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들어가기 전에

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 내지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인지하면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란 것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어느 지역에 위치한 관광명소나 혹은 그 고장에서 나오는 상품 등을 하나의 이야기를 부여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지, 또한 자신들이 선보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주는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상품이나 관광명소가 우월하고 탁월해도 그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상품에 대한 가치를 두고 현대사회는 본래 그 상품이 정말 가치가 우수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면 모른다는 것이다.

 

관념론적인 용어일 수 있겠지만, 실제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를 우리가 인지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 실존하는 상품은 그 실존하는 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제 아래 실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상품을 하나의 가치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것은 홍보와 광고이며, TV와 각종 미디어로 알려진 상품은 그 상품에 대한 가치로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에 대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만들어진다.

 

현대사회에 말하는 소비사회란, 즉 이미지로 통한 소비, 기호로 통한 소비다. 예를 들어 내가 읽은 서적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인간이 착용하는 의상은 그 나라와 기후에 따라 의상형태가 바뀐다. 여름에는 더위를 줄일 수 있는 얇고 가벼운 천을 소재로 의상을 만들고, 겨울에는 두껍고 추위에 강한 의상을 만든다. 하지만 겨울이란 날씨에 우리는 그 계절적 속성에 어울리지 않은 의상을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겨울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여성들이 짧은 미니스커트 내지 핫팬츠를 입는 경우가 있다. 그 의상들은 겨울이란 계절적인 조건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옷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킹이나 레깅스와 같은 의상을 보조로 하여 길가를 왕래한다.

 


그렇다면 의상은 기능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요소로서 기동하며, 그 기동성에는 이미지라는 인간의 정신적 매체에 의해 존재되어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로 매개로 되어 현실에 드러나는 스펙타클이란 점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통해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을 보여주기보단 그것에 맞추며 살아간다. 물론 그런 요소는 한겨울의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여름용 청바지보단 천으로 만든 여름용 신사바지가 더 시원하겠지만, 여름용 신사바지보단 여름용 청바지를 젊은 남성층은 선호한다. 즉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서 자신의 사회적 객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브컬처에 논하는데 있어서 대중문화의 상품과 문화콘텐츠 그리고 소비사회의 이미지라는 기호적 소비가 왜 화두로 꺼내는 것인가? 결론은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라는 서브컬처 속에는 서로 다른 분위기와 흐름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인간이 원하는 것이나 또는 인간이 마주해야할 상황과 운명을 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으로 들어가기에 대중문화로서는 대중이란 집단에 대한 관찰이 가능하고, 서브컬처로서는 그 근원적인 이야기의 본질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비평에 대하여

비평이란 단어는 참으로 어려운 의미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비평하면 어떤 것을 작품을 보고 그것에 대해 관람자가 자신이 본 주관적인 비평을 인식주의 비평이나 또는 어느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나 감동을 주는 특징을 찾는 것을 형식주의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평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본래 비평이란 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판단에서 전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납적이든 혹은 연역적인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주관적인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주관적인 인간들이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의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다고 모두가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만약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에서 백조에서 검은 색 내지 노란 색을 가진 종이 나올 수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동물의 색에 따라 종의 명칭을 붙였는데, 다른 색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 경험주의적인 관찰도 좋지만, 그 관찰이 100% 옳은 수는 없다. 비평적 관점은 100% 옳은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틀리는 것이 아니다. 결론은 비평적 관점도 객관적이나 그 객관성 내에도 주관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이야기 소재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도 각자의 작품을 보면 다른 관점을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조차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비평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간단히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지식적 범주와 인식적 범위는 각기 다르다는 점이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만화 등과 같은 문화콘텐츠라도 그 작품에 대한 배경적 지식과 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지식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크게 차이날 수 있다. 비평이란 문화적인 요건에서 아직까지 국내 상황은 주로 문학과 영화에 치중되고 있으며, 문학은 대중문화적인 요소와 더불어 고급예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영화는 대중문화의 일부분으로 크게 활용되고 있다.

 

영화는 또한 대중문화로서 시간 죽이기(Killing-Time)로서 매우 탁월하게 적용되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영화관에 이미지로 매체로 그 영화가 실재하지 아니한데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스펙타클화를 이룩한다. spectator라는 열렬한 관중들은 자신들이 환호성을 올리면 올릴수록 정작 본인은 스스로 구경거리에 몰입하는 부외자로 된다.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빠지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타인에 의해 조작되어지는 허수아비 내지 바비 인형으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작품을 관람하는 이상, 그 작품에 대하여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읽으면 비평가의 의무라는 편이 있다. 벤야민이 논하기를 “우리가 점점 생장해 가는 작품을 비유적으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라고 본다면, 해설자는 마치 화학자처럼 그 앞에 서 있고 비평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설자의 경우에는 다지 나무와 재만이 그의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비평가의 경우에는 그 불꽃 자체만이 하나의 수수께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비평가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지나간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재위에서 아직도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 생생한 진리를 물어 보는 데 있다(372~373페이지 <발터 벤야민의 비평개념과 예술개념>).”라고 되어 있다.

 

비평가라는 연금술사는 단지 그 영화라는 필름만 분석하여 나열하는 게 아니라 필름 위에서 춤을 추는 영상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알아가는 것이다. 다른 장르는 둘째치더라도 영화라는 영상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책은 우리 인간은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영화는 사람들은 읽기보단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는 다른 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영화읽기가 가능한 만큼 영상매체 중의 하나인 애니메이션이나 또는 애니메이션의 원류가 되는 만화나 최근 흥행중인 라이트노벨은 단순히 보기를 떠나 읽기가 가능한 콘텐츠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따라서 흔히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영화읽기가 구조주의-기호학이란 것에서 도입되었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같은 서브컬처 역시 그런 관점을 통해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평은 위에서 인상주의 비평이나 또는 형식주의 비평을 언급했지만, 사실 비평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그 비평에 해당되는 관점은 매우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구조주의 비평 이전의 비평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있으며, 영미의 신비평, 여성주의 등 다양한 비평적 관점이 존재한다. 비평이란 것은 어느 작품에 대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이 맞는가를 찾아봐야할 것이다.

