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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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역사와 문명 속에서 가장 쓸데없는 행위와 행동들이 바로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란 것은 인간을 서로 붕괴하고 망치고 이때까지 노력한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린다. 그 모래성도 성난 파도가 몰아치는 태평양 중앙에 위치한 작은 암초에 세운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사라지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전쟁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정치적인 업적에서 주요 이벤트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아니한가?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 어차피 패자들에게 기억해줄 이름 따위가 없는 세상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 역사 곳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과 시간 속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딱히 그렇다고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패자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하다못해 그들과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의 기록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전쟁의 역사와 패자의 역사, 그리고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 전쟁, 한국전쟁은 패자들의 기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쟁 후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체로 이루어진 들판과 산하, 그리고 부서진 건물잔해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공간에서 지금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나, 한편으로 불안하다. 세상에는 과도기라는 존재하는데, 우린 그 과도기가 너무 짧았으며, 그 과도기 속에 충분히 통과의례로 봐야할 것들이 너무 미비했다. 나는 지금도 한국사회는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잊어버린 전쟁이라던 625사변 즉 한국전쟁이라고 하나, 아직도 한국인의 무의식적인 공간에는 공포와 적대심이란 것이 남아있다. 해방 전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서 직접 겪은 사람과 더불어 그들의 직계 후손이 아직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에서는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이라고 표지에 그려져 있지 않은가? 한국전쟁은 정말 끝나지 않았다. 단지 휴전된 상태로 화약고에 점화가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위기감만 계속 맴돌고 있다.

 

최근 북한정치계의 변화와 세계사회의 탈(脫)이데올로기로 통한 더욱 더 견고한 이데올로기적 행동, 유가상승과 에너지고갈, 환경오염 등 이 모든 세계적인 변화, 거기에 맞춘 한국의 외부에 대한 변화 내지 내부 자체의 변화는 여전히 한국사회가 어지럽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역사를 알아야 결국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와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방향이 보인다. 예전에 <철학,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이란 책을 보았는데, 역사학과 철학은 조금 다르나, 기본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과거를 보고 앞을 생각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고 말이다. 철학에서는 그 문제의 해결을 바로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문제의 원인, 즉 문제 자체에 대한 답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본다면 어느 철학자 말처럼 철학은 철학에 대해 생각해서 철학적이기보다는 그 행동으로 통해 하나의 실천의지가 있어야 철학적이란 문구가 생각난다. 게다가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과학이란 지식이 존재해야 한다. 철학의 사유는 논리가 필연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 사고로 통한 논리적 판단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절실할 것이다.

 

물론 칸트가 말한 것처럼 논리라는 것은 윤리라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윤리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도 역사 속의 사실에서 우리는 윤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단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길 앞에서 윤리적 가치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는 윤리적 시선보다는 논리적 시선에 가깝다. 사료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저술된 점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특히나 일방적으로 누구의 입장보다는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로 통해 복원했다.

 

한국전쟁을 연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대부분 사진과 간략한 연표정도일 것이다. 그 당시 어느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 대해선 잘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오해와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런 문제를 잘 간파했는지,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판단을 당대의 문헌과 기록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국내보다는 남한 측의 전시작전에 큰 기여를 한 미군정과 미국정부의 자료, 그리고 북한 측에 있었던 소련에 대한 자료였다.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로 전환되자, 러시아 전쟁기록물에 보관된 전쟁기록의 등장은 매우 신기했다. 그만큼 신빙성이 보인 자료가 객관성을 보이는 자료가 등장한 것이다. 이때까지 그저 우리는 재구성된 자료로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여기의 자료와 기록물은 그 가치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전쟁의 원인을 찾자면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왜 전쟁이 되어야 했고, 왜 1950년 6월 25일이어야 했으며, 또 1953년 7일 27일에 휴전 협정을 맺어야 하는 가이다.

 

단순히 했다고 했지 그 뒤에 숨은 이야기는 모른다. 또한 무슨 이유로 발발했는지 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친일파 문제부터 시작하여 북한 측의 공작, 이승만의 자기 독단, 비리와 부정, 미군과 소련, 유엔의 결정 등을 말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인상 남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에 상당히 교우가 좋고 협력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틀렸다는 점이다. 오히려 미군정은 전쟁의 의한 물자 및 인원 소모와 내부 정치적 입지로 피곤하고 지쳤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몰래 이승만을 정치적인 숙청을 계획에 많은 놀라움을 주었으며, 미국이 전쟁에 그렇게도 적극적 의지가 없음에도 이승만의 북진을 추구하는 점에서 그의 지도력이 정말 의심스러웠다. 임시정부 수립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원조를 받던 그가 어느덧 미국과 차질을 빚는 모습을 말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분명하고 견고했으나, 적어도 이들은 필사적이지 않았다. 당시 2차 세계 대전 후의 두 진영의 정치적 파워에 집착했었지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독립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한국의 독립에 중요성을 안 것은 당시 참전한 중하급 장교와 사병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참전해서 죽음으로 한국의 자유를 지켜내었으나, 그 가치를 이승만이 거침없이 무시한 점에서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것이 일방적인 내용이 아니라 미국 자체의 공문서 보고라는 점에서 말이다. 미군의 젊은 군인들은 자유의지라는 가치로 참전해었을지 몰라도 미국이란 정부는 그렇지 못함은 절실히 나와 있었다. 아니 소비에트 연방의 무서운 독재자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보는 그의 정치적 판단은 매우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라 오히려 조바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종료 시까지 독일 나치와 전쟁을 벌인 소련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에 직접적 물자투입은 힘들었고, 게다가 전쟁직접 지원국이 된다면 국제적인 정치외교 입장이 매우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점을 중국의 모택동의 중국 공산화 성공과 더불어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들을 북한에 다시 복귀하여 강한 군사력으로 키워 남한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그리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전에 1949년에 이미 황해도 일대에는 전투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은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았다.

