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천재다 1 - Seed Novel
하람 지음, Nardac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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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해지기 바란다. 그러나 자신들이 특별해지는 만큼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인간에게 자신이 남들보다 위에 있고자 하는 우월의식과 더불어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내면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개인적인 활동으로 타인의 시야를 받기보다는 개인과 개인이 모인 그룹 사이에서 동시에 인정받기를 원한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으나 더 중요한 점은 인간은 자신이 그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인 면들이 자기 일상적 요소에서 발견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그리고 그 특이한 인간이 자기가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매우 밀접하다면 말이다.

 

한국 라이트노벨 작품인 “그녀는 천재다” 제1권을 읽어보며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독특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낯설음과 그 낯선 공간에서 일어나는 어느 한 남학생의 일상을 토대로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이 경소설이란 이유로 상당히 외면 받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사실 경소설 역시 일상에서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나 또는 삶의 이면에 가려워진 인간의 욕망을 다루지 않은 것이다.

 

그런 부분을 본다면 고전적인 문학소설에서 다루는 담론이나 범주에 닿을 수 없을망정 현대소설과 비교하면 그렇게 차이난다고 볼 수만 없다. 단지 설정에서 다소 재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시나리오를 지닌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천재다”를 읽어 보면서 흔히 우리가 TV나 뉴스, 신문에서 나타나 가끔 관심을 유도하는 천재들이 평범한 공간에 있으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인가를 다루는 것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부분이 아니라 본다.

 

이 작품의 히로인으로 등장한 윤시아에 대해 보자면 이 작품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이름 대신 평범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학생의 시선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완벽히 마스터 하는 인간이다. 공부와 체육은 기본이고 외모와 몸매, 게다가 합기도까지 완벽하게 수련하여 어린 시절 태권도 했다는 평범이를 그냥 가볍게 제압한다.

 

작품에서 히로인의 존재로 본다면 남성중심의 스토리전개라 하여도 여성의 강력한 현대사회의 각인은 여실히 드러난다. 보통 서사구조를 지닌 작품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존재로 많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반해 여기는 오히려 남성인 평범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나오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경향보다는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다.

 

그런 평범이의 성격에 따라 이른바 둔감한 녀석이란 호칭을 붙이기 딱 좋은 케이스라는 점이다. 이 작품의 발단은 천재소녀인 윤시아가 대학교 면접시험 당일에 화문고등학교 내의 큰 이슈로 떠오른다. 검은 긴 머리카락과 명석해 보이는 그녀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머리카락 색을 노랗게 물들이고,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기 스스로 퇴학한다고 하고, 얼굴에 진한 화장과 귀에는 철렁철렁한 귀걸이까지 달려 있었다.

 

그 상태에서 학교에서 뛰쳐나가 모든 학교 선생이 초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상대할 수 없는 지경에 오직 그녀에게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평범이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벤츠인 윤시아를 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원인은 바로 평범이에게 있었다. 그녀는 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윤시아는 천재라는 점에서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스터한 상태이다. 게다가 고2에 명문대 면접만 가면 붙을 운명이다.

 

그녀는 사실 명문고 대신 국립고로 선택하고, 대학에 일찍 가기보단 평범한 여학생으로 위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학년 1위에 어려운 외국학회 영문논문까지 독파하여 이해하는 그녀에게 보통 사람에게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평범이는 절교를 선언했다. 결국 그 절교선언이 2주 후의 불붙은 화약고처럼 터진 것이다.

 

평범이와 윤시아는 본래 15년 지기 소꿉친구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서로 잘 어울렸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오랜 친구에게 크나큰 벽을 느낀다. 평범이는 자신의 이름도 거론할 것도 없이 그저 윤시아의 친구로 남았을 뿐이다. 그에게 윤시아란 머나먼 왕국에 살고 있는 완벽한 공주였다. 윤시아 앞에서는 초라한 자신이기에 그는 언제나 윤시아 앞에서 주눅이 들고 수동적 존재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것을 견디지 못해 절교선언했으나, 윤시아에게 친구는 오로지 평범이만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유일하게 천재소녀 윤시아라기 보다는 천재소녀인 윤시아로 말이다. 사실 윤시아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인간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상이한 존재에 대해서는 배척하며,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 질투를 한다. 게다가 그 질투의 대상이 완벽한 조건을 가지게 되면 될수록이다.

