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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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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인물은 독일 근대문학의 거두를 지나 독일 그 자체를 나타내어주는 대문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독일이란 국가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 비해 언어적 표현력이 떨어지는 국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언어는 마치 산 위에서 흐르는 강물이 계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강물은 거대한 하천이 되어 바다와 마주하는 연안과 같은 느낌이다. 거대한 물결이 강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오고, 그 강물을 받은 바다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거대한 파도가 반대로 올라가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을 삼킬 것 같은 기복이 찾아온다.
괴테라는 대문호의 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이 뛰며, 그의 글을 정체되어 있지만, 그의 글을 읽는 나의 머릿속에는 큰 영상이 올라온다. 일단 출판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괴테는 Strum und Drang라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중심지였다. 그의 글은 낭만주의이었고, 계몽사상과는 전혀 다른 글이었다. 괴테가 논하길 볼테르로서 한 시대는 끝이 나고, 루소로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한 것처럼, 괴테는 자신의 손에는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영혼 속에서는 루소가 있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19세기의 유럽에서 루소의 사상이 문학적으로 움을 튼 것이었다.
그런 낭만주의적인 글이었는지, 또는 괴테가 루소를 무척이나 동경했는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순간 루소가 생각났다. 처음 베르테르가 주무관 집에 방문하였는데, 그 집안은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서 제일 큰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동생의 수는 여덟 혹은 아홉 정도 보였다. 그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로테 옆에 앉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가 우드토 백작부인에게 열광하여 그것에 대한 사랑과 좌절로 인해 <신 엘로이즈>를 만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마음과 열정적인 감정과 그리고 숭고한 이상을 가진 베르테르는 안타깝게도 로테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사모했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은 괴테가 아마 2번의 사랑에 실패한 이력이 있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가장 처음 사랑한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괴테가 처음 약혼한 여성과 약혼이 파혼되어서 그런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베르테르가 땅 속 깊이 사랑하던 여인의 관을 묻은 것 같은 것이다.
로테와의 사랑은 해설서에 나온 것처럼 2번째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 자신과 알고 지낸 남자의 약혼녀라는 점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에게 슬픔과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이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로테, 사실 괴테가 2번째로 사랑한 여인의 이름은 샤를 로테 부프라는 점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히로인의 이름은 곧 괴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것이고, 괴테는 마음을 죽인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이란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체나 영혼이나 서로 다름없다는 점에서 육체적 베르테르의 죽음은 정신적 괴테의 죽음을 승화시킨 것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괴테가 선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삶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또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열정과 도취가 숨을 쉬고 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는 1774년에 출시된 점을 보면, 아직까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계몽주의라는 이성적 인간과 그에 반대되는 반계몽주의 또는 낭만주의는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과 감정 앞에서 무엇이 우선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괴테의 작품의 낭만주의는 루소의 <에밀>에서 표현한 것처럼, 베르테르가 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과 솔직한 모습을 두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로테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순수하고 선한 아이들이 로테의 손에서 자애롭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서로 장난치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베르테르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서 보여주는 것이 자연적이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베르테르는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흠뻑 취하기도 하고, 마을에 처음에 올 때 마을 어린아이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베르테르는 높은 귀족집안의 아들은 아니지만, 집안 자체가 일반 농민보다 신분이 높았기에 베르테르를 처음 본 아이들은 두려워하거나 경계했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자, 어린 아이들은 모두 베르테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또한 베르테르는 마을 우물가에 어떤 처녀가 물을 기르러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물통을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란 점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테르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베르테르의 그 자연적인 감정이란 바로 단순히 괴테가 베르테르로 통해 위험하고 허무하며, 애타는 사랑만 적은 것이 아니었다. 소설 내에서는 순간적으로 베르테르로 보는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베르테르가 사랑하던 로테는 사실 이미 알베르트라는 혼약자가 있었고, 베르테르는 로테를 너무 사랑하기에 잠시 그 마을에서 잠시 떠난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공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백작을 알게 된다. 그 백작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으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고, 베르테르와 마음이 맞았다. 또한 베르테르는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인 B를 만났는데, 그 B양은 마치 로테와 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그리고 우아한 마음까지 가졌기에 베르테르는 B양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자신과 친한 공작과 같이 무도회에 갔으나, B양은 베르테를 보고도 안절부절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백작도 난처한 표정을 지은 후에 베르테르에게 미안하다면 무도장에서 집으로 가길 부탁했다. 그 이유는 당시 공작이 살던 사회는 귀족들의 상류계급 문화가 존재했고, 베르테르는 그곳에 합당하지 못하여 배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베르테르는 거기서 나온 것이 홀가분했고, 그런 사람들이랑 있는 것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하지만 B양의 불친절함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 이유는 B양은 원래 귀족집안의 후예고, B양과 같이 사는 숙모는 그런 베르테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베르테르로 보는 귀족사회에 대해 그들이 무능하거나 재력이 없거나 또는 교양이 없어도 단지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그것에 안주하여 교만 방자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 간의 평등이 되지 않았지만, 평등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베르테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평등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역시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좋은 친구로 여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이성적 지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성보다 자연적인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자면 알베르트는 기존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루소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대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사실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정만 비판할 뿐 그 외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프랑스 정치권력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대안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성적인 지배에서 권력은 지식을 동반하고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므로 지식이 없는 평민들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말싸움에서 베르테르는 인간의 감정에 의한 극단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말에서 “절도는 물론 죄악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으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해야 하나요, 벌을 주어야 하나요? 