 

단지 1950년에 전쟁으로 서울수복과 낙동강전선에 이르는 불리한 전황에서 순식간에 전투가 아닌 정치적 무력항쟁인 전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가 군대 출신이 공군이다. 미국이 에치슨 선언이후 미군을 다 철수했어도,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에 있던 미공군이 전쟁 발발 후 제일 먼저 대구에 도착한 사실에 의아해 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공군이 제대로 된 군사조직이 아니었다. 공군에 사용되는 항공기들이 해군 항공모함 내지 육군기지로 의해서 조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미군이 지원한 항공기가 제일 먼저 한국전투에 들어온다. 미리 전쟁을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일본이 진주만 습격 시에 미군의 주요 작전병력은 많이 없었다는 사실에 고의적인 전쟁명분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일본과 전투를 벌인 이유는 진주만 습격이고, 그 습격원인은 미국인 일본이 필요한 군수물품 중에 원유수입을 금지한 것이었다. 모든 기계는 석유에너지로 움직이니 그 석유를 공급받지 못할 경우 일본군은 전쟁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행위를 보면 첩보전이라든지 심리전이란 고도의 기술과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위로 인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복구 순위에서 한국이 상당히 뒤에 있는 점, 한국전쟁 후 비로소 지원이 오다가도 그 지원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없고 당시 이승만 정권과의 신경전에서의 지원의 차단은 매우 정치적인 암투가 적대국 사이만 아니라 내부의 갈등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전쟁을 하는 주체는 정치선택권자가 아닌 선택자에 의해 지시받는 군인이란 점이다.

 

위에서 언급하나 미국이나 유럽 기타 많은 국가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젊은 청춘들에게 나는 분명히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을 보내도록 유도한 자들은 불쾌하게 여긴다. 그들은 한국의 자유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세계패권에 있어서 실험을 한 것이고, 그들의 지원은 진정으로 타국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란 점이다. 자본주의가 성공시키는 것 까지는 좋으나, 그 성공으로 통한 군장비의 획득은 하나의 시장관계가 형성한다. 전쟁은 단순히 밑에 있는 직접적 무력 행위자와 달리 그 과정이 상이한 점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역사란 상징적 기록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민주자유주의와 더불어 탈산업화된 정보시대에 개인의 역사 역시 중시되나, 기본적으로 역사의 바탕은 큰 사건과 기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매우 정치적 입지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 과거의 지난날을 어떻게 다시 되돌아 봐야 할 것인가? 남과 북은 대치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서로 초토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남는 것은 오로지 시체와 잔해물이다. 그런다고 지금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과 북, 한국사회, 국제정세가 참 묘해질 수밖에 없다. 단지 있었다는 사실과 왜 있었고, 어떻게 흘러가야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세히 알아갈 수밖에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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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최주현 옮김 / 새만화책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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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을 떠나 전쟁이 없는 오스트리아로 넘어온 사트라피, 그녀에게 다가온 유럽은 정말 상이한 곳이었다. 당장의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거기에 모자라 언제라도 도망을 칠 준비를 해야 하는 이란과 너무 다른 풍경에 많은 문화적인 충격을 받는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란, 자신이 주어진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길들여 가는 것이고, 문화라는 것은 그런 길들여지기 위해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문화라는 차이는 국가와 민족에 따라 어느 개인적인 존재를 극과 극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다르지만, 같은 국가조차도 말이다. 사실 사트라피가 오스트리아에 오기 전인 이란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자유로운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정을 벗어난 학교와 사회에서는 다른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국경을 넘어버렸다.

 

과연 그녀가 자유가 다시 온 것인가? 아닌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녀는 당장 지겹고도 짜증나는 베일을 벗어 던질 수가 있었고, 머리카락을 계속 키울 이유도 긴 옷을 입을 이유도 없다. 폭압적인 정권아래 파티와 락음악까지 즐기는 것조차 눈치 보던 그녀에게 여기에서 파티는 일상이었고, 그녀가 즐겨들은 핑크 플로이드는 모두가 그냥 듣는 음악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사소한 것에 해방을 느끼던 이란과 달리 여긴 해방이란 공간이 다시 그녀의 목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화적인 차별이다. 먼저 언어권이 유럽이라 독어나 불어 중에 뭔가 했어야 했고, 게다가 그녀가 다닌 학교는 프랑스계 학교라는 점과 기숙사 동료가 독일어를 쓰는 것이 문화적 장벽이었다. 언어의 차이는 결국 상대방과 나의 소통을 단절하게 되므로, 사트라피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야 하고, 그들이 평소 즐기는 방만한 태도까지 즐기어야 했다.

 

가령 흡연, 음주에 넘어 마리화나, 대마초와 같은 환각제를 말이다. 자유라는 것에서 당시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일탈적 행위로서 자유를 외쳤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환락적인 재미와 감각적이고 일순간의 쾌락을 위한 방편에 그쳤다. 그들이 즐긴 자유라는 것은 그저 일탈과 방만한 태도였다. 그런 태도라도 사트라피는 거기에 목메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고 게다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억압이 있었다. 그녀는 이란인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에서 많은 혼돈을 겪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데, 다른 공간에서는 그것조차 망각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가는 곳에 따라 다른 점은 인정해야 하나, 문제는 이란에서 벌여진 비극에 대해 누군가 아무렇게나 왜곡된 시각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사트라피는 견딜 수 없는 비극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 가서 주변 친척들이 자유를 위하여 죽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던 어린 소녀였으나, 이제는 그들의 죽음을 하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어야 했다.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 깊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불과 몇 년 사이의 행동이나, 이란 사회내부의 불안은 사트라피의 부모님과 할머니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깊은 마음을 나눌 자가 없었다. 이란인이라는 외부인이라 그녀는 자유가 있다는 국가조차도 자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평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등과 자유는 뭔가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보완적인 관계이다. 가령 내가 자유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불평등이라는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평등이란 것은 형식적이라 윤리적이고 인간애적인 부분은 법적 제도적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로서 할 수밖에 없다. 사트라피에게 그 평등이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자기가 머물던 집에 헬러 부인은 겉으로 좋아 보이는 척하고 있었으나, 내심으로 사트라피에 대한 불신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헬러 박사는 사트라피에게 자신의 물건을 훔쳐갔다고 의심하면서 그녀를 무시한다. 사트라피는 아무리 여기에 적응하려고 해도 그녀는 천상 이란인이었고, 서구사회에서는 그녀가 아무리 서양말과 서양문화를 즐겨도 이란인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남자친구와 사귈 때 그는 사트라피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 데려가자, 그의 어머니는 사트라피에게 나가라고 말한다.

