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행복의 조건에서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구조 사회에서는 아마 돈이 많은 사람들로 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라는 것으로 행복 그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행복은 돈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할지 모른다. 경제가 모든 인간의 불평등의 시작점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간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지 문명의 이기심이 그늘지고, 누군가 부유하면 누군가는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인간에게 문명의 진보가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 오히려 기계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더더욱 착취와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일상의 반복에 의해 기계적인 존재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정말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타샤 튜더의 삶이 녹아있는 그녀의 집과 풍경을 소개하는 <타샤의 정원>이란 책을 보며, 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다. 타샤 튜터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온 삶은 돈이나 세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튜더 가문의 집안, 즉 영국 왕가의 후손으로 영국에 살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녀는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위적인 문명의 손길보단 19세기 미국이 이제 정착민들이 힘차게 살아가던 그 건축과 생활 도구들이 즐비했다.


후기에 나오듯이 그녀의 집은 마치 1800년대 시대의 1800년대의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맨발에 의상도 fast-food가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로 가득하다. 책에 거론된 것처럼 타샤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반까지 가장 자연주의자로서 살아온 인간일 것이다. 나 역시 삶의 가치는 자연주의를 추구하지만, 그녀처럼 살아갈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하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바라보는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화폭과 같다.


현실의 사물들을 그대로 촬영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꿈나라의 요정들이 사는 세계와 같았다. 꽃이 계절별로 시기별로 화려하게 피우고, 맛있는 산열매와 들열매는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아무런 투쟁과 혼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것은 나에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라고 할 것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타샤의 책은 당연히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렇게 살기 위한 여유가 없을 것이고, 그런 여유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살아갈 용기도 없을 것이다. 타샤의 삶이 타샤만의 것이 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이 있는 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평화적이고, 마음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 앞에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자유와 평등이란 정의적 가치는 항상 우리 인간사회에 이상적으로 논하지만, 실재 그것이 제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하여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한다.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 사람이 모이더니 결국 가게가 생기고 도로가 생기며, 마지막엔 볼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게 테이블에 놓여있는 메뉴판이 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예전에 읽어본 서적 1권이 생각났다.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이다.


