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들어가기 전에

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 내지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인지하면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란 것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어느 지역에 위치한 관광명소나 혹은 그 고장에서 나오는 상품 등을 하나의 이야기를 부여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지, 또한 자신들이 선보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주는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상품이나 관광명소가 우월하고 탁월해도 그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상품에 대한 가치를 두고 현대사회는 본래 그 상품이 정말 가치가 우수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면 모른다는 것이다.

 

관념론적인 용어일 수 있겠지만, 실제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를 우리가 인지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 실존하는 상품은 그 실존하는 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전제 아래 실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상품을 하나의 가치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것은 홍보와 광고이며, TV와 각종 미디어로 알려진 상품은 그 상품에 대한 가치로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에 대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만들어진다.

 

현대사회에 말하는 소비사회란, 즉 이미지로 통한 소비, 기호로 통한 소비다. 예를 들어 내가 읽은 서적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인간이 착용하는 의상은 그 나라와 기후에 따라 의상형태가 바뀐다. 여름에는 더위를 줄일 수 있는 얇고 가벼운 천을 소재로 의상을 만들고, 겨울에는 두껍고 추위에 강한 의상을 만든다. 하지만 겨울이란 날씨에 우리는 그 계절적 속성에 어울리지 않은 의상을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겨울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여성들이 짧은 미니스커트 내지 핫팬츠를 입는 경우가 있다. 그 의상들은 겨울이란 계절적인 조건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옷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킹이나 레깅스와 같은 의상을 보조로 하여 길가를 왕래한다.

 


그렇다면 의상은 기능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요소로서 기동하며, 그 기동성에는 이미지라는 인간의 정신적 매체에 의해 존재되어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로 매개로 되어 현실에 드러나는 스펙타클이란 점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통해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을 보여주기보단 그것에 맞추며 살아간다. 물론 그런 요소는 한겨울의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여름용 청바지보단 천으로 만든 여름용 신사바지가 더 시원하겠지만, 여름용 신사바지보단 여름용 청바지를 젊은 남성층은 선호한다. 즉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서 자신의 사회적 객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브컬처에 논하는데 있어서 대중문화의 상품과 문화콘텐츠 그리고 소비사회의 이미지라는 기호적 소비가 왜 화두로 꺼내는 것인가? 결론은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라는 서브컬처 속에는 서로 다른 분위기와 흐름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인간이 원하는 것이나 또는 인간이 마주해야할 상황과 운명을 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으로 들어가기에 대중문화로서는 대중이란 집단에 대한 관찰이 가능하고, 서브컬처로서는 그 근원적인 이야기의 본질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비평에 대하여

비평이란 단어는 참으로 어려운 의미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비평하면 어떤 것을 작품을 보고 그것에 대해 관람자가 자신이 본 주관적인 비평을 인식주의 비평이나 또는 어느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나 감동을 주는 특징을 찾는 것을 형식주의 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평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본래 비평이란 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판단에서 전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납적이든 혹은 연역적인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주관적인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주관적인 인간들이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의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다고 모두가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만약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에서 백조에서 검은 색 내지 노란 색을 가진 종이 나올 수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동물의 색에 따라 종의 명칭을 붙였는데, 다른 색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 경험주의적인 관찰도 좋지만, 그 관찰이 100% 옳은 수는 없다. 비평적 관점은 100% 옳은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틀리는 것이 아니다. 결론은 비평적 관점도 객관적이나 그 객관성 내에도 주관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이야기 소재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도 각자의 작품을 보면 다른 관점을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조차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비평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간단히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지식적 범주와 인식적 범위는 각기 다르다는 점이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만화 등과 같은 문화콘텐츠라도 그 작품에 대한 배경적 지식과 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지식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크게 차이날 수 있다. 비평이란 문화적인 요건에서 아직까지 국내 상황은 주로 문학과 영화에 치중되고 있으며, 문학은 대중문화적인 요소와 더불어 고급예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영화는 대중문화의 일부분으로 크게 활용되고 있다.

