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으면 주제나 의미에 대한 부분에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관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난해하여 보통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 매우 부적당한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너무 쉽게 적어 마치 이원화적인 대립관계만 내세우면, 그것은 단순히 한쪽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정치적 공세이지 그것 자체에 철학이란 단어를 수식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이나 혹은 그 이상의 서적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치와 철학에 대한 사고를 간단히 유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숲의 왕국”에서 이런 문제를 잘 고민했는지, 작가가 매우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풀어 넣었다.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한 곳은 인간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자연 숲속이고, 그 숲속이라고 하여도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처럼 숲속의 나무들이 동물들이 직접 인간처럼 행동하기보단 그 숲 자체의 나무로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움직인다. 물론 작품 중간에 나무들이 움직여서 땅을 메우고, 시냇물을 막고, 가시를 날리는 것은 상당히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나, 그 상상력에 대한 글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적은 작가나 그것을 바라보는 문인들 역시 이 소설은 우화(寓話)라는 점에서 숲속의 나무들을 인격을 갖춘 존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하여 나무들이 인격화하여 그들이 직접 사람과 교감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숲속의 주인인 원노인과 원노인 아래서 같이 일을 돕는 목상무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숲속의 기운이 좋고 나쁨을 알 수 있지, 그 이상으로 대화를 듣거나 직접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인간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보단, 자연의 나무들이 어느 특정 인간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대화능력을 소유한 원노인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다. 고등학교 시절 625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어 그의 마음은 아마 매우 수척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숲일지도 모를 돌산을 보며, 그곳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60년 동안 노력하고, 목상무는 원노인이 40년 전에 거둔 고아로서 함께 그 숲속을 가꾸게 하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제 머리가 하얗게 된 노인과 중년의 남성이 되었다. 노인은 어느 제안을 했다. 숲속의 왕을 정하자고 말이다. 이때까지 잘 견뎌온 그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이 작품의 주인공인 노인은 사실 몇 년 전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 다행히 효험은 있었으나 그의 인생이 길지 않음을 노인 스스로 알고 있던 것이다.

 

노인은 그래도 아랑곳없이 그저 숲만 돌보고 숲에서 즐기고 많은 것을 나누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보단, 기독교에 대한 관념적으로 대하던 그는 정말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저 자신의 신이 정하는 것처럼 자연에 있는 숲속이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숲속에 이때까지 왕이나 계급은 없었다. 단지 노인만이 숲속의 주인이었다. 노인은 숲속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숲속의 나무와 그 나무를 찾아오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벌레와 시냇물까지 모두였다.

 

아름다운 숲이란 모두가 모여 옹기종기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갈등도 빚어도, 그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었다.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처음 나무를 심을 때 리기디소나무나 밤나무와 같은 큰 나무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나무를 심는다고 주변에 잡초와 잡목을 베자, 그만 홍수피해가 나버린 것이다. 잡초와 잡목들은 홍수가 오면 그 홍수를 막는 힘이었다. 숲속에는 언제나 크고 인간에게나 혹은 동물에게나 실용적인 나무만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당장 쓸모없이 보인 것들이어도 노인에게 모두 소중한 생명이었다. 노인이 가꾼 숲은 전국의 유명한 숲이 되고, 거기에 오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였고, 나비와 벌은 춤을 추었다. 시냇물의 물맛은 너무 좋아 주변에 산짐승이나 아니면 원노인도 찾아와 갈증을 해소했다. 그 모든 작은 하나들이 이루는 숲이었다. 아마 그런 숲에서 원노인은 자신이 숲의 주인이 아니라 숲의 주인 중에 하나이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곳에서 말이다.

 

노인이 숲의 왕을 뽑고 싶은 것은 이제 자신의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다는 점과 동시에 이제 숲 스스로가 자신들을 가꿀 수 있는 능력이 된 것을 알았다. 노인은 숲을 믿었고, 숲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상무에게 숲을 부탁하고, 어디로 여행만 다닌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숲은 조용하지 않았다. 왕의 자격에서 누가 되는가에서 인간과 동물에게 실용적이지 못한 작은 나무들이 차례라 밤나무, 잣밤나무, 벚나무에게 찾아가나 계속 주소가 틀렸다. 하지만 탱자나무에게 갔을 때 탱자나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숲은 이제 나무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명령했다.

 

처음에 사람을 내쫓고, 동물을 내쫓고, 벌레도 내쫓자 숲은 마치 아무도 오지 않은 적막한 공간이 되었다. 이제 시냇물도 막고, 하다못해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오는 것은 외로움과 괴로움, 아픔과 슬픔이었다. 시냇물이 막자 뜨거운 태양이 지면을 비추면 나무들은 목이 타들어가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비가 많이 오면 이미 삼림이 황폐해져 모두 토사에 밀려 피해를 보았다. 거기다가 진딧물까지 나무의 진을 빨았고, 숲은 신음에 가득했다. 그리고 숲속 밖의 인간들은 숲속 안의 나무들이 병들고, 열매도 못 맺고, 더 이상 즐거움이 없자 모두 없애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과 남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이 그 남의 머리 위로 올라가고 싶은 심술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여 최악의 극단적 상황까지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들을 죽이고 멸종하게 하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들이 계산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자기 자신들이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들은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탱자나무 역시 처음에 인간을 멸시했으나, 그 역시 원노인의 정성 아래 이만큼 자라고 자란 것이다. 탱자나무는 처음에 자신이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으로 알았으나, 원노인은 탱자나무의 향이 좋다고 여겼다. 원노인에게 모든 것은 다 필요한 존재였다.

 

사랑받지 않은 존재가 없듯이 숲속의 나무들과 그리고 풀들은 모두 자신들이 이 숲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것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등과 같은 큰 나무들은 인간들에게 직접 열매도 주고, 좋은 경치도 준다. 인간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능력이 있는 재산가 내지 엘리트다. 하지만 작은 풀과 작은 잡목들은 당장 필요 없어 보이는 존재로 그들보다 밤나무나 도토리나무 심지어 사과나무를 심어보는 것이 이익이 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사소하고 작고, 별로 두각을 나타나지 못하는 나무나 풀 역시 숲속에서 바꾸어 말하여 우리 인간사회에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그런 작은 존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지? 혹은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너무 비관적인 사고에 빠져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며, 모두를 곤란하게 하는지가 우리 현실을 나무에 빗대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주 일어난 일이고, 또한 그런 문제로 숲속은 멸종을 맞이하나 다시 살아난다. 혁명이라든지 쿠데타와 같은 강제적인 폭력과 행위보단 조금씩 서로 대화와 토론을 거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모두 고생하고 모두 곤란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와 철학은 무엇일까?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인정해주는 관용이 아닐까?

 

원노인이 숲속에서 왕을 지정하게 되면 당연히 서로 다투고 난관에 부딪힐 것을 미리 예상했다. 하지만 원노인은 다 잘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서로의 힘으로 모두 서로 도우며 잘 살 수 있는 길을 말이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균형이란 중요하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고,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다. 그런 점들을 모두 같은 존재로서 인정해주면 왕은 소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왕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왕이 되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세계일까? 하지만 그 길은 결코 평탄치 않은 사실은 이 소설에서 잘 보여준다. 그것은 어렵고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