 

엘리트의 존재는 결국 보통 사람들과 괴리감을 주게 되어 엘리트끼리 뭉치게 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 엘리트 사이조차도 분류가 생성되면 다시 외면을 당한다. 그런 소외의식을 느끼는 존재가 윤시아이었다. 물론 절교 선언에 대한 취소와 영원히 그런 잔인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평범이의 말에 문제는 해결되지만, 평소에 하지 않을 담배와 술까지 도전한 윤시아의 모습을 본다면 그녀의 마음은 심하게 상처받은 것이다.

 

평범이의 한달 용돈이 든 지갑을 다 날려버리고, 게다가 술도 못 마시면서 술에 취해 평범이의 등에 업혀 집에 가는 윤시아는 눈물을 보이며 내 곁에 떠나지 말라고 버리지 말라고 한다. 평범이는 윤시아에 대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태도보단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무의식적 행동과 감성적인 태도로 대한다. 그런데 이것이 후에 전학온 최수정이란 여학생에게 큰 위안감이 된다.

 

사실 최수정이란 여학생 역시 천재이다. 그녀는 전학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학년 2위로 차지한다. 그녀는 천재적인 요소로 윤시아와 친해지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인간과 친해지기 어렵게 된다. 그녀 역시 지나친 능력을 가진 탓에 주변 인간들에게 미움을 산다. 더 후에 나타나는 이유리 역시 가시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와 같은 행동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천재라는 좋은 칭호만큼 외로움과 배타적인 인간관계에 당해야 했다.

 

이 중에서 최수정은 윤시아와 친해지면서 평범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 역시 친구가 없는 점에서 윤시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리고 윤시아가 평범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평범이와 친해지게 된다. 그녀는 평범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평범이가 윤시아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해줄 것이라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시아가 자신이 어떤 존재에 상관없이 언제나 친구로서 대해주는 평범이를 원하는 것처럼 최수정 역시 윤시아와 같은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하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적인 관계가 성립하는 말이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최수정이기에 평범이의 태도는 확실히 최수정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하나, 그런 평범이의 이해타산적이지 못한 인간관계로 자신의 어둠에 이끌어가게 한다. 평범이는 자신이 최수정의 어둠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수정을 괴롭히는 동네 일진에게 달려든다. 어떻게 보다면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라는 의미는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사실 싸움기술을 본다면 평범이 옆의 윤시아가 월등했으나 평범이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일진과 싸웠다. 게다가 싸움은 윤시아가 월등해도 윤시아를 지켜주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범이는 일진에게 얻어맞아 온몸에 타박상을 입어 싸움이 끝난 후에는 기절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고, 그 남은 일진을 정리한 것은 윤시아였다. 처음부터 윤시아는 자신이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으나 앞뒤 없이 뛰쳐나간 평범이를 보면서 그가 친구라는 사실을 행복해 하였다.

 

이 작품을 보면 사실 가장 평범한 사람이 가장 강할 수가 있고, 가장 강력한 사람이 약할 수 있다. 윤시아 앞에서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평범이, 가끔 그런 평범이의 말과 태도에 상처받는 윤시아, 그런 2사람의 사이를 보고 부러워하는 최수정, 평범이가 마치 어린 시절 윤시아처럼 보이는 이유리, “그녀는 천재다” 1권에서는 평범이는 분명 이 천재소녀 앞에서는 상당히 벅찬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너무 평범하여 때로는 좌절하기도 때로는 그냥 당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겐 지능과 두뇌에는 천재는 있어도 친구간의 우정과 사랑에는 천재는 없다. 또한 자기들과 전혀 다른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과 그렇게 집단적으로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천재는 없다. 너무 평범한 평범이가 때로는 평범 이상으로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주나 그 평범한 바보의 진실 앞에는 천재들은 천재로 평범이를 대하는 것이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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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상 - 2월혁명의 발발과 이중권력의 수립
레온 트로츠키 지음, 최규진 옮김 / 풀무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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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어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란 소설은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다. 동물농장이란 소설에서 모든 동물이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서로 대화도 하고 소통을 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이른바 국가체계까지 발달한다. 멍청한 주인의 무능력한 농장운영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봉기를 일으키는 모습에서 이것이야 말로 러시아 혁명을 비꼬는 하나의 풍자로 보였다.