루소는 말년에 파리사람들의 비웃음과 음해를 피하기 위해 시골로 오고,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가 식물을 채집한다. 가지고 가는 것은 연필과 종이가 든 가방과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 루소는 산과 들로 나가 식물들을 바라보며 그 식물의 효능이나 이용성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식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세심하게 그린 식물의 잎과 줄기, 그 식물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으로 가득한 글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타샤의 집 역시 그렇다. 계절과 시기가 바뀌면, 각종 식물의 색이 바뀌고, 나무에는 많은 꽃들이 만개하며, 그 꽃이 지면 풍요로운 과실이 맺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웃과 같이 나누어 먹고, 파티를 열어 모두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나에게 저런 삶을 찾아볼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런다고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느 골목길에 콘크리트 담벼락 너머로 나와 있는 목련이나 동백나무의 잎사귀와 꽃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봄이 다가오는 자락에 각종 색들이 만발한 산과 들을 보는 것 역시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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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이란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들을 말하나, 사실 장난감은 우리 어린 아이들만이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어른들이 가지고 노는 것일 수 있다. 장난감은 영어로 toy, plaything로 사용된다. 다 큰 여성들도 인형을 수집하거나 다 큰 어른도 게임기를 장난감을 사용한다. 장난감이란 단순히 아이들만을 위한 물건만이 아니다. 단지 아이들이 좋아할 뿐이다. 문제는 장난감이 성상이 플라스틱이나 나무, 금속 등과 같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장난감에 첨부된 성분이 벤젠, 페놀, 카드뮴, 납 등과 같은 매우 해로운 것들이 들어갈 경우가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장난감을 한자 단어로 적절히 사용하면 玩具 製品이다.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완구제품이라고 하고, 완구세트라고 한다. 그런데 저 제품이 완벽하려면 우선 성분이 전혀 사람들에게 위해성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제조사가 유명한 레고가 아니라 (주)三靑이고, 좋은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장난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주)三靑의 경비능력을 배양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장난감으로 통해 성공하기보단 경비능력으로 성공한 三靑은 玩具 製品에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조과정에서 실수로 납과 카드뮴, 벤젠 등을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원래 벤젠과 카드뮴, 납 등은 인체에 들어가면 암에 걸리거나 골수에 악영향을 주어 빈혈이나 뼈 조직이 약해지고,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 중독에 의한 병인데, 이타이란 아프다는 일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玩具 製品 출시를 결정한 업체는 (주)三靑이 아니라 거대기업 (주)新世界 주주총회로 통해 판매가 가능했다. 우리 어린이들 같은 사람들은 불량한 玩具 製品에 노출되었네요. 문제는 필요한 사람이 구매가 아니라 억지로 반 강제적으로 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오늘 뉴스 보시고 느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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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혹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가는 존재다. 그 존재라는 것은 공간 위에 의해 처음 생성되겠지만, 이후 시간적인 기능으로 기록된다. 즉 인간의 시간이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인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더라도,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 영상은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이 생겼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영상들은 모두 기록되어 녹화되어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거나 역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거나, 그 재생된 시간처럼 자신의 시간이 같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자유자재로 변해도, 그 시간을 조정하는 인간과 그 시간이 조정된 콘텐츠를 보는 인간 역시 비가역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역사라는 말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지나간 것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연결되어 있는 사슬처럼 연속된 하나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흥행한 영화 <변호인>에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이 작품 설정상 등장한 적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기에 현재 우리가 다시 접하고 판단할 수 있다. E.H 카는 역사에 대해 역사가의 의무로서 생각하겠지만, <굿바이 E.H 카>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에 의해 정립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민중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역사라는 것은 누구나 자신에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 가치관이다. 인간이 살아온 현재는 결국 과거의 시간이 축척되어온 하나의 과정인 점에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사를 본인의 영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현대인들의 정체성에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라 과거 우리 수많은 인류가 부딪힌 문제였다. 하지만 현대사회 인간에게 역사라는 가치는 그저 지루한 소재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통계조사 젊은 세대로 넘어갈수록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언제 일어나고 그것에 대한 경위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950년 한국전쟁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1905년 을사늑약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자주권, 그리고 이어지는 1910년 한일병합 같은 일들이다.

