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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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녕 나츠메 소세키 작자의 작품이렸소? 고양이가 세상을 보고,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고양이가 narrator로 변신하여 narrative를 이끌어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재미난 글이구나!

 

 

 

이런 엉뚱한 문체로서 이 소설의 감상을 열어가는 내 심정은 그 소설의 문체에 조금 동화되어 적어보려고 한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란 작가는 예전부터 조금 이름을 들어왔다. 예전에 일본의 아주 현명한 문학비평가 겸 사상가인 가라타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의 문학도 중에서 나츠메 소세키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실로 느끼게 해주었으니 말이로다. 물론 그 이전에 푸른 문학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고코로 즉 마음(心)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참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치밀히 묘사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원전은 보지 않음에도 애니메이션에 담론하고 있는 작품의 묘사력에서 영상효과도 중요하나 그 원래의 스토리라인이 엄청나게 탄탄한 것만은 사실이렸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 작품의 대작 중에서 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작가인 것을 한층 더 깊게 다가왔다. 문제는 매력적이란 사실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가 적은 것을 읽음이지,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마주본 사실이 없기에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모든 등장인물은 나츠메 소세키 자신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은 분리된 자신의 모습이다. 오로지 여기서 현명하고도 풍월을 제대로 외우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이름조차 없는 고양이다. 이름 없는 자가 어찌하여 인간살이에 그렇게도 상상 이상으로 관찰하고 풍월을 외운다는 말인가? 어째든 그 고양이는 바로 나츠메 소세키의 자아비판을 하는 목소리 중에 하나다. 이 소설은 매우 풍자가 강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게다가 고양이가 인격화되어 우화처럼 서술자가 되었으니 이 기묘한 조화는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단지 이 글을 보면 볼수록 재미와 더불어 가슴 한편에 왠지 모를 슬픔이 다가온다. 왜냐하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비록 소설에 가상의 인물들이 펼쳐가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나 그 모티브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부분은 모두 나츠메 소세키란 소설가를 반영한 것이다. 무척이나 우둔하고 겉멋만 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은 웃기게도 영어교사를 맡고 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과 미국 등과 같은 외국과 교역하면서 신문물이 들어오고, 거기에 당시 지식인과 기업인, 정치인들이 큰 변화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하오니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 역시 동경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니고, 영국에도 유학갈 정도로 수재였지만, 그 역시 구샤미군처럼 자신의 모순에 뼈저리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늘 말하듯이 주인은 책 1권을 들고 몇 장도 읽지 않은 주제에 잠만 탐하고, 주변에 메이테이, 간게츠, 산페이, 스즈키, 부에몬 등과 같은 인물이 오면 마치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츠메 소세키는 열심히 했지만, 그가 그렇게 함에도 그 자신은 구샤미군처럼 느껴질 것이로다. 당시 일본사회는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만든 화(和)를 중시한 시기는 지나갔다.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과거의 봉건국가는 지나가고, 전형적인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한 시기다. 러일전쟁을 거론하는 것부터 당시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물론 고양이는 자신이 일본인이고, 자신 역시 국가를 사랑하기에 전쟁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의 승기를 바란 것 같아도, 의연금을 내달라는 것에 구샤미군의 쓴 표정에서 전쟁 이후의 당시 상황에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음은 분명하다.

 

 

 

왜 그렇게까지 그래 생각함에 중요한 것보다는 왜 그리 되었나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분명 고양이가 보는 어느 영어교사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의 담화로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츠메 소세키의 슬픔과 고뇌가 담겨있다. 우선 구샤미군을 보면 그는 위장병을 앓고 있다. 왜 앓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특별히 술을 많이 마시거나 음식을 편식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는 위장병으로 늘 아픔을 느낀다. 그 모습은 마치 나츠메 소세키가 위장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에서 그렇고, 그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그의 젊은 시절에 신경쇠약증으로 무척이나 고생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풍자로 가득한 글에서 고양이가 풍월을 외우는 자들을 보고 자기도 외우고 있으렸다! 하고 있어도 역시 이 글은 풍자 속에 가려진 나츠메 소세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양이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고 2년 동안 살며, 산페이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고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을 때 고양이는 죽음에 대해 고통보단 오히려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형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라며 최후를 맞이하며 이 소설은 끝을 본다. 하지만 그 전에 고양이는 자기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타인들의 죽음을 예견한다.

 

 

 

주인은 조만간 위장병으로 죽는다, 가네다네 영감탱이는 욕심 때문에 이미 죽었다.” 이 소설의 하권이 1907년 나츠메 소세키기가 40세일 때가 창간되고, 그 후 나츠메 소세키는 1915년 향년 48세의 나이로 결국 위궤양에 의해 세상과 이별을 맞이한다.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은 자신이 쇠경쇠약으로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쓰러졌고, 게다가 위궤양이 지독한지 그의 운명을 재촉했다. 그래서 마치 구샤미군처럼 위장병으로 죽는다는 사실에서 자신을 구샤미군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그는 위장병으로 죽고 만다. 이 글귀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깊은 아픔과 허무함이 드리워졌다.

 

 

 

나츠메 소세키가 일본 근대문학에서 잊을 수 없는 작가고, 일본에서 그의 작품을 100년 동안 사랑한 것처럼 나 역시 그의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한국 근대작가 이상의 날개에서 나온 문구가 생각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나츠메 소세키는 그런 천재적 문학도인 자신의 우울과 그 우울함을 주는 세상에 대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츠메 소세키의 연대를 보니 그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다.