 

그런 러시아혁명의 중심이 되던 인물은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정신을 승계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비에트의 기본인 볼셰비키당을 건국하였고, 그의 목표는 불운하면서 어리석은 동물농장의 주인인 차르왕국을 영원히 업소중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동물농장처럼 늙은 돼지 메이저는 이미 죽어버렸으나, 영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버지로서 나타난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의 돼지 얼굴은 나폴레옹이란 난폭한 돼지에 의해 어설프게 선전에 사용된다. 그것은 마치 스탈린과 북한 괴뢰정부를 만든 반파시스트로 위장한 파시스트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현재 병행하여 같이 읽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문구가 살짝 생각난다. 사회(민주공화)주의 혁명에서 왜 진정한 사회(민주공화)주의로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사회가 노동자와 농민이 억압당하는 사회가 보통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일 경우 경제적 낙후와 제3세계라는 점에서 기존 강대국에 의해 착취를 당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적인 이념으로 운동해도 결국 그것이 민족주의로 연결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들의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초기에는 진보적이나 보수적으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잡한 세계정세에 살아남아야 하는 점, 국민 대부분들이 지금 현재 어려운 실태에 대한 대응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악독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혁명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공화적인 국가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본다면 러시아의 혁명은 너무 낙후된 국가경제와 사회, 게다가 1905년 1월에 발발한 피의 일요일 전후로 러일전쟁이 있었다.

 

러일전쟁에 러시아의 패배, 그리고 그 뒤의 차르정권의 무능함과 부패함은 러시아 국민에게 절대적인 불만을 사게 했다. 그런 와중 국민들은 비극적인 피의 일요일 당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시위를 벌였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잔인한 대학살로 마감한다. 러시아의 제1의 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제2의 혁명인 1917년 2월 혁명은 새로운 계기로 이어진다.

 

바로 그 피의 일요일에 시작된 러시아의 숨은 군중들의 분노와 자유가 터진 2월 혁명 그 자리를 계속 지켜보던 레온 트로츠키가 적어내린 것이 러시아 혁명사이다. 이 책 표지에 걸린 레온 트로츠키와 주변에 있는 볼셰비키 요원 속에서 조지 오웰 문학소설 동물농장의 스노볼은 그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다. 사실 레온 트로츠키 사진을 이 책의 흑백으로 보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의 모습은 수염과 흰 머리로 이미 나이가 많이 찬 노인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청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당장이라도 ‘나는 앞으로 뛰어 가겠노라’라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빛을 가진 만큼 그의 인생은 과연 그러하다. 1929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940년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고향에서 아주 떨어진 멕시코에서 살해당할 때까지 그의 혁명적인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마르크스의 제1의 인터내셔널, 엥겔스의 제2의 인터내셔널 , 레닌의 제3의 인터내셔널이 그리고 스탈린의 의해 와해된 제3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제4의 인터내셔널을 수록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동물농장”을 읽다보면 스탈린의 돼지화신인 나폴레옹은 자기 농장의 동물들에게 평등을 외치나 그들에게 오히려 가중된 노동과 가혹한 전제주의적인 경찰국가를 수립한다.

 

사실 차르에 의한 러시아조차도 무능한 차르와 주변에 있는 빈대 같은 악랄한 정부 관료들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위해 경찰국가 체계와 더불어 비밀경찰을 투입한다. 게다가 비밀경찰이 볼셰비키에 잠입하여 보고할 정도이니 얼마나 정부의 무능함을 상기했을까? 그런 러시아에서 트로츠키가 보고자 하는 러시아 혁명은 매우 독특하다. 이 혁명의 주체는 볼셰비키가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였다.

 

볼셰비키의 역할은 그저 작은 화약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알리는 선전가요, 협의주체였다. 하지만 혁명은 그들에 의해 발발한 것이 아니다. 차르 왕조의 알렉산드로 3세는 무기력하고 감흥 없는 무감정의 왕이었다. 따분한 일과와 그저 평온함을 추구한 이 어리석은 차르는 사이비종교에 빠지고 점술에 의지했다. 특히나 러시아 벌판에서 찾아온 수도승 라푸스틴에게 의지한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바보와 같았다.