이런 근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도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현실에서 이제 그 이전의 시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은 이상 어떠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린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은 성찰과 비판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최근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장르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회 네이버카페 애니큐어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 6번째가 “역사적 소재와 만화애니메이션의 만남”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역사적 소재에 의해 만화애니메이션만 논하는 것은 조금 부적당하고 여기고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이란 것은 하나의 서사를 가진 매체이고, 문학소설이나 TV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은 다수의 미디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록한 fact이다. 하지만 fact란 만들어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가 있고, 자신이 속해있는 진영이나 국가, 사회에 따라 기록은 달라진다. 한국의 역사에서 아직까지 고조선에 대해 논란이 쌓여 있고,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에서 한반도 북쪽으로 넘어서지 못한 것이 과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의 민족에서 원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북방과 남방이 섞여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시조가 단군이라면,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보존한 국가는 고구려로서 한국의 선조는 북방 계열인가? 아니면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 살아남은 남방 계열이 선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류학적으로 북방민족의 기원은 자신들의 토지가 적합하지 않기에 사냥과 승마에 능하고, 남방민족은 비옥한 토지가 있기에 농경문화가 잘 정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가야왕국이 김해평야인 점에서 식량과 물의 관계는 문명과 국가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역사적인 요소에서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 혹은 문화적 상황, 기후와 토양, 식량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우리에게 그 역사라는 과거의 유산들이 이어져 내려온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나, 지금 우리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역사와 역사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소재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요소에서 문화콘텐츠 관계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최근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 어느 드라마를 방영하거나 혹은 어느 영화를 상영하는데, 누군가 강력한 스포일러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가령 <정도전>에서 조선개국공신이 정도전이 죽고,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는다는 점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각각 등장하는 주인공이 죽는 것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어버린 현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쇼를 보려는 관객에겐 짜증나는 스포일러이겠지만, 일반 상식수준 정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도전이나 이순신 모두 역사적 인물로서 한 사람은 조선개국 이후 왕과 신하의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죽어야 했고, 한 사람은 과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대결하다가 죽게 된다. 물론 이순신의 죽음은 왜국과의 전쟁보단 조선 내부의 권력적 암투에 의한 갈등도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관점을 보기보단 다양한 조건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한국 대표 연예인에 일본에서 ‘욘사마’라고 불리는 배용준 씨가 출연한 <태왕사신기>에서 연출한 장면들은 너무 터무니없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한국드라마 중에서 왕과 왕비를 시해하려는 무리가 이상한 요술을 사용해서 암살한다는 설정 역시 상당한 오류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만약 사전에 시청자로 하여금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과 사실을 알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사극드라마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제작진에 의해 설정을 재조정하여 가상의 이야기나 인물, 사건 등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드라마로는 꾸준히 KBS1방송에서 했고, 그 외의 방송사에서 제작했지만, 최근 극장가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영화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콘텐츠에 대해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를 역사도서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로 통해 판단해 나가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서 영상으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쉽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정확한 문헌적인 정보에 의해 분석한 게 아니라 그저 연출가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에 우리가 깊이 파고들면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정보로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나 영화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기에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굿바이 E.H 카>에서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되는 것은 좋으나, 문제점은 모든 사람들이 역사가가 되기 위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나마 한국에선 대부분 문화콘텐츠가 영화나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우리 애니큐어가 지정한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다. 국내 만화책은 모르나 애니메이션으로 역사적 소재를 제대로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해보았자, 위인들을 소재로 한 교육용 애니메이션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차라리 web-toon이나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만화책에서 몇 편 제작되고 있다고 하나, 한국 만화시장규모와 인식을 고려하면 매우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솔직히 말하여 일본의 문화콘텐츠에서 만화애니메이션의 규모는 매우 거대하며, 최근에 라이트노벨, 피규어, 음반 등도 활발하여 일본의 하위문화는 단순히 하위문화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느끼나, 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화애니메이션 내에 반영하고 있다.

언제나 벚꽃의 등장은 자신들의 문화적 요소를 잘 들어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은 그런 문화적 정체성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도 심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나오는 설정이 바로 전국시대와 메이지유신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와 관련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메이지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를 지키기 위한 신선조 그리고 유신자사들의 싸움은 늘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만화애니메이션에 심하게 반영되어 이따.

전국시대에 대한 소재로 미소녀 모에로 통해 만들거나, <바람의 검심>이나 <박앵귀> 같은 작품들은 메이지 시대 초반의 갈등들을 다룬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소재로 하기에 전쟁이란 것은 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가옥과 밭을 파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나, 만화애니메이션에선 위대한 영웅들이 활보하는 거대한 서사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장수들은 엄청난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인물로 묘사한 점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은 거기서 희생되는 많은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 내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승부한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정치적 대의는 백성 혹은 국민이란 존재를 위해서라고 한다. 전쟁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과연 그런 것인가? 과거 어느 영주의 싸움은 그 영주의 영토에 사는 주민 모두들에게 부여된 전쟁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지배계층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지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죽는 것이 과연 영웅이라고 칭송해야할 전쟁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미화된 점이 분명한 문제다. 2015년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전국시대> 시리즈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전국시대>를 보면 그 당시 장수들을 외모나 성격 등의 설정을 지나치게 미화시켰으며, 그 캐릭터에 반대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저하시킨 점이다. <의풍당당 카네츠구와 케이지>를 보면 주인공 2명과 일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하찮은 존재로 묘사한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만든 작품들의 문제란 바로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동들에 대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는 주요 이용대상자가 젊은 계층과 학생들이다. 그들이 즐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역사적 소재는 역사적 인식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큰 문제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에서 일본열도를 통일한 대업에 대해 큰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이 임진왜란의 실패라는 점에서 하나의 비극으로 볼 수 있다.

서사와 역사의 차이점은 서사는 끝이 나면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지는 것이나, 역사는 또 다른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나,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다. 그러나 만들어온 이야기를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로 통해 충분히 역사적 인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이나 영화로 제작하여 흥행하면 사회적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가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을 때 사회에 큰 충격이 주었다.

