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조가 살던 시대적 배경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 및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는 이렇게 말했다.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대사상의 연구요, 조선 혼의 명암, 또는 전 조선의 흥망쇠멸에 관한 연구”라고 말이다. 또 일본의 학자들조차 “다산은 조선의 영광”이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살던 조선 후기는 곧 조선의 정치, 철학, 문학, 경제 등의 부흥이 일어난 르네상스와 같은 시기였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살던 시절은 정조임금이 군주로 있었던 시기고,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해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시기다. 따라서 <역린>이란 영화를 봤을 때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정약용 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때 정약용 선생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회의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영화 <역린>에서 이런 역사적 조건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정조가 펼친 탕평책과 그 탕평책을 시도한 영조,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화 <역린>의 모티프와 세계관을 만들었다. 더 올라가, 영조 한참 이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을 가지고 노론과 남인이 대립했다. 남인은 조대비의 상복을 3년으로 하고, 노론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정치적 논쟁으로 휘말린 것이 예송논쟁이고, 이 논쟁으로 인해 노론과 남인은 피로 피를 씻는 숙청을 겪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배 내지 사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노론이 득세하고, 그 노론은 계속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영조시대에는 왕도 위협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2. 사도세자와 정조

보통 조선왕가의 군주는 자신의 어머니가 양반가문의 규수로 선택하나,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었고, 그것이 하나의 콤플렉스로 된 영조는 평생 노론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다. 그것에서 왕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노론의 반대세력인 남인과 소론을 등용해야 했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런 남인세력 중에서 젊고 개혁적인 사대부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사도세자의 행동을 노론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영조는 정치적 힘이라는 대립관계에서 노론을 따르게 해야 했고, 사랑하는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굶주림과 목마름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정조는 영조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정치적 권력 관계에서 노론에 대한 복수심과 더불어 노론이 득세하면 조선이란 국가가 위험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노론이 예송논쟁에서 상복 1년의 착용과 남인이 상복 3년의 착용은 효종이란 군주에 대한 군주로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군주의 권력을 지지하는 남인, 신하의 권력을 지지하는 노론의 대립관계가 결국 붕당정치에서 대립관계를 보였고, 그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에서도 대립관계를 보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보는 벽파, 그의 죽음이 잘못된 것으로 보는 시파로 분리된다.

 

3. 남인과 노론

영화 <역린>은 그런 역사적인 조건과 흐름에 따라 스토리가 시작한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처음 정권을 잡던 시기, 정조에 대한 암살사건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대한 미수로 불발되었고, 그 사건에 대한 상상적인 스토리텔링을 불어 넣은 것이 <역린>이다. 실제로 정조는 홍국영과 연합하여 노론의 많은 세력을 죽였고, 후에는 홍국영도 죽이게 한다. 작품 내에 정순황후가 영조가 늙은 나이에 들어온 후처로, 그녀는 노론의 실세 중심이었고, 그녀의 가족은 정조에 의해 숙청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에서 남인의 씨를 모조리 마르게 한 여인이다.

 

그 정도로 당시 남인과 노론의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영화 <역린>에서 그런 모습을 잘 드러냈고 그 설정관계를 보이기 위해 왕의 강연을 하는 많은 신화들이 정조를 우습게보고 말장난을 치는 것이 나온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 위로 올라가는 출연진에서 중요한 2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하나는 심환지와 하나는 번암 체제공이다. 체제공은 조선의 3정승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영조에게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신하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충신이고, 정조에게는 정치적 지원군이고, 사도세자에게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주는 신하였다.