 

그녀는 분명 자유가 있으나 자유롭게 되지 못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자신의 존재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녀에게 성취감으로 아무리 공부를 잘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도 단지 그뿐이다. 그녀는 사랑이 필요했다. 외로움이란 개인적인 자유이고, 영혼적인 자유일 수 있으나, 인간은 외로움을 이기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란에 있던 어머니의 방문은 마치 모든 것을 가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자신을 도둑으로 의심한 헬러 부인이 있던 곳에 방을 얻은 것은 어머니와 같이 있을 때이지만 말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사트라피는 결국 방황을 한다. 가출을 한 것이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길거리에 있는 담배를 주워 피고,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주워 먹고 그렇게 1달 이상을 보낸 것이다. 그녀는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지기 시작해 처음에 기침이 조금씩 나오더니 이제는 끝임 없이 나오다 이젠 입 안에서 피까지 나왔다. 그녀는 오랜 과로와 우울증으로 쓰러졌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정리하여 이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올 때 자신 안에 있던 우울함은 가족과 만남으로 사라질 줄 알았으나, 다시 우울은 멈추지 않았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란인이었으나, 이란 안에서는 서구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디서나 자신의 발길을 줄 수 없는 그녀에게 다시 우울함으로 가득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싫었으나 전쟁을 무의식적으로 상기하던 그녀에게 모순적인 형태로 내보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레자와 만나 사랑에 눈을 뜬다. 잘생기고 나름 지적인 그에게서 뭔가 지루한 자신에게 새로운 공감대가 되어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환상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 레자와 결혼하고 난 뒤에 불과 1달 만에 싫증을 느낀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그들이 서로 원하는 것은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이성이었다. 현실은 전혀 반대였고, 둘 사이에 벽이 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혼을 선택한다. 사트라피에겐 이 이혼은 새로운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가져왔던 억압들이 세상에 대한 반항들로 표출되었는데, 이제 그 반항이 왜 반항인가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예전에 오스트리아에서 이란으로 넘어올 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미술대학에 다닌 사트라피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이혼하고 난 뒤에 프랑스로 가기로 한 것을 말이다. 가기 전에 우연히 아버지가 선물해준 책과 책을 읽은 후에 만난 이란의 신지식인들에서 그녀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자국에서의 가족과 국가정치의 폭력, 그런다고 외국에 가도 자유라는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는 없었다. 단지 그녀의 자유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경험과 현실 속에 받아들인 숙명을 다시 새롭게 재조명하여 그것을 알리는 것이 그녀가 새롭게 만들어갈 자유였다.

 

서구사회에서 이란인, 이란에서 서구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안고 가야했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제2의 출국은 그녀의 새로운 인생을 도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생에서 그녀는 당시 알고 있었고, 이 만화를 만들 때에도 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언급 한다. 페이지 마지막 부분 그녀의 독백에서 그녀가 출국할 때 가족들의 배웅을 보면서 적은 글이다.

 

<작별은 훨씬 덜 괴로웠다. 10년 전 내가 오스트리아에 갈 때와는 달리 더 이상 전쟁은 없었고,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으며, 엄마는 기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할머니는 여기에 있었다...1994년 9월의 이날 저녁 이후, 운 좋게도 나는 1995년 3월 이란 새해 때 한 번 더 고향을 방문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1996년 1월 4일에 돌아갔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랐다.>

 

사트라피가 출굴 할 때 전쟁은 끝이 났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 이란은 생각이상으로 성을 억압하고, 정부는 필요이상으로 억압적이었다. 그녀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로 갔지만, 대신 영혼의 안식과 자유를 주는 할머니와의 시간은 버려야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운명을 하신다. 언제나 좋은 꽃향기가 나는 할머니의 몸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음은 사트라피에겐 큰 슬픔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란 단지 몇 가지 선택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길이다. 어떤 선택이라고 할지어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다. 자유라는 것도 어떤 선택에 따라 앞날이 다르게 변모된다. 하지만 선택한 것에서 진정한 자유가 있냐는 질문에 과연 얼마나 있는 가이다. 우리에겐 자유로운 삶보다는 선택이 주어질 뿐이다. 단지 여러 길 중에 1가지만 선택한 자유만 있다. 물론 생각하거만 그 선택할 수만 있는 자유조차 박탈되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그런 사트라피는 지금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인이 되었다. 그녀가 얻은 자유는 더 많은 표현의 장으로 갔으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녀가 그만큼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때 그녀에겐 또 다른 자유를 희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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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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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인간은 자유를 열망하고 자유를 위해 살아가고 심지어 자유를 위해 죽어간다. 그 자유라는 것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인간들에게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정말 다양하고 천차만별이라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가 난색할 정도인 것 같았다.

 

그런 자유의 개념에서 가장 자유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고 가장 유린되며 그리고 가장 신처럼 신봉되다가 때로는 악마의 얼굴로 변하는 전쟁에서, 이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 것일까? 식민지의 암울함과 동족상잔의 슬픔을 받아온 한국이라는 곳에서 자유라는 이름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숭고와 폭력을 남긴다.