장애복지시설에 일어난 폐단이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해 사회적 이슈는 매우 대단했다. 단순히 역사적 소재라는 것은 먼 과거만이 아니라 최근의 이야기도 역사적 소재인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선 부림사건이 이외에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나오는데, 현재 대법관 임명 안을 두고 후보자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개입한 법조인이란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미디어콘텐츠가 생각보다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점이다. 물론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 역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를 전후배경을 삼은 작품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일본이나 한국에서 제작된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역사적 인식을 심어주거나 혹은 반성하게 해줄 수 있는 전환지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역사적 소재가 콘텐츠로 제작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허구의 서사일 뿐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 아래 스스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역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승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패자의 기록은 늘 어리석은 존재로 될 뿐이다. 아니라면 치욕과 모욕 그리고 고통과 억압의 상처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와 죄악, 혹은 부당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외압과 강탈을 좀 더 명확히 찾아내지 않는다면 똑같은 비극은 반복되고, 그 비극의 수혜자는 바로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예다. 만약 미화되거나 조잡스럽게 조작된 콘텐츠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과연 제대로 된 미래가 나올까? 물론 보는 그 순간은 재미로 끝나면 모르지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따르게 된다. 특히나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장르는 오락이나 재미로 받아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1> 마지막 편에서 재미있는 정리가 나온다.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디지털은 사진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한다. 이로써 조롱당하는 것은 역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주의 의식이다. 아날로그 기록사진은 역사에 봉사하는 이미지였다. 그것은 문자로 이루어진 ‘상징계(The symbolic)'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조작사진은 증언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의무에서 독립된 순수 자율적 이미지로서 환영과 허구로 이루어진 ’상상계‘의 현상이다. 백남준은 이미 1970년대 초에 더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은 ’이미저리(imagery)'나 ‘비디오리(videory)'뿐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 사실은 허구로, 증명은 날조로, 진리는 오락으로 대체 된다.”

우리가 주로 다루는 만화애니메이션을 생각하자면, 이들은 완벽한 이미지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작된 영상물이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 같은 실사영상물이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경우 더욱 완벽한 허구와 오락거리다. 게다가 날조된 설정과 인물이라면 더욱 완벽한 상상의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제 아무리 상상의 세계 역시 현실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19세기까지는 현실이 상상의 세계를 지배한 시기지만, 20세기부터 점점 역전되어 이제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을 지배한다. 역사적 소재로 본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 주제라고 하나, 그런 주제로 본다면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너무 간단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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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엘로이즈 1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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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연애소설에서 로맨스는 존재하지만, 낭만주의적 요소는 없다. 그 이유는 연애소설에는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정서, 감정, 개성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만의 사랑만을 중요하게 나둔다.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를 말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소설에서도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에서 우리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더 막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연애소설은 자신들의 연애에 대한 자유이지, 그 이상의 자유는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20세기 자본주의 정착 이후 21세기에도 그런 관점은 유효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그런 소설조차도 화려한 스펙타클로 가득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미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력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드라마 연출이나 또는 가상결혼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이벤트성 고백이다. 그 고백의 성사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이 마음이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로 통해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로맨스라는 이름이 결국 이벤트의 크기, 즉 자본력의 동원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 모습들은 이미지가 매개로 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을 녹아 들어가며, 남녀 간의 사랑, 하다못해 사랑 아닌 개인적 의상과 취미 내지 취향조차 거기에 맞추어간다. 우리의 마음이란 과연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하여 가는가? 이런 21세기 대중문화에서 18세기 문학 <신 엘로이즈>는 당연히 색다른 모습일 것이다. <신 엘로이즈>를 읽기 전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괴테의 소설은 낭만주의 소설로서 베르테르가 아름다운 여인 로테를 사랑하지만, 끝내 이룰 수 없기에 권총자살로 막을 내린 비극적 소설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에 절망하는 베르테르,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그의 슬픈 편지에서 단순히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낭만주의소설로서 사랑만을 논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 것처럼 괴테의 영혼이 되어준 루소의 <신 엘로이즈> 역시 그러하다. <신 엘로이즈>는 루소가 자신을 소재로 적은 소설이고, 자신의 주변 요소를 통해 저술한 소설이다. 주인 생 프뢰는 우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고, 생 프뢰가 사랑던 쥘리는 미덕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위스인이던 생 프뢰는 자신의 신분은 소시민이고, 쥘리의 신분은 귀족이었다. 쥘리의 아버지는 귀족의 신분으로 높은 직위에 게다가 장교 출신이란 이유로 생 프뢰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겼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비극적인 두 남녀의 운명이 시작되는 점이다. 괴테의 소설에선 일방적으로 베르테르가 계속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루소의 소설은 편지를 등장인물끼리 서로 주고받는 것이 특징이다. 소설에서 보통 등장인물이 같이 그 공간에 나와 서로 말로서 대화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나, 여기선 자신이 그날 있었던 일이나 자기가 생각한 일에 대해 계속 편지로 주고받는다.


