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13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 13권을 읽는 순간 나는 다시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7년 극장판인 end of eva를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고 하면 지금 카라사의 주요 멤버들의 전신이던 가이낙스사의 모습들을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모든 것이 가이낙스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 그리고 추후 상영될 급이 나온다고 치더라도 그 당시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잊을 수 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상당히 신화적이다. 억압된 신지, 아스카, 레이라는 14세 청소년을 상대로 벌이는 어른들의 사회는 그야말로 폭력과 착취에 가깝다.

 

여기서 그들의 운명은 내던지게 된다. 그렇게 자신도 받은 만큼 추후에 보상심리로 작용하여 언젠가 태어날 인간들에게 같은 행위를 반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철학과 문학으로 보면 같은 이야기와 같은 문제들이 돌고 돈다. 인간이란 하나의 존재에서 개성과 인격은 실존적인 하나이나, 인간이 지닌 속성으로 보면 같은 오류와 왜곡들이 계속 돌아오게 마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화에 대한 재구성은 바로 이런 연유가 아닐까?

 

그런 상황들이 최고조로 도달하는 것이 1997년의 end of eva. 제레라는 인류극비단체가 신지의 희생으로 통한 구원이라는 의식은 한마디로 신화가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제의과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제의과정에서 희생자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신격화 내지 응징자로서 대해진다. 신화의 주인공은 영웅과 반영웅의 자리에서 시점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삼국지란 소설에서 유비입장에서 보면 조조는 역적이나, 진나라 사마의의 후손들 입장에서는 혁명을 만든 자다.

 

그런 편견적 요소를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 신세기 에반게리온 13권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던 장면과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지가 아스카의 위기에서 보고도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스카를 위해 몸을 던진 점과 그가 양산형 에바와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이드(id)에 무한대로 가까워진 것이다. 결국 신지의 의식구조는 파괴되고 무의식으로 구성된 자기 안의 욕망 안에 신화의 새로운 부활을 맡기려 한다.

 

문제는 이때까지 신지는 분열된 자신과 살아야 했다. 항상 자신의 욕망을 지나 욕구까지 무시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가 묘한 감정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작품에서 이카리 사령관이 신지를 신지의 외삼촌 집에 맡긴 모습이 인상 깊다. 평소 딱딱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라도 항상 냉정하고 자신의 아우라를 남들에게 굽히지 않는다. 심지어 제레에서 이카리 사령관을 추궁할 때도 그는 냉정을 잃지 않고 대응했다. 그런 이카리 사령관이 신지를 맡길 때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거의 90도에 가까울 정도로 고개와 몸을 숙인 그의 모습에선 엄청난 각오와 결의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가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신지만이 아니라 이카리 역시 오랫동안 상처를 품은 사실도 옆볼 수 있다. 신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삼촌의 아들과 싸우고, 학교에서도 소문이 좋지 못하다. 덕분에 그 누구도 친하게 지내지 않고 오로지 혼자만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누가 신지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어른이란 세계에서 이카리 사령관의 행동에 분노를 분출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이카리 사령관도 아내를 죽인 낙인이 찍힌 사람이란 점이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뒤틀렸다는 뜻이다. 신지와 같이 유이의 묘에 갔을 때 아들의 손을 잡던 이카리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작고 연약해 보인다. 신지만이 그런 아픔이 아니라 이카리 사령관 역시 지독한 고독과 아픔을 지닌 것이다. 그 덕분에 이카리 사령관은 광기에 빠졌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거짓사랑을 한다는 것에서 말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네르프의 책임연구자인 리츠코와 비밀스러운 외도를 했고, 그 이전에 그녀의 어머니 나오코와도 비밀적인 불륜행각을 벌였다. 리츠코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아래 살아온 인생이기에 어머니와 이카리사령관의 불륜은 그녀로 하여금 나오코의 욕망을 자기 역시 욕망했다. 그런 어리석은 모녀는 같은 남자에게 버림을 받는다. 단지 차이점은 나오코는 자살을 선택했고, 리츠코는 방아쇠를 들이댄 것이다. 거짓의 사랑에 속는 자신을 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아는 합리적인 그녀는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라고 볼 수 있는가 하고 역설한다.

