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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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녕 나츠메 소세키 작자의 작품이렸소? 고양이가 세상을 보고,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고양이가 narrator로 변신하여 narrative를 이끌어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재미난 글이구나!

 

 

 

이런 엉뚱한 문체로서 이 소설의 감상을 열어가는 내 심정은 그 소설의 문체에 조금 동화되어 적어보려고 한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란 작가는 예전부터 조금 이름을 들어왔다. 예전에 일본의 아주 현명한 문학비평가 겸 사상가인 가라타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의 문학도 중에서 나츠메 소세키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실로 느끼게 해주었으니 말이로다. 물론 그 이전에 푸른 문학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고코로 즉 마음(心)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참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치밀히 묘사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원전은 보지 않음에도 애니메이션에 담론하고 있는 작품의 묘사력에서 영상효과도 중요하나 그 원래의 스토리라인이 엄청나게 탄탄한 것만은 사실이렸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 작품의 대작 중에서 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작가인 것을 한층 더 깊게 다가왔다. 문제는 매력적이란 사실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가 적은 것을 읽음이지,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마주본 사실이 없기에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모든 등장인물은 나츠메 소세키 자신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은 분리된 자신의 모습이다. 오로지 여기서 현명하고도 풍월을 제대로 외우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이름조차 없는 고양이다. 이름 없는 자가 어찌하여 인간살이에 그렇게도 상상 이상으로 관찰하고 풍월을 외운다는 말인가? 어째든 그 고양이는 바로 나츠메 소세키의 자아비판을 하는 목소리 중에 하나다. 이 소설은 매우 풍자가 강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게다가 고양이가 인격화되어 우화처럼 서술자가 되었으니 이 기묘한 조화는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단지 이 글을 보면 볼수록 재미와 더불어 가슴 한편에 왠지 모를 슬픔이 다가온다. 왜냐하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비록 소설에 가상의 인물들이 펼쳐가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나 그 모티브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부분은 모두 나츠메 소세키란 소설가를 반영한 것이다. 무척이나 우둔하고 겉멋만 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은 웃기게도 영어교사를 맡고 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과 미국 등과 같은 외국과 교역하면서 신문물이 들어오고, 거기에 당시 지식인과 기업인, 정치인들이 큰 변화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하오니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 역시 동경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니고, 영국에도 유학갈 정도로 수재였지만, 그 역시 구샤미군처럼 자신의 모순에 뼈저리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늘 말하듯이 주인은 책 1권을 들고 몇 장도 읽지 않은 주제에 잠만 탐하고, 주변에 메이테이, 간게츠, 산페이, 스즈키, 부에몬 등과 같은 인물이 오면 마치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츠메 소세키는 열심히 했지만, 그가 그렇게 함에도 그 자신은 구샤미군처럼 느껴질 것이로다. 당시 일본사회는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만든 화(和)를 중시한 시기는 지나갔다.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과거의 봉건국가는 지나가고, 전형적인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한 시기다. 러일전쟁을 거론하는 것부터 당시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물론 고양이는 자신이 일본인이고, 자신 역시 국가를 사랑하기에 전쟁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의 승기를 바란 것 같아도, 의연금을 내달라는 것에 구샤미군의 쓴 표정에서 전쟁 이후의 당시 상황에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음은 분명하다.

 

 

 

왜 그렇게까지 그래 생각함에 중요한 것보다는 왜 그리 되었나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분명 고양이가 보는 어느 영어교사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의 담화로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츠메 소세키의 슬픔과 고뇌가 담겨있다. 우선 구샤미군을 보면 그는 위장병을 앓고 있다. 왜 앓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특별히 술을 많이 마시거나 음식을 편식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는 위장병으로 늘 아픔을 느낀다. 그 모습은 마치 나츠메 소세키가 위장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에서 그렇고, 그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그의 젊은 시절에 신경쇠약증으로 무척이나 고생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풍자로 가득한 글에서 고양이가 풍월을 외우는 자들을 보고 자기도 외우고 있으렸다! 하고 있어도 역시 이 글은 풍자 속에 가려진 나츠메 소세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양이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고 2년 동안 살며, 산페이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고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을 때 고양이는 죽음에 대해 고통보단 오히려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형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라며 최후를 맞이하며 이 소설은 끝을 본다. 하지만 그 전에 고양이는 자기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타인들의 죽음을 예견한다.

 

 

 

주인은 조만간 위장병으로 죽는다, 가네다네 영감탱이는 욕심 때문에 이미 죽었다.” 이 소설의 하권이 1907년 나츠메 소세키기가 40세일 때가 창간되고, 그 후 나츠메 소세키는 1915년 향년 48세의 나이로 결국 위궤양에 의해 세상과 이별을 맞이한다.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은 자신이 쇠경쇠약으로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쓰러졌고, 게다가 위궤양이 지독한지 그의 운명을 재촉했다. 그래서 마치 구샤미군처럼 위장병으로 죽는다는 사실에서 자신을 구샤미군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그는 위장병으로 죽고 만다. 이 글귀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깊은 아픔과 허무함이 드리워졌다.

 

 

 

나츠메 소세키가 일본 근대문학에서 잊을 수 없는 작가고, 일본에서 그의 작품을 100년 동안 사랑한 것처럼 나 역시 그의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한국 근대작가 이상의 날개에서 나온 문구가 생각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나츠메 소세키는 그런 천재적 문학도인 자신의 우울과 그 우울함을 주는 세상에 대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츠메 소세키의 연대를 보니 그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다.