인간은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입으로 통해 전달하기 보단 글로 전달하는 게 더 정확하고 이성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엘로이즈>를 보는 순간 오히려 글은 이성으로 가득하기보단 거대한 강물이 굽이굽이 하류로 흘러가듯이 율동과 열정이 숨어있었다. 그런다고 그 열정이 너무 지나치게 강렬하게 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괴테의 소설은 말 하나하나가 매우 강렬했으나, 여기서는 자신의 강렬한 마음을 마치 호수에 큰 파장이 일어난 것처럼 울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 수 있는 것은 <신 엘로이즈>에 담긴 내용은 쥘리와 생 프뢰라는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시대의 모순과 루소의 사상이 담겨있었다.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이 동기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공회의 토대가 되었고, 삼권분립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우어진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입법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만약 잘못된 법과 제도가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것이 입법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프랑스의 정치사회는 모순으로 가득했었다.


프랑스대혁명과 세계 혁명가의 복음서가 된 <사회계약론>보다 루소의 서적으로 사람에게 더 많이 읽혀진 것은 <신 엘로이즈>와 <에밀>이다. 게다가 <에밀>을 읽다보면 사람들은 루소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여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알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만약 <신 엘로이즈>에 대해 조금 이해한다면 오히려 여성이야말로 남성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여성은 정숙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21세기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지만, 적어도 자유연애가 보장된 지금보다 그때의 <신 엘로이즈>의 쥘리와 생 프뢰의 사랑이 더욱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신 엘로이즈> 1권을 보면서 느낀 점은 루소가 쥘리와 주변 인물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세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시민의 도덕심을 강조했고, 부당한 권력과 세견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의 거만한 로코코(탐미주의)문화의 특성을 부정했으며(한 여자가 다수의 애인을 거느리는 것), 그 원인이 바로 사랑의 결합이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인한 동의가 아니라, 여자의 동의 없이 억지로 귀족이나 부호에게 가는 것이다. 사랑 없는 결합에 서로 다른 애인을 찾는 것을 부도덕하게 여기고, 특히 쥘리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쥘리의 어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른 여자를 만나다, 이제 나이가 들자 다시 집에 온 점을 본다면 과연 그 시대의 도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루소는 본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사고로 인해 몇 번 죽을 뻔했으며, 자연에 은둔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당시 파리 살롱문화를 비판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신 엘로이즈>를 읽으면 생 프뢰의 기행에서 발레지방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곳의 주인들은 손님에게 아무런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 않으며, 집안의 하인들과 식사할 때 같은 탁자 앞에 의자를 앉게 해주는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그 마음가짐을 루소는 잊지 않은 것이다. 루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미덕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신 엘로이즈>가 단순히 쥘리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메인으로 다룬다고 해도, 그 이야기의 흐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미덕은 늘 따라다닌다. 남녀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신 엘로이즈>는 인간의 자연성을 늘 추구하는 것이 보인다. 쥘리에 대한 생 프뢰의 존경은 쥘리가 갖고 있는 미덕이고, 그 미덕은 꾸미지 않은 쥘리의 마음이다. 쥘리의 초상화가 생 프뢰에게 올 때 그는 그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화가가 쥘리의 있는 그 모습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아랫부분을 정확히 달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두 뺨과 턱을 분리시킴으로써 윤곽은 좀 흐트러뜨리지만, 더 귀엽게 보이게 하는 그 가벼운 굴곡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아주 불만이 큽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아니더라도 참 인상적인 말이 많았다. 21세기 화려한 사랑의 미디어가 18세기 소설에서 나온 사랑보단 못한 이유는 “언제나 겸손한 진실한 사랑을 사랑의 표시를 대담하게 내보이지 않아요. 수줍게 숨기지요. 숨기기, 침묵, 거 많은 수줍음은 사랑의 달콤한 열광을 강화하고 감춰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미디어로 전달되는 스펙타클은 언제나 대담하게 언제나 웅장하게 언제나 화려하게 꾸미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로맨틱하게 보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18세기 소설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나, 사랑이 인스턴트로 변해버린 지금의 시대에 보면 과연 어느 쪽이 더 시대착오적인가 하고 생각할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분명 남녀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혹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인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이라면,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감정이니까요.” 이 말에 너무 공감한다. 우리는 감정을 너무 쉽게 드러나지만, 감정 그 자체를 가지지 않고 있다. 이성은 오직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성과 혹은 이성으로 얻어진 지식과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물론 그런 일들이 용인되어버린 비극적인 세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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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2-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 책...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고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놓고 왔는데...이 리뷰를 보니 후회가 밀려오네요...ㅜㅜ