 

라푸스틴에게 의지만 하면 권력은 금방이라도 떨어졌다. 사기꾼들이 법무부와 각종 정치 조직의 고위 관료 직을 차지했다. 신앙심조차도 없는 러시아 종교인들조차 러시아 정교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허울 좋은 자리에 의지해 자기 잇속만 채웠다. 이런 공간에 국민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괴로워했다. 식량과 연료가 없는 국민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공장은 파업으로 치닫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던 어머니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느 순간 여성들 그 자체가 혁명의 중심부였다. 기억나는 장면은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 심한 슬픔과 고통을 받은 병사에게 여성들은 어머니요, 애인이요, 여동생이요, 아내였다. 병사들의 총구에 하나의 꽃을 피우게 한 것이다.

전쟁에 끌려간 그들은 다른 동맹국을 위한 방매막이와 총알막이가 되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전쟁터에 갈 때 그들이 정확한 정보작전이 아닌 그저 무능한 이동이 얼만지, 저녁에 밥을 얼마나 주지 않았는지 세고 있었다. 신발은 굽도 없고 의복만 부실하였으며, 그런 무능한 장교로 인해 수백만에 이르는 러시아 청년들이 비명횡사했다.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오로지 따뜻한 가족이 있는 집이었다.

그들은 죽기보다는 살아 있기를 바랐다. 죽기 위해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런 병사들이 처음에 구속을 당했으나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류했고, 거기엔 마음의 안식을 주던 여성들이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지나 이제 죽음 앞에 저항하기 위해 이들은 1917년 2월 혁명의 소용돌이로 흘러간다. 이런 모습을 레온 트로츠키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적 주인공이 이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름도 모를 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며 이 책을 적은 것이다.

 

물론 이 후에 중간에서 차르에게 손을 던지고, 볼셰비키에게 손을 넌지시 던지는 간활한 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계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결정한 기관이었다. 문제는 1924년 레닌의 죽음과 더불어 트로츠키의 정치적 몰락과 망명이 큰 타격이었다. 전에 읽어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그 당시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러시아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공간인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독일로 돌아가고, 트로츠키가 쫓겨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터 벤야민은 독일 나치즘에 대한 저항 심리와 우울함으로 자살을 택한다. 그래도 적어도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있던 공간이다. 작은 시장 길에 수많은 행상들, 공연장에 많은 사람들, 발터 벤야민이 좋아하던 러시아 인형, 그리고 그가 혼자서 열령히 흠모하던 지적인 여성 아샤, 그런 모스크바의 일기들은 트로츠키의 몰락으로 끝나 버린다.

 

그렇게 아쉽게도 그의 추방과 망명에서 러시아의 자유는 검게 물들어 갔으나, 그가 하고자 했던 일들은 결코 헛된 일들은 아니었다. 비로 그가 이상주의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의 이상적인 모습은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꾸자 하는 이상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란 돼지가 있어서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체계에 대한 풍자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 작품은 트로츠키를 내쳐버린 러시아와 더불어 트로츠키가 바꾸고 싶은 그 세상마저도 풍자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왜 돼지인 나폴레옹은 4발이면서 2발로 서서 인간의 옷을 입고 옆 동네 농장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을까? 왜 나폴레옹과 같이 술을 마시던 농장 주인들은 인간이면서도 영화 동물농장의 암캐의 눈에 돼지처럼 보였을까? 돼지처럼 변한 인간, 인간처럼 행동하는 돼지는 마지막 장면에 모두 사라졌으나, 희망은 아직 존재한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죽었을망정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가치관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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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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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니체의 서적은 읽는 그 순간만큼은 곤란하지 않으나, 그 순간이 지난 다음 순간, 또 이후의 순간이 연결되면 상당히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뭔가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하다가 마치 다른 이야기로 빠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역자인 김정현 교수의 이야기처럼 니체는 자신의 도서들은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인정받을 것처럼 니체가 작고한지 112년 지난 이후 니체는 분명히 큰 영향은 주고 있으나,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쉽게만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전에 읽어보았던 비극의 탄생과 반사회적고찰은 어느 정도 공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쉬운 도서는 아니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관으로 통해 그리스의 그 웅장하고도 진실한 문화를 찬양했다. 반사회적고찰에서는 독일(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독일이 이겼다고 거기에 대한 자국민들의 광기에 넘치고 자만에 빠진 황홀에 대해 비판했다.

