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 2
강풀 글 그림 / 재미주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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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이 돌아가신 노무현 前 대통령 추모를 위해 3년 동안 티에 들어가는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2012년 올해는 어느 초로의 늙은이가 검정 고무신에 노란 밀짚모자를 쓰고 뒤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노무현 前 대통령의 다룬 다른 웹툰인 노공이산을 보면서 <순정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이 보였다. 경상도 남자라는 특유의 거친 말투와 행동에 당시 그의 아내와 결혼 전에 재미난 일화가 있다. 군대 입영 전에 그녀를 불러내어 이야기하던 모습이 인상 깊다.

 

 

그녀 : 공부하면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지 사람은 와 불러내노?

 

그 : 집을 지으려면 기둥이나 대들보도 필요하지만 서까래나 장식물들도 필요한 거 아이가?

 

그녀 : 그럼 여자는 서까래나 장식물 같은 사람이란 말이가?

 

아차 하고 그는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후회하나 이미 지나간 말은 담을 수 없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실수 일까나? 아니면 당시 남자들의 스타일이라고 할까나, 그는 그렇게 제대하고 나서 그녀가 생각나서 공부가 되지 않았다. 장난이 심한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장난을 친다고 할까나? 나무 뒤에 숨어서 그녀가 책을 가슴에 품고 지나갈 때, 개구리 한 마리를 던져 그녀를 매우 놀라게 한다. 아마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주 대수롭지 않게 그녀 주변을 서성인다. 어느 날 짜증이 머리까지 올라온 그녀가 그에게 말은 건다.

 

 

그녀 : 이런 장난 좀 고마하면 안돼?

 

그 : 크크크... 재미없드나? 나 책 쫌 빌리도

 

그녀 : 우짠 일이고? 법전 아니면 쳐다도 안보는 니가!

 

그 : 내도 톨스토이 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알고!

 

그녀 : ?

 

그 : 니가 아는 건 내도 알고 싶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낮에는 서로 공부와 일을 밤에는 밤하늘에 별을 보면 논길을 손잡고 걷는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녀 : 빌려간 책을 베개 삼아 잠만 잔거 아니가?

 

그 : 내도 <안나 카레리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고 억수록 감동받을 줄 안다! 내는 뭐 법전으로 맹근 밥 묵고, 먹는 물도 유죄 무죄 따져 가... 무신 사랑을 법적으로 하는 줄 아나!

 

그녀 : 호호호

 

 

뒤에 달리는 이야기해설은 감동이 온다. “밤하늘이 쏟아질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벼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걸었다. 2년 동안 커피 한 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도시화 된 곳에 이런 소박하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래도 뭔가 모르게 무언가를 이끄는 매력은 충만하다. 이런 밤하늘에 별을 보면서 산책하는 소박한 이야기가 강풀의 <순정만화>에도 녹아있다. 강풀도 모두 잠이 들 때 홀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그를 그리워하듯 말이다. 어째든 <순정만화> 하권으로 가면 그들의 단순한 사랑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행복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이 되어 새로운 자화상을 비추어준다. 지나간 날에 대한 회상과 반성, 그리고 성장과 미래에서 말이다.

 

주인공 연우를 보면 그는 고3시절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어 아무도 없이 혼자 고독 속에 자신을 버렸다. 친구 규철이가 우연히 장례식장에 준 담배, 그는 담배만 피우던 사람이고, 예전에 살던 집에 있으면 부모님 생각에 괴로워 홀로 아파트 5층에 왔으나, 그가 어디에 있든지 외로움을 버릴 수 없었다. 그저 담배만 피우다 새벽의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 그에게 마음을 나눈 수영은 예쁘장한 여고생이나 뭔가 삐뚤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저항적이고 남들에게 거친 말투를 사용한다. 수영은 본래 아버지가 있었으나 그 아버지가 사실 어머니와 이혼했다는 점, 그리고 새 아빠와 새 오빠가 왔다는 점이다.

 

수영은 연우에게 그날 자기에게 떠나간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고 처량하며 차마 따라갈 수 없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였다. 연우에게 그런 모습이 보인 이유는 연우에게 그 외로움이란 짐을 평생 가지고 살았으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남자의 고뇌였다. 이 책에서 아마 내가 가장 남자로서 공감 간 부분이다. 한국에선 남자들은 꼰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뒤돌아서면 자신의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것이고,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수영이 왜 그날 아버지는 뒤도 안보고 그냥 갔는가에서 규철이 하경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날 때의 그 모습과 동일하다.

