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상 - 2월혁명의 발발과 이중권력의 수립
레온 트로츠키 지음, 최규진 옮김 / 풀무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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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어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란 소설은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다. 동물농장이란 소설에서 모든 동물이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서로 대화도 하고 소통을 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이른바 국가체계까지 발달한다. 멍청한 주인의 무능력한 농장운영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봉기를 일으키는 모습에서 이것이야 말로 러시아 혁명을 비꼬는 하나의 풍자로 보였다.

 

그런 러시아혁명의 중심이 되던 인물은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정신을 승계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비에트의 기본인 볼셰비키당을 건국하였고, 그의 목표는 불운하면서 어리석은 동물농장의 주인인 차르왕국을 영원히 업소중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동물농장처럼 늙은 돼지 메이저는 이미 죽어버렸으나, 영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버지로서 나타난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의 돼지 얼굴은 나폴레옹이란 난폭한 돼지에 의해 어설프게 선전에 사용된다. 그것은 마치 스탈린과 북한 괴뢰정부를 만든 반파시스트로 위장한 파시스트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현재 병행하여 같이 읽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문구가 살짝 생각난다. 사회(민주공화)주의 혁명에서 왜 진정한 사회(민주공화)주의로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사회가 노동자와 농민이 억압당하는 사회가 보통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일 경우 경제적 낙후와 제3세계라는 점에서 기존 강대국에 의해 착취를 당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적인 이념으로 운동해도 결국 그것이 민족주의로 연결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들의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초기에는 진보적이나 보수적으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잡한 세계정세에 살아남아야 하는 점, 국민 대부분들이 지금 현재 어려운 실태에 대한 대응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악독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혁명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공화적인 국가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본다면 러시아의 혁명은 너무 낙후된 국가경제와 사회, 게다가 1905년 1월에 발발한 피의 일요일 전후로 러일전쟁이 있었다.

 

러일전쟁에 러시아의 패배, 그리고 그 뒤의 차르정권의 무능함과 부패함은 러시아 국민에게 절대적인 불만을 사게 했다. 그런 와중 국민들은 비극적인 피의 일요일 당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시위를 벌였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잔인한 대학살로 마감한다. 러시아의 제1의 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제2의 혁명인 1917년 2월 혁명은 새로운 계기로 이어진다.

 

바로 그 피의 일요일에 시작된 러시아의 숨은 군중들의 분노와 자유가 터진 2월 혁명 그 자리를 계속 지켜보던 레온 트로츠키가 적어내린 것이 러시아 혁명사이다. 이 책 표지에 걸린 레온 트로츠키와 주변에 있는 볼셰비키 요원 속에서 조지 오웰 문학소설 동물농장의 스노볼은 그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다. 사실 레온 트로츠키 사진을 이 책의 흑백으로 보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의 모습은 수염과 흰 머리로 이미 나이가 많이 찬 노인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청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당장이라도 ‘나는 앞으로 뛰어 가겠노라’라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빛을 가진 만큼 그의 인생은 과연 그러하다. 1929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940년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고향에서 아주 떨어진 멕시코에서 살해당할 때까지 그의 혁명적인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마르크스의 제1의 인터내셔널, 엥겔스의 제2의 인터내셔널 , 레닌의 제3의 인터내셔널이 그리고 스탈린의 의해 와해된 제3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제4의 인터내셔널을 수록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동물농장”을 읽다보면 스탈린의 돼지화신인 나폴레옹은 자기 농장의 동물들에게 평등을 외치나 그들에게 오히려 가중된 노동과 가혹한 전제주의적인 경찰국가를 수립한다.

 

사실 차르에 의한 러시아조차도 무능한 차르와 주변에 있는 빈대 같은 악랄한 정부 관료들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위해 경찰국가 체계와 더불어 비밀경찰을 투입한다. 게다가 비밀경찰이 볼셰비키에 잠입하여 보고할 정도이니 얼마나 정부의 무능함을 상기했을까? 그런 러시아에서 트로츠키가 보고자 하는 러시아 혁명은 매우 독특하다. 이 혁명의 주체는 볼셰비키가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였다.