 

 

도대체가 니체라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는 인식 내지 사고구조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을 가했다. 심지어는 그 보통 사람에 지나 유명한 인물이나 철학자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적인 어조는 상당히 황당하고도 놀라웠다. 독일의 관념철학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인 임마누엘 칸트와 합리주의의 기여자이며 이성에 대한 이원론적인 체계를 확립한 데카르트를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우습게 보는 시야가 그렇게만 틀렸다고 그런다고 맞다고 여기기에도 난감하다는 점이다. 전에 다른 철학도서에서 니체에 대한 내용을 봤는데, 니체주의는 자신이 니체주의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니체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책들은 기존의 가진 모든 생각을 버려야지 가능하고, 심지어 버려서 니체의 말에만 따라가도 버림을 당한다.

 

 

니체의 철학도서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말하고 싶은 말들을 보면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어리석음에 흥겨워하는 사람들을 선도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자신을 따라오는 많은 무리를 모두 내쫓아 내려고 한다. 도대체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맞다고 하는 것인가? 틀렸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단순히 맞다와 틀렸다는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넣고자 하는 것일까?

 

 

이번에 읽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는 역자 후기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또 다른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중간에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을 암시하는 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신은 죽었다는 것처럼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가 강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이는 곳일수록 니체는 그곳을 진리나 인간의 도리가 있기 보다는 인간을 망치는 곳으로 보았다. “선악의 저편”에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부분에 강렬한 충격적인 발언을 니체가 가한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기독교의 부정은 곧 자신의 입지마저 꺾을 수 있는 위험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도덕의 계보”에 보이다시피 교회가 주도한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보인다. 마녀사냥이란 광기는 결국 종교적인 부패에 의해서이다. 그러한 광기의 축제 속에 현명한 재판관은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마녀사냥 당하는 존재마저 거기에 동조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을 넘어 제대로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도덕이란 단어와 윤리라는 단어에 대해 전에 나는 다소 혼돈을 가졌다. 윤리(倫理)와 도덕(道德)하면 왠지 서로 비슷하고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가? 아니라면 우리 같은 일반 한국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라는 과목조차 듣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도덕이란 어느 특정한 시기와 공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어느 특정한 시기나 공간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란 말을 했듯이 윤리라는 개념은 철학에 가까운 개념으로 본다. 그렇다면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은 철학적인 영역보다는 철학이 아닌 그저 강제적인 인간의 관념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니체의 서적으로 돌아가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나온 아포리즘의 문구에서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이라든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와 같이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집단이란 광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윤리의식이나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이미 없다. 단지 절대적인 다수의 논리로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진리라는 것이 진리가 아닌 하나의 집단의 무기가 되는 순간 전체주의적인 조건으로 변모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 것이 예나 지금의 모습이다. 니체는 100년 후의 인간에게 공감이 가는 것이라 1,000년도 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런 인간의 집단적 광기는 이미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면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잔혹한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언의 약속이라는 강항 충동이 있기에 이성만이 아니라 양심마저 내다 버린다. 그것은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불타고 있는 마녀 앞에서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분노의 저주를 퍼붓고 있다. 단지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다음 불의 정화의식은 자기 차례인 것을 말이다.

 

 

따라서 니체는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가지는 사고방식에 대해 무척이나 경계한다. 그 중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므로 절대적인 영역을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선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면을 인정하더라도 왜 인간들은 계속 타락을 하고 있는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플라톤과 이후의 기독교의 교부철학이 과연 인간에게 좋은 삶과 진리를 주고 있는가?

 

 

