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따이한
김우영 지음 / 푸른사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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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라이따이한, 라이라는 한자어인 래()로 의미는 오다는 말이고, 따이한은 대한(大韓)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국이 온다 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래라는 말이 베트남에서는 혼혈아이를 아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가령 흑인에 대해 깜둥이라 하는 것과 농촌사람들을 촌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책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듯이 역시 소설 내용도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라이따이한이라고 하여 전쟁에서 어느 전투원이 베트남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이별을 그리는 단순한 전쟁이란 비극적인 이데올로기를 로맨스란 환상으로 가려운 것이 아니라 전쟁과 낭만에서 태어난 암울한 비극의 씨앗에 대해 적은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들을 모은 것들인데, 10편이 되는 단편소설들을 모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느끼는 예사롭지 못한 점들은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을 마치 그 사람의 입장과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적어간 것이다.

 

특히나 답답한 일들이 있으면 막소주를 마신다는 것처럼, 서민의 애환과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만든 사회구조라는 점에서 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라이따이한 소설은 총 10편으로 구성된 것처럼 (1) 625전쟁 시 1.4후퇴로 개마고원 산자락 고향을 내버려두고 내려온 어느 순박한 노인의 이야기 통일 꽃”, (2) 중 수교로 통해 한국사람들이 중국에서 가서 중국 교포나 현지인과 만나 남겨진 2세에 대한 슬픈 이야기 한궈쓰성츠”, (3) 성실한 농부가 소 육성사업 실패에 따른 인생좌절에 대한 이야기 까치다리 동동”, (4) 일제강점기 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팔 하나 잃은 노인의 귀국 이야기 상봉”, (5)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인데도 버림받은 베트남가족 이야기 라이따이한”, 김삿갓이 먼 과거서 현대 첨단기술로 통한 세계일주를 다룬 세계 특사여행”, 수술 시 수혈 받은 피가 에이즈로 감염되어 인생의 좌절을 겪는 몽실대과 그 남편의 이야기 악파의 피”, 과학자들의 미래지향적 과학이야기 우리들의 천국”, 가난한 문필가 남편과 그 가족들의 가난함 일상과 오순도순한 이야기를 다룬 자화상”, 한국 시인이 몽골처녀와 한눈에 반해 서로 결혼한 찐따화 니엔거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생각한다면 낯설 수 없는 이야기나, 낯설 수밖에 없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정보와 교통 발달,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한다고 여겼으나,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보통 서사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이 아닌 보편적 영역이나, 이 이야기는 현대에 살아가는 어느 특정인물에게 일어난 것을 적어가고 있으므로 매우 개인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인물들이 우리에게 전혀 새롭지 않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더욱 새롭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접하는 TV와 미디어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의 반에 반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실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TV의 이야기로 가득 메우는 것을 본다. 우리는 현실에 살아가는 존재인데, 왜 현실이 아닌 드라마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 같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이 책의 뒤편에 가면 안용산이란 시인이 적은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바로 이 시대와 살아가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계와의 부딪침이다. 그래서 인식과 표현을 두 날개로 삼아 힘차게 날아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또 다른 문구가 있다. 문학가인 구인환 교수의 문구처럼 <소설은 스탕달의 말대로 인생의 길가에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에는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양상이 다채롭게 비친다. 일상생활의 살아가는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한이 서리어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과 미움 갈등과 평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초탈의 철학이 숨 쉬게 된다. 또한 격동의 역사 흐름 속에 민족의 수난과 그 극복 또 전란과 평에의 희구가 숨가쁜 현실을 이룬다.>

 