 

 

영문과에 다닌 점을 본다면 그의 문학적, 철학적 재량은 상당하다. 이 책에서 등장인물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거론하고 있다. 초인(超人)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넘으려고 하는 욕망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메이지시대의 엉터리지식인이라고 해도 정말 엉터리로 볼 수 있을까 이다. 등장인물 중 구샤미군은 무척이나 어리석고, 아둔하며,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심이 있었다. 비록 엉뚱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고양이가 어미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무참히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구샤미군의 집에 올 때 그 고양이의 생명은 구샤미군의 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초반에 이 집의 하녀인 볼이 넓은 오상에게 미움털이 박혀 위기에 빠지나, 그 생명을 살게 해준 것은 구샤미군 덕분이다. 비록 아둔하고 어리석어도 말이다. 고양이는 주인의 멍청함과 아둔함을 비웃으나, 한편으로 주인의 입장을 동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양이와 같은 나츠메 소세키이니 말이다. 당시 일본이 자본주의가 오고, 가네다 같은 영감이 득세하는 시기였다. 학문을 하는 자들은 모두 쓸모없는 자가 되기 시작했다. 간게쓰와 같은 인물은 충분히 영리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려 해도 받지 않은 채 가네다의 딸과의 혼사를 뒤로한다. 대신 산페이 군이 가네다의 딸과 결혼한다고 한다.

 

 

 

고양이가 죽은 것은 바로 왜 가네다의 딸을 간게쓰가 아닌 산페이로 하느냐이다. 이미 일본은 공부를 하고, 인격을 중시하던 과거의 마음을 모조리 버린 채 새로운 문화에 적응했는지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과거의 헤게모니적인 관직이나 권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관직과 재력은 유효하되 인간살이가 점점 삭막해져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구샤미군처럼 어리석고 현실물정은 모르는 자는 가네다와 같은 부자들에 대해 경외심이나 존경심은 없다. 나츠메 소세키가 이 소설을 집필 당시 분명 당시 사회나 혹은 지금까지라도 보통 일반인들은 가네다와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황금만능주의가 도래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 구샤미군과 고양이, 그리고 나츠메 소세키는 매우 좋지 않음이렸다. 하지만 세상을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고, 지식인들의 지식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고, 메이테이 같은 작자는 허풍선이만 늘어내고 있다. 그런데도 웃긴 사실은 그런 엉뚱한 세상에 묻혀버린 지식인들에게 교육받는 이들은 다시 그 지식인들이 원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네다와 같은 인물로서나 혹은 따르는 무리로서 가는 것이다.

 

 

 

이 소설처럼 구샤미군은 영어를 가리키는 교사이고, 나츠메 소세키 역시 교사와 교수를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교육관과 사회관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음에 대한 낙심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가네다 영감이 자신의 딸과 간게쓰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메이테이와 구샤미군에 대해 은밀한 공작을 펼친다. 구샤미군 집 옆에 학교가 있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네다 영감으로부터 뭔가의 지원을 받아 야구를 하고, 그 공들이 모두 구샤미군으로 향한다. 공이 날라 오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고, 귀찮아진다. 그래도 구샤미군은 중학생들 상대로 막무가내 행동을 하고, 엄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 집에 학생들이 와서 인사말로 “공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냥 대문 안으로 보내주었다.

 

 

 

자신 역시 교사인데, 학생들은 교사인 자신보다 가네다 영감의 재력에 마음이 갔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재미난 풍자이나, 한편으로 보면 나츠메 소세키의 기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도 나츠메 소세키는 이런 세상이 모순으로 너무 가득한 것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은 분명하다. 본 작품에서 고양이가 주인은 위장병으로 곧 죽겠지만,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자라고 한다. 주인은 곧 죽는다 에서 지금은 죽지 않았고, 가네다 영감은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라는 말에서 풍월을 외는 시대에 뒤쳐진 자보다, 가네다와 친하게 지내는 구샤미군의 옛 친구인 스즈키의 말대로 “그런데 그 돈이라는 놈이 괴물이라서, 지금도 어떤 사업가한테 가서 듣고 왔는데, 돈을 버는 데도 삼각술(三角術)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의리도 없고, 인정도 없고, 수치도 없고, 이로써 삼각이 된다는 거야, 재미있잖아? 아하하하.”

 

 

 

저 삼각술에서 의리, 인정, 수치도 없이 돈만 밝히면 그 시대에서 인정받아 성공한다는 자체에 나츠메 소세키와 나츠메 소세키를 분리시킨 고양이와 구샤미군의 일행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 구샤미군이 위장병은 단순히 음식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구샤미군이 단순히 정말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는 구샤미군과 같은 사람이 멍청하고 어리석게 되어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 정신병원에 있는데, 이들은 평소에 멀쩡해도 가끔씩 자신의 재주를 부릴 때만 미친 인간이양 된다. 하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상대방이 정상인으로 볼 뿐이다.

 

 

 

아니 이 소설에서부터 뭔가 잘못 되지 아니한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타이틀로서 고양이가 어떻게 인간과 같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그것도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은 새끼고양이가 말이다. 온갖 철학과 문학적 지식과 더불어 과학의 지식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만하면 천재 중에 천재인 고양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서술하는 언어는 마치 화려한 꽃들이 이리 피고 저리 피어 구불구불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현상이렸다.