플라톤 자신에 대한 논리라면 좋을지 몰라도 후세는 그렇게 플라톤처럼 될 수는 없다. 아니라면 기독교가 가진 그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망치고 타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얼마 전에 읽어보았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난다.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에게 하나의 죄의식을 옭아놓아 인간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죄를 갚기 위해서 구속당하는 것이 당연시 하는 체계적인 인간조작, 더 심각한 사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인간의 사고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에서 인간의 자유란 과연 그 위대하다는 자유가 어디까지 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가? 그저 나는 자유롭다고 여기면 자유인가? 그 자유마저도 억압인데도 그것이 하나의 자유라는 관념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어느 단두대에 자신이 이슬로 변하게 프랑스 롤랑이란 부인의 외침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그 자유 역시 광기에 차버린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인간은 항상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과연 당연한 것인가? 라고 의문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가령 내가 오늘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데,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는 물과 음식을 먹어야 하는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비교하기를 단지 상식적으로 보기엔 너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어렵게 보일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고, 다르게 보자면 물과 음식은 눈으로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이성이란 관념은 물과 음식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마음만 먹는다면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의문을 품는 것이 어려울까? 정해진 양만 채울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물과 음식일까?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이성과 그 사고관념일까? 차라리 후자 편이 더 위험해 보이지 않을런가? 물은 썩으면 뱉으면 되고, 음식이 상하면 토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뱉을 수도 토할 수도 없다. 도리어 그것이 인간의 속박하니 선악이란 존재는 정확한 인간의 윤리의식보다는 단지 도덕이란 사회적인 흐름, 그것도 광기어린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이며, 도덕의 계보를 잡아내어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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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공부중 2013-10-1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봤습니다.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
토니 클리프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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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중에서 아직 읽어보지 않은 소설로 아리랑이란 작품이 있다. 조정래 작가의 역사소설로서 실존 인물인 김산이란 인물을 토대로 당시 일본강점기 아래 비극적인 시대상황과 동시에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쉽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주인공 김산은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움직인 독립군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한 분들 중에 미국의 자유주의와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로서 활동했는데 불구하고 왜 후자 측이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숙청이 되었을까 라는 것이다. 예전에 본 드라마 중에 김두한을 소재로 한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아버지가 독립군의 위대한 장군인 백야 김좌진으로 나온다.

 

김좌진 장군은 항일활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더불어 민족정신을 재정비한 위대한 선조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기존에 항일투쟁활동을 하던 중국과 조선에게 영향을 줄망정 방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선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 숙청되고, 게다가 강제로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이주되었다.

 

그것은 누구의 계략인가? 1927년 러시아에서는 매우 특별한 일이 발생된다. 그것은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 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상과 체계를 펼치려 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제외되고, 1929년 러시아 영토로부터 추방된다. 그것은 결국 트로츠키와 적대관계로 되어버린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을 장악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의 장악은 결국 기존 반파시스트 내지 반독재에 저항한 마르크스-레닌으로 이어지는 사상이 결국 막히게 된 것이다. 문학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보면 나폴레옹이란 사나운 돼지가 용기 있고 지혜로운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를 내쫓으면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독재와 암흑정치에 대해 비판한다.

 

그 모든 암흑정치의 원인점은 바로 스탈린에 의한 트로츠키의 추방이고, 그것도 모자라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다. 트로츠키가 왜 이렇게도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를까? 전에 읽어 보았던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에서 한국의 근현대사의 암울한 이야기를 다시 수중 올라왔을 때 아직까지 한국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메카시즘의 덫을 결국 스탈린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트로츠키의 추방은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던 볼셰비키의 영웅을 영원한 추방으로 이어짐에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오던 비극은 시작되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한 숙청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실패하거나 또는 변질된 노동자의 국가로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를 저술한 토니 클리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변질된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자본을 소유하고 독점해 버리는 국가자본주의라고 한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국가자본주의, 사실 일반적인 자본주의는 자본의 유통과 힘으로 통해 시장경제를 자유적으로 활동하는 곳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과 더불어 동유럽, 현재 유일하게 스탈린주의에 골수처럼 박힌 북한의 국가독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주의이고 파시스트의 국가였다.

 

재미있는 내용은 예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에 몸담은 자들이 반파시스트 세력에 제대로 된 응징이나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같이 권력을 소유했다. 가령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라면 정치적인 참여가 농민과 노동자들이 많아야 하나 오히려 엘리트와 재력가 내지 관료들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농민과 노동자처럼 민주주의 근간이 되는 제일 많은 국민이 많은 참여를 보이다가 어느 순간 그 비율이 줄어들고 어느새 국가 당을 장악하는 것은 관료들이 되었으며, 이것은 곧 관료주의 내지 전체주의로 변모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모택동과 같은 중국 공산당이라 하는 작자도 결국 관료들과 군인들로 채워진 하나의 권력수단으로 변모했다.