정말 이 소설은 인간의 한이 몸서리치는 소설이었다. 단지 어느 개인, 그것도 딱 집어내어 농촌사람, 베트남 어느 3대 모녀, 중국의 어느 모자, 몽골의 어느 아가씨, 고향에 다시 온 할아버지, 고향을 그리워한 어느 할아버지, 에이즈에 걸린 부부, 입안에 생선가시가 걸려도 병원비 몇 천원이 아까워 그냥 빠질 때까지 노력하는 문필가의 아내, 모두 일반사람이고, 흔히 볼 수 있어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들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만 찾지, 어둠 뒤에 소외된 자들에게 항상 무관심의 장막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엔 깊은 아픔과 여운이 남는다. 글자도 모르면서 고향의 첫사랑을 그리워해 하모니카를 부는 마고원 할아버지의 슬픔에서 이들은 외롭게 혼자 쓸쓸히 죽어간 이웃일 수 있고, 에이즈에 걸린 부부는 그저 착실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인데도 한 순간에 모두에게 멀어져야 하던 비극일 것이다. 몽실댁이 둘째 딸과 막내딸을 위해 떼어내는 모습은 참 애처롭다. 막내가 엄마의 젖을 먹으려고 추워서 엄마의 품에 안기려고 해도 엄마 몽실댁은 강제로 부정한다. 그녀에게 들어간 악마의 피가 그녀의 아이들에게 가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둘째 딸에게 밥을 직접 지어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남편과 자신은 라면을 끓여 먹는다. 마지막에 몽실댁은 자신의 언니네 가족에게 두 딸을 맡기고, 남편과 같이 자신의 고향인 몽실골로 간다.

 

이렇게 허무한 운명처럼 이들에게 닥친 고난에서 정말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특히 진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중에 하나가 사할린에서 돌아온 어느 징용당한 할아버지다. 팔을 잃어 외로이 러시아에 있다가, 러시아인과 결혼했으나, 그녀마저 죽고, 고향으로 영구귀국을 한다. 돌아오자 환영보단 소외가 심했다. 자기가 살던 집인데, 오히려 타국살이보다 낯설었다. 예전 아내는 재혼을 하고, 일가친척들은 모두 외면한다. 자기처럼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는 자신이 돌아왔다고, 주변 친척 중에 혼삿길 막았다고 인연까지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런 일들은 종종 본 것 같았다.

 

한궈쓰성츠와 라이따이한에선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타국으로 발을 넓히며 타국의 여인과 짧고 허황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특히 라이따이한에서 할머니는 월남전에 한국인의 아이를 얻고, 그 중 딸아이가 한국베트남 수교로 출장 온 한국인의 딸을 놓는다. 그래서 3대 모녀가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라이따이한 1세인 딸의 아이가 뇌성마비환자였다. 아버지란 작자는 도망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이 모녀들을 돌보던 한국인 선교사가 노력하나, 선교사에게 돌아온 말은 차갑고 이기적인 답이었다. 그나마 월남전에 온 남자는 괜찮았다. 미안하다는 말과 조금의 돈을 부쳐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사경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이 책의 저 모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슬펐는지 작가는 진안 운장산의 최승호 시인이 만든 라이따이한의 노래라는 시를 읊는다.

 

엄마는 예 있는데, 아빠는 어디 있나

얼굴도 못 본 나, 새똥처럼 던져놓고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로 갔나

<메콩강> 줄기 따라 핏줄 이리 흐르건만

모르겠네 모르겠네 뿌리를 모르겠네

내 나이 스물 넘고 서른 넘어도

모르겠네 모르겠네 아빠 아빠 나라 <따이한>

궁금치도 않다던가 뿌리놓은 씨앗들

야자수 뒤흔드는 <스콜> 바람에 행여나 오시려나 아빠의 소식

그러나 바람만.....무심한 바람만.....

무정한 아빠처럼 그저 그냥 그렇게 지나네요.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낯선 세계의 모습이나, 그 세계의 그들에겐 매우 현실적으로 참담하고 암담할 것이다. 자기의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이들의 한은 너무 철저했다. 이념과 전쟁에 상관없이 그저 순박하게 살고 싶던 그녀들, 폭탄이 떨어지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난 이웃들, 옆집 처녀는 배의 창자가 터져 그날 먹은 음식까지 알 정도라 했다. 이 부분이 나올 때 폭격으로 인해 나체로 길가를 달리던 어린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 기억났다. 그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은 네이팜탄 소녀였다. 사실 네이팜탄 소녀나, 개마고원에서 내려온 마고원 할아버지나, 징용당한 할아버지나 모두 아무런 죄가 없이 그저 세월의 잔인함 속에 어둠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한다. 아픔의 기억은 사라지려 하나, 그 사라진 기억 너머에는 아픔의 공간까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책을 읽으며 짧은 여운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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