 

따라서 전쟁의 씨앗이 스쳐가거나 혹은 스쳐가는 도중에 있는 국가와 인간이라면 뭔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까도 한다. 이번에 읽어본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를 보면서 자유라는 이름과 혹은 국가라는 존재에서 어느 한 소녀가 성인여성으로 성정하기까지의 이야기로 통해 그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이며, 큰 선물이고, 한편으로 허울 좋은 망상이면서도 반드시 갈구해야할 가치관이란 사실을 파괴적으로 보여준다.

 

그 파괴라는 것은 자아에 대한 파괴도 있을 수도 있으나, 그 파괴 되어가는 과정이 그 소녀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같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죽음에서 나의 의지와 운명을 개척하는 도중의 죽음이 아닌 그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무책임한 외부의 압력이라면 정말 납득이 불가하지 않은가?

 

이런 폭력의 시대에 태어난 마르잔 사트라피는 정말 독특한 운명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외증조할아버지는 본래 이란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열심히 국정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꿈을 좌절되었다. 그 이유는 이란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나고 일개 장교 하나가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임금은 샤라고 하는데, 세계 석학들의 전쟁, 테러, 착취에서 빠질 수 없는 독재자로 등급 한다.

 

그의 독재자의 등급에는 많은 원인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이란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가 난다는 점이다. 석유, 그것은 인류가 기계문명이 시작되고 나서 검은 황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지금 내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석유채굴에서 나온 나프타가스로 요리를 해먹는 것이고, 다음날 회사에 출퇴근하기 위해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를 운전함에도 디젤유와 휘발유가 필요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지금 타이핑을 치는 컴퓨터의 키보드와 마우스조차도 다 석유에 의한 화공산업용품으로 생긴 존재다. 석유라는 것은 20세기부터 시작해 21세기 모든 문명을 지닌 국가라면 필수적으로 챙겨야 할 에너지다. 그런 에너지가 막대한 양이 보유한 이란에 많은 국가들이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20세기 1차, 2차 대전 이후 강대국들은 많은 자본력을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제3의 국가를 타도할 필요가 있었다.

 

이란의 경우 이슬람문화권이라 기본적으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무역경제자유주의에 군사적인 적대감은 처음부터 없었다. 차라리 스탈린주의를 위시한 소비에트연방 및 동유럽 국가들이 더욱 골치가 아플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이란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독재정부를 만들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통치한다. 그런 와중에 어린 소녀 사트라피는 시대의 모순과 상처 그리고 반항으로 이어지는 자신을 이야기를 담은 서적이 페르세폴리스다.

 

1권과 2권이 분리되어 있다면, 1권은 그녀가 아직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에 있는 학교로 유학가기 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페르세폴리스라는 책은 단순히 픽션적인 이야기를 담은 만화가 아니라 논픽션을 기본으로 하여 기술해 나가는 하나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니 자전적인 회고록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만화로 탄생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만화로 생각하기엔 다소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깊은 좌절과 반항의식을 옆볼 수 있었다. 샤 정권의 독재와 거기에 저항하는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무참히도 살해하는 권력들, 가장 인상 남는 부분은 어느 극장의 문을 모조리 잠군 후에 거기 안에 화재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못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 이게 바로 독재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을 운명일까?

 

감옥에 출옥하여 자유를 맞이하고 싶었으나 얼마 후에 자신의 집에 있는 욕조에 얼굴이 빠진 채 죽은 마르크스주의자, 그것도 모자라 괴한에게 습격당해 교사된 가족들까지, 이런 혼돈스러운 시기에 전쟁까지 일어난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말이다. 1980년 이라크에서 이란에 대해 침공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도시문명을 파괴를 당한다. 이 모든 원인은 이권에 대한 집착이었다. 아랍권 국가에서 석유가 많이 나와 재정적으로 부유하기도 하나, 한편으로 수로에 대한 집착이었다.

 

