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의 시대 - 통제하다 평화롭다 불안하다
아르망 마틀라르 지음, 전용희 옮김 / 알마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근대 철학자 중에서 현대철학의 기본적인 뿌리가 되던 3사람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예전에 니체가 저술한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니체의 문체는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막상 그 문장 하나들을 모우면 무슨 말인지 헷갈린다. 세상에 니체주의는 니체 혼자라는 말이 있듯이 니체에 대한 서적을 보면 뭔가 감이 오지만, 그 감을 잡는 순간 다시 놓친다. 그래도 이 책에서 상당히 인상 깊은 문구가 나온다.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일화인데, 1789년 프랑스혁명이 성공하자 프랑스 높은 계층 중에 롤랑 부인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 부인은 혁명 후에 색 퍼란 단두대 아래 자신의 목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변하면서 외쳤던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따지고 본다면, 자유라는 이름은 얼마나 위대하면서 한편으로 무서운지 끔찍한 상상력을 자아내게 한다. 이른바 저 자유라는 이름이 오늘날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아니라면 먼 미래에 닿는 그 찰나마저도 집어 삼켜지는 하나의 마수가 아닐까 싶다. 자유라는 것은 루소가 제시한 공동체 속의 자신을 포함하여 거기에 따르거나 혹은 홉스가 자유가 자유란 강제력의 부재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처럼,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란 칸트처럼 자신의 이성적 의지거나 혹은 밀처럼 윤리적 조건이 따라붙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금 난해한 부분이 있다. 위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자유라는 관념이 상당히 철학적이면서 깊은 사고로서 풀어가는 것에 반해 현실 속의 대부분 사람들 즉 군중이나 대중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인권인가? 아니라면 개인적인 권리인가? 더 나아가 권리에 대한 권리인가? 자유주의 개념에서 많은 종류가 있지만, 자본이 중심이 되는 자유주의라면 발터 벤야민이 말한 소재가 생각난다.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는 자본에 비례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본에 자유가 비례하고 권리와 권력이 비례한다는 것은 곧 자유의 독점이 되는 셈이다.

 

자유라는 것이 돈으로 매겨질 정도로 물질만능주의적인 세상이라면 참 곤란한 일들이 많이 발생될 것이다. 오늘 서평하려는 <감시의 시대>에서 자본주의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나, 조금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대중들 내지 군중들에 대한 자유에 대한 생각을 여기서 보고 생각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정치적 표현 내지 부조리에 대한 투쟁에서 자유를 얻기보다는 그저 소비로서 자유를 쟁취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에겐 자신이 말과 몸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력으로 승부하는 선택권이야 말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틀린 점이 아니다. 과거 동독과 서독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난 후에 동독 국민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서독의 백화점에 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것이 자꾸 소비의 사회로 도래할수록 과연 자유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정말 위험하다. 오히려 그런 사회가 기정 현실화 되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헤게모니적인 당연성이라면 인간의 의식은 본인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누군가 억지로 집어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로 되지 않겠는가?

 

그런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군중들을 대중들을 자신들이 지배당한다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그것을 위한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그 인식을 가로막는 것을 생각해 보니 여기서 좋은 문구가 나온다. 질 들뢰즈의 이야기로서 <우리는 더 이상 유폐된 채 작동하는 통제 사회가 아닌, 순간적 커뮤니케이션과 지속적인 통제로 작동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라고 말이다. 통제되는 것이 통제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고, 예전에 강압적인 요소는 비강압적이라 하나, 더 강력한 강압적 통제방법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공간에서 순간적이란 함은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점이다.

 

포스트모던 즉 탈산업 시대에서 정보매체의 발달은 인간에게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도록 한다. 즉 개인과 개인의 직접적인 대면과 유대보다는 전화, 핸드폰, PC, 인터넷으로 통한 간접적 대면으로 서로에 대해 지속적인 관계를 해체한다. 그런다고 하여 이들에게 유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에게 존재하는 유대감은 하나의 전체주의적인 태도로 변질된다. 가령 인터넷문화와 관련하여 한국의 인터넷문화 현재를 돌아보자. 우리 인터넷매체는 강력한 통신과 정보 이용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빠른 점과 명확하지 않거나, 혹은 고의적인 왜곡과 조작으로 마녀사냥 내지 사회적 대립이 야기되기도 한다.

 

감시의 시대에서 나오나, 과거처럼 모든 것을 직접적인 폭력수단인 테러보다는 차라리 그 대상지역의 사람들로 하여금 소요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더 좋은 수단이다. 외부의 군사적 테러리즘은 결국 상대국민들에게 공포의식만큼 반발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이에 반대로 정신적 선전공략, 즉 프로파간다적인 수단으로 대상들을 선전하면 매우 효과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아쉽게도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파리8대학의 교수이고, 독자인 나는 한국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군정에서 메카시즘의 열풍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효과적인 군사적 전략이 미군들의 직접적 개입보다 미군들의 심리전술로 통한 방법이 좋았다.

 

물론 그런 방법은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만이 아니라 북한에 들어온 스탈린군부세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이에 멍하니 당하는 국민들끼리만 서로 싸우고 미워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제법 먹힌다는 사실이다. 강대국들이 상대국가인 식민지 내에서 행한 방법들이 인도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테러리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시체를 유기하고, 심지어 가족들 앞에서 잔혹한 고문과 가족들에게 고문을 가하고 때에 따라서는 살해도 서슴치 않으며, 심지어 시체마저 유기시킨다.

 

감시의 시대에서 이런 폭력적인 요소가 결국 폭력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폭력 원인제공자는 폭력의 시초를 숨기고, 그 폭력의 보복성만을 증폭시킨다. 보복을 당하는 존재들은 그 테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간접적으로 프로파간다에 의해 동조된 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폭력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민간인들이 군인 못지않은 테러를 당하면 군중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불안은 모든 감시의 조건이고 시작이다. 불안을 자극하여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라는 슬로건이 결국 모든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는 단계로 이어진다.

 

폭력을 막기 위한 폭력인가? 아니라면 폭력을 시행하던 자들이 계속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폭력을 하나의 폭력을 가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작용하는 것일까? 본래 처음부터 폭력을 가하거나 그 폭력을 가하기 위해 눈 뜬 장님들의 동의를 받기 위해 감시를 하나의 자유와 평화 유지군으로 활용하지 않았던가? 감시의 기술과 교활함은 그래서 더더욱 발전하지 않은가? 게다가 소비의 자유가 인간의 이기와 편리만을 빠지게 하여 인간의 모든 정보와 사생활이 하나의 칩으로 실시간 감시되지 않은가?

 

어쩌면 감시의 시대는 정말 감시하는 방법보다는 왜 감시하게 되었는가에 치중하는 도서이다. 감시라는 것이 합리적 수단이 되기까지 강대국에서 벌여온 불법행위들이 테러로 다가와 그 테러에 대한 테러리즘이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공포를 잊기 위해 미디어의 조작과 왜곡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우생학이란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분류하고 차별하여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존재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우생학은 열등한 존재를 낙인찍게 하여 범죄예비자로 취급한다. 범죄예비자는 처음부터 범죄 할 계획을 준비했던가? 아리면 그들이 범죄 이외에 그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았는가? 감시의 시대에서 정말 감시를 받을 자들이 오히려 감시를 하고 있다. 그 감시조차도 당연하다고 믿게 하는 눈속임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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