 


어떤 유치한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철학적인 담론이 존재하고 있으며, 문학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상매체 역시 Narrative라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비평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거기에 게임과 코스튬플레이 세계는 아직까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세계이며, 여전히 서브컬처라는 오타쿠 문화라는 이유로 멸시당하고 억압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서브컬처는 대중문화와 달리 근원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 본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진부한 Cliche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 원인은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은근히 영화내용과 영화인물 그리고 영화문화에 기대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그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스토리를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인스톨을 시켰다. 그리고 위기라는 심리적 배반에 의해 조성된 기대심리를 클라이맥스로 이어져 마지막에는 정반의 변증법에서 합이라는 결론으로서 즐겁게 극장을 나온다. 화면은 눈을 자극하여 극장가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영화는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영화의 스토리나 인물은 기억해도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아니라면 인상 남는 장면이나 인물에 대해 회상하며 후기를 쓰거나 또는 사진이나 그림을 포스트의 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리뷰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인가? 후기인가? 단순히 보자면 후기가 될 것이고, 감상적 리뷰 혹은 자신만의 경험에 의한 인상주의 비평이 되겠지만, 비평이란 단어 대신 감상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글들이 인터넷에 넘친다는 점이고, 적당히 스토리만 찾아 그것에 대한 나열과 배치만 하여 작품 내에 가진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매우 많다. 물론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술자가 제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한계성이 도달할 것이다. 단지 그 한계성은 작품에 대해 비평을 넘어 작품을 만드는 그룹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다.

 

③ 서브컬처 비평의 문제점

서브컬처에 대해 비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유는 그 공간이 너무 좁다는 점과 아직까지 이런 세계에 대해 다들 낯설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기를 좋아한다. 그런 점은 위에서 지적한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자신의 한계성 내지 작품의 한계성으로 인해 발생되는 직설적 공격, 즉 비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브컬처의 비평이 제일 어려운 이유는 기본적으로 비평을 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점이다. 비평하는 것은 결국 영상매체 내지 문화콘텐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적인 수준을 겸비해야 한다.

 

가령 한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3번째 오타쿠 붐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 본인은 포스트모더니즘 내지 해체주의적인 미학을 연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칭호는 포스트모더니티적인 감독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불안정한 시대적 모습과 청소년들의 심리를 표현했다. 안노 히데아키가 그런 철학도서를 보고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본인과 애니메이션 스텝들이 가지는 심리적 요소가 작품 내로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감독 본인은 그것을 이해하고 만들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의 해체주의적인 미로서 볼 수 있는 것은 철학자들은 세상의 원리를 발견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철학자 중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철학자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온 것처럼 안노 히데아키가 만든 작품들이 굳이 그가 어려운 인문도서를 옆에 차고 있지 않아도 그런 내용을 만들 수 있던 것은 안노 히데아키라는 인물이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분석하기 이전에 우리는 안노 히데아키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의식과 무의식적 의도가 담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것에서 읽어내려면 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작품 내에서 감독이 일부러 패러디(풍자적 모방) 내지 페스티쉬(유희적 모방) 또는 오마쥬로 연출할 수 있고, 그 작품의 모티브가 자신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의도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존 로봇 메카닉 장르에 큰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명제는 정의의 추구이고, 절대적인 의지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이다. 형이상학적 미라는 절대적인 가치 아래서 주인공이 선(善)의 대변자가 되어 악(惡)을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그리고 적이라고 불리는 사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사도라는 적인지 아니면 가까운 인간인지 구분이 모호하게 해준다.

 

특히나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더불어 오이디푸스신화의 반입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선 오이디푸스신화를 알려면 그리스비극에서 아주 유명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를 알아야할 것이며, 오이디푸스신화로 통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역시 파악해야 한다. 즉 인간의 무의식적인 성적인 욕망과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되는 문제까지 말이다. 덧붙이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에 대한 대립관계구도가 나온다. 가족이란 구성체가 안정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문제점의 시작점이란 점에서 이 작품은 기존에 가진 로봇애니메이션의 가치를 해체시킨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것과 이러하지 않은 관점으로 같은 작품을 보는 것은 큰 전환점이 이어진다. 서브컬처의 비평에서 가장 힘든 과제는 애니메이션 마니아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영화나 문학 등과 같은 전공자가 참여하거나 또는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이야기를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일부 인터넷에 존재하는 리뷰어의 글에는 비평적인 관점보단 작품에 대한 줄거리와 인물소개, 그리고 개인적 감상문에 불과한 글들이 넘친다. 물론 그들의 활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그들이 자신만의 글을 적는 것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비평이란 것은 그런 개인적 주관으로만 가득한 글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 작품에 대한 제작진 내지 감독, 그리고 유사작품을 데이터베이스화 시킨 것 역시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비평의 관점에선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여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평문화에 대해 한국 자체적으로 활성화 되지 않은 것이 문제이며, 비평문화가 활성화된 곳은 인문학과 영화에만 치중된 것이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비교하여 그 종류와 콘텐츠가 활발하지만, 대중들의 외면(웹툰과 같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는 활성화)과 전문가들의 무관심, 그것을 소비하는 향유자들의 거리감으로 인해 하위문화에 대한 비평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위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즐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우아한 취미를 가졌다는 착각을 가지며 살고 있지만) 하위문화라는 것은 오타쿠라고 멸시하면서 아직까지 어른이 덜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현실이고, 정작 그런 부당한 현실에 처해진 향유자들은 그런 현실로부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거부하며, 심지어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조차 낯설게 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가 내지 연구자들은 향유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위문화 그 자체에 대한 비평과 하위문화 향유자들이 소비하는 작품에 대한 비평이 어려운 이유는 아마 이런 사회적 구조와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④ 어떻게 비평해 나갈 것인가?

