예인에 대한 미디어적인 욕망에서 그 부조리에 대해 폭로한다. 그 부조리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녀는 TV 앞에서 무조건 완벽한 여인이 되어야 했다.

 

드라마, CF, 모델 심지어 자기 가족까지도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이 있었다. 주인공 리리코가 유명인사가 될 때 리리코의 가족에게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리리코는 자신의 성형수술의 성공에서 자신의 여동생도 새로운 삶을 가기를 바란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무단한 현실이었다. 리리코의 기획사 사장은 리리코에 의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착복하고 있었다. 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말인가? 스펙타클이란 인간의 관계적인 여건에서 현실적인 인간관계보다 이미지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미지라는 것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처럼 실제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와 상관없이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다. 사실상 리리코의 모습을 스크린 안의 TV 속의 모습을 보면 정말 완벽하다. 미모의 그 완결성은 모든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고, 그녀의 잡지는 언제나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재벌2세에게 구애를 받았다. 그녀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로 통해 모든 것을 사로잡은 것이다.

 

리리코의 모습이야 말로 완벽한 스펙타클이었다. 그 스펙타클이란 대중을 사로잡는 것에서 리리코의 존재야 말로 대중들이 바라는 신적 존재였다. 신이란 과거의 종교적인 한 완벽한 존재적 위치보단 차라리 TV의 연예인처럼 새롭게 숭배 받는 존재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미디어는 결국 정치적인 목적과 더불어 경제적인 요건도 중요하다. 그 경제적인 구조에서 리리코는 환상의 존재로 되어야 했고, 때로는 신과 찬양도 받아야 했다. 스포트라이트로 쏟아 치는 찬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는 그녀가 이미지로서 살아있는 여신이었다.

 

그러나 사실 카메라는 대부분은 남자의 손에 들려있고, 남자의 눈으로 보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 중에 하나 카메라의 눈은 남자이나, 그 카메라의 눈이 남자라는 것을 영화 내의 3인칭 카메라로 보고 있다. 영화감독이 나나카와 미카라는 여성이었다. 즉, 이 영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여자연예인이 어떻게 착취되고 망가져 가고 있는지 그 연예인이란 존재가 여성이란 점에서 외모와 관련된 자본주의 시장체계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그 비판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가지는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처음을 보면 리리코의 탄생이 나온다. 그녀는 붕대로 온 몸을 감긴 채로 점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데, 유방과 음부를 가린 채 푸는 장면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하게 만든다. 비너스의 탄생은 결국 최고의 미를 가진 아프로디테에 대한 것으로 미인의 탄생은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에 의해 생기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런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인간의 미에 대한 종교적 관념을 무시하는 미쟝젠 요소가 나온다. 그것은 리리코의 방의 장식이다. 일본 영화를 그렇게까지 많이 본 것은 아니나, 일본 여자감독을 보면 실사영상이든 애니메이션영상이든 모두 소품의 배치가 탁월하다는 점이다.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의 방을 잘 봐야 하는 이유에서 그녀의 방이 대부분 붉은 색이란 것과 동시에 천주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상이 보통과 다르다는 점이다.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의 종교는 알 수가 없다. 그녀의 방에 천주교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이 2가지 상을 보면 눈을 모두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이 탄생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는 태어나면서가 아니라 인조적으로 성형수술을 하여 재창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존재는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한 부정조차 부정하는 것에서 영화는 부정의 부정의 긍정이 아니라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영화 자체에서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 완벽한 리리코이나 그 리리코는 인간들의 욕망을 대표하는 신화적 존재다. 외모가 화려한 여성이 TV에 나와 대중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리리코의 이미지가 곧 일본 사회의 대표성이란 점이다. 리리코란 존재의 시뮬라크르는 결국 스펙타클로 전환된 것이다. 그런 욕망의 현상은 실재의 리리코를 대신하여 이미지라는 환상으로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다. 왜 그들은 그렇게 리리코에게 열광할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본연의 욕망, 즉 자신에 대한 욕망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대중문화에 내재된 전체적인 흐름에 자신을 맡기려고 하는 동물화적인 모습이다. 자크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리리코에 대한 욕망은 결국 대중문화에서 나오는 끊임없이 미디어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인간상이다. 문제는 그 본래의 인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망가지는 것이다. 리리코의 여동생을 본다면, 분명 리리코는 미인은 커녕 아주 못난 얼굴과 외모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녀가 처음 스포트라이트에 의해 유명해지자 그녀가 뒤로 하는 짓은 추악한 본능이었다. 어느 잘생긴 남자와 무대대기실에서 갑자기 섹스를 하고, 자기의 인기가 고즈에의 의해 위기를 받자, 그 스트레스로 인해 변태적인 섹스를 요구한다.

 

자신의 유능한 매니저인 하다의 남자친구를 보는 순간, 하다가 보는 앞에서 하다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하다에게 명령하여 하다와 하다의 남자친구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하도록 명령한다. 물론 그 이전에 하다에 대해 동성연애를 하는 리리코에게 그녀는 인간의 성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일탈된 행위로서 자신이 유지하고자 하는 완벽함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스트레스에 대한 기제적 반응이 결국 리리코로 하여금 변태적인 성적 도착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그것은 코즈에 대한 테러와 마약투여까지 실시한다.

