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마단 사럽 지음, 전영백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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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는 뭐라고 나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단지 "현대사상지도" 구조주의편에서 구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조란 무엇인가. 이 개념 자체는 오래됐다. 일반적으로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구성요소 및 요소 간의 여러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자, 개개의 요소가 변환되어도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전체로 정의된다. 그러나 구조주의에는 구조 개념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 첫째로 구조를 자기완결적이며, 실재적인 체계가 아니라 어떤 변환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라고 보는 점. 둘째로 구조를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적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개개의 것이 그것을 통해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출현하는 차이의 쳬계로 간주하는 점. 셋째로 그런 구조가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사의 실천에 우연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더욱 난감하다. 단지 구조주의는 자본을 지은 칼 마르크스, 영원회귀사상을 강조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인간의 무의식을 꺼내어 이성사고로 생각하던 서구사고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언어도 하나의 과학이며 체계를 지닌 것이라고 설명한 소쉬르의 언어학(기호학)으로 통해 생성되었다. 물론 초기 구조주의자들은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 루이 알세튀르, 로랑 바르트, 미셀 푸코, 자크 라캉으로 대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점은 여기 등장한 구조주의자 중에서 미셀 푸코와 자크 라캉은 후기 구조주의로서도 등장하는 점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 다음에 온 프랑스 사상운동이다.

 

그래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는 딱 내가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사상에서 정치, 철학, 사회, 언어,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대두된 점은 분명하다. "현대사상지도"에서 후기 구조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식이 이데아적으로 현전하는 표상, 텍스트에 위임된 일의적인 의미, 근대의 진보를 담당해온 이성 및 자율적 주체, 사회나 역사를 전체로서 통제하는 제도나 법 등, 모든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존재자의 동일적인 현전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 다음에 오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근본 전략이다. 게다가 그것은 다른 형태의 사상체계를 제시하기보다는 의미, 주채, 법을 설정하려는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텍스트 자체에 규범적인 동일성을 자기해체하는 계기가 포함되고 있으며, 동일성의 수립이 그 유일한 근거가 차이를 억압하고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폭로하는 내재적 비판을 전개한다.>

 

어째거나 나는 이 책을 보는 이유는 이런 복잡다양한 내용을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자, 정신분석하자, 사회학자가 어느 인물이 있고 그들은 어떠하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에서 이 책을 보았다. 처음 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를 알게 된 계기는 사상이나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다가 우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주제로 한 논문들을 접하면서 알게된 사상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해체적으로 분석한 논문과 포스트모더니즘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비평적 텍스트로 접근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서사구조를 분석한 논문 등 다양한 학문을 접함으로서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철학이 있다는 것과 그 사상철학 기반에는 후기구조주의가 있었고, 다시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로 연결된 것을 알았다.

 

물론 이들 중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연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본 입장에서 마르크스가 상당히 사회구조적으로 글을 적는 점과 당대 명문의 글뿐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의 서적을 보고 인용하고 적절하게 집필했던 것으로 매우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사회철학자였다.

 

어째든 아직 인문학에 접하지 않은 일개 애니메이션 오타쿠 주제에 현대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사회를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뒤따르나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았다. 내가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비평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7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1장 라캉과 정신분석

2장 데리와 해체이론

3장 푸코와 사회과학

4장 후기구조주의의 흐름

5장 식수,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비: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

6장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

7장 보드리야르와 문화적 실천

 

1장에서 라캉의 접함 조금 신선했다. 내가 은근슬쩍 들어본 프로이트라는 존재를 여기 라캉으로 통해 존재를 더욱 각인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이어받았으나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조금 새롭게 보았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정신분석에 남성의 페니스 즉 동물적성기에 집중했다면 라캉은 팔라스 즉 남근에 집중했다.

 

프로이트적인 면은 동물적인 성적인 비유가 많다면 라캉은 오히려 문화와 역사적인 흐름으로 보기 편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서구사회는 이성중심의 남성권력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므로 모든 언어적인 형태나 사회적인 구조가 남성지배적인 흐름을 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팔라스에서 우리 인간이 태어나면서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가질 수 없음에 대한 상처로부터 언어를 배우고 언어를 배우는 것은 곧 사회적인 존재로 되는 것인듯 하다.

 