 

 

영문과에 다닌 점을 본다면 그의 문학적, 철학적 재량은 상당하다. 이 책에서 등장인물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거론하고 있다. 초인(超人)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넘으려고 하는 욕망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메이지시대의 엉터리지식인이라고 해도 정말 엉터리로 볼 수 있을까 이다. 등장인물 중 구샤미군은 무척이나 어리석고, 아둔하며,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심이 있었다. 비록 엉뚱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고양이가 어미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무참히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구샤미군의 집에 올 때 그 고양이의 생명은 구샤미군의 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초반에 이 집의 하녀인 볼이 넓은 오상에게 미움털이 박혀 위기에 빠지나, 그 생명을 살게 해준 것은 구샤미군 덕분이다. 비록 아둔하고 어리석어도 말이다. 고양이는 주인의 멍청함과 아둔함을 비웃으나, 한편으로 주인의 입장을 동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양이와 같은 나츠메 소세키이니 말이다. 당시 일본이 자본주의가 오고, 가네다 같은 영감이 득세하는 시기였다. 학문을 하는 자들은 모두 쓸모없는 자가 되기 시작했다. 간게쓰와 같은 인물은 충분히 영리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려 해도 받지 않은 채 가네다의 딸과의 혼사를 뒤로한다. 대신 산페이 군이 가네다의 딸과 결혼한다고 한다.

 

 

 

고양이가 죽은 것은 바로 왜 가네다의 딸을 간게쓰가 아닌 산페이로 하느냐이다. 이미 일본은 공부를 하고, 인격을 중시하던 과거의 마음을 모조리 버린 채 새로운 문화에 적응했는지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과거의 헤게모니적인 관직이나 권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관직과 재력은 유효하되 인간살이가 점점 삭막해져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구샤미군처럼 어리석고 현실물정은 모르는 자는 가네다와 같은 부자들에 대해 경외심이나 존경심은 없다. 나츠메 소세키가 이 소설을 집필 당시 분명 당시 사회나 혹은 지금까지라도 보통 일반인들은 가네다와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황금만능주의가 도래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 구샤미군과 고양이, 그리고 나츠메 소세키는 매우 좋지 않음이렸다. 하지만 세상을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고, 지식인들의 지식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고, 메이테이 같은 작자는 허풍선이만 늘어내고 있다. 그런데도 웃긴 사실은 그런 엉뚱한 세상에 묻혀버린 지식인들에게 교육받는 이들은 다시 그 지식인들이 원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네다와 같은 인물로서나 혹은 따르는 무리로서 가는 것이다.

 

 

 

이 소설처럼 구샤미군은 영어를 가리키는 교사이고, 나츠메 소세키 역시 교사와 교수를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교육관과 사회관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음에 대한 낙심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가네다 영감이 자신의 딸과 간게쓰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메이테이와 구샤미군에 대해 은밀한 공작을 펼친다. 구샤미군 집 옆에 학교가 있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네다 영감으로부터 뭔가의 지원을 받아 야구를 하고, 그 공들이 모두 구샤미군으로 향한다. 공이 날라 오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고, 귀찮아진다. 그래도 구샤미군은 중학생들 상대로 막무가내 행동을 하고, 엄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 집에 학생들이 와서 인사말로 “공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냥 대문 안으로 보내주었다.

 

 

 

자신 역시 교사인데, 학생들은 교사인 자신보다 가네다 영감의 재력에 마음이 갔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재미난 풍자이나, 한편으로 보면 나츠메 소세키의 기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도 나츠메 소세키는 이런 세상이 모순으로 너무 가득한 것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은 분명하다. 본 작품에서 고양이가 주인은 위장병으로 곧 죽겠지만,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자라고 한다. 주인은 곧 죽는다 에서 지금은 죽지 않았고, 가네다 영감은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라는 말에서 풍월을 외는 시대에 뒤쳐진 자보다, 가네다와 친하게 지내는 구샤미군의 옛 친구인 스즈키의 말대로 “그런데 그 돈이라는 놈이 괴물이라서, 지금도 어떤 사업가한테 가서 듣고 왔는데, 돈을 버는 데도 삼각술(三角術)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의리도 없고, 인정도 없고, 수치도 없고, 이로써 삼각이 된다는 거야, 재미있잖아? 아하하하.”

 

 

 

저 삼각술에서 의리, 인정, 수치도 없이 돈만 밝히면 그 시대에서 인정받아 성공한다는 자체에 나츠메 소세키와 나츠메 소세키를 분리시킨 고양이와 구샤미군의 일행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 구샤미군이 위장병은 단순히 음식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구샤미군이 단순히 정말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는 구샤미군과 같은 사람이 멍청하고 어리석게 되어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 정신병원에 있는데, 이들은 평소에 멀쩡해도 가끔씩 자신의 재주를 부릴 때만 미친 인간이양 된다. 하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상대방이 정상인으로 볼 뿐이다.

 

 

 

아니 이 소설에서부터 뭔가 잘못 되지 아니한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타이틀로서 고양이가 어떻게 인간과 같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그것도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은 새끼고양이가 말이다. 온갖 철학과 문학적 지식과 더불어 과학의 지식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만하면 천재 중에 천재인 고양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서술하는 언어는 마치 화려한 꽃들이 이리 피고 저리 피어 구불구불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현상이렸다.

 

 

허나 고양이가 이토록 전지전능한 지식과 판단을 가지고 인간을 보니, 인간의 모습이란 그저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였다. 고양이는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지 않았기에 말이다. 대신 고양이는 술을 마시고 마치 춤을 추면서 항아리에 빠져 죽는다. 그래도 고양이는 죽음이 고맙다고 한다. 아니 죽음으로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절망 속의 희망을 품은 나츠메 소세키의 외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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