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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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화(神話)라는 것은 결코 멈추지도 멈출 수도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유한에서 유한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유한성에서 자신들의 무한성을 찾기 위해 신화라는 매체를 이용한다. 인간은 통시적인 존재이나, 그 통시적인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시적 영역인 신화에 매력을 느낀다. 생각하면 왜 고대 그리스 배경에서 나오는 일리아스나 오디세우스와 같은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가? 많은 영화나 문학 텍스트에서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올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거기에 대한 욕망에 물결에 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명히 시간적 존재다. 시간이란 유한성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유한성이란 자신의 생명에 직결되므로 그 죽음을 초월한 시간과 공간에 의지하려는 무의식이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가끔 왜 사람들은 분명 그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해도 받아들이고 맹목적인 신념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생각하면 그저 신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비합리성이 합리성이 되고, 합리적인 존재가 비합리적인 존재로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 민담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많이 내려온다. 가끔 민담과 전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나보고 집안 가구를 옮기는데, 왜 어느 특정일만 골라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손 없는 날”이란 말을 한다. 손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날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이유를 물어보면 옛날 어른들이 하니깐 그대로 한다는 비논리적이면서 비합리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민담과 설화에서 전해온 이야기를 지금 현재적 시점에서 찾아가보면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도 그것을 하나의 사실 아니지만 사실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저 이유도 없이 단지 그러하니까! 라는 주장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여전히 진행형이다. 모던 아리랑은 그런 비현실적인 세계의 민담과 전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티브가 대부분 전래동화로 내려온 구전설화라는 점이다.

 

앞전에 조선희 작가가 집필한 <모던팥쥐전>을 저술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전설 중에 콩쥐팥쥐가 유명하다. 마치 서양의 신데렐라의 이야기처럼 어느 구박받는 착한 여자아이가 권력자의 아들에게 마음에 들어 운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여전히 캔디 이데올로기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신화가 살아 움직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사회는 이른바 spectacle로 가득한 세상이다. 문화가 인간이 주체가 아닌 인간이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투영하여 그 욕망에 따르고 있는 문화에 대한 인간종속이다.

 

spectacle은 애석하게도 전복되어도 새로이 탄생하는 신화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대체하고 그것 역시 합리와 논리보단 그 자체로 구속당하는 인간을 꾸준히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사회라도 고전부터 전해온 동화를 spectacle에 갇힌 인간의 딜레마를 보여주면 어떨까? 반드시 문화적 헤게모니라는 지배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의 피할 수 없는 번뇌라도 좋다. 여기서 분명 밝히나 우리의 전래동화는 미풍양속을 강조하나, 그 이면에는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예를 들어 콩쥐팥쥐전에서 콩쥐가 관아의 권력을 힘을 얻어 팥쥐를 갈기갈기 찢어 젓갈로 담구는 행위라든지 신데렐라가 계모에 대한 복수로 참수형을 내리거나 혹은 근친상간으로 어머니에게 쫓겨난 백설공주가 7명의 난쟁이와 성관계를 맺는다든지, 심지어 그 왕자의 키스에서 왕자는 시체애호가라는 변태적 정신이상자든지, 다시 생각해보면 시체애호가는 그렇다. 까닭 없이 죽은 시체에게 남성이 키스를 하는 이유는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단지 공주라는 신화적 욕망에만 집착한 이상 인간은 이성이란 고리에서 멀어져 그저 맹신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결국 아름답지 못한 하나의 이야기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애니메이션을 보니 동화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권력자들이 대중들에 대한 속임수로서 제공한 소문이란 점이다. 원전의 이야기가 반전되어 새롭게 수립된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따라 절대적 악이나 절대적 위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주인공이 돋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결말이 남기지 못한 채 비극으로서 계속 맴돌아가 가면 어떤가?

한 남자의 영혼을 두고 죽은 소녀와 살아있는 여성의 집착은 4명의 남자를 차례로 죽음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10년마다 영화가 나오나, 그 남자주인공은 의문사를 맞이한다. 그 죽음이 아파도 받아들이고 다시 10년을 기다려서 자신의 남자의 영혼이 오기를 바라는 중년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에게서 연인을 빼앗는 소녀, 육체는 소멸해도 그 육체의 영혼은 반복하여 돌아오는 공간에서 인간의 영혼은 영화라는 공간에서 영원성을 가진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로 통해 죽은 인간과 산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가 비록 실제로 그 가상의 존재와 같지 않으나 우리는 그 가상을 계속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 속에 현실, 현실 뒤에 현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판단력이 있어도 그 순간자체에 대한 인간은 자신들을 판단할 수 없으나, 영화로 통해 판단하다. 그 영화에서 타인이나 그 타인은 결국 많은 그 개인 개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 모습에서 서로간이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을 하면서 저자가 나로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느끼면서도 거부한다. 그것이어야 말로 신화적이다. 신화란 욕망, 억압, 해방이 있기에 끊임없이 순환한다.

 

또한 신화란 희생이 계속 되풀이 되어야 한다. 분명히 밝히나 신화는 무한대의 영역이기에 그 무한의 영역을 채워줄 유한의 영속적 귀속이 필요하다. 유한이 유한을 재생산하기에 무한처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상에 대한 희생의 정당성이다.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해 때로는 그 희생당한 자가 다시 복수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이다. 과거는 유령처럼 자신과 조우한다. 그리고 유령이 아닌 현실로서 받아온 자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유령이 과거라면 현재로서 유령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게 마무리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신화적 영역에서 자신의 추악함을 보이기를 거부하며, 그 추악함을 소수의 인물로 몰아넣는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을 희생하면서도 그 욕망조차도 신성시 내지 미화하는 행동을 한다. 모던아랑전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인간이야기다. 귀신, 유령, 수수께끼, 미스터리, SF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현실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의 인간에게 가려진 마음을 추악한 결말로서 이끌어낸다. 모든 이야기가 좋게 끝나지 않은 채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 소수자가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듯이 그 소수자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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