 

물론 그런 비합리적인 요소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의 주요 포인트다. 모든 것이 비틀리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사들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현실에서 합리적이란 점에서 하나의 신화를 갖춘다. 욕망의 부재와 욕망의 분출 그리고 희생과 희생에 대한 대가의 갈취, 13권은 바로 이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에 근접한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태풍의 눈 안에 있으면 소용돌이가 치지 않는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고 주변만 시끄럽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유이와 그리고 신지가 있다.

 

리리스와 합체한 레이가 신지에게 다가가 무엇을 바라냐고 한다. 신지에게 레이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느낌이나 한편으로 반 친구이다. 친구라는 이성과 어머니라는 무의식에서 신지의 무의식적 욕망은 레이와 오이디푸스적인 성적욕망을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벽에 갇힌 신지에게 큰 벽일 것이다. 이미 싱크로 비율이 400%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세상에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인가? 아니면 에로스라는 삶의 욕망인가?

 

신지는 초호기 안에 있을 때 2가지의 욕망을 함께 누린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야 하는 아기로서는 타나토스의 본래의 목적은 상실했다. 그런데 다시 싱크로 비율이 증대하면서 그 기회는 왔다. 단지 차이는 초호기에 처음 빨려갔을 때에는 레이와 분리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레이와 초호기가 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지에게 욕망을 묻는 레이, 레이를 본 신지는 그것이 레이라고 하나, 레이는 레이가 아닌 신지의 마음이라고 한다. 신지에게 레이는 어떤 존재인가?

 

이때 신지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살던 시기의 추억을 다시 생각하며, 유이의 무덤 무릎 꿇은 이카리 사령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절망하듯 주저하는 이카리 사령관과 달리 신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담담하게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피해자는 신지인지 아니면 이카리 사령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아니라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절규에서 신화라는 것은 그 가해와 피해의 주고받음이 끊임없이 전개되는 우리의 숙명처럼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처럼 어머니는 아버지와 분리된 존재이나, 어머니와 아들은 본래 하나인 존재다. 아버지보다 아들에게 사랑을 더 대해주는 어머니의 영역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에 대해 매우 질투한다. 유이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조차도 잠들어 있는 초호기에 유이를 가장 사랑하는 이카리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들인 신지만이 탈 수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앓는 신지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모든 것이 시작되어 죽음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에 신지의 선택이 기다린다. 제레는 신지의 자아가 파괴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지는 이때까지 자아의 위축과 자신의 기피로 살아온 자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희망이던 어머니의 기억을 회상하는 모습에서 신지는 파멸과 존속 어디를 택할까? 물론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여 세상에 에바 파일럿 2명인 자신과 아스카만 존재한다. 혹자는 아담과 이브라고 하나, 그것은 인류의 탄생이기면서도 모든 것의 절멸이다. 죽음과 삶이 함께 공존하는third impact에서 모든 억압에 대한 거부로 인해 이어지는 종말인가? 아니면 그 억압에 대한 자신과의 조우로 통한 새로운 자신의 만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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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 현대문화론선 19
앤드류 밀너 지음, 박거용 옮김 / 현대미학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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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물론이란 분야에 대해서는 주로 문화인류학 방면에서 생각했다. 예전에 읽어본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은 문화인류학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신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관점으로 문화인류학에 대해 보면서 각각에 대한 장단점과 문화유물론자에 대한 공격적 비판에 대해 반박과 동시에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이 새로운 대안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집이다. 따라서 문화유물론을 문화인류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내 입장에선 이번에 읽어보는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는 그런 취지가 다소 들어가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문화라는 것을 단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고, 문화라는 것에서 인간의 하부토대인 경제적 구조가 그 사회에 강한 영향을 주는 점과 기상조건, 지리적 조건, 생태적 조건이 문화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 것 역시 강조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화(文化)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문화라는 단어는 국내외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에서 지역과 연령, 경제와 심지어 음식까지 적용된다. 문화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이 매우 광범위하여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의 서문에서도 문화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가장 까다로운 두세 개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명한다.