 

체제공의 등장에서 정조와의 친밀한 관계가 어전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에 대한 강조성이 없었다. 영화는 분명 정조 VS 노론의 형태이고, 그것은 정조 & 남인 VS 노론의 형태이어야 했다. 작품의 세계관 설정에서 다소 아쉬운 이유는 노론의 암살 작전에만 치중했지, 그것에 대한 반대전략을 제대로 보여주기보단 그저 정조와 홍국영이 대장군을 설득하거나 궁중 호위대와 암살대의 싸움에 치중하려는 것으로 정치적 대립관계를 강조한 것이 아쉽다. 소설 <역린>과 영화 <역린>의 차이는 자세히 알 수 없겠지만, 이런 갈등이 있었기에 <역린>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4. <역린>과 정조

정조는 어린 시절에 암살의 위험에 시달렸고, 새벽에 첫 닭이 울 때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항상 마음에 독을 품고 있었으며, 그 어떤 문신보다 학문이 출중하고, 왜만한 무신과 대등할 정도로 무술에 능숙했다. 실제 정조는 활을 잘 쏘았으며, 신하와 강연할 때도 자신이 직접 시험을 볼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너무 뛰어났기에 노론의 입장에서 계속 견제를 받아야 했다. 영화 <역린>에서 카메라 앵글이 참 중요한데, 이른바 편집과 편집이란 몽타주적인 기법보단, 영화는 미쟝센이란 카메라의 구도와 명암, 소품과 인물의 배치로서 상황을 보여준다.

 

정조가 나오는 장면에서 close-up이 자주 등장하여 정조의 심리적 상황에 대해 초점을 보여주었고, 정순황후를 비추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정면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보는 low-angle로 드러낸다. 그것은 밑에서 위로 보게 하여 피사체의 대상인물이 작품에서 권위가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다. 정조가 정순황후를 알현할 때 그녀는 발을 정돈하고 있었는데, 정조가 발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있었으며, 주변 궁녀들에게 그의 목숨을 가지고 농담 던지는 것도 정조의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역린>과 정순황후

하지만 암살이 실패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정조의 관점으로 정순황후가 스스로 유폐되는 것을 선택할 때 over shoulder shot(어깨너머로 보이는)로 연출한다. 카메라의 연출이 중요한 것은 정조와 정순황후의 정치적 대립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카메라의 대립관계는 정순황후 서재에 붙잡힌 혜경궁 홍씨인데, 정순황후의 자리는 높은 자리에서 곰방대를 피우고, 혜경궁 홍씨는 낮은 자리에서 결박당한 채 붙잡혀 있다. 카메라가 배우와 사물의 배치, 그리고 등장인물의 조명 등에서 그들의 상황과 인물의 속성을 보여준다.

 

살인청부업을 양성하는 노파가 처음 등장할 때 빛의 굴절을 이용하여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의 대비가 강하다. 영화에서 그가 위험한지 그가 얼마나 주도하고 있는지를 빛의 명암 대비로 보여준다. 또한 공간적인 요소로도 보여준다. 정조가 제대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존현각이고, 그의 처소는 군주의 자리를 생각하면 너무 초라했었다. 하지만 정순황후의 처소는 항상 밝은 빛이 들고 있고, 그녀는 자신의 권위를 잘 보여주기 위해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맨발을 드러내고,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데 따뜻한 물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어야 할 정조와 너무 대비된 상황이었다.

 

6. 정조 암살 미수

정조는 국가의 왕이지만 왕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바로 정순황후와 그녀의 주변세력인 노론에 의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현실이었다. 그리고 <역린>은 영화와 소설로서 노론세력에 대항하는 정조를 보여준다. 군사와 인사권을 모두 노론이 잡고 있었고, 그들은 이권으로 결탁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한다. 남인과 노론은 각자의 세력들에게 혼인관계를 보내 친척관계와 더불어 학문적 스승과 제자로 유지한다. 그런 정치적 세력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단순히 누구 하나만 제거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단단한 카르텔을 해체해야지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

 