 

그녀가 그렇게 비뚤어지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이다. 그것을 강조하고 마치 그런 사회적 구조를 비웃듯이 그녀가 선전하는 아이스크림 선전이 인상 깊다. 마치 남자의 성기인 것처럼 보이는 빨간 아이스 바를 핥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애무하는 펠라치오처럼 보인다. 처음에 리리코가 하다가 추후에는 코즈에가 한다. 대중문화는 리리코가 성형미인이든지 혹은 코즈에가 자연미인이든지 상관 없다. 단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신데렐라가 필요하다.

 

신데렐라의 한계성은 그녀의 젊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그 젊음을 가지고 있어도 오래가지 않았다. 리리코의 데뷔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코즈에의 등장은 결국 대중들이 사로잡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부응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기 여배우는 철저하게 도구화 된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리리코가 방소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생일 이벤트에서 이상한 나비가 보이면서 결국 기절하는 모습이 나온다. 기절과 동시에 코즈에에게 해를 가하려는 하다의 모습은 몽타주로 나온 듯이 상반된다.

 

그리고 그 몽타주의 결말은 리리코의 패배이고, 그녀는 결국 많은 마이크를 앞에 선 데스크에 앉아 카메라만 가득한 무대 밖을 본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인간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고 단지 카메라만 눈 부신다. 리리코 스스로 자신의 눈에 칼을 찌르고 있을 때, 카메라가 순간 멈추나 아무도 그녀의 안전이나 위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리리코가 마약중독에 빠진 여배우라는 특종만 파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리리코는 눈물 대신 아주 빨간 피 눈물을 흘린다.

 

이 작품의 미쟝센의 조건에서 붉은색이 아주 중요하다. 붉은 색은 박애적인 의미도 되나, 결국 피를 의미하고, 그 피를 만든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리리코와 그 욕망의 조류에 타고 싶은 리리코의 욕망마저 이 시대의 도구에 불과했다. 이미지가 매개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리리코는 아주 뛰어나고 우월한 여배우로 알았으나 최후에는 버려지고 자신을 대체할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들 역시 물화되어버린 도구가 되는 것이다. 리리코의 성적욕망에 대한 부분에서 리리코 자신이 재벌과 하다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있으나, 위에서 지적하다시피 카메라를 기본적으로 남자의 눈이다.

 

그러한 남자의 눈으로 가득한 카메라 세계 이외에 욕망의 세계는 아주 심연적인 공간이 있다. 마지막에 리리코가 사라지고, 그것도 모두의 기억에 사라질 무렵에 코즈에는 무대촬영을 마치고 뒤풀이를 간다. 과격한 쇼가 이루어진 어느 클럽에서 코즈에는 리리코의 매니저인 하다를 본다. 하다를 보고 뒤따라 간 곳에는 리리코가 도도하게 미소짓고 있다. 그녀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리리코는 단순히 성형미인에 대한 것보단 성형미인으로 새로 태어나 대중문화에 등장한 신데렐라다.

 

대중들의 욕망이 미디어로 통해 나오는 것만 아니라 그 이면을 자신이 지배하고 싶다는 것이다. 리리코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이미지로 통해 하나의 소비기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뒤 세계로 보이는 클럽은 자신이 하나의 숨은 여왕이었다. 대중들이 항상 열광하는 곳은 이미지로 통해 욕망이 자신에게 투영된다면, 클럽에서 자신이 실제적으로 욕망을 조장하는 곳이다. 그래서 영화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가기보다는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로테스크한 요소에서 일관적으로 리리코의 시술 장면과 부작용, 하다와의 섹스관계이다.

 

특히 하다와의 섹스에서 리리코는 그저 성적욕망을 여성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거대한 기대의식과 코즈에에 대한 거세공포로 인한 방어기제다. 하다에게 성적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서 리리코가 흥분을 느꼈을 뿐이다. 자신의 음부를 하다에게 핥아 라고 명령하는 리리코와 그런 리리코의 음부를 핥는 하다, 리리코의 명령에 의해 같이 망가지는 하다와 하다의 남자친구의 모습에서 우리는 욕망이란 것이 결국 상대방에 의해 같이 심연의 세계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리리코의 어긋난 모습에 대해 그녀를 시술한 의사들의 대화가 기가 막힌다. 리리코의 수술에서 리리코의 몸은 귀와 눈, 그리고 음부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가 모두 제거되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대체되었다. 그 대체된 몸은 시체의 살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리리코의 살은 검게 부패되어가고, 그런 시술을 받을수록 자신은 더욱 추하게 변해간다. 그런 지저분한 모습은 결국 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르주아에 대해 해보자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결국 돈을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은 부정한 세력이 겉으로 나오지 않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에 대해 리리코로 통해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준다.

 

재벌2세에 대한 리리코의 연애 루머에서 보는 것에서 재벌2세가 결국 톱스타 미녀를 차지하게 되고, 결국 그 미녀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고깃덩어리 사실에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모두 거짓이고 속임수라는 것을 폭로한다. 물론 리리코 역을 맡은 사와지리 에리카는 본래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리리코의 연기에서 인간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세계와 달리 인간 본연의 실제성에서 이중적이고 더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리리코에 대해 더럽다고 하나, 그 더러움을 만든 것은 대중의 욕망이다.

 

대중의 욕망으로 탄생한 리리코, 결코 대중들은 자신들에 대한 문제보다 리리코에 대한 욕망과 가십거리만 찾을 것이고, 거기에 대체되는 또 다른 리리코만 찾을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러지 아니한가? 스펙타클의 전복은 또 다른 스펙타클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해 절규함>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기대감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리리코의 신화를 창조하고 파괴한다. 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대중이란 점이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이기에 끝도 없는 반복된 이야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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