 

이것을 논한 사람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영문학 교수인 레이먼드 월리엄즈에 의해 정의되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란 도서는 유물론이란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점과 그 후에 마르크스주의가 발달시킨 점에서 대부분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와 학자들이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라고 한다면, 이 도서에서는 영미문화권에서 보는 마르크스주의와 문화연구에 대한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인 앤드류 밀너 역시 호주에 위치한 대학교의 교수로서 영미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접근하는데 있어서 20세기 대부분의 사상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축이 되었다면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영미문화권에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는 의미다. 특히 문화유물론이 영국의 문화연구라는 비교문화연구 내지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발전하면서 작고한 레이먼드 월리엄즈를 비롯하여 테리 이글턴이란 세계적 지식인이 문화이론에서 큰 획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따른 발전과정에서 프랑스 구조주의에서 특히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뭐라고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나 프랑스 철학과 사상사에서 루이 알튀세르가 가지는 의미는 막대한 것 같았다. 그가 말하고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21세기에 와서 강력한 전환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을 마르크스로만 보는 것은 아니나, 마르크스주의로서 시작하는 문화이론과 문화연구, 문화유물론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검토를 요구할 수 있게 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런 문화에 대한 복잡성에 대해 앤드류 밀너의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에서는 기본적으로 그 과정을 레이먼드 월리엄즈 중심으로 진행한다. 일단 레이먼드 워리엄즈가 문화라는 그 복잡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알아본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그의 최초의 중요저서인 문화와 사회(Culture and Society)에서 “① 개인의 정신습관, ② 전체 사회의 지적 발전 상태, ③ 예술, ④ 한 집단 또는 국민의 삶의 전체 방식”이라 했다. 문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미시적인 개인영역에서 거대한 국가영역으로 넘어가는 점에서 문화라는 것은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역사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보는 것 역시 난항이다. 역사적인 부분을 문화적인 영역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문화를 역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갈 것인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역사라는 시간적 흐름아래 우리가 가진 문화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역사와 문화 중에서 역사가 문화에 종속되는 부분이 강하다고 본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처럼 인간은 상부구조보단 오히려 하부구조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고, 또한 상부구조가 헤게모니적인 변동으로 통해 하부구조에 영향을 주는 점에서 모순되나 결국 그 상부구조에서 만들려는 변화자체가 하부구조에 대한 피드백현상으로 여긴다.

 

어떻게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서로 만나고 얽히며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라는 공간인 것이다. 환경공학 전공자의 관점에 본다면 세계정치 현상으로 교토의정서나 바젤협약과 같은 국제조약은 상부구조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환경오염에 따른 정치적 행위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물질과 현상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가? 물질로서 토대가 되어가는 것이 차라리 현대사회의 포커스라고 보는 것이 낳을지 모른다고 여긴다. 특히나 플라톤주의처럼 형이상학적 미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현세의 인간이 아니라 물질적 혜택과 신자유주의로 통한 자본주의가 통용되는 국제사회 경향을 보면 오히려 문화유물론적인 요소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은가 싶다.

 

단지 문화유물론이란 영역은 자본주의화가 일어난 곳이나 혹은 전혀 일어나지도 않은 원시부족에 대한 관찰에서 별로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명사회의 인간이 누리고 있는 물질과 과학적 혜택을 떠나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의식과 무의식구조가 크게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인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식인과 제왕>과 같이 일반 대중이 상식도서로 읽히기 위한 도서이라도 기본적으로 다 읽고 나면 원시사회와 혹은 중세유럽, 또는 근현대의 인간들의 모습에서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아니면 오히려 그렇게 믿고 폭력을 신성화하여 억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성인이라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더 야만적이지 않은가 라는 의문마저 든다. 이런 부분은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학 영역에서 내가 문화유물론에 대해 접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문화가 가진 사회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라는 점에서 단순히 원시부족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듯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 역시 그런 국제사회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의 변화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그 중심축인 레이먼드 월리엄즈가 정리한 도서와 그런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사상가들이 거론된다. 그런 점에서 딱히 이 도서에는 각 사상과 학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고찰보다는 영미문화권 특히 영국의 버밍엄현대문화연구소에 노동자문화론에 대해 영향을 준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문화연구를 만든 자들 흐름을 집어낸 도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으로 통해 그런 내용을 알 수 있기보다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낸 자들의 학문적 변화에 초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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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이펙트 - 인간은 어떻게 사람다울 권리를 찾게 되었는가 10 그레이트 이펙트 3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박홍규.인트랜스 번역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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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관심 있는 분야 중에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각별히 생각하는 것이 인권이다. 인권(人權)은 고대철학보다는 근현대철학으로 넘어오면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인권을 생각하면 진보나 보수,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민주의 등등 다양한 정치적 논쟁의 기본인 되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인권이 중요하기에 모든 가치를 담아낼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날의 많은 큰 변화 내지 혁명, 개혁이란 인간의 인권에 대한 열정에서 그 인권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냐? 라고 물어보면 막상 난해한 반응이 닥친다.

