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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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이상한 사람의 정신인지 혹은 낯선 사랑의 정신인지? 아무튼 제목으로 봐서는 분명히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에서 학원물과 연애물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라이트노벨이지만, 라이트노벨로 하기에는 뭔가 큰 갭이 보인다. 작가인 마미야 나츠키는 어떤 인물인줄 모르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관점과 시각은 분명 이 작품 표지에 나오는 소녀인 사이케테이 리코로 대체된다. 사이키델릭이란 정신에서 그 말을 살짝 바꾸어 사이케테이, 즉 사이키한 인물로서 리코를 등장시킨 것이다.

 

역시 제목부터 정신이란 것을 내세울 때부터 조금 이상했지만, 막상 책을 열어보니 역시 그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책 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그의 제자이자 배신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란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신분석에 대해서 논하자면 기라성 같은 존재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구조주의에 영향을 끼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목인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의 소유자는 리코가 되는 것이고, 그녀는 마치 프로이트와 융을 꺼내면서 일러스트 표지 주인공 중 하나인 유우진을 자꾸 파헤치고 꺼내려 한다.

 

가령 이것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파리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되어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만든 라캉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물론 라캉에 대한 것은 구조주의 내지 후기구조주의를 소개하는 책으로 만나고, 대략적인 이론만 봤을 뿐이나, 그가 치료하는 방법 중에 환자의 뺨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뺨을 맞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면 그 치료는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서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즉 어느 문제대상이 감추고 있는 그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라캉이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적인 방법으로 리코는 유우진의 방어기제적인 요소를 간파하여 그의 벽을 허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인이란 별명과 함께 상당히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유우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문제로서 파괴한다. 기존에 갇혀있는 유우진의 고립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는 리코의 관계에서 리코의 정이라면 유우진의 반이고, 그 둘의 대립은 합으로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는 셈이었다. 그 부정을 부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리코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에 대한 재생이고 회상이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알 수 없는 깊은 아픔을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그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어 해소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 곯아 썩는 것이 인간이다. 육체적으로 세포가 균에 침식당해 몸이 곪아 가고, 정신적으로 더욱 고립되어 극단적 행위를 하게 된다. 유우진의 자살충동은 바로 정신적인 고립에서 발생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리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가령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다.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남자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인간은 근친에 대한 터부의식과 반드시 근친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가족에 대하여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유우진이 부모를 잃은 것은 8살, 그의 누나인 유우키는 초반에는 16살이고, 후반에는 17살이다. 작가가 실수한 것인지 번역과 편집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남매는 아직 마음이 여릴 때 부모를 잃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유우진는 누나인 유우키에 대해 친누나이지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우키는 달랐다. 그녀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도 잘 돌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유우진에게 어머니를 대신한 유우키 자신이 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대체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직장 상사와 불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면, 반대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서 된 것이다.

 

하지만 누나인 유우키가 아버지 같은 직장상사에게 마음이 빼앗기면 어머니 같던 누나 유우키를 잃어버린 것처럼 유우진은 질투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종말은 비극적인 살인사건과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유유키의 친구이며, 리코의 친구이자 부활동교사인 마호 역시 이 사건을 두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드러나기 싫은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유우키의 죽음에 대해 마호 역시 유우진에 대한 죄의식과 깊은 슬픔이 남아있었기에 리코는 유우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그 악몽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유우키를 대신하여 리코라는 이름을 유우진에게 넣어 주려고 했다.

 

결국 유우키는 가족이란 이름의 누나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누나(선배)로 대체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오토마톤처럼 유우키는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보였다. 유우진은 자신의 존재를 두고 실존주의적 모습은 세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와 분리되어 있기에 고독을 추구하는 한 마리의 늑대와 같았다. 그렇지만 유우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서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를 추구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간 누나처럼 자신도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코가 유우키의 죽음을 모방하여 유우진의 트라우마를 부수려 했다.