 

영화는 또한 대중문화로서 시간 죽이기(Killing-Time)로서 매우 탁월하게 적용되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영화관에 이미지로 매체로 그 영화가 실재하지 아니한데도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스펙타클화를 이룩한다. spectator라는 열렬한 관중들은 자신들이 환호성을 올리면 올릴수록 정작 본인은 스스로 구경거리에 몰입하는 부외자로 된다.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빠지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타인에 의해 조작되어지는 허수아비 내지 바비 인형으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작품을 관람하는 이상, 그 작품에 대하여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읽으면 비평가의 의무라는 편이 있다. 벤야민이 논하기를 “우리가 점점 생장해 가는 작품을 비유적으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라고 본다면, 해설자는 마치 화학자처럼 그 앞에 서 있고 비평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설자의 경우에는 다지 나무와 재만이 그의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비평가의 경우에는 그 불꽃 자체만이 하나의 수수께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비평가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지나간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재위에서 아직도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 생생한 진리를 물어 보는 데 있다(372~373페이지 <발터 벤야민의 비평개념과 예술개념>).”라고 되어 있다.

 

비평가라는 연금술사는 단지 그 영화라는 필름만 분석하여 나열하는 게 아니라 필름 위에서 춤을 추는 영상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알아가는 것이다. 다른 장르는 둘째치더라도 영화라는 영상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책은 우리 인간은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영화는 사람들은 읽기보단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는 다른 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영화읽기가 가능한 만큼 영상매체 중의 하나인 애니메이션이나 또는 애니메이션의 원류가 되는 만화나 최근 흥행중인 라이트노벨은 단순히 보기를 떠나 읽기가 가능한 콘텐츠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따라서 흔히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영화읽기가 구조주의-기호학이란 것에서 도입되었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같은 서브컬처 역시 그런 관점을 통해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평은 위에서 인상주의 비평이나 또는 형식주의 비평을 언급했지만, 사실 비평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그 비평에 해당되는 관점은 매우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구조주의 비평 이전의 비평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있으며, 영미의 신비평, 여성주의 등 다양한 비평적 관점이 존재한다. 비평이란 것은 어느 작품에 대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는 것이 맞는가를 찾아봐야할 것이다.

 


어떤 유치한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철학적인 담론이 존재하고 있으며, 문학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상매체 역시 Narrative라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비평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거기에 게임과 코스튬플레이 세계는 아직까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세계이며, 여전히 서브컬처라는 오타쿠 문화라는 이유로 멸시당하고 억압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서브컬처는 대중문화와 달리 근원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 본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진부한 Cliche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 원인은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은근히 영화내용과 영화인물 그리고 영화문화에 기대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그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스토리를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인스톨을 시켰다. 그리고 위기라는 심리적 배반에 의해 조성된 기대심리를 클라이맥스로 이어져 마지막에는 정반의 변증법에서 합이라는 결론으로서 즐겁게 극장을 나온다. 화면은 눈을 자극하여 극장가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영화는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영화의 스토리나 인물은 기억해도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아니라면 인상 남는 장면이나 인물에 대해 회상하며 후기를 쓰거나 또는 사진이나 그림을 포스트의 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리뷰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인가? 후기인가? 단순히 보자면 후기가 될 것이고, 감상적 리뷰 혹은 자신만의 경험에 의한 인상주의 비평이 되겠지만, 비평이란 단어 대신 감상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글들이 인터넷에 넘친다는 점이고, 적당히 스토리만 찾아 그것에 대한 나열과 배치만 하여 작품 내에 가진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매우 많다. 물론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술자가 제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한계성이 도달할 것이다. 단지 그 한계성은 작품에 대해 비평을 넘어 작품을 만드는 그룹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다.

 

③ 서브컬처 비평의 문제점

서브컬처에 대해 비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유는 그 공간이 너무 좁다는 점과 아직까지 이런 세계에 대해 다들 낯설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기를 좋아한다. 그런 점은 위에서 지적한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자신의 한계성 내지 작품의 한계성으로 인해 발생되는 직설적 공격, 즉 비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브컬처의 비평이 제일 어려운 이유는 기본적으로 비평을 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점이다. 비평하는 것은 결국 영상매체 내지 문화콘텐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적인 수준을 겸비해야 한다.