 

 

허나 고양이가 이토록 전지전능한 지식과 판단을 가지고 인간을 보니, 인간의 모습이란 그저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였다. 고양이는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지 않았기에 말이다. 대신 고양이는 술을 마시고 마치 춤을 추면서 항아리에 빠져 죽는다. 그래도 고양이는 죽음이 고맙다고 한다. 아니 죽음으로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절망 속의 희망을 품은 나츠메 소세키의 외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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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
후루타 모토오 지음, 박홍영 옮김 / 일조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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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문구가 가장 인상이 깊었다. “총알은 미국의 것이고, 보급품은 일본의 것이고, 흘린 피는 한국의 것이다.” 물론 100% 조사의 사용은 맞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전반적인 내용은 맞다. 무기는 미국이 제공하고, 보급품은 군수기지로 활약하던 일본(오키나와 섬이 베트남과 가깝고, 게다가 거기는 미군이 주둔했다 - 생각해보면 일본의 땅이 아니라 오키나와는 류구왕족이 평화로이 지내던 곳인데, 일본근대사에서 억지로 빼앗은 영토이다. 그러고 보니 북해도의 아이누족 역시 그러하다 - 거기서 B-52 폭격기의 웅장한 날개를 펴고 갔으니 얼마나 무서우랴?)

 

어째든 <역사 속의 베트남전쟁>이란 책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내용을 아주 구체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만든 도서이다. 보통 베트남전쟁하면 무엇인가? M-16A1을 들고 있는 한국용사들이 베트콩을 향해 연속사격을 날리면, 베트콩들은 바주카를 들고 나와 응사해주는 영화 같은 장면들이 생각난다. 물론 그런 장면은 실제 없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전쟁을 하게 되면 초반에 군대의 규율에 따라 아주 용감히 전진을 하게 되겠지만, 시끄러운 총소리와 대포소리, 폭격기들의 폭탄투하가 시작되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기본적으로 사격을 해본 남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자기가 직접 가늠쇠에 눈을 조준하며, 겨누는 M-16 기관소총이 조용하지 않은 도구라는 것을 알 것이다. 게다가 군대사격장에서는 반자동모드로 통해 한 발씩 사격한다. 만약 반자동에서 자동으로 넘기어 여러 명이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사격한다면 아마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뭐가 뭔지 모르를 공화상태에 빠질 것이다. 게다가 수류탄이 터지고, 바주카포가 날라 오고, 폭격기의 폭탄이 지면 위로 비오는 뿌리면 인간이 이성은 마비된지 옛날이다.

 

그때부터 도망치기 바쁘거나 땅에 엎드려 떨기 바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자라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것이나, 적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없는 곳이 전쟁이다. 그런 전쟁에 대한 기록을 어느 직접 참전하거나 지켜본 입장이 글을 쓴다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말이 나올 수 없다. 적어도 자신이 총을 맞아 큰 부상을 입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무참히 총이나 폭격에 죽던가, 혹은 전쟁이 끝이 나도 자신 안의 세계에서는 전쟁이 끝나지 못한 채 정신적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일까? 물론 멀리서 망원경을 전황이나 보며, 혹은 지도나 전광판에 마치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을 엄청난 고민하고 신중을 기하는 플레이어처럼 말 한마디나 때로는 손가락으로 끝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겐 목숨의 위태로움이 없기에 그들에게 전쟁이란 영광의 순간이다. 병사 수 천 명이 죽어도 적진에 큰 타격과 승리의 전환점이 되면 누가 죽든지 그 원망의 소리 대신 환호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있든지 그 자리에 있으면 객관적인 입장은 불가능이다.

 

어째든 전쟁이란 인류의 역사로 보면 문명의 존재에겐 필요악이란 이름이라고 본다. 전쟁은 분명히 나쁘고 더럽고 증오스럽지만, 인간은 자신의 그 나쁘고 더럽고 증오스러운 존재성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전쟁이다. 그래서 그 전가를 시키는 자들은 매우 비열하고 치사하며 악독한 자들이다. 보통 전쟁에서 승패의 결과나 군세나 혹은 군인이나 전투요원이 아닌 자들이 옆에 말리는 것도 아닌데도, 20세기의 전쟁은 군인과 군인의 전쟁이 아니라, 그 국가의 정치적 권력(안에 숨은 이권단체)과 상대국가(특히 어린이, 여자, 노인들과 같은 저항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그 존립자체이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집계하면 총과 칼에 의해 죽기보단 독가스에 의해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독가스가 퍼지면 군인들은 방독면이라도 구비하여 막으면 되나, 민간인들은 그냥 노출되고, 면역력이 약한 자들은 그저 죽을 뿐이다. 전쟁이 미친 짓이라고 외치는 것이 백 번, 천 번이고 옳고 지당하다. 전쟁 후에 남는 것은 없다. 그나마 원정 간 국가의 영토는 무사하나, 원정당한 영토는 그야말로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고, 환자와 난민만 무성할 뿐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 나라에 다녀간 사람들이 상대국가 정치체계는 몰라도 그 국민에 대한 발언이 정당하냐고 생각하면 이들의 사고회로는 완전히 파시즘의 그물에 걸린 불쌍한 물고기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 속의 베트남전쟁이란 도서는 저런 표현이나 느낌을 살리지 못하나, 적어도 그런 상황 속에 전쟁이란 상황을 잘 정리해간 도서다. 책의 저자는 일본 동경대학교 부총장으로 문화연구를 하던 학자이니 매우 잘 정리했다고 본다. 저자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일본이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한국이나 미국처럼 강한 충격을 일본에게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은 군사적 목적에서 파병과 같은 전투행위보단 물품이나 팔던 보급기지였다. 생각해보면 1950년 625전쟁에서 가장 피를 본 나라는 당연히 한국과 북한이다. 많이 죽고 많이 다치고, 게다가 농토가 황폐화되고, 도시가 무너졌으니 말이다.