서브컬처 비평이 어려운 이유는 그 문화적인 산업규모가 국내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점과 그것을 비평할 수 있는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나 언론학, 영화학, 영상학 교수나 전문가들이 글을 적고 있지만, 그 규모나 수는 매우 저조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서적 역시 많지 않다. 물론 출판되어도 일반 서점가에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경우도 많으며, 설사 있다고 해도 직접 구매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하여 읽는 경우도 드물다.

 

비평이란 것은 창작과 달리 직접 비평하는 사람이 스스로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만화애니메이션 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단법인을 조직하여 활동하거나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평가란 조직은 따로 구성되어 있지 아니하며, 그나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평은 감상 내지 후기, 리뷰라는 카테고리로서 글이 저장되나, 비평적 가치를 드러내는 글이 아니라 의미가 모호한 리뷰로 들어가는 현실이다. 리뷰라는 것은 Review, 즉 “다시 보다.”로 될 것이고,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면 감상과 비평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네이버사전에서 Review라는 것은 비평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비평을 한다는 것은 리뷰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국내 커뮤니티에서 비평은 Critical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리틱이란 비평가가 보는 비평이란 좋지 못한 방향으로 논평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긍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본다면 Review & Critical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 나갈 수밖에 없다. 비평이란 것은 단순히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서 무엇을 더 볼 수 있는지도 관찰해야 하는 점이다. 작품 내의 이야기로 모든 것을 결부 짓을 수 있겠지만, 작품 외로 이어지는 세계를 넘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평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만으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적는 방법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향이나 혹은 편집자나 독자의 성향을 반영하여 움직일 수 있으나, 비평이란 본인 자신이 편집자로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소설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할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비평이란 것은 미학과 같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삶을 빛의 굴절처럼 바라본다면, 미학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가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비평이란 철학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며, 철학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한다는 것처럼 철학적 사상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문제다. 영화에서 말하는 구조주의사상이 프랑스 사상가인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롤랑 바르트,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로 이어졌으며, 구조주의 이전에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소쉬르가 존재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경우 낭만주의 사상가인 루소까지 이어진다.

 

이런 철학자의 도식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철학이 세계의 변화를 주기 전에 먼저 그 변화를 주기 전에 세계 그 자체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을 감상하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면 그 세계관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평적 입장을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비평은 철학에서 시작되므로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먼저 서사에 대한 연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을 읽음으로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역사라는 개인의 이야기이며, 그 개인은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시라는 이야기는 정해진 주인공이 실존하던 인물이 아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혹은 인간의 욕망과 터부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이라면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해질 수 있는 계기가 도래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은 비록 환상적인 이야기나 표현이 많으나, 그 자체가 하나의 시라는 이야기이므로 우리에겐 하나의 개연성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개연성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개연적인 부분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에서 기존의 관념 안에서 만든 작품은 모더니즘이라면 그것은 해체, 보완, 추가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다. 최근 애니메이션은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 기법을 다 적용하는 추세이므로 그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 낯선 것은 아니다.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적 근본과 그 사상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일단 위에서 언급한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다. 선과 악의 해체, 절대적인 미를 추구할 주인공파일럿의 혼돈, 불완전한 결말과 이야기 흐름은 해체주의 특성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래서 비평이란 관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활습관이나 삶의 축척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한 관점과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또한 만화, 애니메이션은 그림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전문용어를 상황에 따라서 이해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의 미학이므로 영화용어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들을 파악하고 서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노력과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비평은 남에 의해 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클 수밖에 없는 분야다. 남의 비평문을 보고 따라 적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남의 비평문으로 통해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해석과 관련하여 비평하고자 하는 당사자는 미학적인 요소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 철학자는 미학자로서 글을 쓰며, 미학의 기본적인 틀은 철학으로부터 시작이다. 그렇기에 미학적 관점을 가진다는 점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하위문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라이트노벨의 경우 국내 문학과 및 문예창작학과 전공자들도 참여하고 있어서 사실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은 충분히 미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러나 모든 하위문화 콘텐츠를 쉽지는 않으나 충분히 다룰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코스튬플레이의 경우 다른 서브컬처와 달리 콘텐츠를 영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인간이 연기하거나 혹은 그 연기했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영상매체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작품을 비평하는 것만이 아니고, 작품을 만든 제작사, 감독, 각본, 작가가 아니라, 그 사진이 찍히는 당사자라는 점이 어려운 난관점이다. 칸트의 <판단력비판>과 같이 미에 대한 연구에서 미란 외형미와 내재미를 두 가지를 다 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지나칠 경우 다른 미적 영역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국내 코스튬플레이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본다면 코스튬 플레이문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에 의한 피사체가 많다는 점이고, 이 피사체라는 코스튬플레이를 촬영하는 부류는 여성보다는 남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외형미적인 요건에서 외모와 몸매 등은 충분히 촬영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인간이 가진 성적 무의식적인 요소에서 아니마(Anima)라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에서 남성은 자신들의 무의식에서 원하는 여성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릴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른 입장에 놓인 상황이라면 부조리하겠지만,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를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에서 외형미가 내재미보다 크게 상회하면 그 사진은 단순히 코스튬플레이로 통해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것보단, 단지 자신의 미모를 조금 더 귀엽게 예쁘게 섹시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자신의 얼굴은 그대로 가지고 있겠지만, 자신이 정작 쓰고 있어야 할 가면(코스튬 플레이하고자하는 캐릭터)은 없고, 단지 자기의 얼굴만이 남는 것이다. 촬영자가 촬영할 때 피사체를 촬영할 때, 그 피사체가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작품의 캐릭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그 당사자만이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하지만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몰입은 오로지 코스튬 플레이어만 할 수 있다. 문제는 코스튬플레이어가 추구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미소녀라는 점이다. 미소녀캐릭터에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언제나 좋은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하고 싶어 하기에 많은 코스튬플레이어들이 같은 작품의 같은 인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내용보단 명확하게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기에 타인과 상대해야하는 인물들에겐 항상 카리스마적인 요소나 가와이이한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처럼 코스튬플레이문화에서 레디-메이드라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을 본다면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대중들이 향유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근원적인 요소는 다르지 않은 점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가와이이한 요소는 귀여운 미소녀로 볼 수 있겠지만, TV에 등장하는 아이돌가수나 연예인에게도 적용된다. 그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기에 단지 보는 대상이 다를 뿐 그 안에 내재된 욕망은 같다는 점이다. 현재로서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문화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며 일부 의상학, 만화애니메이션, 언론학 관련 학과나 학회에서 논문이 드물게 나오는 수준이다.