만화애니비평 2015-02-16 18:08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루소가 저술했기 때문이죠.
 


<순결의 마리아>란 작품은 중세의 가을, 14~15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정확한 배경으로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후 아직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 도중이다. 당시 사회는 고전주의시대, 즉 가톨릭 종교가 매우 강한 통치력으로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런 시대에 이단이란 존재는 섬멸의 대상이다. 따라서 <순결의 마리아>는 주인공 마리아라는 마녀지만, 그 시대적 배경은 상당히 역사적인 고증을 담고 있다. 특히 전투장면이나, 의복, 건축양식, 문화적인 요소는 잘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난 점은 만약 사람이 아프면 이 뿌리를 드세요. 기도를 합시다. 수술 후 약을 복용하세요. 이 뿌리를 드세요.”라는 점이다. 고대 사회는 지금같이 신약 대신 약용식물로 복용하여 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고전주의시대는 신앙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여기고 기도했으나 그 결과 <순결의 마리아> 4화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4화의 주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위험성이란 바로 기독교 문명과 자연적 조건의 대립이다. 여성 복식문화에서 다들 몸을 감추지만, 마리아의 의상은 노출이 강하고, 서큐버스로 통해 남성의 정기를 빼앗아 전쟁을 중지하려 한다. 그러나 고전주의시대에는 성행위를 대하여 교회나 국가적으로 매우 금지시켰다. 특히 여성에 대해 매우 악랄한 존재로 보거나 남성의 정신을 흔들리게 하는 존재로 보았다. 마리아의 존재에서 서큐버스를 다루는 점이나, 노출이 심한 옷은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큰 반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도로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약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심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중세의 가을이 도래한 유럽은 십자군 원정 이후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그것은 민심에 대해 기존 봉건귀족에 대한 의구심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와 국가는 여전히 신의 가호 아래 전쟁을 벌였고, 농민보병군사들은 아무런 군사적 기술과 장비도 없이 희생되어야 했다.

 

<순결의 마리아>란 작품이 15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나, 시대적 조건과 전쟁의 상황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21세기에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 전쟁에서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바로 그 시대 지배이념이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도덕이다. 그 도덕이란 이름이 결국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은 역으로 되는지 잘 나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마리아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 받지 못하나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서 마리아는 마녀이고, 마녀로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느 집단의 이익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아 어느 소수나 다른 타자를 링 밖으로 내모는 일들은 어디서든 일어난다.

 

마녀사냥에 대한 부분에서 15세기 까지는 마녀의 존재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하지만 16세기부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악마와 손을 잡고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다. <순결의 마리아>15세기의 일어난 배경에서 만든 작품이다. 마녀에 대한 고증에서 조금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그런 마녀로서 보는 당시 사회의 모순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점이 연속되는 것 역시 중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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