 

그 다음으로 미국이나 유엔군, 소련, 중공 순으로 갈듯하다. 그러면 이에 반면에 누가 가장 이익을 봤는가에서 당연히 일본이다. 일본은 전쟁경제로 통해 부를 축척해갔다. 한국전쟁에서 옆집에 불 건너 구경하였는데, 그 옆집이 모조리 불타니 거기에 대한 조치에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봤는가? 게다가 베트남전쟁이라니, 후루타 교수는 그런 점을 이 책에 명시했다. 적어도 그는 일본에서 망언이나 하는 비양심적 인물이 아니라 순순히 학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객관적인 판단 아래 이 책을 적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이 전쟁에 대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본래 베트남은 고대 중국으로 시작하여 10세기부터 독립하여 다시 19세기 후반 프랑스에게 식민지화 당한다. 중국 역사서에서 남만이란 미개한 종족들이 소개되는데, 아마 베트남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에게 정치적 압박을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왕국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자본제국주의에 점령당했다. 웃기는 사실은 프랑스하면 자유와 평등이 연상되나, 그것은 자기들만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많이 양호한 편이나 20세기 현대사까지 지켜보면 알제리전쟁과 그 일들은 프랑스가 과연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화와 평등을 논할 가치가 있을까 싶다.

 

이에 반해 다른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더불어 서구사회의 식민지로 전략했다. 그러던 베트남이 스스로 독립하려고 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대신 일본이 와서 침략하더니, 이제 베트남 스스로 독립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때 프랑스와 일본과의 충돌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침략을 하려다 실패하고, 1964년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있었다. 통킹만 사건을 쉽게 말하면 지나가는 동네 초등학생에 대해 덩치 좋은 고등학생이 다가와 자기 얼굴에 주먹 2대를 날리는데, 한 번은 가짜라는 점이다. 혼자 죽치고 쇼를 하다가 미국과 베트남은 전쟁을 하게 된다.

 

물론 정치적으로 1917년 10월 레닌이 만든 러시아혁명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스탈린주의자로 변질되어버린 소비에트연방이 미국과 냉전 중이라, 베트남이든 중공이든 당시 국민들은 오로지 2차 세계대전과 강대국의 해방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해진 이후 도래할 냉전에는 아무런 감이 없었다. 그 시험무대가 1차 매치는 한국전쟁이고, 2차 매치는 베트남전쟁이다. 그나마 한국전쟁은 미군과 전 세계 유엔군이 왔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정당성이 부여되나, 베트남전쟁은 단독적이고, 그 우군이 한국파병만 도착했다. 물론 다른 남베트남 내지 다른 일부 국가가 있으나, 유럽사회는 그렇게 도착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전쟁은 단순히 겉으로는 좌우이데올로기란 목적의식이나, 그 뒷면에 나온 보고서에는 원유, 고무 등과 같은 자연원자재인 셈이다. 아마 이때부터 전쟁은 조금씩 정치적 힘겨루기와 더불어 원자재 소유 전쟁을 하고, 21세기는 완벽하게 자원과 영토의 목적으로 변모했다. 결국 세계는 시장자유주의라는 것이고,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탈(脫)이데올로기가 오히려 더 거센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전쟁은 미소 냉정의 엄청난 여파를 준 전쟁이다.

 

아직도 미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베트남전쟁을 보면 M-16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죽고 또 죽어 죽음의 언덕을 차지한다. 이길 수 없었던 베트남에 대해 최후의 승자는 미국이다! 라는 깃발을 날리듯 그때 미군이 패배해도 21세기에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을 알아야 하는 것은 전쟁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특히 퓰리처상으로 올라간 네이팜탄소녀의 모습이 다시 보이면 안되는 것이다.

 

네이팜탄이 자신의 옷에 붙어 그 옷을 모조리 벗어 폭격을 피해 달아나던 그 소녀, 이젠 중년의 부인이 되었지만, 그 사진의 비참하고 급박함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전쟁을 하면 나는 군인이 죽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 특히 어린이들이 학살되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누구에겐 상당한 이익과 발전이 되었지만, 그만큼 누군가에겐 그 이상의 피와 눈물을 쏟게 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서 모순을 느낀다.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답도록” 정말 누가 그것을 망치는지는 잘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어느 피해자 내지 가해자의 특이성을 살리는 것보단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는 책이 좋을 듯하다. 비록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도, 우리 역시 그런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에게 가한 폭력을 기억해도, 남에게 폭력을 가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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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Freakonomics이란 책을 봤을 때 상당히 의아했다. 괴짜경제학이란 말에서 괴짜가 만든 경제학인지, 아니라면 괴짜 같은 사람이 경제학을 연구한 것인지?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안의 경제가 괴짜라는 것이지 말이다. 또 다른 의아함은 이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인가라는 점이다. 매우 똑똑한 사람이고 독특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머리말에 들어갈 때 우연히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라는 미국 철학자는 자유지상주의였다.

 

물론 자유지상주의라고 하여 자본주의와 함께 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그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에 대한 자유에 대한 권리이지 자본으로 통한 자유를 모조리 억압하는 형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노직이란 노장의 철학자가 이 책에 등장했다. 어느 날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브 레빗이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말에 이래저래 모두 하고 싶다는 엉뚱한 답변에서 노직이 그에게 나이를 묻자 저자는 스물여섯이라고 한다. 그 대답을 들은 노직은 이렇게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말해주었다.