 

논문을 참조하자면 코스튬플레이에 대해 비평하자면 인류학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변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코스튬플레이의 기원이 어느 영웅의 옷을 따라 입어 그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즉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과 동일시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스튬플레이를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매우 주술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원래의 근원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라면, 지금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미디어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환경에서 원하는 대상은 하나이나, 그 대상이 되고자하는 인원은 매우 많다는 점이다.

 

대상이 실존하고, 그리고 인격이 가진 그 자체만으로 비평의 관점은 상대에 따라 큰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으며, 외형미에 치중하는 부류라면 상당히 어긋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외형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재미를 추구하지 않은 것이 코스튬플레이문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에는 그로테스크한 연출이나 상황이 매우 많다. 그로테스크란 인간이 보기엔 낯설고 역겨우며, 매우 혼돈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충격이야 말로 인간이 기존에 가지지 못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을 만든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유치한 장르라고 지탄받아도 그래도 프랑스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더불어 제7의 예술로 인정받는다. 예술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어떤 이미지가 나올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학이란 말이 있다. 그 미래의 윤리학의 원천이 되는 상상력, 이미지가 현실로 바뀌는 일들이 종종 보곤 한다. 이미지가 에너지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문학적 요소가 들어간 라이트노벨이 미래사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런 문화콘텐츠에 대한 이해와 판단으로 이들이 나아갈 길을 더 넓고 다양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비평은 작품을 만드는 자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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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경제에 대한 짧은 단상

 

내가 가장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은 사람들은 경제, 경제 이야기하는데, 선거에서 경제를 중심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나 사실 인간을 중심으로 경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가장 멍청한 부류는 부동산가격에 대해 신경쓰는 존재인데, 그들은 아직도 생각하지 못한다. 집값은 왜 높게 오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나, 물가가 왜 이리 상승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상가나 점포의 지대료가 상승하므로 당연히 상품의 가격이 올라간다.

 

부동산으로 이익보다는 금액과 물가상승으로 손해보는 금액에서 어느 것이 더 클까? 물론 자본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리스크는 적으나 집 한 채 잡고 오기 부리는 대대수 사람들, 아니 유권자들을 보면 멍청함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아마 집 가격은 년간 몇 백 만원 단위로 오르지만, 상품들은 100원부터 시작하여 몇 천원 단위로 올라가기에 그런 차이점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자고 입는 것에 대해 매일매일 필요하므로 거기에 소모되는 금액에서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마트에서 살 게 없고, 10만 원을 들고 가도 몇 개 잡으면 다 소모된다."라고 말이다. 그것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물가의 상승은 결국 부동산이란 과잉적인 화폐 인플레이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으로 소비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화폐의 이동이 이런 고가에만 몰입되어서 그렇다. 계속 블루오션을 외면하는 국민적 정서와 국가정책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선거에서 국민은 현명하다고 하나, 사람들은 서로 정치이야기는 하나, 정치철학과 경제학에서 말해주지 않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하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점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토크빌이 말하듯이 그 나라의 정치적 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이라고 말한다.

 

과연 지식은 권력을 쌓고, 권력은 지식을 생산하여 은폐하면, 지식으로부터 소외된 자는 계속 돌고 돌 뿐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신화를 보고 믿지를 말아라. 그것은 그 사람의 역사이지 당신의 역사가 아니다. 차라리 패배의 이야기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거기서 거기다. 일확천금을 노리기보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기는 삶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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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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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이상한 사람의 정신인지 혹은 낯선 사랑의 정신인지? 아무튼 제목으로 봐서는 분명히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에서 학원물과 연애물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라이트노벨이지만, 라이트노벨로 하기에는 뭔가 큰 갭이 보인다. 작가인 마미야 나츠키는 어떤 인물인줄 모르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관점과 시각은 분명 이 작품 표지에 나오는 소녀인 사이케테이 리코로 대체된다. 사이키델릭이란 정신에서 그 말을 살짝 바꾸어 사이케테이, 즉 사이키한 인물로서 리코를 등장시킨 것이다.

 

역시 제목부터 정신이란 것을 내세울 때부터 조금 이상했지만, 막상 책을 열어보니 역시 그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책 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그의 제자이자 배신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란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신분석에 대해서 논하자면 기라성 같은 존재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구조주의에 영향을 끼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목인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의 소유자는 리코가 되는 것이고, 그녀는 마치 프로이트와 융을 꺼내면서 일러스트 표지 주인공 중 하나인 유우진을 자꾸 파헤치고 꺼내려 한다.

 

가령 이것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파리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되어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만든 라캉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물론 라캉에 대한 것은 구조주의 내지 후기구조주의를 소개하는 책으로 만나고, 대략적인 이론만 봤을 뿐이나, 그가 치료하는 방법 중에 환자의 뺨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뺨을 맞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면 그 치료는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서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즉 어느 문제대상이 감추고 있는 그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라캉이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적인 방법으로 리코는 유우진의 방어기제적인 요소를 간파하여 그의 벽을 허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인이란 별명과 함께 상당히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유우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문제로서 파괴한다. 기존에 갇혀있는 유우진의 고립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는 리코의 관계에서 리코의 정이라면 유우진의 반이고, 그 둘의 대립은 합으로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는 셈이었다. 그 부정을 부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리코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에 대한 재생이고 회상이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알 수 없는 깊은 아픔을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그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어 해소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 곯아 썩는 것이 인간이다. 육체적으로 세포가 균에 침식당해 몸이 곪아 가고, 정신적으로 더욱 고립되어 극단적 행위를 하게 된다. 유우진의 자살충동은 바로 정신적인 고립에서 발생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리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가령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다.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남자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인간은 근친에 대한 터부의식과 반드시 근친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가족에 대하여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유우진이 부모를 잃은 것은 8살, 그의 누나인 유우키는 초반에는 16살이고, 후반에는 17살이다. 작가가 실수한 것인지 번역과 편집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남매는 아직 마음이 여릴 때 부모를 잃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유우진는 누나인 유우키에 대해 친누나이지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우키는 달랐다. 그녀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도 잘 돌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유우진에게 어머니를 대신한 유우키 자신이 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대체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직장 상사와 불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면, 반대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서 된 것이다.

