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빛깔있는책들- 역사 275
한창완.박석환.전현지 지음 / 대원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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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님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 강연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강신준 교수님은 노동과 관련하여 놀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놀이를 하는 것이고, 그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바로 노동을 줄이고 개인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서평하려고 하는 <만화>에서 나오는 인류의 예술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고대 인류문명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채취와 사냥을 하던 수렵문화였다. 당연히 동물에 대한 사냥과 식물과 열매를 가지고 오면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한다.

 

인간과 동물이 가장 대비되는 점으로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놀이라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주술, 의식, 행사, 각종 절차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문화적인 요소와 분리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매일 일만 하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누적된다면 자극적인 술과 담배, 혹은 성적 쾌락을 원할 것이다. 인간이 단순한 삶을 누리게 되면 일반적인 동물과 같은 말초적 신경을 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면 말초적 자극이 아닌 다른 것도 찾게 되고, 이른바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혹은 취향을 가진다. 인간이 취미를 없다는 것은 곧 삶에서 특별한 재미를 찾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고대 인류가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벽화에 그림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력과 동시에 자신들의 기록을 보여준다. 동물사냥이나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곧 그것이 여가생활이고, 또한 그것이 예술로서 현대사회에서 큰 가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만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아는 만화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여가와 인간의 상상력은 눈앞의 이미지로 나타내는 하나의 미학적 가치로 보는 것이 옳다. 유럽사회에서는 이미 만화라는 것은 예술로서 인정을 받는데, 실사카메라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을 표현주의로 충분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화는 글과 그림이란 텍스트가 동시에 들어가기에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영상문화의 급진적 발달에서 문자문화는 최후의 보루가 만화라는 말도 있다.

 

만화에 담겨진 말풍선에서 글자가 들어가고, 이미지는 상황적 묘사를 하여 정보 전달력이 매우 탁월하다. 영상과 음성이 동시에 들어간 멀티미디어는 수용자로 하여금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나 비판적 사고를 멈추게 하는 한계성을 지닌다. 또한 멀티미디어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재생하기에 자기가 다시 그 자리로 되돌리는 것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된다. 대신 만화는 종이책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동시에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여 비교할 수 있다. 만화의 정보전달력은 이미 충분하다. 어린아이 교육학술지나 혹은 과학도서에서 그림첨부에서 만화의 상상력과 전달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 <만화>라는 것을 인류의 역사와 그리고 인류 속에 한국인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었나? 사실 이 책을 고르면서 우연히 블로그 이웃 분이신 박석환 선생님의 도서란 것을 알고 흥미를 가졌으나, 더 흥미를 가지게 된 원인은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계신 한창완 교수님이 같이 공저했기 때문이다.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에서 책 내용이 너무 어렵고 이론적인 영역이 너무 많았다. 일반적으로 대중들과는 전혀 소통을 나눌 수 있는 도서도 아니고, 만화애니메이션 전공자(본인은 환경공학 전공자)라도 봐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았다.

 

신문방송학 거기서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소를 반영하여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기에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알아보는 것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분석하는 하나의 텍스트이론도서로 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이외에 프랑크푸르트학파 문화연구 등의 내용들까지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도서가 아니었다.

 

덕분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 하는 취미생활을 가진 입장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만화애니메이션 기호학을 알기 위해서는 어차피 위 도서는 한 번은 지나가야할 도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서에서는 글자 위주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든 반면 이번의 <만화>에서 삽화나 이미지의 배치가 적절하게 들어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전달력을 준 것이 좋았다. 한창완 교수님 혼자가 아니라 박석환 선생님과 전현지 선생님의 공저라는 점에서 다양한 관점이 책 속에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책에서 고대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회의 유럽에서 그림과 조선은 중후기 그림이 나온다. 그림의 중요성은 당시 일반 사람들은 글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되, 글을 적을 수 없어서 지식 전달력의 한계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으로 통해 정보전달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판화나 색채로 통해 대중과의 소통과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 대신 글자의 등장은 슬로건이나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나 혹은 한국 시조를 그림에 집어넣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취미생활 내지 정신수양으로 즐겼던 방법이다. 그래도 여전히 종이라는 것은 대중에게 낯선 존재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한 것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고 볼 수 있다. <만화>에서 이도영 선생님에 대한 업적을 무척 대단히 여기는데, 그것은 시사만화 내지 항일문학에 근거가 되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은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신적 방법도 있다. 지금 지배당하는 이데올로기의 부당함을 감추기 위한 정신교육은 우리 민족혼을 잃게 하려고 했다. 이에 저항하는 방법은 대중들을 계몽하는 방법이나 문맹인이 많은 점과 어려운 한자로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점이 큰 난관이었다.