 

“이 친구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네. 그렇다면 벌써부터 굳이 통합적인 중심 주제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 젊은이는 재능이 너무나 풍부해서 하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친구인지도 모르지. 결국 그때그때 질문을 하나 택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거라는 애긴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과연 철학의 거장다운 말이다. 그런 거장의 안목이 있었는지 이 스티븐 레빗의 감추어진 능력은 정말 재미있다. 책을 넘길 때마다 오! 이런 면이 있었나? 라고 생각 드는 것도 있었고, 한편으로 본인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부분도 있었다. 어차피 인간사회는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안다는 말처럼 단지 스티븐 레빗은 절대적인 영역의 인간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에 비해 머리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호기심과 분석하는 과학적 사고가 훨씬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보자면 그가 가진 가치관인 것 같았다. 그는 클린턴 정부시절 부시의 잘못된 선거운동에 대한 자문관이라고 했으니, 그의 가치관은 얼마든지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엘리트 출신의 학자이고 당연히 백인이지만, 그것에 하나의 헤게모니적인 권력을 바라기보단 그것을 파헤치려고 했다. 왜냐고 이 책을 자세히 보면 나오지 않은가? 미국의 극단적인 백인우월사상으로 가득 찬 인종차별주의자 KKK(Ku Klux Klan)단에 대한 일화에선 분명히 그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가 만약 백인우월주의자라면 자신들 백인들의 문제점과 난폭함, 그리고 잔혹함을 그대로 떠버릴 수가 있을까? 예전에 본 미국역사에서 흑인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 레빗은 이미 그런 기존의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고정관념에 대한 공격으로 볼 수 있다. 마약상에서 왜 부모와 사는지, 낙태문제와 범죄문제, 교육과 주변 환경 요소는 분리하기 힘든 요소이다. 특히나 부동산과 스모선수는 폐쇄적인 정보로 통해 이익을 챙기는 부당성을 고발한다.

 

인간에게 항상 자신만의 영역이란 것이 있다. 그 영역에서 하나의 신성함을 인정받으면 그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는 것 같다. 단지 일본의 스모선수의 경우 스모선수의 사회에 내재된 비리와 부정을 고발한 두 명의 용사는 어느 순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뿐이다. 정보를 고립하는 것과 대중들이 정보를 알아도 그것을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 인식 자체가 너무 당연한 이데올로기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상한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편견과 고정관념에 쌓여간다.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회구조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란 한계라는 점이다. 그 정보 자체가 어마어마한 경제적 효과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시장에 채소를 사러갈 때도 같은 골목길 안의 가게인데도 어느 가게의 채소는 양도 풍부하고 가격도 합당하고 게다가 영양가도 좋다. 반대로 어느 곳은 그러지 못하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분명한지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은 식물학자 및 전문상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상인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지역의 어느 농장에서 값도 합리적이고, 영양가가 높고 신선한지를 모두 타인에게는 비밀이다.

 

영업의 전략에서 정보라는 것은 매우 사소한 일상의 부분까지 미친다. 그런 정보이니 그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겐 어느 정보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조차 불분명할 때가 있다. 분명 그 판단을 내리는 순간만큼 우리 인간들, 혹은 본인 같은 일반 사람 역시 “나는 분명 이 선택이 옳고, 틀리지 않았으며,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이었어.”라고 하나, 막상 돌이켜보면 그것은 틀린 답이었다. 레빗의 괴짜경제학에서 부동산이 그렇게 보였다. 분명 42,000달러에 매매를 할 수 있어도, 중개업자가 40,000달러로 팔아 자신에게 수수료가 적게 떨어지더라도 유도하는 점이다. 그러나 수수료를 비율로 받아가기 때문에 몇 백달러 이상 차이나지 않으며, 오히려 빨리 거래를 성사함으로 부동산 업체 사람에게 그 만큼 거래물량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부여한다.

 

흔히 시간만 끌면 광고비와 운영비가 나가니 이왕이면 어서 나가는 편이 이익이란 점이다. 그러나 업체사람은 판매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42,000달러가 적정하나 요새 시세는 40,000달러입니다. 2,000달러를 낮추면, 금방 팔리고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말은 자신의 심리적 욕망을 남에게 떠미는 꼴이다. 사소한 부분들은 이래저래 좌충우돌한다. 특히 인상 깊은 점은 범죄다. 누구나 자신은 안전하고 안락한 사회생활을 누리기를 바란다. 문제는 자신은 그런 욕구를 가지나 주변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부분으로 넘어간다. 가난하고 못배우고, 게다가 집안환경이 나쁜 청소년이 범죄확률은 매우 높다.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10대 청소년들이다. 이들의 범죄원인은 부모이다. 어머니가 10대 미혼모로서 흑인들이 주로 많고 술, 마약, 담배 등으로 매우 심각한 부작용이 온다. 물론 이런 아동들은 원하지 않은 임신이고, 낙태가 거절당하면 무리하게 낳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낙태수술비까지 비싸고, 불법적이라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부적절하게 관리된 산모의 자녀들은 편부모에 가난한 집안에 학교에 가서 교육의 기회도 낮고, 좋은 직업도 얻지 못하며, 중고등학교 시절부터는 학교보단 거리로 나간다.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매우 값이 저렴한 일이나, 혹은 불법적 일이다. 마약의 손길은 그러하다. 어느 유색인종 학자가 몇 년 동안 마약r 갱들과 지내며 그들의 생활을 봤는데, 처음에 그는 죽을 수 있으나, 그 역시 유색인종으로 미국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고, 흑인사회에서 흑인들 역시 그를 보면서 처음에 적대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같이 밥도 먹고 생활까지 돌봐주는 사이가 되었다.