 

하지만 누나인 유우키가 아버지 같은 직장상사에게 마음이 빼앗기면 어머니 같던 누나 유우키를 잃어버린 것처럼 유우진은 질투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종말은 비극적인 살인사건과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유유키의 친구이며, 리코의 친구이자 부활동교사인 마호 역시 이 사건을 두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드러나기 싫은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유우키의 죽음에 대해 마호 역시 유우진에 대한 죄의식과 깊은 슬픔이 남아있었기에 리코는 유우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그 악몽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유우키를 대신하여 리코라는 이름을 유우진에게 넣어 주려고 했다.

 

결국 유우키는 가족이란 이름의 누나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누나(선배)로 대체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오토마톤처럼 유우키는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보였다. 유우진은 자신의 존재를 두고 실존주의적 모습은 세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와 분리되어 있기에 고독을 추구하는 한 마리의 늑대와 같았다. 그렇지만 유우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서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를 추구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간 누나처럼 자신도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코가 유우키의 죽음을 모방하여 유우진의 트라우마를 부수려 했다.

 

유우키는 유우진을 사랑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점과 그 유우키의 죽음에서 얻은 고통의 사슬을 끊고, 리코라는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서 상당히 인용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있었다. 기인처럼 문학가이자 시인인 괴테의 명언을 남기는 리코에서 리코가 보여주는 행동은 결국 유우진의 사슬을 끊어주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모하던 로테의 집에서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베르테르는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말한 사슬과 리코가 말하는 사슬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슬이란 말은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온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여 있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고 말이다. 리코가 유우진에게 계속 말하는 사슬은 결국 유우진이 세상을 살아가야 인생의 자유고, 그 사슬은 유우진의 고뇌에 자리 잡은 누나의 죽음이고, 그것을 이겨낼 방법은 사랑이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다보면 문학, 영화, 철학, 정신분석에서 나온 내용들을 많이 인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재미를 넣은 경소설이지만, 보통 일반 시중에 나온 왜만한 소설보다 더 깊이 내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때에 따라서는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는 순간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Blue>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Blue>라는 영화는 프랑스 삼색기에서 푸른색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다룬 것으로 여자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스스로 고립하기로 한다. 혼자만의 방랑 속에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바람피운 여자는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인 남자가 여자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나,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같이 남편이 남긴 악보를 정리하던 중에 서로에 대해 사랑하면서, 여자주인공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인간은 본래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감정을 두고 원시시대의 인간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즐겼다면, 사회가 생기면서 사랑은 인간의 사회성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슬이란 존재는 인간의 도처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 사슬을 끊을 방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란 점이다. 고립된 유우키는 자유보단 방종에 가까웠으며, 그것은 자유보다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지만 감옥은 유우키만 것이 아니었다. 유우진에게 말은 건네주는 이안과 유이, 유이는 과거 중학교 시절 어떤 여자아이를 왕따 시키는 집단에 속해있었다. 당시 유우진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자 반대표로 억지로 끌려나와 유우진에게 협박적인 말투를 내뱉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 공포를 맛본다. 인간을 속박하는 사슬은 도처에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인간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되는 비이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은 정신분석에 대한 내용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가는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연애 카운슬러로 활동하는 마호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자크 라캉이 남긴 말 중에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와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가 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그런 명제에서 리코는 항상 튀는 행동을 한다. 자신이 여자임에도 여자인 리코를 좋아하는 엔마 사나의 지나친 장난에서 리코는 옷이 물에 젖어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만약 보통 여자라면 가슴을 가리고 수줍은 얼굴로 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당당히 자신의 몸매를 뽐내는 그녀는 참 특이하였다. 아니라면 엔마 사나가 아방가르드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리코 자체가 아방가르드, 즉 반미학적인 전위성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우진을 구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사회성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규격화 일반화 획일화를 강요한다. 상대방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다른 언행을 보여주면 바로 낙오시키거나 차별한다. 이런 것을 두고 집단주의의 한계성인가? 자신들이 옳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틀려야 하고, 어긋나야 한다. 인간은 겉으로 예외의 존재를 부정해도 속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야지 자신들이 단합되어 정의의 이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이안은 제대로 헤쳐 나오지 못했고, 유이는 그들의 일부가 되어 유우진을 공격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사고방식을 부수는 색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사랑으로서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책 제목이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아닌가 싶다. 1권에서 유우진에 대해 리코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를 사회적 존재로 변모시켰다. 남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유우진에서 2권에서는 유우진의 새로운 인생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성세대 관념적으로 매우 위험한 부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유우진 옆에 계속 머문 이안과 리코 옆에 계속 있던 사나에 대해서다. 리코 친구 사나는 남자처럼 행동하나 사실 여자였고, 이안은 남자인 유우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안은 감정적인 모습이 드러내고, 사나는 매우 차갑고 냉혹한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융이란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 있고, 여성성 안에도 남성성이 존재한다. 이안이나 사나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상대적인 성별에 대한 심리적 왜곡이 내재되어 있다. 라이트노벨이라도 환상과 마법, 공상과학을 배제된 평범한 학교공간에서 다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다소 과장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이야기에서 차용된 모티브들은 분명 지금이라도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고 있을법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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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소를 읽는다 - 자유와 평등, 다시 시대의 광장에 서다
김기의 지음 / 다른세상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루소를 읽는다>를 읽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연구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은지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이 서적을 집필한 작가도 그렇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루소가 제시한 그 사상이 정말 옳았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루소는 기독교를 믿었지만, 기독교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반계몽주의자였으며, 자연주의자였다. 오히려 신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던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기보단 그 민중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광인이 되어야 했고, 불안감에 미쳐 의심병에 걸려야 했다. 루소가 그런 힘든 상황에서 잃지 않은 것은 당시 도시 빈민과 시골의 농민에 대한 인간애였다. 그의 인간애적인 모습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이성과 문명이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혹은 아닌지를 밝히는 연구에서 루소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고 배고픔에 허덕인다고 했다. 지금처럼 예술이 누구나 혼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위용과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물자를 낭비해야 했다.