 

꼰대 같은 한국남자들의 이면성이 그들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수영의 어긋난 삶의 모습과 연우의 처량한 모습에선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뿌리 깊은 상처가 내려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순정만화>에선 그냥 순정만화가 아니라 인간의 성장에도 관심을 둔다. 특히 하경이의 경우 수영이처럼 그 쓸쓸한 뒷모습을 규철이에게 발견한다. 규철은 회사에서 강제 퇴사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회사에도 입사원서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간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자신이 없기에 오히려 하경이를 아끼는 마음에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남자에게는 그런 심리가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직접적인 것은 아니나 간접적인 경험에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규철은 하경이에게 자신의 눈물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꼰대 같은 행동을 한다. 그때 하경이에게 강숙이가 불쑥 나타났다. 규철의 행동에 허무해하던 하경은 고등학생인 강숙과 같이 맥주 마시는 도중, 강숙의 행동에 크게 웃는다. 슬프나 강숙의 행동에 그저 크게 웃은 것이다. 강숙은 그런 크게 웃던 하경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다시 행복한 미소와 웃음을 말이다. 그렇게 하경에게 상처를 준 규철은 알고 보면 누구보다 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남자들이 좌절을 하여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최고이면서 최악의 선택이다. 나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겠어! 라는 책임의식, 그런 좌절의식에 그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붕어빵 가게 아주머니가 보여준 삶의 의지에 감동받는다. 가게가 거리순찰을 하던 공무원에게 모두 박살나지만, 아주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삶의 의지에서 규철은 거기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붕어빵을 파는 가게 옆에 그는 넥타이와 목도리를 팔고 있던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자신에게 새로운 희망과 사랑은 찾아오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전부 희망만이 좋은 일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강숙이가 하경이에게 선물한 목도리를 규철의 가게에서 파니 말이다. 거리의 상인과 그 상인의 옛날 연인이던 하경의 마주침, 그리고 그것을 보는 강숙과 붕어빵 가게 아주머니, 이들의 마주침에서 알 수 없는 슬픔, 우울, 허무함이 교차한다. 다시 시작하려고 한 그 계기의 순간에서 위기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강풀은 그것만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강풀의 웹툰 <순정만화> 시리즈는 뒤에도 계속 나온 것으로 안다. 그 중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영화로 만들어져 매우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들었다.

 

작지만 뭔가 마음 속 깊은 곳에 감동을 주는 강풀 작가, 그가 바라보는 감동이란 거대한 서사물이나 비극적인 사건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론 최근에 개봉한 그의 작품인 <26년>은 매우 거대한 역사적 순간과 비극적 사건으로 풀어놓은 한 맺힌 이야기지만, 그 이외에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일상에 머물러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스쳐갈 지 모른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은 순정만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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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1 강풀 순정만화 1
강풀 글 그림 / 재미주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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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 이번에 영화에서 개봉된 <26년>으로 처음 작품을 접해보았다. 물론 그의 이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학회에 세미나를 들을 때 그때 같이 가시던 디자인학부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시는 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당시 작년 초였던가?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 시장의 열악한 환경에 따른 회생방법으로 한참 웹툰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진두적인 작가가 강풀이었다. 강풀의 웹툰으로 영화 및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희망적인 의견을 당시 그 교수님이 나에게 하셨다. 한국 만화의 침체에서 웹툰의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 문화에 큰 바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바람의 선두를 어디인지 나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강풀의 히트작이면서 지금은 연극까지 하고 있는 작품, <순정만화>를 읽어보기로 했다. <순정만화>라고 하여 보통 순정만화라고 하면 로맨스가 들어간 편이나 그 로맨스에는 왠지 모르게 너무 낭만성을 추구하는 바람에 현실에 대한 배제가 너무 격리되어 있는 한계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왕자나 재벌, 여자는 무명의 회사원이나 아르바이트생으로 말이다. 현실에서 과연 그것이 얼마나 일어날 확률이 있는가에서 현실적 접근이 불가하고, 오히려 더 몽상에 가까운 것이 현실처럼 다가오길 바라는 신화와 같았다.

 

물론 강풀의 <순정만화>는 실제 인물이 존재하거나 또는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일어나면 좋겠다는 하나의 시라는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란 말에서 이 웹툰을 모운 만화가 철학의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까지는 아니나, 적어도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철학적 요소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우리 일상생활에 희망이 있는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지, 아니면 언제까지 우리는 과거에 매여 자신의 모습을 자학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내가 과연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가? 라는 질문이 온다.

 

어렵지 않게 충실하게 마음으로 다가오는 강풀의 웹툰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정의 애수를 느끼게 한다.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 미적 감각은 철학보다 더 보편적인 것이 칸트의 말이다. 말은 어려워도 우리 일상적으로 미,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대부분 보편적인 부분이 많다. 하지만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일상 속에서 볼 수 없기에 우리는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story-teller인 동시에 story-hearer이기 때문이다. 소통에서 듣고 말하기는 서로간의 마음을 전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런 점을 바로 강풀의 <순정만화>에서 추구한 것이라 본다. 그런 점에서 단행본 상권을 보면 사람들의 인연은 아주 사소한 계기라는 것이다. 아니 사소한 일상의 반복과 반복으로 인한 다져짐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 일상의 반복과 반복에서 그 반복의 순간만 우리는 누적해가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인가 하나의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갇혀진 내 마음 속에 답답함과 소심한 용기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 등등까지 말이다. 1화부터 인상 깊은 것은 어느 여고생 수영의 입에서 나온 욕이다. 아침 지각할까봐 기분이 영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멈추고 만다.