 

딱히 범죄자와 학자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 사기보단 그들을 주시할 때 왜 그렇게 되는가이다. 우리는 그냥 흑인이니깐 가난한 할렘가의 불량배라고 하나, 막상 왜 그렇게 되고, 그것이 된 배경과 사유에는 관심이 없다. 스티븐 래빗이 그런 일들을 어떻게 잘 포착하여 책까지 썼는지 그의 자유이나, 적어도 그가 그렇게 본 것은 괴짜경제학은 단순히 경제라는 합리적 계산이익으로 보는 경제학이 아니라 정말 그 경제 자체를 연구하는 하나의 사회과학이다. 물론 이 사회과학에는 철학이 있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범답안이 아니라 왜 그 문제가 생겼는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원인의 답이다.

 

괴짜경제학은 정말 그가 괴짜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괴짜처럼 되지 않으면 건들지 못한 부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별과 고정관념, 일부 사람들의 정보 독점과 왜곡이다. 결국 그것은 그 사회에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괴물이다. 처음에 괴물은 큰 살모사처럼 독만 내뿜다가 결국에 메두사처럼 모든 것을 돌로 만든다. 적어도 살모사는 무조건적으로 사람을 위협에 빠뜨리게 하지 않지만, 메두사는 보는 인간 모두 망가뜨린다. 결국 망가져 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한 사회의 이면이다. 물론 두 눈 크게 뜨고 생각을 한번만 아니라 또 다시 한번 더를 유지하면 가능할지 모르나, 그것이 되었다면 레빗이 책을 적어 낼 이유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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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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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읽으면 주제나 의미에 대한 부분에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관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난해하여 보통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 매우 부적당한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너무 쉽게 적어 마치 이원화적인 대립관계만 내세우면, 그것은 단순히 한쪽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정치적 공세이지 그것 자체에 철학이란 단어를 수식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이나 혹은 그 이상의 서적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치와 철학에 대한 사고를 간단히 유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숲의 왕국”에서 이런 문제를 잘 고민했는지, 작가가 매우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풀어 넣었다.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한 곳은 인간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자연 숲속이고, 그 숲속이라고 하여도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처럼 숲속의 나무들이 동물들이 직접 인간처럼 행동하기보단 그 숲 자체의 나무로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움직인다. 물론 작품 중간에 나무들이 움직여서 땅을 메우고, 시냇물을 막고, 가시를 날리는 것은 상당히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나, 그 상상력에 대한 글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적은 작가나 그것을 바라보는 문인들 역시 이 소설은 우화(寓話)라는 점에서 숲속의 나무들을 인격을 갖춘 존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무들이 인격화하여 그들이 직접 사람과 교감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숲속의 주인인 원노인과 원노인 아래서 같이 일을 돕는 목상무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숲속의 기운이 좋고 나쁨을 알 수 있지, 그 이상으로 대화를 듣거나 직접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인간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보단, 자연의 나무들이 어느 특정 인간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대화능력을 소유한 원노인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다. 고등학교 시절 625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어 그의 마음은 아마 매우 수척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숲일지도 모를 돌산을 보며, 그곳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60년 동안 노력하고, 목상무는 원노인이 40년 전에 거둔 고아로서 함께 그 숲속을 가꾸게 하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 머리가 하얗게 된 노인과 중년의 남성이 되었다. 노인은 어느 제안을 했다. 숲속의 왕을 정하자고 말이다. 이때까지 잘 견뎌온 그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이 작품의 주인공인 노인은 사실 몇 년 전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 다행히 효험은 있었으나 그의 인생이 길지 않음을 노인 스스로 알고 있던 것이다.

 

노인은 그래도 아랑곳없이 그저 숲만 돌보고 숲에서 즐기고 많은 것을 나누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보단, 기독교에 대한 관념적으로 대하던 그는 정말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저 자신의 신이 정하는 것처럼 자연에 있는 숲속이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숲속에 이때까지 왕이나 계급은 없었다. 단지 노인만이 숲속의 주인이었다. 노인은 숲속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숲속의 나무와 그 나무를 찾아오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벌레와 시냇물까지 모두였다.

 

아름다운 숲이란 모두가 모여 옹기종기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갈등도 빚어도, 그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었다.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처음 나무를 심을 때 리기디소나무나 밤나무와 같은 큰 나무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나무를 심는다고 주변에 잡초와 잡목을 베자, 그만 홍수피해가 나버린 것이다. 잡초와 잡목들은 홍수가 오면 그 홍수를 막는 힘이었다. 숲속에는 언제나 크고 인간에게나 혹은 동물에게나 실용적인 나무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당장 쓸모없이 보인 것들이어도 노인에게 모두 소중한 생명이었다. 노인이 가꾼 숲은 전국의 유명한 숲이 되고, 거기에 오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였고, 나비와 벌은 춤을 추었다. 시냇물의 물맛은 너무 좋아 주변에 산짐승이나 아니면 원노인도 찾아와 갈증을 해소했다. 그 모든 작은 하나들이 이루는 숲이었다. 아마 그런 숲에서 원노인은 자신이 숲의 주인이 아니라 숲의 주인 중에 하나이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곳에서 말이다.

 

노인이 숲의 왕을 뽑고 싶은 것은 이제 자신의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다는 점과 동시에 이제 숲 스스로가 자신들을 가꿀 수 있는 능력이 된 것을 알았다. 노인은 숲을 믿었고, 숲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상무에게 숲을 부탁하고, 어디로 여행만 다닌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숲은 조용하지 않았다. 왕의 자격에서 누가 되는가에서 인간과 동물에게 실용적이지 못한 작은 나무들이 차례라 밤나무, 잣밤나무, 벚나무에게 찾아가나 계속 주소가 틀렸다. 하지만 탱자나무에게 갔을 때 탱자나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숲은 이제 나무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명령했다.