 

그 낭비는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향수 하나를 생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했고, 치장하기 만든 가발에는 많은 식재료가 필요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어보면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루소가 바라보던 농민의 힘든 삶에서 그의 인간애적인 정신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빈민, 거지, 창녀, 도둑, 병자로 가득한 곳이었다. 모두 가난에 의해 내몰린 자였고, 누구 나하나 그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했다. 루소와 더불어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디드로 역시 그러했다. 오로지 루소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예전에 <에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정말 놀라운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죄지은 사람은 목매달아 죽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그렇지만 나도 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장발장이란 이름의 사나이는 오로지 집에서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쳤다. 그 죄로 그는 오랜 시간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조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추후에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 신분을 속이고 살아갈 때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거둘 때, 코제트의 생활은 어느 사기꾼 여관 주인집에서 제대로 된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다. 추운 날에 먼 거리까지 물을 길러야 했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런 비참한 생활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하지만 범죄자의 말로는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몸을 팔아야 하고, 남자는 몸을 버려야 했다. 오늘 날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최근에 개봉되었던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국에서 만든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먹을 식량이 없어서 걱정하고, 공장에서 감시원들의 부당한 행위에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버려진 고아, 이런 모습은 루소가 프랑스 파리에서 보던 그 장면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인 것처럼, 그 사슬이란 고리는 바로 인간의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루소가 가진 인류애적인 가치는 “아름다움을 사람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라는 말처럼 루소는 인간 스스로 인간성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루이왕정 시기에 핍박받았으며, 수구세력에 의해 그의 사상은 무참히 짓밟혔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은 논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루소의 사상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18세기 낭만주의, 19세기 관념철학과 마르크스주의, 20세기의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유명한 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보았다. 거기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면서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문명이란 세계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력으로 변화하여 만든 장소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명의 역사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고대에서는 지식을 이용한 치수관리와 화술,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물리적인 폭력과 무력을 이용한 계급, 현대는 자본이란 이름의 경제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인간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루소는 그 굴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보다 100년 전부터 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게다가 실존주의적으로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존재성까지 고민한 그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해 파고가면 갈수록 루소의 영향은 막대했다. 루소가 그렇게 원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루소는 “누구도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기의 몸을 파는 여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파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또한 산업화의 가속화로 도시는 계속 인구가 모여들고, 시골은 황폐해지며, 소득의 불평등은 이제 인구까지 감소하고 있다. 현재 부부 2인당 출생되는 자녀수는 1.2명, 여기에 사회는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국방군사력 기본이 되는 젊은 남성 수가 감소하여 비상 시 국가존립조차 위협이 되고 있다. 인구가 줄면 당연히 기업이 생산되는 상품을 소비가 축소되고, 기업의 생산력이 감소되면 그 나라의 경제가 위태롭다. 우리는 매일처럼 정치권에서 경제문제를 두고 이슈로 삼지만, 그 경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참 어리석게 보인다. 인간이 경제위에 있는지 아니면 그 아래에 있는지 구분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구의 감소는 인간이 계속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재생산되어야 하겠지만, 그 생산에 의한 2차적 생산이 부족한 이유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남성, 중앙과 지방의 경계선상에서 경제력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태어날 2세의 인생에 미친다. 교육비용의 증가, 생활에 불충분한 급여는 점차 국민생활의 질을 떨어뜨리며, 그것이 결국 인구감소로 이어진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여 민생이 사는 것이 아니라 민생이 살아야 경제가 일어나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을까? 루소는 진짜 필요한 것에 대해 너무 가치가 낮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가령 우리 인간은 의식주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과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허나 현재 우리는 식량의존국이 되었고,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노고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농민이 해당되지 않으나 적어도 쌀과 같은 식재료는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또한 인간에게 식량만큼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에 인간이 가장 하등하게 취급당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싫어하거나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바라면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여긴다. 애완동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보여주듯이 행동하는 그들의 가식과 협소한 생각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애완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기도 하는가? 물론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을 위해주는 것보다 그저 애완동물로부터 애정을 받으려하는 인간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까?

 

억지로 동물을 키워, 그들의 성기를 자르고, 혹은 강제로 수정하는 것이 동물에 대한 사랑인가?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란 오류와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어리석음에 계속 시련은 되풀이 된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기심의 공화국을 만든다.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비판한 것처럼 4대강 공사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여 어느 특정인에게 이익이 가게 한 일을 보며,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게 여겼다.

 

이미 도시사회생활에 익숙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그 공간에서도 자연의 세계를 보호하고 가꾸며, 아름다운 것들을 보존해야 하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며, 강과 개울을 콘크리트로 바르더니 강물의 수질이 악화되고, 인간이 마셔야 할 물도 오염되어 식수걱정을 하게 되었다. 잠시 이익을 보려던 것이 오히려 그것을 원상 복구하는 것으로 몇 십 배에 가까운 예산을 소모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하는 일이 모르겠다.