 

그래서 만화라는 매체는 대중들에게 어렵지 않게 재미를 주면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예전에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발간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대표적인 한국 문학평론가이신 김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다.” 그것은 만화가 우리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매체가 아니라 스스로 진화하여 나오고 즐기는 문화라는 점이다. 최근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만화작가들이 전문적인 만화가보다 웹툰으로 통한 아마추어 작가들이 시시각각 나오고 있다. 특히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과 같은 작품은 매우 성공한 점과 웹툰이란 하나의 매체를 만화책으로 발간하거나 영화, 연극으로 재편성하기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26년>의 흥행은 웹툰을 통한 스토리텔링의 개발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외에 많은 웹툰 작가들이 등단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독특한 아이디와 소재라고 볼 수 있다. 만화라는 표현주의적 매체를 더욱 상상력을 집어넣음으로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만화문화가 이렇게 잘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문사 폐간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처음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등과 같이 독립운동가에 의해 만들어지다 추후 친일파가 신문사를 운영함에 따라 퇴색된 것이 아쉽다.

 

<만화>라는 도서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본천황 생일에 도가 지나친 찬양과 태평양전쟁 참전을 조선인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배제된 점에서 민족지라는 설정을 다소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을 이해했는지 군사정권 때 만화가 탄압의 대상인 점과 그것으로 만화문화가 위축된 것 역시 다루었다. 예전에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콘텐츠학과의 박인하 교수님과 김낙호 선생님의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에서 해방 이후 한국전쟁, 휴전, 군사정권과 대통령직선제와 일본문화 개방까지 다양한 역사적 흐름을 잡았는데, 한국에서 만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것과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역시 <만화>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국내 문화산업을 보면 다소 취미생활을 위한 사회적 여건이 부족하다. 인간에게 취미생활을 부여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인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감수성이란 중요하다. 인간은 이성과 같이 감정을 가진 존재다. 즐거움과 슬픔은 인간이 평생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다. 감정을 느끼기에 사랑도 하고, 타인에 대해 공감도 한다. 공감이란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감성적 현대인이다. 어떻게 보면 자극적인 미디어에 의해 즉 이미지가 매개가 되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우리 현대인들의 감성은 자기 스스로의 감성이 아니라 주어진 감성에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만화>를 다 읽은 후에 한 번 표지를 살펴보았다. 앞 쪽에는 많은 만화들이 서로 편집되어 배치되어 있었고, 후면에는 오로지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만 존재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참 좋아했다. 기존 모더니즘적인 미적 가치에서 이 작품은 주인공의 모습을 크게 탈피했다. 멋있고 훌륭하고 강한 존재보단 오히려 나약하고 버림받고 심지어 인생의 큰 좌절을 한 자들이 모인 것이 외인구단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소외된 자였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은 포스트모던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치의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맛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의 만화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고정된 틀과 고정관념에 갇혀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움에 요동을 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비록 마지막에 까치와 엄지가 광인이 되었으나,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켜가면서 미친 듯이 웃으며 서로 포옹해주는 2사람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들은 분명 정상인이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나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다. 한국에서 바로 만화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공포를 가진 외인구단으로 보인다. 기존의 틀에 메이지 않고 계속 꾸준히 새롭게 등장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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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 - 조선 최고 어의가 된 마의
장웅진 지음 / 황금책방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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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까지 전쟁 수단에서 차량을 이용한 수송이나 이동수단이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제일 중요한 이동 및 수송수단은 말이었다. 물론 수송은 당나귀나 노새 그리고 소가 좋았으나 긴급을 요하는 수송에서는 말을 제외할 수 없는 것이다. 군에 있을 때 생각나던 부분이 있는데, 전쟁에서 화학전을 벌이는 이유는 바로 인마(人馬)를 살상(殺傷)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말의 기동력은 1차 세계대전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아직 장갑차들의 발전 수준이 미미했으며, 숲이나 산과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말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현대전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기계기술의 발달은 말이 전쟁터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20세기 초반까지는 분명히 전략수단으로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으며, 그것이 시간이 과거로 가면 갈수록 더 위력을 발휘했다. 말이 가진 기동력은 인간의 발과 비교할 수 없으며, 말의 발굽에 짓밟혀 죽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현대사회 이전의 전쟁에서 말은 곧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략적인 영역이었다. <마의 백광현>에서 백광현은 인간을 치료하는 의술이 아닌 말을 치료하는 의술을 배운다.