 

 

개인적으로 나 같은 경우 인권에 대해 논점으로 만든 사람은 장 자크 루소라고 생각했다. 그의 저서인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국가에서 기초가 되는 서적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큰 격동을 맞이한 인물과 그 인물의 책이 있다는 사실에 솔직히 많이 놀라웠다. 이펙트 시리즈 중에서 여러 가지 서적을 보면 크리스트교의 성서부터 시작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마르크스의 자본론, 아담 스미스 국부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등을 생각하면 그들의 유명세는 분명하나 미국독립전쟁의 혁명과 법률의 기초가 된 인권이란 도서를 안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저자가 토마스 페인이란 인물로서 당시 미국의 지식인과 대통령을 지닌 조지 워싱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프랭클린과 상당히 가까운 인물이었단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영국인이면서 미국의 자유를 원하였으며, 미국의 자유와 더불어 프랑스혁명에 대하여 다소 보수적인 그는 인권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것이기에 심지어 단두대 아래로 사라질 루이16세 역시 정당한 재판을 벌여 그를 무리하게 죽이면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라는 공포의 혁명정치가는 루이16세에게 처형을 명을 내리고, 계몽이란 새로운 신화 속에서 이성을 상실한 프랑스혁명 후에 정치권에서 토마스 페인은 이성의 중요도를 강조했다. 덕분에 운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목과 몸이 두 동강이 날 운명이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로베스피에르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낸 업보만큼 그 역시 단두대 앞에서 혁명의 광기에서 희생되는 주인공으로 변모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유와 평등을 외친 토마스 페인은 인간에게 닥치는 파시즘을 매우 경고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루소 역시 인간에게 의지는 일반의지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나 대중들은 전제의지로 살아가며 그들에게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한 민주적 전제주의로 빠지는 것처럼 토마스 페인은 그것을 매우 경계했다. 토마스 페인은 주장한 미국독립에서 인권에 대한 보장과 더불어 그 인권수여자에게 종교의 자유는 필수이며, 노예와 인종차별 역시 반대했다. 그의 사상이 후에 링컨과 루즈벨트, 게다가 공화당 대통령 레이건의 입에서도 나올 정도라면 토마스 페인의 역할을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나 미국은 흑인노예를 인정하고, 링컨이 이것에 대항하여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인종차별의 벽은 지금까지도 내려오며, 특히 미국 인권운동가인 킹 목사의 살해사건은 미국이란 국가가 과연 인권이란 토마스 페인의 선물을 잘 간직하고 있는가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랑스러운 미국독립기념일에 모두 함께 자유를 외치나 그 자유의 선구자의 노력이 가끔 물거품이 되는 일들이 종종 벌여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토마스 페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더 선구자라고 한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이란 선언문을 만들고, 그것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10월 혁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미국독립혁명이 토마스 페인의 인권선언문으로 불과 6개월 만에 일어난 결과라면 엄청난 일이다. 물론 그 뒤에는 프랑스의 지원이 있었고, 프랑스의 지나친 지원은 결국 루이16세가 3부회를 소집하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지나친 군사력의 소모는 재정을 악화하고, 국민경제를 파괴한다.

 

 

이것이 역사적 교훈이고 사실이란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토마스 페인은 전쟁에 대한 문제점을 넘어 국민경제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의 자유와 평화를 만든 자가 오히려 복지와 안정을 고려한 점에서 놀라웠다. 그는 노인에게 연금을 부부들과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복지적 혜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모든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보다 지나친 기근과 가난을 해결해야 것이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최근 경제민주화라고 떠들어대는 위선자 역시 이런 토마스 페인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적인 기반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라가나 정작 미국의 민주주의의 기반자의 사상이나 철학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이 모순이다. 보수 세력에게 보수주의라는 철학이 없다는 이 책의 역자의 말처럼 프랑스혁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적은 보수주의철학자(물론 인식적으로 진보적이나) 에드먼드 버크는 진정한 보수주의 정치자로서 권력으로서 정치낭비를 하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했다. 지난날 우리의 과거에서 권력으로 정치를 휘두른 것이 보수의 논리라고 한다면 보수주의철학의 기반이 되던 버크의 기본적 명제마저 어기는 것이 아이러니한 발상이다.