 

오로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 이기심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이끌려 새로운 사슬의 고리가 되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병이 든다. 인간성의 형성에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한 사람의 존재로 만들기보단 그저 기존의 사슬에 적합한 인간만을 만든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자신 내지 그 단체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조차 마음의 양심조차 느끼지 못한다. 최근 육군28사단에서 벌어진 구타사건이나 혹은 다른 군부대에서 일어난 자살사고나 총기사고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병폐에 빠졌는지 알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이다. 그 억압하던 자도 분명히 타인이나 혹은 어느 사회에서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보상심리는 정말 최악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현상이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오직 자연적인 인간이고, 그 자연에서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치는 바다나, 혹은 넓고 푸른 하늘, 시원한 강줄기가 흐르는 하천, 바람이 부는 넓은 평야에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하나가 된다. 모든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서도 그들이 맑은 땅과 물을 지키려한 것은 단순히 도시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갉아먹는 도시의 척박함에서 영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자연에 대한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의 문장이 거대한 강줄기처럼 굽이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다.

 

인간 역시 그 자연적 존재로 본다면 서로 다를 것도 없으나, 계속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살아간다. 강자의 논리로 하나의 정의를 만드는 것은 고대 노예를 만들고 착취하던 자들의 부조리한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루소는 “힘을 정당성으로 만드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바꾼 것이다.”라고 한다.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권리로부터 시작이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타인의 자유가 소중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등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공적재산의 영역으로 보겠지만, 최소한 존 롤즈라는 정치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소수혜자가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정치적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성공은 교육에 의해 결정되고, 그 교육은 기회의 균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공적교육이 무너진 이상 경제적 조건이 없는 자에겐 오직 같은 운명을 되풀이된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교육을 인간 스스로 살아가고, 자연에 대해 같이 살아가게 함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과정이기를 원했다. 인간이 도구로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감시와 처벌로 통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제 아무리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패륜을 저지르고, 또한 자기인생에 대한 허무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비정규직과 실직자 같은 사람들은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멀어진 세모녀의 자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삭막한지 잘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그러나 우리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처럼 계속 어둠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자신들은 벤츠에 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들은 벤츠 타이어가 밟고 지나가는 아스팔트에 불과한데 말이다. 벤츠를 타고 그저 어디에 추락하든지 또는 충돌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차를 타거나 먼 길을 걸어가는 다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눈앞에 있는 위기와 고통을 잠시 잊는 힐링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대안이 필요하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여 현실은 바뀌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해 개인적 삶은 바꿀 수 없으나,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삶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으로서 끝이 나지만, 사회의 문제는 각자의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안 일어날 것이란 믿음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실에서 언젠가 그 칼날은 자신의 목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기에 계속 비극은 되풀이고 매일 새로운 소극이 탄생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이나, 인간의 이성 내에 윤리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기심(利己心)이고, 인간은 감정(感情)을 가졌다고 하나 거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無情)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개인보다 더 못한 야만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개인들은 자신들의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이상 문제를 삼지 않지만, 문명과 미개의 중간단계인 야만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 잠을 충분히 자더라도 멈추지 않고 약탈과 착취는 반복한다. 진심으로 문명인 혹은 이성적 인간이라면 타인을 공격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배운 가르침에서 "의무와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타인의 불행 속에서 자기 이익을 찾는 일은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타인의 불행에 빠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경제적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실은 마치 야만의 사회처럼 보인다.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루소가 제시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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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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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인물은 독일 근대문학의 거두를 지나 독일 그 자체를 나타내어주는 대문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독일이란 국가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 비해 언어적 표현력이 떨어지는 국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언어는 마치 산 위에서 흐르는 강물이 계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강물은 거대한 하천이 되어 바다와 마주하는 연안과 같은 느낌이다. 거대한 물결이 강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오고, 그 강물을 받은 바다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거대한 파도가 반대로 올라가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을 삼킬 것 같은 기복이 찾아온다.

 

괴테라는 대문호의 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이 뛰며, 그의 글을 정체되어 있지만, 그의 글을 읽는 나의 머릿속에는 큰 영상이 올라온다. 일단 출판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괴테는 Strum und Drang라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중심지였다. 그의 글은 낭만주의이었고, 계몽사상과는 전혀 다른 글이었다. 괴테가 논하길 볼테르로서 한 시대는 끝이 나고, 루소로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한 것처럼, 괴테는 자신의 손에는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영혼 속에서는 루소가 있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19세기의 유럽에서 루소의 사상이 문학적으로 움을 튼 것이었다.

 

그런 낭만주의적인 글이었는지, 또는 괴테가 루소를 무척이나 동경했는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순간 루소가 생각났다. 처음 베르테르가 주무관 집에 방문하였는데, 그 집안은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서 제일 큰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동생의 수는 여덟 혹은 아홉 정도 보였다. 그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로테 옆에 앉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가 우드토 백작부인에게 열광하여 그것에 대한 사랑과 좌절로 인해 <신 엘로이즈>를 만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마음과 열정적인 감정과 그리고 숭고한 이상을 가진 베르테르는 안타깝게도 로테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사모했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은 괴테가 아마 2번의 사랑에 실패한 이력이 있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가장 처음 사랑한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괴테가 처음 약혼한 여성과 약혼이 파혼되어서 그런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베르테르가 땅 속 깊이 사랑하던 여인의 관을 묻은 것 같은 것이다.

 