 

그 옆에는 5층에 사는 소심한 샐러리맨인 연우가 소심하게 수영의 행동에 눈빛만 본다. 그런데 예쁘장하게 생긴 수영의 입에서 “아이 씨빨 조땐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어버린다. 조금 인상이 날카로워 보인 여고생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침묵의 엘리베이터는 결국 1층으로 내려가나, 연우는 거기서 수영의 위압에 주눅이 든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멍하니 수영과 같이 내려가다가 자신의 넥타이가 수영의 넥타이 색과 비슷한 것을 보고 똑같다고 하는데, 수영을 그 모습을 보고 그냥 무심히 보자, 연우는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후다다 거리며 도망친다.

 

그런 바보 같은 모습에 수영은 비웃으면서 한편으로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 도중 수영은 아침에 넥타이를 매지 않아 연우의 넥타이를 달라고 한다. 연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수영에게 넥타이를 주는데, 나처럼 끈 넥타이를 맬 줄 몰라, 지퍼 넥타이를 꺼내려다 자기 얼굴에 걸리는 모습이 나온다. 거짓 없는 연우의 행동, 그리고 그 연우가 보여준 호의에 수영은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넥타이를 준다. 이렇게 조금씩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고, 한편 다른 쪽에선 고등학생 강숙과 캐리어우먼인 하경의 관계가 보인다. 하경은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는 차가운 도시의 여자다.

 

그녀가 담배에 입에 물고 라이터가 없자 옆에서 누군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준다. 아무리 봐도 결코 어울리지 못할 그들, 그래도 강숙은 상관없다. 언제나 하경에게 달려가고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 한다. 자신에게 반응이 오지 않아도 그저 달려가는 강숙, 그의 마음은 오직 1가지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았다. 그러나 하경은 허무한 자신의 심정을 달랠 길이 없어 그저 묵묵부답이다.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을까 하는 심정에 강숙을 차갑게 대하나, 한편으로 그의 간절함이 그녀의 일상을 더욱 혼란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샐러리 쑥맥 회사원과 여고생, 그리고 화가를 꿈꾸는 고등학교 남학생과 커리어우먼, 이들의 관계는 왠지 모르게 현실에서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인데도 각자의 마음을 전해주기 위해 살아간다. 특히 연우와 수영의 모습은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자신보다 12살이 어린 수영에게 마치 동등한 인간으로 존대해주는 연우와 그런 연우에게 솔직한 심정을 전하는 수영은 일상적으로 흔한 존재일 것 같은 사람이나 뭔가 특별해 보인다. 낭만적인 것은 겉으로 보기엔 웅장하고 비장할 것 같으나 막상 그 안에 갇힌 자는 고뇌의 순간이다. 따라서 낭만주의적 연애는 자기가 할 수 없기에 타인으로 대리만족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낭만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매우 일상적으로 소소하게 잔잔하게 그리고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연우와 수영의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에 반해 강숙과 하경은 성난 폭폭 위에 떨어지는 나뭇가지처럼 매우 험난해 보인다. 하경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으면서도 괜찮다고 하는 강숙은 아직 철없어 보이나 보통 남자들이라면 한 번 정도 꿈꾸고 싶거나 혹은 직접 해봤을 캐릭터다. 단지 강숙처럼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면 좀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 먹은대로 쉽지 않다. 그 가능성은 모든 것에 대한 바침과 동시에 포기다. 자신을 불태움으로 그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4사람 사이에 다른 풋풋함이 나온다. 길거리에서 넥타이와 목도리를 파는 규철, 그 옆에는 포장마차에서 붕어빵과 간식거리를 파는 아줌마가 있었다. 왠지 소박한 거리의 장사꾼들, 우리 일사에서 흔히 보는 서민적 모습이다. 우리가 항상 기대하고 보는 순정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동화 속 왕자나 공주가 대부분이다. 현대생활에서는 화려한 백화점과 고급승용차, 아니면 외국의 고급스러움을 추구한다. 왜 우리는 진실한 낭만을 그런 곳에서 찾을 생각만 하는 것인가? 작은 것에 대해, 혹은 일상적인 것에 대해, 그것이 좁다면 도서관의 책들 사이에도 좋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소중한 이야기와 인연을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으로 욕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진실한 낭만은 자기에게 오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않다. 그런 물리적인 환경보다는 자신이 가진 마음의 틈새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필요하다. 마음의 틈새라고 하면 무엇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인해 그것이 나도 모르게 넘칠 수 있는가이다.

