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13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 13권을 읽는 순간 나는 다시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7년 극장판인 end of eva를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고 하면 지금 카라사의 주요 멤버들의 전신이던 가이낙스사의 모습들을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모든 것이 가이낙스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 그리고 추후 상영될 급이 나온다고 치더라도 그 당시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잊을 수 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상당히 신화적이다. 억압된 신지, 아스카, 레이라는 14세 청소년을 상대로 벌이는 어른들의 사회는 그야말로 폭력과 착취에 가깝다.

 

여기서 그들의 운명은 내던지게 된다. 그렇게 자신도 받은 만큼 추후에 보상심리로 작용하여 언젠가 태어날 인간들에게 같은 행위를 반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철학과 문학으로 보면 같은 이야기와 같은 문제들이 돌고 돈다. 인간이란 하나의 존재에서 개성과 인격은 실존적인 하나이나, 인간이 지닌 속성으로 보면 같은 오류와 왜곡들이 계속 돌아오게 마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화에 대한 재구성은 바로 이런 연유가 아닐까?

 

그런 상황들이 최고조로 도달하는 것이 1997년의 end of eva. 제레라는 인류극비단체가 신지의 희생으로 통한 구원이라는 의식은 한마디로 신화가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제의과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제의과정에서 희생자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신격화 내지 응징자로서 대해진다. 신화의 주인공은 영웅과 반영웅의 자리에서 시점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삼국지란 소설에서 유비입장에서 보면 조조는 역적이나, 진나라 사마의의 후손들 입장에서는 혁명을 만든 자다.

 

그런 편견적 요소를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 신세기 에반게리온 13권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던 장면과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지가 아스카의 위기에서 보고도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스카를 위해 몸을 던진 점과 그가 양산형 에바와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이드(id)에 무한대로 가까워진 것이다. 결국 신지의 의식구조는 파괴되고 무의식으로 구성된 자기 안의 욕망 안에 신화의 새로운 부활을 맡기려 한다.

 

문제는 이때까지 신지는 분열된 자신과 살아야 했다. 항상 자신의 욕망을 지나 욕구까지 무시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가 묘한 감정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작품에서 이카리 사령관이 신지를 신지의 외삼촌 집에 맡긴 모습이 인상 깊다. 평소 딱딱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라도 항상 냉정하고 자신의 아우라를 남들에게 굽히지 않는다. 심지어 제레에서 이카리 사령관을 추궁할 때도 그는 냉정을 잃지 않고 대응했다. 그런 이카리 사령관이 신지를 맡길 때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거의 90도에 가까울 정도로 고개와 몸을 숙인 그의 모습에선 엄청난 각오와 결의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가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신지만이 아니라 이카리 역시 오랫동안 상처를 품은 사실도 옆볼 수 있다. 신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삼촌의 아들과 싸우고, 학교에서도 소문이 좋지 못하다. 덕분에 그 누구도 친하게 지내지 않고 오로지 혼자만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누가 신지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어른이란 세계에서 이카리 사령관의 행동에 분노를 분출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이카리 사령관도 아내를 죽인 낙인이 찍힌 사람이란 점이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뒤틀렸다는 뜻이다. 신지와 같이 유이의 묘에 갔을 때 아들의 손을 잡던 이카리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작고 연약해 보인다. 신지만이 그런 아픔이 아니라 이카리 사령관 역시 지독한 고독과 아픔을 지닌 것이다. 그 덕분에 이카리 사령관은 광기에 빠졌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거짓사랑을 한다는 것에서 말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네르프의 책임연구자인 리츠코와 비밀스러운 외도를 했고, 그 이전에 그녀의 어머니 나오코와도 비밀적인 불륜행각을 벌였다. 리츠코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아래 살아온 인생이기에 어머니와 이카리사령관의 불륜은 그녀로 하여금 나오코의 욕망을 자기 역시 욕망했다. 그런 어리석은 모녀는 같은 남자에게 버림을 받는다. 단지 차이점은 나오코는 자살을 선택했고, 리츠코는 방아쇠를 들이댄 것이다. 거짓의 사랑에 속는 자신을 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아는 합리적인 그녀는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라고 볼 수 있는가 하고 역설한다.

 

물론 그런 비합리적인 요소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의 주요 포인트다. 모든 것이 비틀리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사들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현실에서 합리적이란 점에서 하나의 신화를 갖춘다. 욕망의 부재와 욕망의 분출 그리고 희생과 희생에 대한 대가의 갈취, 13권은 바로 이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에 근접한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태풍의 눈 안에 있으면 소용돌이가 치지 않는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고 주변만 시끄럽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유이와 그리고 신지가 있다.

 

리리스와 합체한 레이가 신지에게 다가가 무엇을 바라냐고 한다. 신지에게 레이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느낌이나 한편으로 반 친구이다. 친구라는 이성과 어머니라는 무의식에서 신지의 무의식적 욕망은 레이와 오이디푸스적인 성적욕망을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벽에 갇힌 신지에게 큰 벽일 것이다. 이미 싱크로 비율이 400%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세상에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인가? 아니면 에로스라는 삶의 욕망인가?

 

신지는 초호기 안에 있을 때 2가지의 욕망을 함께 누린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야 하는 아기로서는 타나토스의 본래의 목적은 상실했다. 그런데 다시 싱크로 비율이 증대하면서 그 기회는 왔다. 단지 차이는 초호기에 처음 빨려갔을 때에는 레이와 분리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레이와 초호기가 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지에게 욕망을 묻는 레이, 레이를 본 신지는 그것이 레이라고 하나, 레이는 레이가 아닌 신지의 마음이라고 한다. 신지에게 레이는 어떤 존재인가?

 

이때 신지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살던 시기의 추억을 다시 생각하며, 유이의 무덤 무릎 꿇은 이카리 사령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절망하듯 주저하는 이카리 사령관과 달리 신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담담하게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피해자는 신지인지 아니면 이카리 사령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아니라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절규에서 신화라는 것은 그 가해와 피해의 주고받음이 끊임없이 전개되는 우리의 숙명처럼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처럼 어머니는 아버지와 분리된 존재이나, 어머니와 아들은 본래 하나인 존재다. 아버지보다 아들에게 사랑을 더 대해주는 어머니의 영역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에 대해 매우 질투한다. 유이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조차도 잠들어 있는 초호기에 유이를 가장 사랑하는 이카리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들인 신지만이 탈 수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앓는 신지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모든 것이 시작되어 죽음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에 신지의 선택이 기다린다. 제레는 신지의 자아가 파괴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지는 이때까지 자아의 위축과 자신의 기피로 살아온 자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희망이던 어머니의 기억을 회상하는 모습에서 신지는 파멸과 존속 어디를 택할까? 물론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여 세상에 에바 파일럿 2명인 자신과 아스카만 존재한다. 혹자는 아담과 이브라고 하나, 그것은 인류의 탄생이기면서도 모든 것의 절멸이다. 죽음과 삶이 함께 공존하는third impact에서 모든 억압에 대한 거부로 인해 이어지는 종말인가? 아니면 그 억압에 대한 자신과의 조우로 통한 새로운 자신의 만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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