정조 암살사건이 미수하였더라도 한 나라의 왕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바로 신하들의 권력이 너무 강력했다는 점이다. 정조가 살인청부자 보스를 칼로 베는데, 그 보스가 말한다. 내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이다. 정치란 사실 어느 국가와 사회를 위해 조율 및 조정하는 것으로 정치를 펼치는 것은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여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영위할 수 있어야 해야 하나, 정치란 결정해야 하는 권력자가 필요하기에 그 입장과 상황에 따라 특정 세력에게 이권을 부여하게 된다. 이권의 유지는 결국 그 이권을 가져가는 만큼 누군가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 피해자는 1차는 왕과 그 반대세력이겠지만, 최종적으로 백성이어야 했다. 국가예산이 부족한데 계속 낭비하여 세금을 거두어야 하고, 세금을 계속 거두면 백성의 생계는 어려워지며, 백성의 생계가 어려워지며 민심이 흉흉하게 된다. 그런 상황이 누적되면 범죄가 일어나고 역모가 발생하며 나라의 변이 생기고 만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관이 세워야 하나, 올바른 정치는 윤리도덕적 가치보단 자신들의 이익이 곧 도덕적인 가치로 변하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정조와 노론의 대립관계는 계속되는 것이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노론에서는 정조를 죽이는 편이 유리한 것이다. 어차피 노론의 사람인 정순황후가 정조의 할마마마로 있었고, 그녀가 왕의 책봉을 결정지을 수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왕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었다.

 

7. 영화의 명장면

이런 대립관계에 기반 하여 영화 <역린>은 명장면이 등장한다. 서로 반대되는 세력이 충돌이 일어날 때 찰나의 순간이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정조와 조정석의 대결, 암살집단과 호위무사의 대결, 홍국영과 구장군의 대화 등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보여준다. 또한 카메라에서 처음에는 왕궁을 멀리서 촬영하는 익스트림 롱 샷 → 롱 샷 → 풀 샷 → 클로즈업으로 연결되는데, 표적은 정조라는 것을 설명하고, 존현각이 유일한 정조의 공간이란 것을 보여준다. 실제 존현각의 정조는 적의 화살을 피하면서 적을 활로 공격하기 위해 문과 문 사이로 적을 교란한다.

 

위치적인 전략에서 정조는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취한 것이다. 생과 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조의 전투는 좋은 연출이었다. 그리고 정조가 조정석과 대결하면서 슬로우 모션을 이용하여 긴장감을 드높이고, OST와 주변배경소음을 이용하여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카메라의 영상구조가 빠르지 않고 느리므로 작품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는 수단은 소리와 카메라의 명암, 그리고 클로즈업과 롱 샷으로 처리한 것이다. 빗속의 대결과 위기의 순간은 바로 카메라 앵글과 OST로서 보여준 것이다.

 

8. 작품의 한계성

영화 <역린>은 주인공 정조를 맡은 현빈보다 주변의 조연들의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서 현빈의 모습이 많이 가려진 것이 한계성으로 보였다. 액션물이나 혹은 일반적인 배역이라면 어렵지 않으나 사극이란 특유의 장르이기에 정조의 현빈과 정순황후의 한지민의 한계성은 보일 수밖에 없다. 어느 특정인물을 겨냥하고 오는 관객에게 다소 좋은 서비스가 초반에 나왔고, 물론 그것은 정조가 평소 단련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모습이기도 하나, 캐릭터를 이용한 영화제작진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주가 작은 것으로부터 계속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분명하나, 일일이 군주가 동으로 서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작품의 전개가 산만해질 수 있다. 마지막에 정조가 백마를 탄 상태로 풀 샷으로 보여주나, 그것은 차라리 풀 샷보단 정조가 높은 곳에서 궁과 궁 너머의 한양을 over shoulder shot로 본다면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더 보여주기 좋았지 않았나 싶다. 작품은 카메라의 구도로서 모든 것을 잡아내려고 했기에 그런 부분이 아쉬웠다. 또한 상황적 조건이 너무 억지스러운 것과 부드럽지 못한 것도 그렇다. 등장인물마다 과거의 회상이 많이 차지한 점에서 작품의 세계관을 설명하기보단 그 개인의 입장만 밝히고 있었다.

 

영화제목이 <역린>이란 말처럼 역린(逆鱗)이란 단어가 나온 만큼 그 대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정조가 정순황후에게 말하는 피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단 그 피바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제목과 더 어울렸을 것이다. 아마 이것은 영화자체보다는 영화 시나리오근본이 되는 소설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역린의 대가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하나의 개연성을 더 강조한 점을 단지 살인청부업자의 보스를 참하는 것이 마무리 짓는 것은 <역린>이란 제목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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