물길이 있어야지 무역할 때 유조선이 출입이 가능하고, 환경생태학적으로 생각하면 물이 있어야지 인간은 생존하므로 에너지와 자원에 대한 약탈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미소 냉전 이데올로기가 없어도 말이다. 문제는 이런 것으로 국민의 생활을 처참하게 무너지고, 그 대신 무기를 팔아먹은 국가들은 부를 쌓아갔다. 예전에 전쟁을 하는 국가가 있으면 다른 국가가 두 나라에게 전쟁무기를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국가조약에서 금지되어야 화학무기 및 생체병기가 양쪽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이전의 전쟁은 총기의 총알에 맞거나 창과 칼의 날에 찔리거나 베여 죽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20세기 이후에는 이런 백병전보다는 가스로 통한 화학무기 살상이 가능했다. 전쟁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라 그 상대국가 자체의 인간으로 변질된 것이다. 페르세폴리스에서 그런 인도적이지 못한 세계시장 논리를 비판했다. 경제주의에 의한 자유와 인권에 대한 자유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으나, 이것이 오용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결국 하나의 유물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전쟁 중에서 사트라피는 직접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보는 것에서, 자신의 주변 사람이 끌려가는 현실까지 인지한다. 그녀가 외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그 나라의 14세 미만의 남자아이들은 외국으로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에 끌려가서 민족해방의 전사라는 숭고한 이름이 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숭고한 이름 뒤에는 희생이란 커다란 대가가 있었다. 게다가 끌려가는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황금열쇠 하나이다. 그 열쇠를 가지고 전쟁터에서 죽으면 천국에 가서 부자가 되어 많은 미인 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마치 이건 미치광이 종교단체에서 신도들에게 행하는 하나의 주술행위와 같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전쟁에 가서 총을 들고 싸우나 결국 지뢰밭에서 산산조각이 난 채로 꽃이 꺾이고 만다. 더욱 비극은 그들은 죽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닌 국가라는 명분 아래였으며, 전쟁으로 통해 이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방패막이로 살아가야만 했고, 그 생존이 다하는 순간 총, 폭탄, 지뢰에 의해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인간은 억압이란 공간에 있으면 거기에 맞추어 가면서도 한편으로 거기서 벗어나려는 충돌의지도 있다. 자유가 없는 세계에서 자유라는 이름은 많이 나오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억압된 자기의 내면을 해방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모습은 어린 소녀 사트라피에게 잘 보인다. 이란에서 서구사회 문명을 차단할 때 그녀는 핑크 플로이드 음악을 듣고, 마이클 잭슨과 나이키를 원했다. 그것이야 말로 어린 그녀에게 하나의 자유라는 공간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계속 억압적이었다. 여자에게 끊임없이 베일을 착용하기를 강요하고, 여성의 인권은 그저 자신을 받아주는 남성의 재량에 달려 있을 정도였다. 전쟁과 전쟁 후에 사회가 어지러우면 그만큼의 억압과 독재가 강해지는 것은 권력이 특정 세력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성들의 정치적 조직이고, 그 남성이 군사행동 주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억압된 공간에서 모든 것을 제한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공간에 불안한 일상을 할 수밖에 없는 사트라피 가족들은 사트라피를 오스트리아에 유학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이 없는 곳에 가서 자유가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만 같았다. 그건 사랑하는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자유를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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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의 시대 - 통제하다 평화롭다 불안하다
아르망 마틀라르 지음, 전용희 옮김 / 알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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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근대 철학자 중에서 현대철학의 기본적인 뿌리가 되던 3사람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예전에 니체가 저술한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니체의 문체는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막상 그 문장 하나들을 모우면 무슨 말인지 헷갈린다. 세상에 니체주의는 니체 혼자라는 말이 있듯이 니체에 대한 서적을 보면 뭔가 감이 오지만, 그 감을 잡는 순간 다시 놓친다. 그래도 이 책에서 상당히 인상 깊은 문구가 나온다.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일화인데, 1789년 프랑스혁명이 성공하자 프랑스 높은 계층 중에 롤랑 부인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 부인은 혁명 후에 색 퍼란 단두대 아래 자신의 목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변하면서 외쳤던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따지고 본다면, 자유라는 이름은 얼마나 위대하면서 한편으로 무서운지 끔찍한 상상력을 자아내게 한다. 이른바 저 자유라는 이름이 오늘날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아니라면 먼 미래에 닿는 그 찰나마저도 집어 삼켜지는 하나의 마수가 아닐까 싶다. 자유라는 것은 루소가 제시한 공동체 속의 자신을 포함하여 거기에 따르거나 혹은 홉스가 자유가 자유란 강제력의 부재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처럼,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란 칸트처럼 자신의 이성적 의지거나 혹은 밀처럼 윤리적 조건이 따라붙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금 난해한 부분이 있다. 위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자유라는 관념이 상당히 철학적이면서 깊은 사고로서 풀어가는 것에 반해 현실 속의 대부분 사람들 즉 군중이나 대중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인권인가? 아니라면 개인적인 권리인가? 더 나아가 권리에 대한 권리인가? 자유주의 개념에서 많은 종류가 있지만, 자본이 중심이 되는 자유주의라면 발터 벤야민이 말한 소재가 생각난다.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는 자본에 비례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본에 자유가 비례하고 권리와 권력이 비례한다는 것은 곧 자유의 독점이 되는 셈이다.

 

자유라는 것이 돈으로 매겨질 정도로 물질만능주의적인 세상이라면 참 곤란한 일들이 많이 발생될 것이다. 오늘 서평하려는 <감시의 시대>에서 자본주의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나, 조금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대중들 내지 군중들에 대한 자유에 대한 생각을 여기서 보고 생각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정치적 표현 내지 부조리에 대한 투쟁에서 자유를 얻기보다는 그저 소비로서 자유를 쟁취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에겐 자신이 말과 몸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력으로 승부하는 선택권이야 말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틀린 점이 아니다. 과거 동독과 서독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난 후에 동독 국민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서독의 백화점에 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것이 자꾸 소비의 사회로 도래할수록 과연 자유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정말 위험하다. 오히려 그런 사회가 기정 현실화 되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헤게모니적인 당연성이라면 인간의 의식은 본인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누군가 억지로 집어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로 되지 않겠는가?

 

그런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군중들을 대중들을 자신들이 지배당한다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그것을 위한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그 인식을 가로막는 것을 생각해 보니 여기서 좋은 문구가 나온다. 질 들뢰즈의 이야기로서 <우리는 더 이상 유폐된 채 작동하는 통제 사회가 아닌, 순간적 커뮤니케이션과 지속적인 통제로 작동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라고 말이다. 통제되는 것이 통제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고, 예전에 강압적인 요소는 비강압적이라 하나, 더 강력한 강압적 통제방법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공간에서 순간적이란 함은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점이다.

 

포스트모던 즉 탈산업 시대에서 정보매체의 발달은 인간에게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도록 한다. 즉 개인과 개인의 직접적인 대면과 유대보다는 전화, 핸드폰, PC, 인터넷으로 통한 간접적 대면으로 서로에 대해 지속적인 관계를 해체한다. 그런다고 하여 이들에게 유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에게 존재하는 유대감은 하나의 전체주의적인 태도로 변질된다. 가령 인터넷문화와 관련하여 한국의 인터넷문화 현재를 돌아보자. 우리 인터넷매체는 강력한 통신과 정보 이용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빠른 점과 명확하지 않거나, 혹은 고의적인 왜곡과 조작으로 마녀사냥 내지 사회적 대립이 야기되기도 한다.

 

감시의 시대에서 나오나, 과거처럼 모든 것을 직접적인 폭력수단인 테러보다는 차라리 그 대상지역의 사람들로 하여금 소요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더 좋은 수단이다. 외부의 군사적 테러리즘은 결국 상대국민들에게 공포의식만큼 반발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이에 반대로 정신적 선전공략, 즉 프로파간다적인 수단으로 대상들을 선전하면 매우 효과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아쉽게도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파리8대학의 교수이고, 독자인 나는 한국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군정에서 메카시즘의 열풍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효과적인 군사적 전략이 미군들의 직접적 개입보다 미군들의 심리전술로 통한 방법이 좋았다.

