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슬롭스키(Kieslowski)의 세 가지의 색은 아주 유명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색이란  '자유·평등·박애'를 의미하는 블루, 화이트. 레드의 의미다. 프랑스 국기를 보면 삼색기가 같은 면적을 가지고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프랑스의 상징이면서도 프랑스의 가치이기도 하다. 물론 프랑스 모두가 저런 자유주의, 평등사상, 박애정신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나, 17897월 프랑스대혁명이 삼색기로부터 1830, 1848, 1871년에도 프랑스의 삼색기의 정신은 유효하다. 아니라면 19685월 프랑스 혁명 그렇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프랑스인이 생각하는 삼색기의 정신처럼 키에슬롭스키(Kieslowski)의 세 가지의 색에서도 저런 정신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형식주의 내지 상징적인 요소로서 보여주는 것보다는 어느 인간들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매우 특별하다고 볼 수 없으며, 단지 조금 다른 누군보다 특별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블루에서 주인공 줄리는 어느날 남편과 딸하고 같이 도로를 달리는 도중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줄리 한 사람이었다. 줄리는 자신의 가족이 죽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정부는 남편의 아이마저도 임신하였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이 사라지고, 그 가족과 함께 나눈 추억마저 배신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줄리는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조용히 혼자 살려던 줄리에게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감을 느끼게 되면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자유는 혼자만의 자유이지, 그 자유 안에서 고독과 방랑이라는 이름까지 얻는다.

 

인간의 자유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나, 태어나면서사회가 있기에 그 사회에 의해 구속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줄리를 보면 루소의 자연주의적 사상에 따라 그녀는 인간 원초적인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자유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독신생활은 오히려 슬프고 외로우며 때로는 낯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보면 어느 푸른 수영장에 혼자 빠지는 줄리를 보거나 혹은 혼자 넓은 집에 푸른색 상들리에 조명을 받는 그녀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푸른 색으로 물든 수영장에 혼자 빠지는 줄리의 모습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처럼 보이나 그것으로 통해 진실한 자유는 볼 수 없었다. 어두운 밤에 방에서 푸른 상들리애 조명이 비추지만 그것 역시 자유보다는 고립에 가까워 보였다. 블루라는 하늘색은 바다와 같고 하늘과 같은 색이다.

 

바다와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인간은 그저 자연 속에 하나이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위대하다. 하지만 바다와 하늘은 우리 인간 모두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므로 모두 인간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 혼자라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서로 협조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대하여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인간관계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것이다. 아무리 줄리가 모든 것을 체념해도 그녀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줄리가 느낀 세상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분명히 자유이다. 때로는 그런 자유가 남에게 이타적인 가치로 돌아온다. 작품에서 시골이 아니라 도심지 작은 아파트에 살 때 아파트 주민들이 어느 서명서를 줄리에게 건넨다. 아파트 한 가구에 어느 젊은 여성이 사는데, 그녀는 온전한 직업이 아니라 성인클럽의 쇼걸이란 이유이기 때문이다. 줄리가 그녀의 퇴거를 원하면 그녀는 집에서 내쫓겨 갈 곳이 없어지게 되나, 줄리는 세상과의 단절로 인해 그녀가 무슨 직업을 가지든 말든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다며, 서명을 거부한다. 나중에 그 젊은 여자가 찾아와 줄리와 같이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서 대화를 하고, 그 여자는 줄리에게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한다.

 

그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이 여기서 일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에는 별로 슬프지 않지만,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고 있을 대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얼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자유의지가 있고, 직업의 선택과 유지에서 천하든 귀하든 그 선택자의 자유고 책임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냉소는 너무 슬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줄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과 자신의 남편의 친구가 사실 줄리를 좋아하던 것이다.

 

그는 계속 줄리에게 구원했고, 작곡가인 남편의 악보를 가지고 와서 다시 작업을 하여 줄리와 같이 완성시킨다. 남편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모든 흔적을 지우려던 줄리, 세상과의 단절과 체념을 원한 그녀에게 그의 등장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다. 본 작품은 19세 미만이라 다소 성적묘사(그런다고 노출이 드러나지 않는다)가 나오는데, 줄리와 그가 죽은 남편의 악보작업을 마치고 침대에서 서로 사랑을 나눌 때, 그녀는 이때까지 느끼지 못한 인생의 행복함을 느낀다. 어찌보면 자유라는 것은 혼자만이 고립되어 타인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같이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어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유라는 것은 단지 그 상태가 독단적이어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이면서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의 시민에게 연설하기를 자유라는 것은 혼자만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야 비로소 자신도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군가 의지하고 서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계약적인 요건에 따라 구속당할 수 있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구속과 억압이 시작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서로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 정치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대한 포용력은 어디까지 있을까? 줄리는 남편의 정부에게 찾아갔을 때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던 딸은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남편이 바람핀 여자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사실이다. 남편의 정부는 줄리에게 매우 미안하다고 하나, 자신의 뱃속에 아이에 대해 줄리에게 자비를 구하려 한다. 자유의 포용력에서 아무리 남편이 바람피우고, 그 남편에게 사과와 해명조차 듣지 못했지만, 새로 자라나는 어린 생명에겐 아무 죄가 없다. 그런 생명조차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 부정하게 태어나더라도 생명자체는 천부인권을 보장받을 자유, 그것이 블루에서 말할 수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물론 기본적인 자유는 고립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교감이란 사실은 중요하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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