그 마음이 넘치지 못해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나나 주변에서 보는 일들이다. 12월 추운 겨울,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그다지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금방 녹아 버려 눈송이가 어느새 빗줄기와 물줄기로 바뀌어 생명을 담아갈 하천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날에 눈이 오지 않는다고 편의점에서 눈 스프레이를 뿌리는 연우의 순수한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변화할 주체는 나라는 존재임을 생각해본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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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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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탄생되지 않았으나 비극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다보면 비극이란 원래 우리 인간이 마음속에 지니던 세계다. 그것은 비극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비극이라 부르지 않았을 터이다. 그래서 나는 비극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비극은 인간이 원래 지니고 세상에 나온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제 비극은 탄생해야만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의 영혼을 찾아, 그리고 인간의 고뇌에서 더 멀리 나아가 예술과 문화로서 세상을 아우르기 위해 말이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는 그런 논조가 아주 힘차게 흐른다. 니체의 문장력은 각각을 읽으면 하나의 공감이 될지 모르나 모두가 모이면 종잡기 어려운 큰 해일이 된다. 그런 것들이 바로 비극의 서열에서 1번째는 아폴론적인 이성, 2번째는 디오니소스적인 무절제이면서도 생명력, 3번째 이 2가지의 화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자기 안의 심연세계가 존재한다. 그 심연세계는 우리는 지금 부정하는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니체는 오히려 그것을 열어두라고 하는 것이다. 니체가 아이러니하게 아버지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반기독교로 대항한다. 저 사티로스가 뛰어노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말이다. 현세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한 기독교 관념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인 데카르트의 산물이 진득하게 남아있다.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죄가 가진 존재,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으로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만 요구한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의 역사는 이상하게도 폭력과 더 잔혹한 역사를 반복했다.

 

그들이 부정하는 절대적인 이성, 이데아의 세계에서 도리어 더 혼란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혼란을 부정했고, 그 자체는 마녀의 장난으로 보았다. 마녀의 장난이 있기에 그 마녀에 대한 응징이 있기에 다시 평화와 안정이 온다고 믿었다. 오!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속 편한 수법이란 말인가? 니체의 디오니소스에서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더 인정하고 가속화 하려고 한다. 인간 본성을 숨기지 말고 분출하는 디오니소스의 예술에서 니체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나약함도 강함도 모두 드러내야 했다. 바로 비극으로 말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숨겨두는 채로 살아간다. 그러나 비극에서 우리의 인간이 신화적으로 보는 대상으로 하여금 갖가지 상황과 묘사가 드러난다. 신이란 절대적이고 위대하고 한 치의 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하나, 니체가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의 세계관에서 신이란 음탕하고 폭력적이고 정이 넘치고 게다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요소를 추구했는지 모른다. 저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쾌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라.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이 되며, 왕은 거지가 되고, 사형수는 왕이 된다. 미친 듯이 이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인간에게 가려진 욕망의 해소가 된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었다는 증거다. 마치 실존적인 자아에 대한 증명과 더불어 니체는 디오니소스로 통한 죽음은 새로운 삶을 알린다. 대지의 축복과 은혜를 내리는 신들, 대지의 모신은 2가지의 얼굴을 가진다. 그들은 생명을 빼앗아가나 또 다시 생명을 내린다. 겨울에 모두 말라버린 대지의 황폐함에서 봄에 새로운 생명의 꽃이 피어난다. 인간도 그렇게 자연에 따라 그 이치를 따름이 정답이리라. 신화의 해체에서 과학이라는 것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과학 이전에 기독교라는 절대적인 종교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신화(억압과 폭력)가 되어 우리의 본성을 억압했다.

 

니체가 바란 비극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신화에서 그 신화를 깨고, 본래의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본래의 신화, 그리스라는 곳에서 디오니소스의 종마 사티로스들을 장난이 일상화되는 곳을 말이다. 예술이란 바로 그런 도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아폴론의 세계에서는 생명력이 없는 조각이나 영웅서사시만 등장한다. 생명력이 없기에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명력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없는 생명을 다시 또 구하기 위해 바닷물을 갈증해소로 여긴다. 소금이 가득한 물이 사람에 들어가면 더욱 더 갈증을 부추기게 되어 결국 자멸한다.