 

군중에 향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그 뒤로는 권력의 장악에 힘쓴 것이다. 물론 이런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토니 클리프의 어린 시절에 나온다. 고통 받는 노동자가 이스라엘인이냐 팔레스타인민족이냐에 따라 서로 차별을 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적은 누구란 말인가? 솔직히 말하여 진실로 우리가 봐야 하는 것보다는 그저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비록 페이지 수도 작고 책의 크기도 작아 봐야할 내용은 적지만, 생각할 것들은 정말 복잡하다. 마르크스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이야기, 글리고 트로츠키와 스탈린과의 마찰에서 말이다. 최근에 스탈린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스탈린이 자기가 사랑한 여자에게 보낸 연서가 아주 로맨틱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로맨틱이 아닌 악마틱했다. 미소 냉전 이데올로기는 스탈린과 스탈린을 위주로 한 허울 좋은 반파시스트의 파시즘이 결국 자기 권력만 나누어 먹으려 한 위선자의 도구로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1967년 체 게바라가 죽을 시에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오히려 체 게바라를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변질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 위에 군림하려던 동물농장의 주인공 나폴레옹이란 돼지였다. 그리고 조심할 점은 스탈린주의의 나폴레옹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폴레옹과 같이 식사하러 온 옆 동네 농장 주인장들도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다. 그러나 반대가 있기에 그 옆 동네 농장 주인장들은 편하게 먹고 마시고 논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 중에 최고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리마인드 한다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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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이상용 지음 / 홍시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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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은 정말 영화에서 허락하는 것은 너무 많고도 다양해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영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자면 현실을 너무 현실처럼 보이기 위해 다루었는지 아니라면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하는지 만들었는지 약간 의문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두운 자리에서 밝은 화면에 향해 몰래 숨어 보는 관음적인 시선이므로 영화는 본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본다.

 

그런다고 그 영화가 실제 있는 사실은 아니다. 전부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우리 앞에서나 옆에서 바로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잘 구성된 각본과 잘 어울리는 배경과 연출이라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관찰이 아닌 관전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마치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몰려든 많은 관전자들처럼 거기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영화가 하나의 관찰의 도구로 본다. 단지 모든 사람이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찰하고 싶다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이번에 읽은 이 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은 그야말로 영화에 빠진 한 영화평론가의 글처럼 그는 영화에 단순히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영화에 빠져 들어가서 자신을 빠지게 한 것들을 손으로 잡아 올린다.

 

확실히 영화는 어는 것을 보는 가에서 차이나기 보다는 어떻게 보는가에서 차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서에서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담론과 화제에 감독과 더불어 그 영화의 시대상에 대해 논하고 있다. 마치 영화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는 신화에 지나지 않아 이제는 그 신화되는 것에 대해 틀어보기도 하고 조롱해보기도 한다. 혹은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에게 하나의 우상보다는 하나의 평범함으로 전제하려 한다.

 

일관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일관되지 않고 격리된 시간과 공간 인간인지 아닌지의 모호함에 따라 오히려 더 우리로 하여금 격리되어 있다고 여기게 하는 장치까지 거론한다. 사실 영화가 사실적인 내용일수록 우리는 착각에 빠진다. 왜냐하면 영화는 필름에 담고 있는 하나의 복사물이지 그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실적이지 않아야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영화가 하나의 사실성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잊고 싶은 일들이나 잊어버린 일들을 스크린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단지 있던 인물이 실존인지 혹은 실존인양 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분명 있었던 일이다. 공간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그대로이지 못한 이유는 시간은 공간 그 자체는 불변으로 남겨두나 공간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는 그 공간의 존재를 위한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면서 딱 확실히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많은 영화들이 홍수처럼 소개되면서 그 속에는 있는 인간의 인식,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와 신화, 문학과 철학 속에서 말이다. 영화를 훔쳐보는 혹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대놓고 보고 있든 영화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단지 중요한 점은 우리 인간들은 행동함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성 외의 무의식적인 영역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영역을 카메라의 앵글로 담아낸다.

 

그래서 영화는 인간의 자기모습을 보는 것이고, 인간 스스로의 모습에 환호와 야유를 보낸다. 그러나 만약 그 영화 속의 모습이 평소 당신과 나의 모습이라면? 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에서 당신의 이야기도 피할 수 없다. 아니라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가 자신의 일상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과 완전 다르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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