 

물론 그런 방법은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만이 아니라 북한에 들어온 스탈린군부세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이에 멍하니 당하는 국민들끼리만 서로 싸우고 미워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제법 먹힌다는 사실이다. 강대국들이 상대국가인 식민지 내에서 행한 방법들이 인도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테러리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시체를 유기하고, 심지어 가족들 앞에서 잔혹한 고문과 가족들에게 고문을 가하고 때에 따라서는 살해도 서슴치 않으며, 심지어 시체마저 유기시킨다.

 

감시의 시대에서 이런 폭력적인 요소가 결국 폭력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폭력 원인제공자는 폭력의 시초를 숨기고, 그 폭력의 보복성만을 증폭시킨다. 보복을 당하는 존재들은 그 테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간접적으로 프로파간다에 의해 동조된 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폭력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민간인들이 군인 못지않은 테러를 당하면 군중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불안은 모든 감시의 조건이고 시작이다. 불안을 자극하여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라는 슬로건이 결국 모든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는 단계로 이어진다.

 

폭력을 막기 위한 폭력인가? 아니라면 폭력을 시행하던 자들이 계속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폭력을 하나의 폭력을 가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작용하는 것일까? 본래 처음부터 폭력을 가하거나 그 폭력을 가하기 위해 눈 뜬 장님들의 동의를 받기 위해 감시를 하나의 자유와 평화 유지군으로 활용하지 않았던가? 감시의 기술과 교활함은 그래서 더더욱 발전하지 않은가? 게다가 소비의 자유가 인간의 이기와 편리만을 빠지게 하여 인간의 모든 정보와 사생활이 하나의 칩으로 실시간 감시되지 않은가?

 

어쩌면 감시의 시대는 정말 감시하는 방법보다는 왜 감시하게 되었는가에 치중하는 도서이다. 감시라는 것이 합리적 수단이 되기까지 강대국에서 벌여온 불법행위들이 테러로 다가와 그 테러에 대한 테러리즘이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공포를 잊기 위해 미디어의 조작과 왜곡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우생학이란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분류하고 차별하여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존재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우생학은 열등한 존재를 낙인찍게 하여 범죄예비자로 취급한다. 범죄예비자는 처음부터 범죄 할 계획을 준비했던가? 아리면 그들이 범죄 이외에 그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았는가? 감시의 시대에서 정말 감시를 받을 자들이 오히려 감시를 하고 있다. 그 감시조차도 당연하다고 믿게 하는 눈속임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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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마단 사럽 지음, 전영백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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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는 뭐라고 나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단지 "현대사상지도" 구조주의편에서 구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조란 무엇인가. 이 개념 자체는 오래됐다. 일반적으로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구성요소 및 요소 간의 여러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자, 개개의 요소가 변환되어도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전체로 정의된다. 그러나 구조주의에는 구조 개념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 첫째로 구조를 자기완결적이며, 실재적인 체계가 아니라 어떤 변환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라고 보는 점. 둘째로 구조를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적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개개의 것이 그것을 통해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출현하는 차이의 쳬계로 간주하는 점. 셋째로 그런 구조가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사의 실천에 우연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더욱 난감하다. 단지 구조주의는 자본을 지은 칼 마르크스, 영원회귀사상을 강조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인간의 무의식을 꺼내어 이성사고로 생각하던 서구사고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언어도 하나의 과학이며 체계를 지닌 것이라고 설명한 소쉬르의 언어학(기호학)으로 통해 생성되었다. 물론 초기 구조주의자들은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 루이 알세튀르, 로랑 바르트, 미셀 푸코, 자크 라캉으로 대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점은 여기 등장한 구조주의자 중에서 미셀 푸코와 자크 라캉은 후기 구조주의로서도 등장하는 점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 다음에 온 프랑스 사상운동이다.

 

그래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는 딱 내가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사상에서 정치, 철학, 사회, 언어,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대두된 점은 분명하다. "현대사상지도"에서 후기 구조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식이 이데아적으로 현전하는 표상, 텍스트에 위임된 일의적인 의미, 근대의 진보를 담당해온 이성 및 자율적 주체, 사회나 역사를 전체로서 통제하는 제도나 법 등, 모든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존재자의 동일적인 현전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 다음에 오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근본 전략이다. 게다가 그것은 다른 형태의 사상체계를 제시하기보다는 의미, 주채, 법을 설정하려는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텍스트 자체에 규범적인 동일성을 자기해체하는 계기가 포함되고 있으며, 동일성의 수립이 그 유일한 근거가 차이를 억압하고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폭로하는 내재적 비판을 전개한다.>

 

어째거나 나는 이 책을 보는 이유는 이런 복잡다양한 내용을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자, 정신분석하자, 사회학자가 어느 인물이 있고 그들은 어떠하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에서 이 책을 보았다. 처음 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를 알게 된 계기는 사상이나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다가 우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주제로 한 논문들을 접하면서 알게된 사상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해체적으로 분석한 논문과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비평적 텍스트로 접근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서사구조를 분석한 논문 등 다양한 학문을 접함으로서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철학이 있다는 것과 그 사상철학 기반에는 후기구조주의가 있었고, 다시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로 연결된 것을 알았다.

 

물론 이들 중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연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본 입장에서 마르크스가 상당히 사회구조적으로 글을 적는 점과 당대 명문의 글뿐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의 서적을 보고 인용하고 적절하게 집필했던 것으로 매우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사회철학자였다.