 

로마제국의 정복 욕구는 바로 아폴론적인 인간상의 말로다. 그리스로마의 연결을 생각하나 니체는 그리스와 로마를 분리했다. 그래서일까? 유럽의 르네상스시기를 그리스의 연결이 아니라 로마의 연결이다. 이성의 재탄생이 옳은 것이 아니라 이성은 그저 디오니소스와의 화해만이 해결이다. 예전에 <비극의 탄생>을 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시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자신의 제자에게 절대 비극시를 옆에 두지 않으려 했다. 이에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한 플라톤은 자신 스스로 비극시를 불을 태워 그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생명력을 죽이는 이 행동에 대해 니체는 처음에는 비판하나 후에 소크라테스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음률의 세계에 찾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성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스위치에 머물러야 하는가? 하기사 디오니소스의 분출된 자에겐 생명의 노래와 더불어 파괴의 욕구도 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겐 사람들에게 마성을 깃들게 한다. 술은 인간에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활력소가 되나, 때로는 인간에게 독이 되어 정신병자가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술로서 모든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의 권한에서 인간은 신의 운명 앞에 농락당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죽음까지도 삶을 위한 연속으로 보기에 포도주에 취한 자 대부분 죽음보단 디오니소스의 찬미에 노래한다. 바로 인간이 가진 원초적 세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생명력을 가진 자로 말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이 아쉽게도 많지 않다고 했다. 니체는 당시 유럽에서 불어온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를 혐오했다. 인간 스스로가 약하기를 바라기에 강한 의지가 없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 보았다. 강자는 항상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만하고 교활한 자가 아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 대한 의지에서 강한 자는 동정으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서 대하기 때문에 강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무기와 권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뛰어넘은 초인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니체의 사상은 독일 나치에 오용되기도 하고, 그에 동조한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지식인들에 의해 오용되기도 했다. 결코 니체는 파시스트로 가득한 나치즘에 동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이든 그 모든 것에 대한 얽매여 자신 스스로를 거기에 매달리게 하는 것을 우려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바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 탈피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의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니체는 무조건적인 죽음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이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 그곳에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하나 거기에 보이는 것은 시체와 사지가 절단된 부상병이었다. 자신마저 전염병에 의해 제대했으니, 그가 바란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삶의 부여다. 하지만 니체가 바란 디오니소스적인 전쟁은 당시에 문명국가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신화가 숨 쉬고, 문명이 닿지 않은 원시사회야 말로 디오니소스가 살아있는 세계다. 그러나 거기는 아폴론은 없다. 물론 인도와 같이 불교가 강한 곳은 삶의 의지가 미약한 곳이기에 비극으로 한계성이 크다.

 

비극은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합리와 비합리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니체가 그토록 목청을 높여 부른 이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비극의 탄생>의 한 부분을 읊어보자.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 활짝, 더 활짝!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훌륭한 무용가들이여,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려만!

웃는 자의 이 왕관, 장미로 엮은 이 왕관을 스스로 내 머리에 썼노라. 그리고 나 자신이 나의 웃음을 신성한 것이라고 말했노라. 그렇게 해줄 만큼 강한 자를 나는 타인들 중에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추는 저 차라투스트라여. 날개로 신호하는 가벼운 자 차라투스트라. 모든 새들에게 신호하면서 날아오를 준비가 끝난 자, 지복에 가득 찬 가벼운 자.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진정으로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성급하지 않은 자, 절대자가 아닌 자, 높이 뛰어오르기와 옆으로 튀기를 좋아하는 자, 나는 스스로 왕관을 썼노라!

웃는 자의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진다! 나는 웃음을 신성하다고 말했노라. 그대들 높은 인간들이여, 나에게서 배울지어다 - 웃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며, 스스로 왕이 되어 그 왕관조차 누군가에게 주고선 자신의 자유로움을 맛보라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자신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라고 한다. 권태로운 자들에게 그는 그저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권태의 늪에 빠져 평생 그 늪이 자기 세상인 것만 생각하면 오히려 미친 사람이 정상일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도리어 광기가 예술과 학문 그리고 예언의 시작이라고 했다. 광기에 빠진 자들이어야 말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진 공간에서 광인들은 그저 갇혀 사는 죄수가 되었다. 이성의 세계는 자신의 비이성을 광인으로 하여금 수용소에 가두어 이성의 세계가 오히려 광기에 찼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처럼 말이다. 니체는 그 광기의 주체,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아폴론적인 세계와 결합과 충돌로서 예술을 그리고 그 절정인 비극을 탄생시키려 한다. 인간 본성을 향하여 말이다. 문명이란 존재는 결국 자연의 세계를 노동으로 통해 이룩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의 파괴와 인간 본성의 파괴로서 존재된 파괴의 습작물이다.

 

숲에는 님프가 춤을 추고, 여신들은 호숫가에서 목욕하며 서로를 바라보면 능욕과 생식력을 자극하는 생명력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리의 디오니소스는 안타깝게도 아폴론적인 회화와 조각으로 통해 본다. 아니 이 역시 비극인가? 디오니소스의 열정이 아폴론적인 세계와 조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관찰자가 아니라 서로가 관찰될 수 있을 만큼 모두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 신은 권태와 부정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신,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죽음과 삶이 함께 하고, 개인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나로서도 인간이 가진 4계절은 죽음과 삶의 반복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 역시 없으니,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그 “달콤한 죽음이여 나에게 와라”라는 타나토스가 있기에 에로스의 세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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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 사랑과 죽음의 교향시
이덕희 지음 / 나비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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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세상에는 니체주의는 없다. 오직 니체주의자로 될 수 있는 자는 니체일 뿐이다. 그 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존을 찾기 위해서 니체로 들어가나 결국 니체로 되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인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데미안처럼 되려고 하나, 계속 그것은 머나먼 여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에 발발하여 싱클레어는 총을 들고 나가고, 거기서 부상을 당해 침대에 누워있는데, 자기의 모습이 어느 순간 데미안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데미안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으로 데미안에게 간 것인가?

