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노동이라고 한다.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없는 가치를 새롭게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가치가 증명하는 것은 자신이 사회에서 하나의 필요성이 갖춘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정치적 내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 그 노동이란 가치로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사회적 표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과거 우리는 민주화를 위한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해도 다른 민주주의는 그대로 소멸하는 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주인이란 독재가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엔 새로운 주인인 자본이 대체되었다. 노예는 평생 노예로 살 수만 없지만 난폭한 주인이 사라진 후에 자기의 몸을 갈기갈기 뜯어먹는 주인이 나타났다. 인간의 정신은 피폐하게 변해가고, 자신의 의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바로 그런 모습을 지닌 것이 오늘날의 젊은 청춘들이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마저 잃어가고 있다. 정치적 참여권인 선거권도 강제가 아닌 강제로 빼앗기도 있다. 노동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왠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이 모든 사회와 국가조직, 세계의 존립도 노동에서 시작된다. 혁명이 일어나도 반동이 일어나도 독재가 일어나도 민주화가 일어나도 그것 역시 노동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노동 없이 차도 지나가지 못하고 신문도 인쇄하지 못하며 게다가 식사를 위한 요리조차 할 수 없다.

 

노동이 모든 것에서 시작된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문화라는 공간을 주어지기 위해서는 오로지 노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 노동을 할 수 없는 존재는 더 이상 사회적 가치를 보여줄 수 없다. 심지어 노동을 해도 그 자가 아주 가난하고 불리한 위치에 있다면 그의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은 노동이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것처럼 언제나 자기 인생에 큰 한탄과 세상에 대한 냉소와 회의감으로 가득한 그들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그들은 큰 소원이다 대단한 포부는 없다.

 

그저 취업하여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삼포대라는 시대에 살아간다. 예전에 서거한 노무현 前 대통령도 경포대,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했으나 그 이름과 달리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런데도 경포대라고 오해와 왜곡이 그를 힘들게 하였고, 한편으로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삼포대였다. 취업과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청춘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절규하고 있다. 카드빚에 시달리며 부채의 늪에 빠져 사채까지 당긴다. 돈을 빌리지 않으려 해도 구원할 방도가 없다. 그저 죽음의 늪에 빠진 채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소외된 이들에게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관용과 희망 그리고 인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왜 우리에게는 자신의 인권을 누릴 권리조차도 제대로 발설할 수 없는 걸까? 길가에서 고된 몸으로 폐지와 고철을 줍는 노인네들, 밥을 굶는 노인과 고아들, 냉대한 눈빛으로 차별을 받는 외국인들, 그리고 옆에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장애인들, 이 모든 자들이 최장집의 눈에 들어오고 그들에 대한 마음을 순수하게 이 책에서 적어간다.

 

인간적 상처를 향하여 직접 보고 그들의 숨결을 담아낸 이 책에는 고고하고 현학적인 철학서적보다 더 훌륭한 가치가 숨어있다. 겉으로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소중하나, 그 가치가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이 세상에 단 1명의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철학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은 존재하고, 그들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때까지 무조건 폭력의 독재만 없으면 해결될 줄 알았으나, 정작 이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았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은 학생과 그 학생들이 대부분 엘리트계층이란 점에서 노동과 인권운동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 간의 위치를 차지하여 입장을 유지해야 하나,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해버렸다. 따라서 노동조차 박탈당한 자들에겐 삶의 생계를 위협당하니 그들에게 더 이상 자유란 없다. 삶이란 이름이 오히려 지옥과 같은 악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모든 정치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 서민안정,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은 왜 이리도 내 귀청을 찢어놓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들이 삶에 대한 울부짖음을 토할 때 외면하고, 때로는 폭력과 억압으로 격리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최장집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낀다. 인간에게 타인에 대한 이해가 사고만으로 판단하는 것과 실제 그 입장을 마주보며 공감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입장은 학문적인 판단에서 필요하겠지만, 인간이 인간 그 자체를 구하는 것에서는 이성적인 학문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합리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점점 합리성이 사회적 격차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피드백이 된다. 젊은 청춘들이 꿈을 잃자 이미 노령화가 되고, 출산율이 저하된다. 노인들은 노인이 처한 운명처럼 굶주림, 질병, 가난, 외로움이 허덕이고, 젊은이들은 가난, 절망, 회의, 냉소들로 좌절한다.

 

이것이 계속 쌓이고 쌓이면 우리 사회는 큰 암흑을 형성할지 모른다. 최근에 일어나는 강력범죄와 흉악범들, 그들의 속사정을 알고 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보이나, 계속하여 제2의 제3의 그들이 반복된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까? 현실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포기한 그들의 허무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는 그들의 사회적 고립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노동이란 삶의 여유와 목적을 찾게 한다. 그러나 그 주어지는 노동도 이들을 괴롭힌다. 하청 업체에 근무한 사람이 10년 동안 7번 회사가 교체된 것도 모르고 비정규직들은 전체 종사자의 반을 넘어가는 수준인데도 오히려 가속화되는 점에서 말이다.

 

예전에는 나만 우리만 잘 살아보자는 말이 통용되었다고 하나,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은 사회적 현실에 우리는 직면했다. 그리고 그 현실에 우리가 아닌 우리들의 미래까지 같이 수반되어 간다. 우리는 이 시련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 것인가? 이들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란 무엇인지 우리는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멀고도 험하나 조금씩 한 발 나아가면 상처로 가득한 그들에게 맑은 미소로 세상에 빛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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