라캉의 이론은 조금 이해하기 난해하다. 물론 라캉의 이론적인 부분에서 내가 평소 많이 사용하는 인식이 많다. 그러다 아이가 어른으로 되는 과정에서 어린시절의 모습을 고찰함은 다소 뭐라고 표현하기가 그렇다. 그러나 정말 내가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떄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내가 애니메이션 오타쿠 생활하면 라캉의 이론 중에서 욕망과 인정부분을 코스프레 세계에서 보는 것 같다. 과연 코스프레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만족하기 위해 하는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을 만족하기 원하는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인물들은 주로 남성 즉 사회적으로 경제적인 부를 어느 정도 소지한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보이는 피사체는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싶은 존재이고,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은 그런 욕망에 대해 (자기를 내보이려는 것을) 욕망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특히나 오타쿠 6대 욕구 중에 '과시욕구'가 강하게 반영된 점과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는 것으로 이른바 사진에 잘 찍히는 것을 입어야 잘되는 코스프레라는 오류적인 사고를 담긴 한국 코스프레 오류적 부분이 보인 듯하다. 어느 코스프레이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쁘거나 잘 빠지거나 혹은 조금 노출이 입는 의상이나 도발적인 포즈가 잘 찍힌다. 결론은 이것다. 위의 붉은 글씨처럼 그들이 욕망하는 대상주체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의 근원은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이고, 이른바 훔쳐보기나 흝어보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고, 게다가 그 사회적인 부분이 성립되려면 언어는 필수다. 언어가 단순히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만이 아니라 모든 시니피에가 담긴 시니피앙에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언어는 하나의 권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최근 스탈당의 "적과 흑"이라는 사실주의적인 고전소설을 읽어봤는데, 이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적으로 읽어봄으로 "적과 흑"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소설에서는 당시 성경을 라틴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소설세계만 아니라 중세유럽사회에서 성경은 자국어가 아닌 라틴어로 많이 만든 점이다.

 

그것은 종교의 힘으로 왕권을 인정받는 유럽에서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었다.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계층은 한정적이고, 게다가 국민들은 자국어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문맹인이다. 그런 문맹인들이 원전의 성경을 읽는 것은 권력에 대한 침투이다. "적과 흑"의 줠리앙은 시골 목수의 소렐가문에서 태어난 비천한 신분이나 그의 우수한 두뇌와 라틴어 실력으로 귀족세계로 들어가서 후작의 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언어라는 것은 곧 지식을 알고 지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언어로 통해 자신의 입장과 권력을 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언어가 대부분 남성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사회적인 현상들은 언어학적인 부분에서 설명하는 점이 많다. 기본적으로 구조주의 자체가 소쉬르의 언어학을 기반으로 했으니 더욱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2장은 데리다와 해체이론이다. 솔직히 데리다를 내가 알던 부분은 이른바 반 플라톤주의에 대한 대표자이다. 그의 서구사회의 형이상학에 대해 해체하고자 했다. 그래서 처음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나는 해체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해체만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보완, 추가, 계승 등과 같은 다양한 애기들이 있었다. 그래도 데리다의 도발적인 면은 강렬한듯 하다.

 

물론 모든 것을 해체함은 올바르지 않다. 그런데 바꾸어 볼때 사회의 어느 합리주의적인 면에서 뒤집어 보면 상당히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다. 그런 점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품거나 다르게 보거나 또는 역으로 시도해보자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해체라는 단어는 상당히 매혹적인 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가령 인종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이 하나의 당위성이 된 곳에서 이런 해체적인 태도가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3장은 사회과학을 제대로 연구한 미셀 푸코이다. 미셀 푸코는 본래 역사쪽인데 어떻게 하여 철학쪽으로 글이 더욱 강화되었다. 미셀 푸코의 글을 보고 사람들은 니체적인 부분이 많다고 한다. 니체는 당시 독일에 살면서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사상을 거부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평등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평등하지 않을까나?

 

어째든 니체에 대한 사상적인 부분을 미셀 푸코가 많이 받았으며 그는 상당히 계보학적인 면으로 고찰한다. 그가 고찰한 것은 권력에 대한 부분이다. 권력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과 대중에 관계 또한 현대사회의 제도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는 우리의 고민이나 문제를 스스로 풀기보단 제도적인 부분에서 많이 찾는다. 사랑은 연예상담가, 심리는 정신분석가 등등 하지만 이런 부분에 너무 얽매이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가 아닌 제도적인 혹은 국가체계적인 하나의 권력체계에 모든 것을 맡기어 버린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규제해 버리니 자유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의문도 든다.

 

또한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점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게 하는 것은 언어라는 것이 크다.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지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권위적 지표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에게 지식을 배우지 않은가? 상위 계급을 지닌 선생은 지식을 가짐으로써 학생들에게 하나의 권력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권력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에서 다양한 체계적인 부분에서 언어로 통해 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의 한마디나 혹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어느 정치가의 한 마디로 대중들의 판도가 이래저래 바뀌지 않은가? 권력은 언어의 위상으로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점이다.

 

4장은 후기구조주의의 흐름인데, 후기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운동과 많은 연계성이 있다. 이 후기구조주의는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인상깊다. 당시 프랑스 정권은 드골이었는데, 그의 정치권에서는 노동자의 억압, 사회적인 문제 등 다양한 담론에 대해 프랑스 노동자와 소르본대학 학생들이 모여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당시 드골은 물러나지 않으나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음은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노암 촘스키와 같은 언어학자가 월남전에 대한 반대서명과 일본에서는 1969년 야스다강당사건과 같은 일들이 벌여졌다. 세계는 1차와 2차세계대전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국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아닌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자본주의 이원화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국가정치가 외교적으로 대립되어 그 국가정치가 군사외교적으로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자신들의 정권에 대해 합리적임을 주장하자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어지러운 20세기에 다양한 사건을 보았고,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계적으로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회구조가 국가정부의 독재성을 보이는 것은 시대적 흐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독재성에 당위성을 주어 국민들을 통제하는 부분은 확실히 비판을 받음은 분명하다.