 

처음에 사람을 내쫓고, 동물을 내쫓고, 벌레도 내쫓자 숲은 마치 아무도 오지 않은 적막한 공간이 되었다. 이제 시냇물도 막고, 하다못해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는 것은 외로움과 괴로움, 아픔과 슬픔이었다. 시냇물이 막자 뜨거운 태양이 지면을 비추면 나무들은 목이 타들어가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비가 많이 오면 이미 삼림이 황폐해져 모두 토사에 밀려 피해를 보았다. 거기다가 진딧물까지 나무의 진을 빨았고, 숲은 신음에 가득했다. 그리고 숲속 밖의 인간들은 숲속 안의 나무들이 병들고, 열매도 못 맺고, 더 이상 즐거움이 없자 모두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과 남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이 그 남의 머리 위로 올라가고 싶은 심술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여 최악의 극단적 상황까지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들을 죽이고 멸종하게 하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들이 계산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자기 자신들이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들은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탱자나무 역시 처음에 인간을 멸시했으나, 그 역시 원노인의 정성 아래 이만큼 자라고 자란 것이다. 탱자나무는 처음에 자신이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으로 알았으나, 원노인은 탱자나무의 향이 좋다고 여겼다. 원노인에게 모든 것은 다 필요한 존재였다.

 

사랑받지 않은 존재가 없듯이 숲속의 나무들과 그리고 풀들은 모두 자신들이 이 숲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것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등과 같은 큰 나무들은 인간들에게 직접 열매도 주고, 좋은 경치도 준다. 인간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능력이 있는 재산가 내지 엘리트다. 하지만 작은 풀과 작은 잡목들은 당장 필요 없어 보이는 존재로 그들보다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심지어 사과나무를 심어보는 것이 이익이 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사소하고 작고, 별로 두각을 나타나지 못하는 나무나 풀 역시 숲속에서 바꾸어 말하여 우리 인간사회에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그런 작은 존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지? 혹은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너무 비관적인 사고에 빠져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며, 모두를 곤란하게 하는지가 우리 현실을 나무에 빗대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주 일어난 일이고, 또한 그런 문제로 숲속은 멸종을 맞이하나 다시 살아난다. 혁명이라든지 쿠데타와 같은 강제적인 폭력과 행위보단 조금씩 서로 대화와 토론을 거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모두 고생하고 모두 곤란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와 철학은 무엇일까?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인정해주는 관용이 아닐까?

 

원노인이 숲속에서 왕을 지정하게 되면 당연히 서로 다투고 난관에 부딪힐 것을 미리 예상했다. 하지만 원노인은 다 잘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서로의 힘으로 모두 서로 도우며 잘 살 수 있는 길을 말이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균형이란 중요하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고,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다. 그런 점들을 모두 같은 존재로서 인정해주면 왕은 소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왕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되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세계일까?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평탄치 않은 사실은 이 소설에서 잘 보여준다. 그것은 어렵고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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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김우영 지음 / 푸른사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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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라이라는 한자어인 래()로 의미는 오다는 말이고, 따이한은 대한(大韓)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국이 온다 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래라는 말이 베트남에서는 혼혈아이를 아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가령 흑인에 대해 깜둥이라 하는 것과 농촌사람들을 촌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책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듯이 역시 소설 내용도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라이따이한이라고 하여 전쟁에서 어느 전투원이 베트남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이별을 그리는 단순한 전쟁이란 비극적인 이데올로기를 로맨스란 환상으로 가려운 것이 아니라 전쟁과 낭만에서 태어난 암울한 비극의 씨앗에 대해 적은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들을 모은 것들인데, 10편이 되는 단편소설들을 모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느끼는 예사롭지 못한 점들은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을 마치 그 사람의 입장과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적어간 것이다.

 

특히나 답답한 일들이 있으면 막소주를 마신다는 것처럼, 서민의 애환과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만든 사회구조라는 점에서 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라이따이한 소설은 총 10편으로 구성된 것처럼 (1) 625전쟁 시 1.4후퇴로 개마고원 산자락 고향을 내버려두고 내려온 어느 순박한 노인의 이야기 통일 꽃”, (2) 중 수교로 통해 한국사람들이 중국에서 가서 중국 교포나 현지인과 만나 남겨진 2세에 대한 슬픈 이야기 한궈쓰성츠”, (3) 성실한 농부가 소 육성사업 실패에 따른 인생좌절에 대한 이야기 까치다리 동동”, (4) 일제강점기 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팔 하나 잃은 노인의 귀국 이야기 상봉”, (5)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인데도 버림받은 베트남가족 이야기 라이따이한”, 김삿갓이 먼 과거서 현대 첨단기술로 통한 세계일주를 다룬 세계 특사여행”, 수술 시 수혈 받은 피가 에이즈로 감염되어 인생의 좌절을 겪는 몽실대과 그 남편의 이야기 악파의 피”, 과학자들의 미래지향적 과학이야기 우리들의 천국”, 가난한 문필가 남편과 그 가족들의 가난함 일상과 오순도순한 이야기를 다룬 자화상”, 한국 시인이 몽골처녀와 한눈에 반해 서로 결혼한 찐따화 니엔거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생각한다면 낯설 수 없는 이야기나, 낯설 수밖에 없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정보와 교통 발달,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한다고 여겼으나,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보통 서사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이 아닌 보편적 영역이나, 이 이야기는 현대에 살아가는 어느 특정인물에게 일어난 것을 적어가고 있으므로 매우 개인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인물들이 우리에게 전혀 새롭지 않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더욱 새롭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접하는 TV와 미디어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의 반에 반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실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TV의 이야기로 가득 메우는 것을 본다. 우리는 현실에 살아가는 존재인데, 왜 현실이 아닌 드라마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 같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이 책의 뒤편에 가면 안용산이란 시인이 적은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바로 이 시대와 살아가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계와의 부딪침이다. 그래서 인식과 표현을 두 날개로 삼아 힘차게 날아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또 다른 문구가 있다. 문학가인 구인환 교수의 문구처럼 <소설은 스탕달의 말대로 인생의 길가에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에는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양상이 다채롭게 비친다. 일상생활의 살아가는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한이 서리어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과 미움 갈등과 평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초탈의 철학이 숨 쉬게 된다. 또한 격동의 역사 흐름 속에 민족의 수난과 그 극복 또 전란과 평에의 희구가 숨가쁜 현실을 이룬다.>