 

가령 한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3번째 오타쿠 붐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 본인은 포스트모더니즘 내지 해체주의적인 미학을 연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칭호는 포스트모더니티적인 감독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불안정한 시대적 모습과 청소년들의 심리를 표현했다. 안노 히데아키가 그런 철학도서를 보고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본인과 애니메이션 스텝들이 가지는 심리적 요소가 작품 내로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감독 본인은 그것을 이해하고 만들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의 해체주의적인 미로서 볼 수 있는 것은 철학자들은 세상의 원리를 발견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철학자 중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철학자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온 것처럼 안노 히데아키가 만든 작품들이 굳이 그가 어려운 인문도서를 옆에 차고 있지 않아도 그런 내용을 만들 수 있던 것은 안노 히데아키라는 인물이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분석하기 이전에 우리는 안노 히데아키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의식과 무의식적 의도가 담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것에서 읽어내려면 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작품 내에서 감독이 일부러 패러디(풍자적 모방) 내지 페스티쉬(유희적 모방) 또는 오마쥬로 연출할 수 있고, 그 작품의 모티브가 자신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의도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존 로봇 메카닉 장르에 큰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명제는 정의의 추구이고, 절대적인 의지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이다. 형이상학적 미라는 절대적인 가치 아래서 주인공이 선(善)의 대변자가 되어 악(惡)을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그리고 적이라고 불리는 사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사도라는 적인지 아니면 가까운 인간인지 구분이 모호하게 해준다.

 

특히나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더불어 오이디푸스신화의 반입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선 오이디푸스신화를 알려면 그리스비극에서 아주 유명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를 알아야할 것이며, 오이디푸스신화로 통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역시 파악해야 한다. 즉 인간의 무의식적인 성적인 욕망과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되는 문제까지 말이다. 덧붙이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에 대한 대립관계구도가 나온다. 가족이란 구성체가 안정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문제점의 시작점이란 점에서 이 작품은 기존에 가진 로봇애니메이션의 가치를 해체시킨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것과 이러하지 않은 관점으로 같은 작품을 보는 것은 큰 전환점이 이어진다. 서브컬처의 비평에서 가장 힘든 과제는 애니메이션 마니아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영화나 문학 등과 같은 전공자가 참여하거나 또는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이야기를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일부 인터넷에 존재하는 리뷰어의 글에는 비평적인 관점보단 작품에 대한 줄거리와 인물소개, 그리고 개인적 감상문에 불과한 글들이 넘친다. 물론 그들의 활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그들이 자신만의 글을 적는 것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비평이란 것은 그런 개인적 주관으로만 가득한 글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 작품에 대한 제작진 내지 감독, 그리고 유사작품을 데이터베이스화 시킨 것 역시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비평의 관점에선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여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평문화에 대해 한국 자체적으로 활성화 되지 않은 것이 문제이며, 비평문화가 활성화된 곳은 인문학과 영화에만 치중된 것이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비교하여 그 종류와 콘텐츠가 활발하지만, 대중들의 외면(웹툰과 같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는 활성화)과 전문가들의 무관심, 그것을 소비하는 향유자들의 거리감으로 인해 하위문화에 대한 비평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위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즐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우아한 취미를 가졌다는 착각을 가지며 살고 있지만) 하위문화라는 것은 오타쿠라고 멸시하면서 아직까지 어른이 덜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현실이고, 정작 그런 부당한 현실에 처해진 향유자들은 그런 현실로부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거부하며, 심지어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조차 낯설게 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가 내지 연구자들은 향유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위문화 그 자체에 대한 비평과 하위문화 향유자들이 소비하는 작품에 대한 비평이 어려운 이유는 아마 이런 사회적 구조와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④ 어떻게 비평해 나갈 것인가?