 

어째든 아직 인문학에 접하지 않은 일개 애니메이션 오타쿠 주제에 현대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사회를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뒤따르나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았다. 내가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비평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7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 라캉과 정신분석

2장 데리와 해체이론

3장 푸코와 사회과학

4장 후기구조주의의 흐름

5장 식수,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비: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

6장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

7장 보드리야르와 문화적 실천

 

1장에서 라캉의 접함 조금 신선했다. 내가 은근슬쩍 들어본 프로이트라는 존재를 여기 라캉으로 통해 존재를 더욱 각인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이어받았으나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조금 새롭게 보았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정신분석에 남성의 페니스 즉 동물적성기에 집중했다면 라캉은 팔라스 즉 남근에 집중했다.

 

프로이트적인 면은 동물적인 성적인 비유가 많다면 라캉은 오히려 문화와 역사적인 흐름으로 보기 편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서구사회는 이성중심의 남성권력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므로 모든 언어적인 형태나 사회적인 구조가 남성지배적인 흐름을 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팔라스에서 우리 인간이 태어나면서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가질 수 없음에 대한 상처로부터 언어를 배우고 언어를 배우는 것은 곧 사회적인 존재로 되는 것인듯 하다.

 

라캉의 이론은 조금 이해하기 난해하다. 물론 라캉의 이론적인 부분에서 내가 평소 많이 사용하는 인식이 많다. 그러다 아이가 어른으로 되는 과정에서 어린시절의 모습을 고찰함은 다소 뭐라고 표현하기가 그렇다. 그러나 정말 내가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떄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내가 애니메이션 오타쿠 생활하면 라캉의 이론 중에서 욕망과 인정부분을 코스프레 세계에서 보는 것 같다. 과연 코스프레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만족하기 위해 하는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을 만족하기 원하는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인물들은 주로 남성 즉 사회적으로 경제적인 부를 어느 정도 소지한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보이는 피사체는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싶은 존재이고,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은 그런 욕망에 대해 (자기를 내보이려는 것을) 욕망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특히나 오타쿠 6대 욕구 중에 '과시욕구'가 강하게 반영된 점과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는 것으로 이른바 사진에 잘 찍히는 것을 입어야 잘되는 코스프레라는 오류적인 사고를 담긴 한국 코스프레 오류적 부분이 보인 듯하다. 어느 코스프레이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쁘거나 잘 빠지거나 혹은 조금 노출이 입는 의상이나 도발적인 포즈가 잘 찍힌다. 결론은 이것다. 위의 붉은 글씨처럼 그들이 욕망하는 대상주체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의 근원은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이고, 이른바 훔쳐보기나 흝어보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고, 게다가 그 사회적인 부분이 성립되려면 언어는 필수다. 언어가 단순히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만이 아니라 모든 시니피에가 담긴 시니피앙에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언어는 하나의 권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최근 스탈당의 "적과 흑"이라는 사실주의적인 고전소설을 읽어봤는데, 이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적으로 읽어봄으로 "적과 흑"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소설에서는 당시 성경을 라틴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소설세계만 아니라 중세유럽사회에서 성경은 자국어가 아닌 라틴어로 많이 만든 점이다.

 

그것은 종교의 힘으로 왕권을 인정받는 유럽에서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었다.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계층은 한정적이고, 게다가 국민들은 자국어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문맹인이다. 그런 문맹인들이 원전의 성경을 읽는 것은 권력에 대한 침투이다. "적과 흑"의 줠리앙은 시골 목수의 소렐가문에서 태어난 비천한 신분이나 그의 우수한 두뇌와 라틴어 실력으로 귀족세계로 들어가서 후작의 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언어라는 것은 곧 지식을 알고 지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언어로 통해 자신의 입장과 권력을 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언어가 대부분 남성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사회적인 현상들은 언어학적인 부분에서 설명하는 점이 많다. 기본적으로 구조주의 자체가 소쉬르의 언어학을 기반으로 했으니 더욱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2장은 데리다와 해체이론이다. 솔직히 데리다를 내가 알던 부분은 이른바 반 플라톤주의에 대한 대표자이다. 그의 서구사회의 형이상학에 대해 해체하고자 했다. 그래서 처음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나는 해체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해체만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보완, 추가, 계승 등과 같은 다양한 애기들이 있었다. 그래도 데리다의 도발적인 면은 강렬한듯 하다.

 

물론 모든 것을 해체함은 올바르지 않다. 그런데 바꾸어 볼때 사회의 어느 합리주의적인 면에서 뒤집어 보면 상당히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다. 그런 점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거나 다르게 보거나 또는 역으로 시도해보자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해체라는 단어는 상당히 매혹적인 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가령 인종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이 하나의 당위성이 된 곳에서 이런 해체적인 태도가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3장은 사회과학을 제대로 연구한 미셀 푸코이다. 미셀 푸코는 본래 역사쪽인데 어떻게 하여 철학쪽으로 글이 더욱 강화되었다. 미셀 푸코의 글을 보고 사람들은 니체적인 부분이 많다고 한다. 니체는 당시 독일에 살면서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사상을 거부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평등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평등하지 않을까나?

 

어째든 니체에 대한 사상적인 부분을 미셀 푸코가 많이 받았으며 그는 상당히 계보학적인 면으로 고찰한다. 그가 고찰한 것은 권력에 대한 부분이다. 권력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과 대중에 관계 또한 현대사회의 제도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는 우리의 고민이나 문제를 스스로 풀기보단 제도적인 부분에서 많이 찾는다. 사랑은 연예상담가, 심리는 정신분석가 등등 하지만 이런 부분에 너무 얽매이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가 아닌 제도적인 혹은 국가체계적인 하나의 권력체계에 모든 것을 맡기어 버린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규제해 버리니 자유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의문도 든다.

 

또한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점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게 하는 것은 언어라는 것이 크다.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지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권위적 지표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에게 지식을 배우지 않은가? 상위 계급을 지닌 선생은 지식을 가짐으로써 학생들에게 하나의 권력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권력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에서 다양한 체계적인 부분에서 언어로 통해 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의 한마디나 혹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어느 정치가의 한 마디로 대중들의 판도가 이래저래 바뀌지 않은가? 권력은 언어의 위상으로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점이다.