 

 

버크 역시 작은 정부를 원했으나, 그 작은 정부는 인권에 대한 어떠한 간섭을 하면 안되는 것이었고, 당시 18~19세기 자유주의 철학과 부르주아의 성장에 따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도 경제의 자유도 중시했으나 그 과정의 원칙과 윤리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점에서 버크와 상반된 길을 가던 토마스 페인이 알고 보면 두 사람이 본래부터 친한 사이란 점에서 조금 특이한 상황을 보았다. 그러나 관점이 다를 뿐이지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자유와 공화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인권 이후 상식 그 외의 책이 버크가 비판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문제점이라도 그 지적은 무조건적인 과격행위는 옳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추후에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도 광기로 갇힌 프랑스혁명시기와 그것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국가정치에 대한 변증법적인 사실로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당대를 살아가는 인물에겐 객관적인 관점이 될 수 없다. 그 상황에 놓이면 그 순간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딜레마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딜레마에서 어떤 최선의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과 반대되는 위기는 찾아오고, 최후의 모습은 외롭게 마감하는 이도 많다. 그 중에 인권의 저자인 토마스 페인도 그렇고, 루소도 그렇고, 마르크스도 그렇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지금도 살아있다. 토마스 페인의 사상은 미국만이 아니다. 보편적인 인간에 대하여 선언하는 윤리적인 인간상이다. 자신의 고국 미국, 자신의 고향 영국, 자신이 의원이 되게 한 프랑스, 그리고 친구 버크의 출신인 아일랜드 할 것 없이 모두가 주인 없는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란 것이다. 아직도 미국에서 토마스 페인의 사상을 기리고 있으나 정작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는 자에게 도리어 역으로 가는 점에서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느낀다. 그 역으로 가게 하는 자도 토마스 페인의 책 내용을 되새기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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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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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노동이라고 한다.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없는 가치를 새롭게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가치가 증명하는 것은 자신이 사회에서 하나의 필요성이 갖춘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정치적 내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 그 노동이란 가치로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사회적 표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과거 우리는 민주화를 위한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해도 다른 민주주의는 그대로 소멸하는 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주인이란 독재가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엔 새로운 주인인 자본이 대체되었다. 노예는 평생 노예로 살 수만 없지만 난폭한 주인이 사라진 후에 자기의 몸을 갈기갈기 뜯어먹는 주인이 나타났다. 인간의 정신은 피폐하게 변해가고, 자신의 의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바로 그런 모습을 지닌 것이 오늘날의 젊은 청춘들이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마저 잃어가고 있다. 정치적 참여권인 선거권도 강제가 아닌 강제로 빼앗기도 있다. 노동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왠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이 모든 사회와 국가조직, 세계의 존립도 노동에서 시작된다. 혁명이 일어나도 반동이 일어나도 독재가 일어나도 민주화가 일어나도 그것 역시 노동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노동 없이 차도 지나가지 못하고 신문도 인쇄하지 못하며 게다가 식사를 위한 요리조차 할 수 없다.

 

노동이 모든 것에서 시작된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문화라는 공간을 주어지기 위해서는 오로지 노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 노동을 할 수 없는 존재는 더 이상 사회적 가치를 보여줄 수 없다. 심지어 노동을 해도 그 자가 아주 가난하고 불리한 위치에 있다면 그의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은 노동이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것처럼 언제나 자기 인생에 큰 한탄과 세상에 대한 냉소와 회의감으로 가득한 그들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그들은 큰 소원이다 대단한 포부는 없다.

 

그저 취업하여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삼포대라는 시대에 살아간다. 예전에 서거한 노무현 前 대통령도 경포대,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했으나 그 이름과 달리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런데도 경포대라고 오해와 왜곡이 그를 힘들게 하였고, 한편으로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삼포대였다. 취업과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청춘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절규하고 있다. 카드빚에 시달리며 부채의 늪에 빠져 사채까지 당긴다. 돈을 빌리지 않으려 해도 구원할 방도가 없다. 그저 죽음의 늪에 빠진 채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소외된 이들에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관용과 희망 그리고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왜 우리에게는 자신의 인권을 누릴 권리조차도 제대로 발설할 수 없는 걸까? 길가에서 고된 몸으로 폐지와 고철을 줍는 노인네들, 밥을 굶는 노인과 고아들, 냉대한 눈빛으로 차별을 받는 외국인들, 그리고 옆에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장애인들, 이 모든 자들이 최장집의 눈에 들어오고 그들에 대한 마음을 순수하게 이 책에서 적어간다.