로테와의 사랑은 해설서에 나온 것처럼 2번째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 자신과 알고 지낸 남자의 약혼녀라는 점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에게 슬픔과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이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로테, 사실 괴테가 2번째로 사랑한 여인의 이름은 샤를 로테 부프라는 점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히로인의 이름은 곧 괴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것이고, 괴테는 마음을 죽인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이란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체나 영혼이나 서로 다름없다는 점에서 육체적 베르테르의 죽음은 정신적 괴테의 죽음을 승화시킨 것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괴테가 선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삶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또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열정과 도취가 숨을 쉬고 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는 1774년에 출시된 점을 보면, 아직까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계몽주의라는 이성적 인간과 그에 반대되는 반계몽주의 또는 낭만주의는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과 감정 앞에서 무엇이 우선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괴테의 작품의 낭만주의는 루소의 <에밀>에서 표현한 것처럼, 베르테르가 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과 솔직한 모습을 두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로테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순수하고 선한 아이들이 로테의 손에서 자애롭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서로 장난치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베르테르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서 보여주는 것이 자연적이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베르테르는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흠뻑 취하기도 하고, 마을에 처음에 올 때 마을 어린아이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베르테르는 높은 귀족집안의 아들은 아니지만, 집안 자체가 일반 농민보다 신분이 높았기에 베르테르를 처음 본 아이들은 두려워하거나 경계했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자, 어린 아이들은 모두 베르테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또한 베르테르는 마을 우물가에 어떤 처녀가 물을 기르러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물통을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란 점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테르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베르테르의 그 자연적인 감정이란 바로 단순히 괴테가 베르테르로 통해 위험하고 허무하며, 애타는 사랑만 적은 것이 아니었다. 소설 내에서는 순간적으로 베르테르로 보는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베르테르가 사랑하던 로테는 사실 이미 알베르트라는 혼약자가 있었고, 베르테르는 로테를 너무 사랑하기에 잠시 그 마을에서 잠시 떠난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공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백작을 알게 된다. 그 백작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으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고, 베르테르와 마음이 맞았다. 또한 베르테르는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인 B를 만났는데, 그 B양은 마치 로테와 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그리고 우아한 마음까지 가졌기에 베르테르는 B양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자신과 친한 공작과 같이 무도회에 갔으나, B양은 베르테를 보고도 안절부절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백작도 난처한 표정을 지은 후에 베르테르에게 미안하다면 무도장에서 집으로 가길 부탁했다. 그 이유는 당시 공작이 살던 사회는 귀족들의 상류계급 문화가 존재했고, 베르테르는 그곳에 합당하지 못하여 배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베르테르는 거기서 나온 것이 홀가분했고, 그런 사람들이랑 있는 것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하지만 B양의 불친절함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 이유는 B양은 원래 귀족집안의 후예고, B양과 같이 사는 숙모는 그런 베르테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베르테르로 보는 귀족사회에 대해 그들이 무능하거나 재력이 없거나 또는 교양이 없어도 단지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그것에 안주하여 교만 방자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 간의 평등이 되지 않았지만, 평등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베르테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평등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역시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좋은 친구로 여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이성적 지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성보다 자연적인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자면 알베르트는 기존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루소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대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사실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정만 비판할 뿐 그 외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프랑스 정치권력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대안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성적인 지배에서 권력은 지식을 동반하고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므로 지식이 없는 평민들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말싸움에서 베르테르는 인간의 감정에 의한 극단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말에서 “절도는 물론 죄악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으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해야 하나요, 벌을 주어야 하나요? 놀아낸 아내와 그 원수 같은 유혹자를 격분한 나머지 죽인 한 남편에게 누가 맨 처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도취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몸을 맡긴 처녀에게 누가 맨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냉혹하기 짝이 없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계측기일지라도 필시 감동되어 그에 대한 형벌을 보류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인간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단순히 자신의 욕심보단 정열에 의해 몸을 던지 인간을 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런 사람을 두고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자살에 대해서는 위대한 행위에 비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나약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지지 않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걸 나약함이라고 말하는 거요? 표면만을 보고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오.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 당신은 그들을 감히 약자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무거운 짐짝을 척척 운반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통이 터지 나머지 여섯 명이나 상대해서 보기 좋게 때려 눕히는 사람을 약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봐요 인간의 노력이 힘이라면 어찌하여 이러한 극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베르테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물결에 움직인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남을 위해 싸우고, 특히나 폭군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궐기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맨 첫 장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난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

 

괴테의 마음 즉 영혼에 루소가 숨 쉬는 이유는 바로 저런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적 성향이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열정적인 사나이고, 자연을 사랑하고 찬양하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인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는 강렬하고 아름답고, 보는 내내 마음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나오는 문체는 아직까지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하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낭만과 낭만주의의 낭만은 다르다. 그 시대의 낭만은 자신의 진실을 몸과 마음으로 다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굳은 결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만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 TV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위해 비싼 차를 끌고 와서 성대한 이벤트는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의 자본력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진정한 낭만주의는 베르테르처럼 자연을 찬양하고, 시를 열정적으로 부를 수 있으며, 거짓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는 진정 베르테르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고, 혹은 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베르테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의 죽음이 애절한 것은 베르테르의 하인이 보여주던 행동이었다. 주인인 베르테르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저 여행을 가기 위한 나그네처럼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 발길을 옮기고, 자신에게 소중한 장소에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댄다.

 

아침에 일어난 하인은 죽어가는 베르테르를 보자 부둥켜 않고, 알베르트와 로테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하면서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베르테르는 하인과 사용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것을 소설 내에서 알 수 있으며, 자기가 죽기 전에 가난한 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주기도 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달리 이성적이지 않지만, 인간을 사랑하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런 베르테르이기에 로테라는 여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보면 베르테르는 미래인에게 가까운 유형이었다.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과 서로 친분을 나누고, 비록 약혼했지만, 로테가 진심으로 베르테르를 사랑했었고, 용기가 더 있다면 알베르트의 약혼을 파기하고 베르테르와 같이 사랑할 선택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는 광기에 젖은 베르테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슬픔은 겉으로 보자면 로테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격렬한 키스를 나누려했지만, 그마저 무산되어 다시는 로테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슬픈 각오에서 베르테르는 시대적 벽에 갇혀 절망한 것이다. 베르테르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로테의 어머니는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고, 자신은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로테와의 재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격발한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소설은 누구나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설레겠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천할 각오는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그리고 그 낭만주의적 이상을 향하던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엄청난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위대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에게 격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죽음, 그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낭만주의 화풍이 강력한 이 그림에선 민중이 봉기하여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전진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외침은 보는 내내 내 귀에 들린다. 그 그림에서 여신의 뒤에서 권총을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베르테르가 선택한 것은 자연적인 인간이고, 알베르트가 선택한 것은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베르테르, 그의 죽음이 비극적이기에 낭만적이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냐하면 베르테르의 사랑이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기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서평을 적고 있을 때 영화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s를 들어서인지 마음에서 격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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