 

볼셰비키의 역할은 그저 작은 화약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알리는 선전가요, 협의주체였다. 하지만 혁명은 그들에 의해 발발한 것이 아니다. 차르 왕조의 알렉산드로 3세는 무기력하고 감흥 없는 무감정의 왕이었다. 따분한 일과와 그저 평온함을 추구한 이 어리석은 차르는 사이비종교에 빠지고 점술에 의지했다. 특히나 러시아 벌판에서 찾아온 수도승 라푸스틴에게 의지한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바보와 같았다.

 

라푸스틴에게 의지만 하면 권력은 금방이라도 떨어졌다. 사기꾼들이 법무부와 각종 정치 조직의 고위 관료 직을 차지했다. 신앙심조차도 없는 러시아 종교인들조차 러시아 정교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허울 좋은 자리에 의지해 자기 잇속만 채웠다. 이런 공간에 국민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괴로워했다. 식량과 연료가 없는 국민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공장은 파업으로 치닫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던 어머니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느 순간 여성들 그 자체가 혁명의 중심부였다. 기억나는 장면은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 심한 슬픔과 고통을 받은 병사에게 여성들은 어머니요, 애인이요, 여동생이요, 아내였다. 병사들의 총구에 하나의 꽃을 피우게 한 것이다.

전쟁에 끌려간 그들은 다른 동맹국을 위한 방매막이와 총알막이가 되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전쟁터에 갈 때 그들이 정확한 정보작전이 아닌 그저 무능한 이동이 얼만지, 저녁에 밥을 얼마나 주지 않았는지 세고 있었다. 신발은 굽도 없고 의복만 부실하였으며, 그런 무능한 장교로 인해 수백만에 이르는 러시아 청년들이 비명횡사했다.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오로지 따뜻한 가족이 있는 집이었다.

그들은 죽기보다는 살아 있기를 바랐다. 죽기 위해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런 병사들이 처음에 구속을 당했으나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류했고, 거기엔 마음의 안식을 주던 여성들이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지나 이제 죽음 앞에 저항하기 위해 이들은 1917년 2월 혁명의 소용돌이로 흘러간다. 이런 모습을 레온 트로츠키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적 주인공이 이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름도 모를 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며 이 책을 적은 것이다.

 

물론 이 후에 중간에서 차르에게 손을 던지고, 볼셰비키에게 손을 넌지시 던지는 간활한 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계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결정한 기관이었다. 문제는 1924년 레닌의 죽음과 더불어 트로츠키의 정치적 몰락과 망명이 큰 타격이었다. 전에 읽어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그 당시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러시아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공간인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독일로 돌아가고, 트로츠키가 쫓겨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터 벤야민은 독일 나치즘에 대한 저항 심리와 우울함으로 자살을 택한다. 그래도 적어도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있던 공간이다. 작은 시장 길에 수많은 행상들, 공연장에 많은 사람들, 발터 벤야민이 좋아하던 러시아 인형, 그리고 그가 혼자서 열령히 흠모하던 지적인 여성 아샤, 그런 모스크바의 일기들은 트로츠키의 몰락으로 끝나 버린다.

 

그렇게 아쉽게도 그의 추방과 망명에서 러시아의 자유는 검게 물들어 갔으나, 그가 하고자 했던 일들은 결코 헛된 일들은 아니었다. 비로 그가 이상주의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의 이상적인 모습은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꾸자 하는 이상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란 돼지가 있어서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체계에 대한 풍자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 작품은 트로츠키를 내쳐버린 러시아와 더불어 트로츠키가 바꾸고 싶은 그 세상마저도 풍자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왜 돼지인 나폴레옹은 4발이면서 2발로 서서 인간의 옷을 입고 옆 동네 농장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을까? 왜 나폴레옹과 같이 술을 마시던 농장 주인들은 인간이면서도 영화 동물농장의 암캐의 눈에 돼지처럼 보였을까? 돼지처럼 변한 인간, 인간처럼 행동하는 돼지는 마지막 장면에 모두 사라졌으나, 희망은 아직 존재한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죽었을망정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가치관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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