 

인간적 상처를 향하여 직접 보고 그들의 숨결을 담아낸 이 책에는 고고하고 현학적인 철학서적보다 더 훌륭한 가치가 숨어있다. 겉으로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소중하나, 그 가치가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이 세상에 단 1명의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철학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은 존재하고, 그들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때까지 무조건 폭력의 독재만 없으면 해결될 줄 알았으나, 정작 이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았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은 학생과 그 학생들이 대부분 엘리트계층이란 점에서 노동과 인권운동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 간의 위치를 차지하여 입장을 유지해야 하나,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해버렸다. 따라서 노동조차 박탈당한 자들에겐 삶의 생계를 위협당하니 그들에게 더 이상 자유란 없다. 삶이란 이름이 오히려 지옥과 같은 악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모든 정치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 서민안정,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은 왜 이리도 내 귀청을 찢어놓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들이 삶에 대한 울부짖음을 토할 때 외면하고, 때로는 폭력과 억압으로 격리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최장집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낀다. 인간에게 타인에 대한 이해가 사고만으로 판단하는 것과 실제 그 입장을 마주보며 공감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입장은 학문적인 판단에서 필요하겠지만, 인간이 인간 그 자체를 구하는 것에서는 이성적인 학문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합리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점점 합리성이 사회적 격차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피드백이 된다. 젊은 청춘들이 꿈을 잃자 이미 노령화가 되고, 출산율이 저하된다. 노인들은 노인이 처한 운명처럼 굶주림, 질병, 가난, 외로움이 허덕이고, 젊은이들은 가난, 절망, 회의, 냉소들로 좌절한다.

 

이것이 계속 쌓이고 쌓이면 우리 사회는 큰 암흑을 형성할지 모른다. 최근에 일어나는 강력범죄와 흉악범들, 그들의 속사정을 알고 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보이나, 계속하여 제2의 제3의 그들이 반복된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까? 현실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포기한 그들의 허무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는 그들의 사회적 고립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노동이란 삶의 여유와 목적을 찾게 한다. 그러나 그 주어지는 노동도 이들을 괴롭힌다. 하청 업체에 근무한 사람이 10년 동안 7번 회사가 교체된 것도 모르고 비정규직들은 전체 종사자의 반을 넘어가는 수준인데도 오히려 가속화되는 점에서 말이다.

 

예전에는 나만 우리만 잘 살아보자는 말이 통용되었다고 하나,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은 사회적 현실에 우리는 직면했다. 그리고 그 현실에 우리가 아닌 우리들의 미래까지 같이 수반되어 간다. 우리는 이 시련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 것인가? 이들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란 무엇인지 우리는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멀고도 험하나 조금씩 한 발 나아가면 상처로 가득한 그들에게 맑은 미소로 세상에 빛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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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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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라는 것은 결코 멈추지도 멈출 수도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유한에서 유한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유한성에서 자신들의 무한성을 찾기 위해 신화라는 매체를 이용한다. 인간은 통시적인 존재이나, 그 통시적인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시적 영역인 신화에 매력을 느낀다. 생각하면 왜 고대 그리스 배경에서 나오는 일리아스나 오디세우스와 같은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가? 많은 영화나 문학 텍스트에서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올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거기에 대한 욕망에 물결에 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명히 시간적 존재다. 시간이란 유한성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유한성이란 자신의 생명에 직결되므로 그 죽음을 초월한 시간과 공간에 의지하려는 무의식이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가끔 왜 사람들은 분명 그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해도 받아들이고 맹목적인 신념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생각하면 그저 신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비합리성이 합리성이 되고, 합리적인 존재가 비합리적인 존재로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 민담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많이 내려온다. 가끔 민담과 전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나보고 집안 가구를 옮기는데, 왜 어느 특정일만 골라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손 없는 날”이란 말을 한다. 손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날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이유를 물어보면 옛날 어른들이 하니깐 그대로 한다는 비논리적이면서 비합리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민담과 설화에서 전해온 이야기를 지금 현재적 시점에서 찾아가보면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도 그것을 하나의 사실 아니지만 사실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저 이유도 없이 단지 그러하니까! 라는 주장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진행형이다. 모던 아리랑은 그런 비현실적인 세계의 민담과 전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티브가 대부분 전래동화로 내려온 구전설화라는 점이다.