 

전혜린 교수가 남긴 유작 2편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까지 읽은 후에 전혜린 교수의 친구인 이덕희 작가의 <전혜린>을 읽어보았다. 처음에 이덕희 작가의 서적을 통해 사전에 어느 정도 안 상태에서 전혜린 교수의 작품을 볼까 생각했으나, 그냥 먼저 전혜린 교수의 서적을 보기로 했다. 철학이나 사상과 같이 하나의 사유의 세계로 정립하기보단 전혜린 교수의 자신의 실존적인 글을 이해하는 것보단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니체의 글에 빠진 전혜린 교수가 떠오른다. 과연 그런 것인가? <전혜린>이란 도서를 보니 역시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문구가 니체의 것이라니, 전혜린 교수는 동생인 채린에게 편지를 적어 니체전집을 모두 주고 싶을 정도로 니체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의 영향을 받아 세계적인 문학소설을 내놓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지와 사랑>을 좋아했다. 헤르만 헤세에게 팬레터를 보내어 독문으로 이루어진 <데미안>과 답장을 받았을 때 전혜린 교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도 독일에 빠지게 되었는가? 물론 책에서 슈바빙의 거리에서 보인 보헤미안의 숨결을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 한 가지의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미륵이라는 한국인이다. 전혜린 교수는 이미륵의 무덤에 가서 참배를 했다. 이미륵은 3·1 운동 후에 독일로 갔고,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으나 어느 순간 독일은 나치에 의해 파시스트들이 나라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어느 독일인이 이미륵에게 히틀러를 아시오라는 말에 모른다고 하고, 그 독일인이 이미륵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라고 묻자 독일이라 대답한다.

 

이미륵의 의지에는 독일이란 아름다운 자연과 자유가 있는 곳이어야 하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독일에서 자유를 원하고 분출한 채 눈을 감았다. 독일인들의 가슴에 이미륵은 아주 큰 감동이었나 보다. 안 그러면 전혜린 교수가 독일에 가서 한국인 여성으로 어떻게 단순히 살아갔을까? 그렇지만 이미륵의 참배에서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의 고뇌가 보인다. 왜 그녀가 니힐리즘에 빠졌는가? 어린 시절 매우 총명한 아이로서 집에서 착한 딸이었다. 그리고 법률가 인텔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혜린 교수를 보면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가까웠다.

 

그것은 전에 보던 에세이에도 그렇게 보였고, 이번에 읽어본 책도 그렇다. 그 분은 마치 아버지가 전부이고 어머니는 존재하더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에 가면서 그것은 변했다.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 그녀에게 큰 전환점이다. 그녀의 글을 보면 다소 시대정신의 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다고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시 검열이 심각하고, 군화발이 거리의 자유를 밟아대던 시절이다. 그녀의 글과 이번에 보던 책에서 간접적으로만 느낀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조선총독부 관할 관리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고향은 처음부터 있었나? 이북에서 태어나 이북 북단에 있다가 전쟁 후 피난 왔다고 하더라도 광복전후의 이야기가 그녀의 에세이에는 없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빚이 전혜린 교수에게 있을까? 독일은 사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이탈리아와 함께 전쟁을 일으킨 범죄국가다. 게다가 파시스트로 무장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가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인 소녀에 대한 마음이 이해가는 것 같다.

 

안네 프랑크는 독일 게슈타포에게 강제로 체포되어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는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배고픔과 병마로 죽은 안네, 그 소녀가 적던 일기에 대해 전혜린 교수는 아주 강하고 깊은 애정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마치 독일나치가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듯,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그런 학살을 일삼던 자들과 같이 결탁한 것이고, 그 아버지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가치관보다 교육으로 통한 사회적 지위와 성공만 바래서일까?