 

정말 이 소설은 인간의 한이 몸서리치는 소설이었다. 단지 어느 개인, 그것도 딱 집어내어 농촌사람, 베트남 어느 3대 모녀, 중국의 어느 모자, 몽골의 어느 아가씨, 고향에 다시 온 할아버지, 고향을 그리워한 어느 할아버지, 에이즈에 걸린 부부, 입안에 생선가시가 걸려도 병원비 몇 천원이 아까워 그냥 빠질 때까지 노력하는 문필가의 아내, 모두 일반사람이고, 흔히 볼 수 있어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들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만 찾지, 어둠 뒤에 소외된 자들에게 항상 무관심의 장막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엔 깊은 아픔과 여운이 남는다. 글자도 모르면서 고향의 첫사랑을 그리워해 하모니카를 부는 마고원 할아버지의 슬픔에서 이들은 외롭게 혼자 쓸쓸히 죽어간 이웃일 수 있고, 에이즈에 걸린 부부는 그저 착실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인데도 한 순간에 모두에게 멀어져야 하던 비극일 것이다. 몽실댁이 둘째 딸과 막내딸을 위해 떼어내는 모습은 참 애처롭다. 막내가 엄마의 젖을 먹으려고 추워서 엄마의 품에 안기려고 해도 엄마 몽실댁은 강제로 부정한다. 그녀에게 들어간 악마의 피가 그녀의 아이들에게 가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둘째 딸에게 밥을 직접 지어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남편과 자신은 라면을 끓여 먹는다. 마지막에 몽실댁은 자신의 언니네 가족에게 두 딸을 맡기고, 남편과 같이 자신의 고향인 몽실골로 간다.

 

이렇게 허무한 운명처럼 이들에게 닥친 고난에서 정말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특히 진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중에 하나가 사할린에서 돌아온 어느 징용당한 할아버지다. 팔을 잃어 외로이 러시아에 있다가, 러시아인과 결혼했으나, 그녀마저 죽고, 고향으로 영구귀국을 한다. 돌아오자 환영보단 소외가 심했다. 자기가 살던 집인데, 오히려 타국살이보다 낯설었다. 예전 아내는 재혼을 하고, 일가친척들은 모두 외면한다. 자기처럼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는 자신이 돌아왔다고, 주변 친척 중에 혼삿길 막았다고 인연까지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런 일들은 종종 본 것 같았다.

 

한궈쓰성츠와 라이따이한에선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타국으로 발을 넓히며 타국의 여인과 짧고 허황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특히 라이따이한에서 할머니는 월남전에 한국인의 아이를 얻고, 그 중 딸아이가 한국베트남 수교로 출장 온 한국인의 딸을 놓는다. 그래서 3대 모녀가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라이따이한 1세인 딸의 아이가 뇌성마비환자였다. 아버지란 작자는 도망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이 모녀들을 돌보던 한국인 선교사가 노력하나, 선교사에게 돌아온 말은 차갑고 이기적인 답이었다. 그나마 월남전에 온 남자는 괜찮았다. 미안하다는 말과 조금의 돈을 부쳐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사경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이 책의 저 모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슬펐는지 작가는 진안 운장산의 최승호 시인이 만든 라이따이한의 노래라는 시를 읊는다.

 

엄마는 예 있는데, 아빠는 어디 있나

얼굴도 못 본 나, 새똥처럼 던져놓고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로 갔나

<메콩강> 줄기 따라 핏줄 이리 흐르건만

모르겠네 모르겠네 뿌리를 모르겠네

내 나이 스물 넘고 서른 넘어도

모르겠네 모르겠네 아빠 아빠 나라 <따이한>

궁금치도 않다던가 뿌리놓은 씨앗들

야자수 뒤흔드는 <스콜> 바람에 행여나 오시려나 아빠의 소식

그러나 바람만.....무심한 바람만.....

무정한 아빠처럼 그저 그냥 그렇게 지나네요.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낯선 세계의 모습이나, 그 세계의 그들에겐 매우 현실적으로 참담하고 암담할 것이다. 자기의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이들의 한은 너무 철저했다. 이념과 전쟁에 상관없이 그저 순박하게 살고 싶던 그녀들, 폭탄이 떨어지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난 이웃들, 옆집 처녀는 배의 창자가 터져 그날 먹은 음식까지 알 정도라 했다. 이 부분이 나올 때 폭격으로 인해 나체로 길가를 달리던 어린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 기억났다. 그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은 네이팜탄 소녀였다. 사실 네이팜탄 소녀나, 개마고원에서 내려온 마고원 할아버지나, 징용당한 할아버지나 모두 아무런 죄가 없이 그저 세월의 잔인함 속에 어둠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한다. 아픔의 기억은 사라지려 하나, 그 사라진 기억 너머에는 아픔의 공간까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책을 읽으며 짧은 여운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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