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 현대문화론선 19
앤드류 밀너 지음, 박거용 옮김 / 현대미학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문화유물론이란 분야에 대해서는 주로 문화인류학 방면에서 생각했다. 예전에 읽어본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은 문화인류학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신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관점으로 문화인류학에 대해 보면서 각각에 대한 장단점과 문화유물론자에 대한 공격적 비판에 대해 반박과 동시에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이 새로운 대안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집이다. 따라서 문화유물론을 문화인류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내 입장에선 이번에 읽어보는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는 그런 취지가 다소 들어가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문화라는 것을 단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고, 문화라는 것에서 인간의 하부토대인 경제적 구조가 그 사회에 강한 영향을 주는 점과 기상조건, 지리적 조건, 생태적 조건이 문화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 것 역시 강조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화(文化)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문화라는 단어는 국내외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에서 지역과 연령, 경제와 심지어 음식까지 적용된다. 문화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이 매우 광범위하여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의 서문에서도 문화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가장 까다로운 두세 개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명한다.

 

이것을 논한 사람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영문학 교수인 레이먼드 월리엄즈에 의해 정의되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란 도서는 유물론이란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점과 그 후에 마르크스주의가 발달시킨 점에서 대부분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와 학자들이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라고 한다면, 이 도서에서는 영미문화권에서 보는 마르크스주의와 문화연구에 대한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인 앤드류 밀너 역시 호주에 위치한 대학교의 교수로서 영미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접근하는데 있어서 20세기 대부분의 사상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축이 되었다면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영미문화권에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는 의미다. 특히 문화유물론이 영국의 문화연구라는 비교문화연구 내지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발전하면서 작고한 레이먼드 월리엄즈를 비롯하여 테리 이글턴이란 세계적 지식인이 문화이론에서 큰 획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따른 발전과정에서 프랑스 구조주의에서 특히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뭐라고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나 프랑스 철학과 사상사에서 루이 알튀세르가 가지는 의미는 막대한 것 같았다. 그가 말하고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21세기에 와서 강력한 전환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을 마르크스로만 보는 것은 아니나, 마르크스주의로서 시작하는 문화이론과 문화연구, 문화유물론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검토를 요구할 수 있게 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런 문화에 대한 복잡성에 대해 앤드류 밀너의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에서는 기본적으로 그 과정을 레이먼드 월리엄즈 중심으로 진행한다. 일단 레이먼드 워리엄즈가 문화라는 그 복잡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알아본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그의 최초의 중요저서인 문화와 사회(Culture and Society)에서 “① 개인의 정신습관, ② 전체 사회의 지적 발전 상태, ③ 예술, ④ 한 집단 또는 국민의 삶의 전체 방식”이라 했다. 문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미시적인 개인영역에서 거대한 국가영역으로 넘어가는 점에서 문화라는 것은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역사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보는 것 역시 난항이다. 역사적인 부분을 문화적인 영역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문화를 역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갈 것인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역사라는 시간적 흐름아래 우리가 가진 문화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역사와 문화 중에서 역사가 문화에 종속되는 부분이 강하다고 본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처럼 인간은 상부구조보단 오히려 하부구조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고, 또한 상부구조가 헤게모니적인 변동으로 통해 하부구조에 영향을 주는 점에서 모순되나 결국 그 상부구조에서 만들려는 변화자체가 하부구조에 대한 피드백현상으로 여긴다.

 

어떻게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서로 만나고 얽히며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라는 공간인 것이다. 환경공학 전공자의 관점에 본다면 세계정치 현상으로 교토의정서나 바젤협약과 같은 국제조약은 상부구조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환경오염에 따른 정치적 행위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물질과 현상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가? 물질로서 토대가 되어가는 것이 차라리 현대사회의 포커스라고 보는 것이 낳을지 모른다고 여긴다. 특히나 플라톤주의처럼 형이상학적 미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현세의 인간이 아니라 물질적 혜택과 신자유주의로 통한 자본주의가 통용되는 국제사회 경향을 보면 오히려 문화유물론적인 요소가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은가 싶다.

 

단지 문화유물론이란 영역은 자본주의화가 일어난 곳이나 혹은 전혀 일어나지도 않은 원시부족에 대한 관찰에서 별로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명사회의 인간이 누리고 있는 물질과 과학적 혜택을 떠나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의식과 무의식구조가 크게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인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식인과 제왕>과 같이 일반 대중이 상식도서로 읽히기 위한 도서이라도 기본적으로 다 읽고 나면 원시사회와 혹은 중세유럽, 또는 근현대의 인간들의 모습에서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아니면 오히려 그렇게 믿고 폭력을 신성화하여 억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성인이라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더 야만적이지 않은가 라는 의문마저 든다. 이런 부분은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학 영역에서 내가 문화유물론에 대해 접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문화가 가진 사회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라는 점에서 단순히 원시부족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듯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 역시 그런 국제사회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의 변화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그 중심축인 레이먼드 월리엄즈가 정리한 도서와 그런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사상가들이 거론된다. 그런 점에서 딱히 이 도서에는 각 사상과 학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고찰보다는 영미문화권 특히 영국의 버밍엄현대문화연구소에 노동자문화론에 대해 영향을 준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문화연구를 만든 자들 흐름을 집어낸 도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으로 통해 그런 내용을 알 수 있기보다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낸 자들의 학문적 변화에 초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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