 

처음에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전혜린 교수의 외면은 강해지는 것인가? 독일 유학시절 전혜린 교수는 가난했으나, 아버지가 제대로 돈을 전해주지 못한 모양이다. 자살하여 운명을 달리한 전혜린의 장례식에 독일에 유학 갈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부친의 눈물은 그래서인가? 그런 부분은 나는 안네의 일기와 이미륵의 생애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유가 없는 한국, 독일에서 왜 자유를 찾는가? 전혜린 교수가 살던 한국은 답답한 동물원이었다. 자유가 없는 곳, 권태와 지루함으로 삶의 활력이 없는 곳, 그래도 어떻게든 삶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그것은 정화와 같이 아주 소중한 혈육, 그리고 1960년 4월에 만난 어느 남자 신입대학생, 전혜린에게 그는 진실로 삶의 희망일까? 그러기에는 왠지 김이 빠진다. 하지만 적어도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매우 전위적인 사람이란 점이다. 요새 길에 가다보면 담배를 피우는 여성들을 많이 본다. 개인적으로 담배냄새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기에 나로서는 누구든지 담배를 피우면 괴로운 편이다. 그런다고 해서 담배를 상대방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은 이상 내가 참견할 권리가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2012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0년대 한국은 남성의 가부장제 권위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을 때다. 이런 시기에 전혜린 교수는 매우 전위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이덕희 회상에서 “너 법대에 들어가면 전혜린이란 괴짜가 있단다. 머리가 굉장히 좋고, 남자들과 막걸리도 잘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큰 소리로 떠들고... 아무튼 굉장한 여성이니 너 한번 사귀어봐.”라는 문구가 나온다. 단지 요새 여성과 달리 그녀는 자기의 이성과 감정이 있다는 점과 짙은 화장이나 화려한 의상 대신 아무렇게나 입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덕희 작가가 처음 전혜린 교수를 볼 때, 그 모습은 독특했다. 여름인데도 스웨터에 목도리, 아직까지 독일의 향수를 잊을 수 없었나보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자신을 만나려 3시간이나 기다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편지도 주고받고 말이다. 상당히 강렬한 영혼의 소유자의 이성과 동시에 매우 강한 영감은 이덕희 작가에게 큰 소용돌이가 되었다. 니체에 빠져 허무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전혜린 교수에서 그 분은 항상 자기의 허무와 존재에 대해 끝없이 추구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전혜린 교수는 독일에서 연극 <당통의 죽음>을 봤다고 한다. 연극에서 24명의 남성, 6명의 여성 정도가 필요해서 30명의 많은 배우가 필요한 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연이 아니었다. 주인공 당통과 그의 목을 노리는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언젠가 테르미도르반동으로 목이 나가는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하지만 당통의 죽음에서 나 역시 생각하거만, 당통에게 닥친 죽음이다. 당통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자신에게 오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삶의 의지도 보이지 않고 그저 타인들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살인죄로 단두대로 가야할 뫼르소 역시 그렇다.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에 오히려 자기의 존재적인 각인은 처형선고와 더불어 그것을 기다리는 뫼르소의 모습이다. 자신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함성이 자신에게 쏟아질 것을 기대하는 뫼르소의 허무 속에 생겨난 실존적인 발견은 우리 인간이 오히려 더 허무한 점은 명시한다. <이방인>이던 뫼르소가 이방인으로 설정했으나 실제로 이방인 우리 모두인 것처럼 말이다.

 

당통은 그런 점에서 이미 모든 것을 넘어선 인간이다. 당통은 아내와 살결을 나누어도 서로 모른다고 하고, 때로는 창녀와 뒹굴기도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에는 진정한 평화가 왔는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이 뒤집힌 채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다른 누군가의 목을 원한다. 그래도 빵은 오지 않는다. 로베스피에르의 고뇌는 아마 자유와 평등을 위한 갈망이나, 그 갈망에도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다. 당통에게 그저 광기에 뿌린 프랑스 파리는 그저 권태로운 일상이다.

 

그런 당통의 죽음을 전혜린 교수는 아주 실존적인 당통을 찾아 나선다. 이미 읽어본 연극대본이라 다시 지금 다른 사람의 글로 보니 뭔가 기분이 새롭다. 인간 그 자체에서 권태로움은 현대 사회에 spectacle이란 현상으로 나타난다. 1968년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의 시작점이던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와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에서 그들은 모든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자신들도 스펙타클화 한다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잠적한다. 특히 라울 바네겜은 68혁명 이끈 선동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거의 숨어살고, 기 드보르는 술과 씨름하며 심장병에 의한 통증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당긴다.

 

조금 전혜린 교수의 죽음과 다른 부분은 전혜린 교수는 니체로서 전위적인 모습을 추구했다면, 기 드보르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상황주의자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끝없이 저항하거나 아니면 자신 안이 관념으로 들어가서 결국 허무를 선택하거나 결국 권태란 잔인한 고문인 것 같다. 아니라면 그 권태조차도 느낄 수 없이 권태 속에 빠진 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왠지 궁금하다. 권태 속에 갇혀 권태감조차 감지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인지 아니면 그 권태로움에 빠져 고뇌하는 것이 좋은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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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성찰.세계론) -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자의 학문 연구 방법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5
르네 데카르트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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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o, ergo sum.”이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명언을 남긴 르네 데카르트 철학에서 실제 그의 서적인 방법서설을 읽는 순간, 그렇게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은 점은 분명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서구의 사상을 기반 되었던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시작한 “cogito, ergo sum” 대신 “je pense, done je suis.”가 오히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 책에서 말한다.

