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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ㅣ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행복의 조건에서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구조 사회에서는 아마 돈이 많은 사람들로 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라는 것으로 행복 그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행복은 돈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할지 모른다. 경제가 모든 인간의 불평등의 시작점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간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지 문명의 이기심이 그늘지고, 누군가 부유하면 누군가는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인간에게 문명의 진보가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 오히려 기계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더더욱 착취와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일상의 반복에 의해 기계적인 존재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정말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타샤 튜더의 삶이 녹아있는 그녀의 집과 풍경을 소개하는 <타샤의 정원>이란 책을 보며, 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다. 타샤 튜터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온 삶은 돈이나 세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튜더 가문의 집안, 즉 영국 왕가의 후손으로 영국에 살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녀는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위적인 문명의 손길보단 19세기 미국이 이제 정착민들이 힘차게 살아가던 그 건축과 생활 도구들이 즐비했다.
후기에 나오듯이 그녀의 집은 마치 1800년대 시대의 1800년대의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맨발에 의상도 fast-food가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로 가득하다. 책에 거론된 것처럼 타샤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반까지 가장 자연주의자로서 살아온 인간일 것이다. 나 역시 삶의 가치는 자연주의를 추구하지만, 그녀처럼 살아갈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하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바라보는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화폭과 같다.
현실의 사물들을 그대로 촬영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꿈나라의 요정들이 사는 세계와 같았다. 꽃이 계절별로 시기별로 화려하게 피우고, 맛있는 산열매와 들열매는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아무런 투쟁과 혼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것은 나에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라고 할 것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타샤의 책은 당연히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렇게 살기 위한 여유가 없을 것이고, 그런 여유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살아갈 용기도 없을 것이다. 타샤의 삶이 타샤만의 것이 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이 있는 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평화적이고, 마음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 앞에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자유와 평등이란 정의적 가치는 항상 우리 인간사회에 이상적으로 논하지만, 실재 그것이 제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하여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한다.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 사람이 모이더니 결국 가게가 생기고 도로가 생기며, 마지막엔 볼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게 테이블에 놓여있는 메뉴판이 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예전에 읽어본 서적 1권이 생각났다.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이다.
루소는 말년에 파리사람들의 비웃음과 음해를 피하기 위해 시골로 오고,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가 식물을 채집한다. 가지고 가는 것은 연필과 종이가 든 가방과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 루소는 산과 들로 나가 식물들을 바라보며 그 식물의 효능이나 이용성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식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세심하게 그린 식물의 잎과 줄기, 그 식물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으로 가득한 글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타샤의 집 역시 그렇다. 계절과 시기가 바뀌면, 각종 식물의 색이 바뀌고, 나무에는 많은 꽃들이 만개하며, 그 꽃이 지면 풍요로운 과실이 맺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웃과 같이 나누어 먹고, 파티를 열어 모두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나에게 저런 삶을 찾아볼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런다고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느 골목길에 콘크리트 담벼락 너머로 나와 있는 목련이나 동백나무의 잎사귀와 꽃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봄이 다가오는 자락에 각종 색들이 만발한 산과 들을 보는 것 역시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