서브컬처 비평이 어려운 이유는 그 문화적인 산업규모가 국내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점과 그것을 비평할 수 있는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나 언론학, 영화학, 영상학 교수나 전문가들이 글을 적고 있지만, 그 규모나 수는 매우 저조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서적 역시 많지 않다. 물론 출판되어도 일반 서점가에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경우도 많으며, 설사 있다고 해도 직접 구매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하여 읽는 경우도 드물다.

 

비평이란 것은 창작과 달리 직접 비평하는 사람이 스스로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만화애니메이션 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단법인을 조직하여 활동하거나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평가란 조직은 따로 구성되어 있지 아니하며, 그나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평은 감상 내지 후기, 리뷰라는 카테고리로서 글이 저장되나, 비평적 가치를 드러내는 글이 아니라 의미가 모호한 리뷰로 들어가는 현실이다. 리뷰라는 것은 Review, 즉 “다시 보다.”로 될 것이고,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면 감상과 비평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네이버사전에서 Review라는 것은 비평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비평을 한다는 것은 리뷰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국내 커뮤니티에서 비평은 Critical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리틱이란 비평가가 보는 비평이란 좋지 못한 방향으로 논평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긍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본다면 Review & Critical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 나갈 수밖에 없다. 비평이란 것은 단순히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서 무엇을 더 볼 수 있는지도 관찰해야 하는 점이다. 작품 내의 이야기로 모든 것을 결부 짓을 수 있겠지만, 작품 외로 이어지는 세계를 넘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평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만으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적는 방법은 자신이 추구하는 성향이나 혹은 편집자나 독자의 성향을 반영하여 움직일 수 있으나, 비평이란 본인 자신이 편집자로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소설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충고에 따라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할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비평이란 것은 미학과 같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삶을 빛의 굴절처럼 바라본다면, 미학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가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비평이란 철학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며, 철학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한다는 것처럼 철학적 사상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문제다. 영화에서 말하는 구조주의사상이 프랑스 사상가인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롤랑 바르트,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로 이어졌으며, 구조주의 이전에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 소쉬르가 존재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경우 낭만주의 사상가인 루소까지 이어진다.

 