놀아낸 아내와 그 원수 같은 유혹자를 격분한 나머지 죽인 한 남편에게 누가 맨 처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도취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몸을 맡긴 처녀에게 누가 맨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냉혹하기 짝이 없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계측기일지라도 필시 감동되어 그에 대한 형벌을 보류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인간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단순히 자신의 욕심보단 정열에 의해 몸을 던지 인간을 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런 사람을 두고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자살에 대해서는 위대한 행위에 비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나약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지지 않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걸 나약함이라고 말하는 거요? 표면만을 보고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오.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 당신은 그들을 감히 약자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무거운 짐짝을 척척 운반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통이 터지 나머지 여섯 명이나 상대해서 보기 좋게 때려 눕히는 사람을 약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봐요 인간의 노력이 힘이라면 어찌하여 이러한 극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베르테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물결에 움직인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남을 위해 싸우고, 특히나 폭군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궐기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맨 첫 장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난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
괴테의 마음 즉 영혼에 루소가 숨 쉬는 이유는 바로 저런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적 성향이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열정적인 사나이고, 자연을 사랑하고 찬양하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인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는 강렬하고 아름답고, 보는 내내 마음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나오는 문체는 아직까지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하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낭만과 낭만주의의 낭만은 다르다. 그 시대의 낭만은 자신의 진실을 몸과 마음으로 다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굳은 결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만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 TV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위해 비싼 차를 끌고 와서 성대한 이벤트는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의 자본력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진정한 낭만주의는 베르테르처럼 자연을 찬양하고, 시를 열정적으로 부를 수 있으며, 거짓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는 진정 베르테르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고, 혹은 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베르테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의 죽음이 애절한 것은 베르테르의 하인이 보여주던 행동이었다. 주인인 베르테르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저 여행을 가기 위한 나그네처럼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 발길을 옮기고, 자신에게 소중한 장소에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댄다.
아침에 일어난 하인은 죽어가는 베르테르를 보자 부둥켜 않고, 알베르트와 로테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하면서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베르테르는 하인과 사용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것을 소설 내에서 알 수 있으며, 자기가 죽기 전에 가난한 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주기도 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달리 이성적이지 않지만, 인간을 사랑하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런 베르테르이기에 로테라는 여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보면 베르테르는 미래인에게 가까운 유형이었다.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과 서로 친분을 나누고, 비록 약혼했지만, 로테가 진심으로 베르테르를 사랑했었고, 용기가 더 있다면 알베르트의 약혼을 파기하고 베르테르와 같이 사랑할 선택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는 광기에 젖은 베르테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슬픔은 겉으로 보자면 로테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격렬한 키스를 나누려했지만, 그마저 무산되어 다시는 로테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슬픈 각오에서 베르테르는 시대적 벽에 갇혀 절망한 것이다. 베르테르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로테의 어머니는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고, 자신은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로테와의 재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격발한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소설은 누구나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설레겠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천할 각오는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그리고 그 낭만주의적 이상을 향하던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엄청난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위대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에게 격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죽음, 그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낭만주의 화풍이 강력한 이 그림에선 민중이 봉기하여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전진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외침은 보는 내내 내 귀에 들린다. 그 그림에서 여신의 뒤에서 권총을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베르테르가 선택한 것은 자연적인 인간이고, 알베르트가 선택한 것은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베르테르, 그의 죽음이 비극적이기에 낭만적이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냐하면 베르테르의 사랑이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기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서평을 적고 있을 때 영화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s를 들어서인지 마음에서 격동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