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 사랑과 죽음의 교향시
이덕희 지음 / 나비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세상에는 니체주의는 없다. 오직 니체주의자로 될 수 있는 자는 니체일 뿐이다. 그 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존을 찾기 위해서 니체로 들어가나 결국 니체로 되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인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데미안처럼 되려고 하나, 계속 그것은 머나먼 여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에 발발하여 싱클레어는 총을 들고 나가고, 거기서 부상을 당해 침대에 누워있는데, 자기의 모습이 어느 순간 데미안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데미안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으로 데미안에게 간 것인가?

 

전혜린 교수가 남긴 유작 2편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까지 읽은 후에 전혜린 교수의 친구인 이덕희 작가의 <전혜린>을 읽어보았다. 처음에 이덕희 작가의 서적을 통해 사전에 어느 정도 안 상태에서 전혜린 교수의 작품을 볼까 생각했으나, 그냥 먼저 전혜린 교수의 서적을 보기로 했다. 철학이나 사상과 같이 하나의 사유의 세계로 정립하기보단 전혜린 교수의 자신의 실존적인 글을 이해하는 것보단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니체의 글에 빠진 전혜린 교수가 떠오른다. 과연 그런 것인가? <전혜린>이란 도서를 보니 역시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문구가 니체의 것이라니, 전혜린 교수는 동생인 채린에게 편지를 적어 니체전집을 모두 주고 싶을 정도로 니체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의 영향을 받아 세계적인 문학소설을 내놓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지와 사랑>을 좋아했다. 헤르만 헤세에게 팬레터를 보내어 독문으로 이루어진 <데미안>과 답장을 받았을 때 전혜린 교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도 독일에 빠지게 되었는가? 물론 책에서 슈바빙의 거리에서 보인 보헤미안의 숨결을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 한 가지의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미륵이라는 한국인이다. 전혜린 교수는 이미륵의 무덤에 가서 참배를 했다. 이미륵은 3·1 운동 후에 독일로 갔고,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으나 어느 순간 독일은 나치에 의해 파시스트들이 나라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어느 독일인이 이미륵에게 히틀러를 아시오라는 말에 모른다고 하고, 그 독일인이 이미륵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라고 묻자 독일이라 대답한다.

 

이미륵의 의지에는 독일이란 아름다운 자연과 자유가 있는 곳이어야 하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독일에서 자유를 원하고 분출한 채 눈을 감았다. 독일인들의 가슴에 이미륵은 아주 큰 감동이었나 보다. 안 그러면 전혜린 교수가 독일에 가서 한국인 여성으로 어떻게 단순히 살아갔을까? 그렇지만 이미륵의 참배에서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의 고뇌가 보인다. 왜 그녀가 니힐리즘에 빠졌는가? 어린 시절 매우 총명한 아이로서 집에서 착한 딸이었다. 그리고 법률가 인텔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혜린 교수를 보면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가까웠다.

 

그것은 전에 보던 에세이에도 그렇게 보였고, 이번에 읽어본 책도 그렇다. 그 분은 마치 아버지가 전부이고 어머니는 존재하더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에 가면서 그것은 변했다.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 그녀에게 큰 전환점이다. 그녀의 글을 보면 다소 시대정신의 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다고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시 검열이 심각하고, 군화발이 거리의 자유를 밟아대던 시절이다. 그녀의 글과 이번에 보던 책에서 간접적으로만 느낀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조선총독부 관할 관리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고향은 처음부터 있었나? 이북에서 태어나 이북 북단에 있다가 전쟁 후 피난 왔다고 하더라도 광복전후의 이야기가 그녀의 에세이에는 없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빚이 전혜린 교수에게 있을까? 독일은 사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이탈리아와 함께 전쟁을 일으킨 범죄국가다. 게다가 파시스트로 무장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가 안네 프랑크라는 유태인 소녀에 대한 마음이 이해가는 것 같다.

 

안네 프랑크는 독일 게슈타포에게 강제로 체포되어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는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배고픔과 병마로 죽은 안네, 그 소녀가 적던 일기에 대해 전혜린 교수는 아주 강하고 깊은 애정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마치 독일나치가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듯,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그런 학살을 일삼던 자들과 같이 결탁한 것이고, 그 아버지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가치관보다 교육으로 통한 사회적 지위와 성공만 바래서일까?