이런 철학자의 도식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철학이 세계의 변화를 주기 전에 먼저 그 변화를 주기 전에 세계 그 자체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을 감상하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면 그 세계관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평적 입장을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비평은 철학에서 시작되므로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먼저 서사에 대한 연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을 읽음으로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역사라는 개인의 이야기이며, 그 개인은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시라는 이야기는 정해진 주인공이 실존하던 인물이 아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혹은 인간의 욕망과 터부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이라면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해질 수 있는 계기가 도래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은 비록 환상적인 이야기나 표현이 많으나, 그 자체가 하나의 시라는 이야기이므로 우리에겐 하나의 개연성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개연성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개연적인 부분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에서 기존의 관념 안에서 만든 작품은 모더니즘이라면 그것은 해체, 보완, 추가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다. 최근 애니메이션은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 기법을 다 적용하는 추세이므로 그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 낯선 것은 아니다. 단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적 근본과 그 사상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일단 위에서 언급한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이다. 선과 악의 해체, 절대적인 미를 추구할 주인공파일럿의 혼돈, 불완전한 결말과 이야기 흐름은 해체주의 특성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래서 비평이란 관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활습관이나 삶의 축척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한 관점과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또한 만화, 애니메이션은 그림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전문용어를 상황에 따라서 이해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의 미학이므로 영화용어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들을 파악하고 서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노력과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비평은 남에 의해 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클 수밖에 없는 분야다. 남의 비평문을 보고 따라 적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남의 비평문으로 통해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해석과 관련하여 비평하고자 하는 당사자는 미학적인 요소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 철학자는 미학자로서 글을 쓰며, 미학의 기본적인 틀은 철학으로부터 시작이다. 그렇기에 미학적 관점을 가진다는 점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하위문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라이트노벨의 경우 국내 문학과 및 문예창작학과 전공자들도 참여하고 있어서 사실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은 충분히 미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러나 모든 하위문화 콘텐츠를 쉽지는 않으나 충분히 다룰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코스튬플레이의 경우 다른 서브컬처와 달리 콘텐츠를 영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인간이 연기하거나 혹은 그 연기했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영상매체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작품을 비평하는 것만이 아니고, 작품을 만든 제작사, 감독, 각본, 작가가 아니라, 그 사진이 찍히는 당사자라는 점이 어려운 난관점이다. 칸트의 <판단력비판>과 같이 미에 대한 연구에서 미란 외형미와 내재미를 두 가지를 다 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지나칠 경우 다른 미적 영역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국내 코스튬플레이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본다면 코스튬 플레이문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에 의한 피사체가 많다는 점이고, 이 피사체라는 코스튬플레이를 촬영하는 부류는 여성보다는 남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외형미적인 요건에서 외모와 몸매 등은 충분히 촬영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인간이 가진 성적 무의식적인 요소에서 아니마(Anima)라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에서 남성은 자신들의 무의식에서 원하는 여성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릴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른 입장에 놓인 상황이라면 부조리하겠지만,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를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에서 외형미가 내재미보다 크게 상회하면 그 사진은 단순히 코스튬플레이로 통해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것보단, 단지 자신의 미모를 조금 더 귀엽게 예쁘게 섹시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자신의 얼굴은 그대로 가지고 있겠지만, 자신이 정작 쓰고 있어야 할 가면(코스튬 플레이하고자하는 캐릭터)은 없고, 단지 자기의 얼굴만이 남는 것이다. 촬영자가 촬영할 때 피사체를 촬영할 때, 그 피사체가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작품의 캐릭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그 당사자만이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하지만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몰입은 오로지 코스튬 플레이어만 할 수 있다. 문제는 코스튬플레이어가 추구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미소녀라는 점이다. 미소녀캐릭터에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언제나 좋은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하고 싶어 하기에 많은 코스튬플레이어들이 같은 작품의 같은 인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내용보단 명확하게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기에 타인과 상대해야하는 인물들에겐 항상 카리스마적인 요소나 가와이이한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처럼 코스튬플레이문화에서 레디-메이드라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을 본다면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대중들이 향유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근원적인 요소는 다르지 않은 점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가와이이한 요소는 귀여운 미소녀로 볼 수 있겠지만, TV에 등장하는 아이돌가수나 연예인에게도 적용된다. 그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기에 단지 보는 대상이 다를 뿐 그 안에 내재된 욕망은 같다는 점이다. 현재로서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비평문화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며 일부 의상학, 만화애니메이션, 언론학 관련 학과나 학회에서 논문이 드물게 나오는 수준이다.

 

논문을 참조하자면 코스튬플레이에 대해 비평하자면 인류학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변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코스튬플레이의 기원이 어느 영웅의 옷을 따라 입어 그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즉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과 동일시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스튬플레이를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매우 주술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원래의 근원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라면, 지금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미디어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환경에서 원하는 대상은 하나이나, 그 대상이 되고자하는 인원은 매우 많다는 점이다.

 

대상이 실존하고, 그리고 인격이 가진 그 자체만으로 비평의 관점은 상대에 따라 큰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 있으며, 외형미에 치중하는 부류라면 상당히 어긋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외형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재미를 추구하지 않은 것이 코스튬플레이문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에는 그로테스크한 연출이나 상황이 매우 많다. 그로테스크란 인간이 보기엔 낯설고 역겨우며, 매우 혼돈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충격이야 말로 인간이 기존에 가지지 못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을 만든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유치한 장르라고 지탄받아도 그래도 프랑스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더불어 제7의 예술로 인정받는다. 예술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어떤 이미지가 나올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학이란 말이 있다. 그 미래의 윤리학의 원천이 되는 상상력, 이미지가 현실로 바뀌는 일들이 종종 보곤 한다. 이미지가 에너지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문학적 요소가 들어간 라이트노벨이 미래사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콘텐츠다. 그런 문화콘텐츠에 대한 이해와 판단으로 이들이 나아갈 길을 더 넓고 다양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비평은 작품을 만드는 자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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