 

유우키는 유우진을 사랑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점과 그 유우키의 죽음에서 얻은 고통의 사슬을 끊고, 리코라는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서 상당히 인용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있었다. 기인처럼 문학가이자 시인인 괴테의 명언을 남기는 리코에서 리코가 보여주는 행동은 결국 유우진의 사슬을 끊어주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모하던 로테의 집에서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베르테르는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말한 사슬과 리코가 말하는 사슬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슬이란 말은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온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여 있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고 말이다. 리코가 유우진에게 계속 말하는 사슬은 결국 유우진이 세상을 살아가야 인생의 자유고, 그 사슬은 유우진의 고뇌에 자리 잡은 누나의 죽음이고, 그것을 이겨낼 방법은 사랑이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다보면 문학, 영화, 철학, 정신분석에서 나온 내용들을 많이 인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재미를 넣은 경소설이지만, 보통 일반 시중에 나온 왜만한 소설보다 더 깊이 내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때에 따라서는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는 순간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Blue>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Blue>라는 영화는 프랑스 삼색기에서 푸른색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다룬 것으로 여자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스스로 고립하기로 한다. 혼자만의 방랑 속에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바람피운 여자는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인 남자가 여자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나,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같이 남편이 남긴 악보를 정리하던 중에 서로에 대해 사랑하면서, 여자주인공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인간은 본래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감정을 두고 원시시대의 인간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즐겼다면, 사회가 생기면서 사랑은 인간의 사회성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슬이란 존재는 인간의 도처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 사슬을 끊을 방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란 점이다. 고립된 유우키는 자유보단 방종에 가까웠으며, 그것은 자유보다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지만 감옥은 유우키만 것이 아니었다. 유우진에게 말은 건네주는 이안과 유이, 유이는 과거 중학교 시절 어떤 여자아이를 왕따 시키는 집단에 속해있었다. 당시 유우진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자 반대표로 억지로 끌려나와 유우진에게 협박적인 말투를 내뱉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 공포를 맛본다. 인간을 속박하는 사슬은 도처에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인간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되는 비이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은 정신분석에 대한 내용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가는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연애 카운슬러로 활동하는 마호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자크 라캉이 남긴 말 중에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와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가 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그런 명제에서 리코는 항상 튀는 행동을 한다. 자신이 여자임에도 여자인 리코를 좋아하는 엔마 사나의 지나친 장난에서 리코는 옷이 물에 젖어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만약 보통 여자라면 가슴을 가리고 수줍은 얼굴로 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당당히 자신의 몸매를 뽐내는 그녀는 참 특이하였다. 아니라면 엔마 사나가 아방가르드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리코 자체가 아방가르드, 즉 반미학적인 전위성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우진을 구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사회성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규격화 일반화 획일화를 강요한다. 상대방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다른 언행을 보여주면 바로 낙오시키거나 차별한다. 이런 것을 두고 집단주의의 한계성인가? 자신들이 옳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틀려야 하고, 어긋나야 한다. 인간은 겉으로 예외의 존재를 부정해도 속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야지 자신들이 단합되어 정의의 이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이안은 제대로 헤쳐 나오지 못했고, 유이는 그들의 일부가 되어 유우진을 공격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사고방식을 부수는 색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사랑으로서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책 제목이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아닌가 싶다. 1권에서 유우진에 대해 리코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를 사회적 존재로 변모시켰다. 남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유우진에서 2권에서는 유우진의 새로운 인생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성세대 관념적으로 매우 위험한 부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유우진 옆에 계속 머문 이안과 리코 옆에 계속 있던 사나에 대해서다. 리코 친구 사나는 남자처럼 행동하나 사실 여자였고, 이안은 남자인 유우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안은 감정적인 모습이 드러내고, 사나는 매우 차갑고 냉혹한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융이란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 있고, 여성성 안에도 남성성이 존재한다. 이안이나 사나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상대적인 성별에 대한 심리적 왜곡이 내재되어 있다. 라이트노벨이라도 환상과 마법, 공상과학을 배제된 평범한 학교공간에서 다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다소 과장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이야기에서 차용된 모티브들은 분명 지금이라도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고 있을법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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