 

처음에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전혜린 교수의 외면은 강해지는 것인가? 독일 유학시절 전혜린 교수는 가난했으나, 아버지가 제대로 돈을 전해주지 못한 모양이다. 자살하여 운명을 달리한 전혜린의 장례식에 독일에 유학 갈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부친의 눈물은 그래서인가? 그런 부분은 나는 안네의 일기와 이미륵의 생애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유가 없는 한국, 독일에서 왜 자유를 찾는가? 전혜린 교수가 살던 한국은 답답한 동물원이었다. 자유가 없는 곳, 권태와 지루함으로 삶의 활력이 없는 곳, 그래도 어떻게든 삶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그것은 정화와 같이 아주 소중한 혈육, 그리고 1960년 4월에 만난 어느 남자 신입대학생, 전혜린에게 그는 진실로 삶의 희망일까? 그러기에는 왠지 김이 빠진다. 하지만 적어도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매우 전위적인 사람이란 점이다. 요새 길에 가다보면 담배를 피우는 여성들을 많이 본다. 개인적으로 담배냄새에 대해 강한 거부감이 있기에 나로서는 누구든지 담배를 피우면 괴로운 편이다. 그런다고 해서 담배를 상대방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은 이상 내가 참견할 권리가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2012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0년대 한국은 남성의 가부장제 권위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을 때다. 이런 시기에 전혜린 교수는 매우 전위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이덕희 회상에서 “너 법대에 들어가면 전혜린이란 괴짜가 있단다. 머리가 굉장히 좋고, 남자들과 막걸리도 잘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큰 소리로 떠들고... 아무튼 굉장한 여성이니 너 한번 사귀어봐.”라는 문구가 나온다. 단지 요새 여성과 달리 그녀는 자기의 이성과 감정이 있다는 점과 짙은 화장이나 화려한 의상 대신 아무렇게나 입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덕희 작가가 처음 전혜린 교수를 볼 때, 그 모습은 독특했다. 여름인데도 스웨터에 목도리, 아직까지 독일의 향수를 잊을 수 없었나보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자신을 만나려 3시간이나 기다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편지도 주고받고 말이다. 상당히 강렬한 영혼의 소유자의 이성과 동시에 매우 강한 영감은 이덕희 작가에게 큰 소용돌이가 되었다. 니체에 빠져 허무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전혜린 교수에서 그 분은 항상 자기의 허무와 존재에 대해 끝없이 추구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전혜린 교수는 독일에서 연극 <당통의 죽음>을 봤다고 한다. 연극에서 24명의 남성, 6명의 여성 정도가 필요해서 30명의 많은 배우가 필요한 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연이 아니었다. 주인공 당통과 그의 목을 노리는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언젠가 테르미도르반동으로 목이 나가는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하지만 당통의 죽음에서 나 역시 생각하거만, 당통에게 닥친 죽음이다. 당통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자신에게 오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점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삶의 의지도 보이지 않고 그저 타인들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살인죄로 단두대로 가야할 뫼르소 역시 그렇다.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에 오히려 자기의 존재적인 각인은 처형선고와 더불어 그것을 기다리는 뫼르소의 모습이다. 자신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함성이 자신에게 쏟아질 것을 기대하는 뫼르소의 허무 속에 생겨난 실존적인 발견은 우리 인간이 오히려 더 허무한 점은 명시한다. <이방인>이던 뫼르소가 이방인으로 설정했으나 실제로 이방인 우리 모두인 것처럼 말이다.

 

당통은 그런 점에서 이미 모든 것을 넘어선 인간이다. 당통은 아내와 살결을 나누어도 서로 모른다고 하고, 때로는 창녀와 뒹굴기도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에는 진정한 평화가 왔는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이 뒤집힌 채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다른 누군가의 목을 원한다. 그래도 빵은 오지 않는다. 로베스피에르의 고뇌는 아마 자유와 평등을 위한 갈망이나, 그 갈망에도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다. 당통에게 그저 광기에 뿌린 프랑스 파리는 그저 권태로운 일상이다.

 

그런 당통의 죽음을 전혜린 교수는 아주 실존적인 당통을 찾아 나선다. 이미 읽어본 연극대본이라 다시 지금 다른 사람의 글로 보니 뭔가 기분이 새롭다. 인간 그 자체에서 권태로움은 현대 사회에 spectacle이란 현상으로 나타난다. 1968년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의 시작점이던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와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에서 그들은 모든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자신들도 스펙타클화 한다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잠적한다. 특히 라울 바네겜은 68혁명 이끈 선동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거의 숨어살고, 기 드보르는 술과 씨름하며 심장병에 의한 통증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당긴다.

 

조금 전혜린 교수의 죽음과 다른 부분은 전혜린 교수는 니체로서 전위적인 모습을 추구했다면, 기 드보르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상황주의자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끝없이 저항하거나 아니면 자신 안이 관념으로 들어가서 결국 허무를 선택하거나 결국 권태란 잔인한 고문인 것 같다. 아니라면 그 권태조차도 느낄 수 없이 권태 속에 빠진 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왠지 궁금하다. 권태 속에 갇혀 권태감조차 감지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인지 아니면 그 권태로움에 빠져 고뇌하는 것이 좋은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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