 

4장은 후기구조주의의 흐름인데, 후기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운동과 많은 연계성이 있다. 이 후기구조주의는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인상깊다. 당시 프랑스 정권은 드골이었는데, 그의 정치권에서는 노동자의 억압, 사회적인 문제 등 다양한 담론에 대해 프랑스 노동자와 소르본대학 학생들이 모여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당시 드골은 물러나지 않으나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음은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노암 촘스키와 같은 언어학자가 월남전에 대한 반대서명과 일본에서는 1969년 야스다강당사건과 같은 일들이 벌여졌다. 세계는 1차와 2차세계대전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국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아닌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자본주의 이원화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국가정치가 외교적으로 대립되어 그 국가정치가 군사외교적으로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자신들의 정권에 대해 합리적임을 주장하자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어지러운 20세기에 다양한 사건을 보았고,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계적으로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회구조가 국가정부의 독재성을 보이는 것은 시대적 흐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독재성에 당위성을 주어 국민들을 통제하는 부분은 확실히 비판을 받음은 분명하다.

 

5장은 식수,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와 같은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이고, 대학교 인문학 계통에서 여성학이 창설되어 강의하고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보면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남녀차별로 시작하여 사회 전반적인 차별문제와 복지나 사회약자문제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기울리는데 반해 한국 여성부는 그저 억지로운 모습만 보인다.

 

여기서도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데 기존 사회와 문화 정치는 팔라스 즉 남근중심의 체계였다면 새로이 여성들이 급부상하면서 기존의 남근적인 부분을 여성적인 부분으로 서로 대화를 하거나 소통하기 보다는 그 남근적인 부분을 여성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부분에서 인정하나 그런 것들을 보면 단순히 지위와 권력만 자신에게 부여되면 평등이라는 하나의 교조적인 태도가 변모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지위과 권력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의무와 책임은 뒷전으로 물러날 경우 어긋난 사회현상이 보인다. 어째든 이 부분에서는 재미있는 해석이 보인다. 과거 오래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명작의 고전으로 남은 그리스신화이다. 여기서 엘렉트라신화와 관련하여 아가멤논 왕이 자신의 아내인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다. 이때 아폴로가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는 것을 옳다고 했는데, 이 두 사람을 죽인 장본인은 아가멤논왕의 막내아들인 오레스테스였고, 이 오레스테스의 누나가 엘렉트라이다.

 

그런데 이 아폴로에게 이 2사람을 죽이라고 충고한 존재가 아테네 즉 전쟁의 여신이다. 아테네는 제우스 머리에서 나온 여신으로 전형적인 남성적인 여신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페이트 나이트 스테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서 아서왕을 본따서 만든 캐릭터인 세이버가 이 아테네 여신과 흡사한 면이 많다. 신화 속에 등장해도 현대인들의 무의식에서 역시 그런 여성들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6장은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리오타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내가 아는 문학도의 이야기로는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나서 한번 이 편을 보니 왜 그런가라는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인다. 세상에는 다양한 담론이 오가는 거대서사가 있는데, 솔직히 거대서사를 뭐라고 표현하기 힘드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끊임없이 역사를 만든다. 바로 그런 역사적인 부분이라든지 혹은 사회이론적인 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애초에 거대서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반대되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나는 무조건인 부분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담론을 제공하는 거대한 존재로서 보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볼만큼 제대로 알지는 못하나 단순히 기존의 사고에만 얽매히는 것도 문제는 옳은 게 아닌가? 최근에는 나는 이런 문구를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해체해야한다고, 2010년대에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낡아버린 사상이 될런지도 모른다.

 

7장은 보드리야르와 문화적 실천이다. 내가 처음으로 철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을 접한 이유는 바로 이 장 보드리야르 덕분이었다. 우연히 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논문에서 나는 장 보드리야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때 해체주의를 만든 데리다의 이름도 보았다.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접한 게 된 것도 다 2사람의 이름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이른바 가상과 현실을 논하는 시뮬라시옹이 유명하다. 이른바 메트릭스 철학자라고 하나, 막상 본인은 자기와 메트릭스와 관련없다고 하나 어째거나 보드리야르의 이론에서 현개사회의 본질을 조금 헤쳐보인다. 그의 이론에서 시뮬라크르는 3가지로 나누었다. 이 이론을 뭐라 표현하기 그러나 1번 시뮬라크르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와 관계 있는 듯하다.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아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형상들을 눈앞에 조각이나 미술상으로 만든다.

 

그런데 2번째 시뮬라크르는 초기 모더니티 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에 의해 붕괴되고 모더니티 사회로 가는데, 이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졌다. 예술들은 하나의 영상으로 제작되어 영화나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영화나 사진은 사본 그 자체로 단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3번째 시뮬라크르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로 들어가면서 진정한 시뮬라시옹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통신발전과 매체의 발전은 사람들간의 전달매체 관계에서 실재 대신 가상이 차지하고 이른바 하이퍼-리얼리티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TV나 PC 옆에서 실재 일어났는지 혹은 아닌지 모르는 일들을 일어난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정보에 의해 길들어지면 미디어에 의한 권력으로 통해 우리는 수동적인 피지배 존재로 된다.

 

얼핏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스펙타클 이론과 많이 유사하다. 어느 서적에 보면 보드리야르는 기 드보르의 이론에서 많이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아마 68혁명의 덕분일까? 어째거나 마지막편은 보드리야르로서 끝맺음을 남긴다.

 

보고 느낀 것이지만 정말 어렵고 복잡하고 생각할 게 많다. 전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고 난뒤에 미셀 푸코가 니체적인 부분을 많이 계승하고 후기구조주의라는 것이 니체적인 부분이 많아 봤는데, 조금 혼돈스러워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그냥 모르고 스쳐가는 편이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뭔가 도움이 되는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구조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그 이론적인 부분이 틀리지 않았거나 혹은 수정해야할 부분이 새롭게 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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