 

5장은 식수,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와 같은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이고, 대학교 인문학 계통에서 여성학이 창설되어 강의하고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보면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남녀차별로 시작하여 사회 전반적인 차별문제와 복지나 사회약자문제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기울리는데 반해 한국 여성부는 그저 억지로운 모습만 보인다.

 

여기서도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데 기존 사회와 문화 정치는 팔라스 즉 남근중심의 체계였다면 새로이 여성들이 급부상하면서 기존의 남근적인 부분을 여성적인 부분으로 서로 대화를 하거나 소통하기 보다는 그 남근적인 부분을 여성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부분에서 인정하나 그런 것들을 보면 단순히 지위와 권력만 자신에게 부여되면 평등이라는 하나의 교조적인 태도가 변모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지위과 권력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의무와 책임은 뒷전으로 물러날 경우 어긋난 사회현상이 보인다. 어째든 이 부분에서는 재미있는 해석이 보인다. 과거 오래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명작의 고전으로 남은 그리스신화이다. 여기서 엘렉트라신화와 관련하여 아가멤논 왕이 자신의 아내인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다. 이때 아폴로가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는 것을 옳다고 했는데, 이 두 사람을 죽인 장본인은 아가멤논왕의 막내아들인 오레스테스였고, 이 오레스테스의 누나가 엘렉트라이다.

 

그런데 이 아폴로에게 이 2사람을 죽이라고 충고한 존재가 아테네 즉 전쟁의 여신이다. 아테네는 제우스 머리에서 나온 여신으로 전형적인 남성적인 여신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페이트 나이트 스테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서 아서왕을 본따서 만든 캐릭터인 세이버가 이 아테네 여신과 흡사한 면이 많다. 신화 속에 등장해도 현대인들의 무의식에서 역시 그런 여성들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6장은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리오타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내가 아는 문학도의 이야기로는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나서 한번 이 편을 보니 왜 그런가라는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인다. 세상에는 다양한 담론이 오가는 거대서사가 있는데, 솔직히 거대서사를 뭐라고 표현하기 힘드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끊임없이 역사를 만든다. 바로 그런 역사적인 부분이라든지 혹은 사회이론적인 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애초에 거대서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반대되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나는 무조건인 부분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담론을 제공하는 거대한 존재로서 보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볼만큼 제대로 알지는 못하나 단순히 기존의 사고에만 얽매히는 것도 문제는 옳은 게 아닌가? 최근에는 나는 이런 문구를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해체해야한다고, 2010년대에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낡아버린 사상이 될런지도 모른다.

 

7장은 보드리야르와 문화적 실천이다. 내가 처음으로 철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을 접한 이유는 바로 이 장 보드리야르 덕분이었다. 우연히 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논문에서 나는 장 보드리야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때 해체주의를 만든 데리다의 이름도 보았다.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접한 게 된 것도 다 2사람의 이름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이른바 가상과 현실을 논하는 시뮬라시옹이 유명하다. 이른바 메트릭스 철학자라고 하나, 막상 본인은 자기와 메트릭스와 관련없다고 하나 어째거나 보드리야르의 이론에서 현개사회의 본질을 조금 헤쳐보인다. 그의 이론에서 시뮬라크르는 3가지로 나누었다. 이 이론을 뭐라 표현하기 그러나 1번 시뮬라크르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와 관계 있는 듯하다.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아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형상들을 눈앞에 조각이나 미술상으로 만든다.

 

그런데 2번째 시뮬라크르는 초기 모더니티 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에 의해 붕괴되고 모더니티 사회로 가는데, 이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졌다. 예술들은 하나의 영상으로 제작되어 영화나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영화나 사진은 사본 그 자체로 단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3번째 시뮬라크르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티 사회로 들어가면서 진정한 시뮬라시옹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통신발전과 매체의 발전은 사람들간의 전달매체 관계에서 실재 대신 가상이 차지하고 이른바 하이퍼-리얼리티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TV나 PC 옆에서 실재 일어났는지 혹은 아닌지 모르는 일들을 일어난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정보에 의해 길들어지면 미디어에 의한 권력으로 통해 우리는 수동적인 피지배 존재로 된다.

 

얼핏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스펙타클 이론과 많이 유사하다. 어느 서적에 보면 보드리야르는 기 드보르의 이론에서 많이 가져왔다고 하기도 한다. 아마 68혁명의 덕분일까? 어째거나 마지막편은 보드리야르로서 끝맺음을 남긴다.

 

보고 느낀 것이지만 정말 어렵고 복잡하고 생각할 게 많다. 전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고 난뒤에 미셀 푸코가 니체적인 부분을 많이 계승하고 후기구조주의라는 것이 니체적인 부분이 많아 봤는데, 조금 혼돈스러워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그냥 모르고 스쳐가는 편이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뭔가 도움이 되는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구조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그 이론적인 부분이 틀리지 않았거나 혹은 수정해야할 부분이 새롭게 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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