 

어째든 합리주의 시작인 데카르트의 서적을 보면서 느낌은 점은 뭔가 차가운 물이 내 입에서 들어와 그 물만의 독특한 맛을 주기보단 그저 맹맹한 느낌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이 서적은 윤리학적인 형이상학보다는 관념과 인식, 그리고 물리학에 대한 부분으로 서술한다. 당시 중세에서 교회의 정치적 압력이 너무 강했을까?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돌고있다 라는 지동설을 발표하고 교회로부터 큰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으면 분명히 수학과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적인 요소가 나온다. 지금의 과학에선 다소 어긋난 점은 많은 수학에 대해 생각해보면 정말 치밀할 정도다.

 

수학에 대해 지식수준이 엉터리인 공대전공자로도 대충 수학에 대한 명제를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 정도다. 수학의 공식은 논리적으로 풀어가니 말이다. 그런다고 수학적 지식이 없다고 논리적인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학의 논리에 모든 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논리적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논리가 논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그런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논리보단 단지 사회적인 기준, 도덕적인 영향에 의해 이 책을 저술했다는 점이 의미가 크다.

 

그는 분명 과학적인 논리로 전개하고 있으나, 그 당시 사람이듯이 신학에 대한 지나친 편중으로 인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점이 안타까웠다. 스콜라철학자 내지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해보면 기원전에 그리스와 그 주변에 기거한 아리스토텔레스 쪽이 훨씬 나에게 납득이 된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에 대한 부분이 종교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해부학이나 기계기술은 분명 후대에 발전했으나, 인식과 관념에 대한 세계는 오히려 막혔는지 모르겠다. 그 막힌 상태에서의 데카르트의 논리는 자기의 주장은 강력하게 끌고 가기보단 이것에 대한 설명이 아닐 수가 없음을 말하고 싶으며, 반드시 이것을 대해 여러분들은 통찰해주기 바라는 듯한 문체였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과 육체에 대한 언급에서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있는 점, 정신이 절대적인 영역으로 남겨두었으며, 그것은 마치 신이 이미 만들어놓았고, 그것에 대한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것은 방법서설이 논리학적인 내용이 담고 있으나 그런 요소가 논리로부터 크게 벗어난 점이다.

 

서구 합리주의 모델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가 책 내용 안에서 드문드문 보인다는 점이다. 서구사회 특히 프랑스 주변으로 하는 국가와 민족에서 그는 동양권 문화를 낮추어 보았다. 식인종과 중국인에 대해 같이 묶어 설명하려는 점과 그들 중에서 물론 지식인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이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에게 그들만의 구조화되어있는 무의식의 체계가 있을 뿐이지 윤리적인 이성에서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식인종과 중국인들에 대해 같은 취급을 하고도 그들 사이에 지식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기만하는 행동이었다.

 

오로지 이성이란 관념은 자신들의 합리에만 찾는 방법서설로는 엄청난 오만과 편견이 녹아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분명 데카르트 자신은 이지적인 인간은 분명하나, 물질에 대한 부분을 모조리 부정하고 그 물질조차 관념이란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은 18세기까지 절대적 논변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역사가 전쟁이란 큰 소용돌이에서 그 합리성을 찾아본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하다. 단지 데카르트 그 자신과 그 자신이 살던 시절이 합리적이라고 믿고 싶다는 강렬한 의미만 느껴질 뿐이다.

 

자고로 철학이라 함은 비판적 의식이다. 그 비판은 시작은 자신에 대해서부터 자신이 가진 이성과 그 이성에 대한 의문이다.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유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강력한 흐름만 대변할 뿐이었다. 관념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단지 이 부분은 매우 동의한다. 데카르트는 일부러 군대에 자원하는 부분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예로서 인간의 신체손실에 대한 관념적 고통을 나열한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신체가 절단되어 의식에 의해 느낄 수 없으나 무의식적으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점을 말이다. 가령 손이 절단된 사람은 이미 절단되어 없는 부분에서 격렬한 통증이 온다고 한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손실되었기에 그 통증은 분명 심리적인 통증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가 하나의 통각으로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든 전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서적을 처음 읽어본 나에게 이 책은 읽기가 참으로 거북했다. 읽는 내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부감이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서 신이 창조한 것보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보는 나의 신화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판단하게 만든 것일까?

 

신에 대한 부분에서 충분히 경건하게 상대방의 의지와 의미를 존중한 준비는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신에 대한 존재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이 있더라도 그 자체가 신에 의해서라면 합리적인 요소가 비합리적인 부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관념론과 유물론은 계속 끊임없이 대립하여 충돌하여 변증법적인 결론이 멈추지 않고 생산하는 것이 20세기 사상을 지배적으로 다룬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발상이다. 아니라면 오히려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구조에서 관념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지배당하도록 하는 착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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