 

앞전에 조선희 작가가 집필한 <모던팥쥐전>을 저술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전설 중에 콩쥐팥쥐가 유명하다. 마치 서양의 신데렐라의 이야기처럼 어느 구박받는 착한 여자아이가 권력자의 아들에게 마음에 들어 운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여전히 캔디 이데올로기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신화가 살아 움직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사회는 이른바 spectacle로 가득한 세상이다. 문화가 인간이 주체가 아닌 인간이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투영하여 그 욕망에 따르고 있는 문화에 대한 인간종속이다.

 

spectacle은 애석하게도 전복되어도 새로이 탄생하는 신화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대체하고 그것 역시 합리와 논리보단 그 자체로 구속당하는 인간을 꾸준히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사회라도 고전부터 전해온 동화를 spectacle에 갇힌 인간의 딜레마를 보여주면 어떨까? 반드시 문화적 헤게모니라는 지배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의 피할 수 없는 번뇌라도 좋다. 여기서 분명 밝히나 우리의 전래동화는 미풍양속을 강조하나, 그 이면에는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예를 들어 콩쥐팥쥐전에서 콩쥐가 관아의 권력을 힘을 얻어 팥쥐를 갈기갈기 찢어 젓갈로 담구는 행위라든지 신데렐라가 계모에 대한 복수로 참수형을 내리거나 혹은 근친상간으로 어머니에게 쫓겨난 백설공주가 7명의 난쟁이와 성관계를 맺는다든지, 심지어 그 왕자의 키스에서 왕자는 시체애호가라는 변태적 정신이상자든지, 다시 생각해보면 시체애호가는 그렇다. 까닭 없이 죽은 시체에게 남성이 키스를 하는 이유는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단지 공주라는 신화적 욕망에만 집착한 이상 인간은 이성이란 고리에서 멀어져 그저 맹신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결국 아름답지 못한 하나의 이야기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애니메이션을 보니 동화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권력자들이 대중들에 대한 속임수로서 제공한 소문이란 점이다. 원전의 이야기가 반전되어 새롭게 수립된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따라 절대적 악이나 절대적 위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주인공이 돋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결말이 남기지 못한 채 비극으로서 계속 맴돌아가 가면 어떤가?

한 남자의 영혼을 두고 죽은 소녀와 살아있는 여성의 집착은 4명의 남자를 차례로 죽음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10년마다 영화가 나오나, 그 남자주인공은 의문사를 맞이한다. 그 죽음이 아파도 받아들이고 다시 10년을 기다려서 자신의 남자의 영혼이 오기를 바라는 중년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에게서 연인을 빼앗는 소녀, 육체는 소멸해도 그 육체의 영혼은 반복하여 돌아오는 공간에서 인간의 영혼은 영화라는 공간에서 영원성을 가진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로 통해 죽은 인간과 산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가 비록 실제로 그 가상의 존재와 같지 않으나 우리는 그 가상을 계속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 속에 현실, 현실 뒤에 현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판단력이 있어도 그 순간자체에 대한 인간은 자신들을 판단할 수 없으나, 영화로 통해 판단하다. 그 영화에서 타인이나 그 타인은 결국 많은 그 개인 개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서로간이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을 하면서 저자가 나로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느끼면서도 거부한다. 그것이어야 말로 신화적이다. 신화란 욕망, 억압, 해방이 있기에 끊임없이 순환한다.

 

또한 신화란 희생이 계속 되풀이 되어야 한다. 분명히 밝히나 신화는 무한대의 영역이기에 그 무한의 영역을 채워줄 유한의 영속적 귀속이 필요하다. 유한이 유한을 재생산하기에 무한처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상에 대한 희생의 정당성이다.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해 때로는 그 희생당한 자가 다시 복수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이다. 과거는 유령처럼 자신과 조우한다. 그리고 유령이 아닌 현실로서 받아온 자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유령이 과거라면 현재로서 유령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게 마무리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신화적 영역에서 자신의 추악함을 보이기를 거부하며, 그 추악함을 소수의 인물로 몰아넣는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을 희생하면서도 그 욕망조차도 신성시 내지 미화하는 행동을 한다. 모던아랑전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인간이야기다. 귀신, 유령, 수수께끼, 미스터리, SF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현실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의 인간에게 가려진 마음을 추악한 결말로서 이끌어낸다. 모든 이야기가 좋게 끝나지 않은 채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 소수자가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듯이 그 소수자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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