 

모든 생물에서 발생되나 특히 인간에게 곤란한 것이 종기라는 것이다. 상처가 나면 피부조직이 곪아 그것이 심한 통증과 함께 때로는 신체에 큰 부담을 주어 사망하게 이른다. 과거 조선의 왕을 보면 종기로 인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외에도 상처를 입은 후에 종기가 터져 죽었다는 사료도 존재한다. 전염병에 대한 대처방안이 약하던 시절에 잠깐 스친 상처도 죽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처는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게도 존재했다. 백광현을 따지고 보면 지금에 와서 수의사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수의사들을 보자면 집에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의사에 대해 매우 존경의 눈빛으로 볼 것이다. 사랑하는 강아지의 재롱을 볼 수 없다는 게 심리적으로 크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말을 치료하는 자에 대해 백정만큼 천하게 여겼다. 인간을 고치는 의원도 중인이나 하는 짓으로 봤으니 말을 고치는 일은 얼마나 소홀하게 여겼을까?

 

그런 마의를 선택한 백광현이 이제 말이 아닌 인간을 고친다? 그것은 상당한 방향을 일으킬 사건이었다. 말의 종기를 고치다 인간의 종기를 고쳐보다가 실수로 죽게 되자 그가 고된 일을 보면서 염라대왕이 의원들이 살려준 인간만큼은 아니나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 보였다. 시대적으로 임진왜란 지난 후에 한참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니 전국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민심은 흉흉하고 위정자들은 당파싸움에 하루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역시 예송논쟁, 효종이 죽은 후에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의 예법에 관한 논쟁으로 붕당정치의 피로서 서로 복수하는 정치싸움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전에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다투던 것도 있으나 남인과 서인의 당쟁은 수백년을 거쳐 내려오고, 정조의 죽음으로 서인의 승리하였으나,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덕분에 정치가들은 국정에 대한 심의나 판단보단 정치적 이익과 패권을 위한 당쟁에 참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런 점이 백광현은 인술로서 어의를 맡으려 하나, 그것을 시샘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의 어머니를 치료하는데, 모든 의원들이 자기에게 내려진 처벌이 무서워 몸을 사리고 있을 때, 궁중 마의인 백광현에게 종기치료를 잘 한다는 이유로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만약 실수로 대왕의 어마마마가 승하하면 그의 목이 다른 의원들의 목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토록 간사한 것일까? 대왕대비의 종기를 짜내고 무사히 치료하자 이번에는 다른 의원과 대신들이 모함한다.

 

대왕대비의 고통스런 치료과정을 보고 치료를 그만두란 어명을 거역하고 치료하자, 아무리 결과는 좋아도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권이 흔들리니 엄중의 처벌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분명히 치료의 완결은 백광현이나 임금의 은총은 이상하게 다른 자에게도 돌아갔다.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시샘의 눈빛이 도사린 것이다. 인간에게 정치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꼭 해야 할 의무와 도리를 지키기보단 자신의 이권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합심하는 당시 실료들을 보면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임금은 나라의 임금이 아니라 신하들 속의 임금이었다. 신하들의 눈빛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느 날 독살되거나 혹은 반정이 이루어진다. 인조반정에 광해군에게 명에 대한 충성에 반발한 그들이 이제는 청에 대한 충성에 의해 효종의 죽음과 소현세자의 죽음이 의문스럽다고 하니 그 얼마나 무서우랴? 백광현이 초로를 지나 이제 중늙은이가 될 때, 집에 귀가 중에 자객이 와서 자신들이 고용한 의원의 사주로 잔혹하게 살해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질투는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 자세를 망각한다.

 

백광현이란 인물은 그런 정치세계와 사회의 비극 속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백광현의 아버지 백의원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려도 정작 자기 마누라와 딸을 살리지 못한 채 도망치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마의 백광현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도 역시 무시하지 못하고, 그런 갈등과 관련하여 신분제의 한계성에 탄식한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압록강 근방에서 몇 년이나 있어야 했던 홍단이의 아들이나, 중인출신으로 손가락질을 받다가 임금의 어의가 되어 겨우 인정받지만 직급 역시 높지 않은 백광현에서 능력 있다고 다 되지 않은 사회란 정말이지 답답하기 짝이 없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고, 현실과 맞지 않은 법과 제도들은 여전히 구중궁궐 높은 분들의 뱃속은 불리되, 저잣거리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가 나오더라도 무서운 가렴주구 앞에서 무용지물이어라. 어느 아낙네가 3개 무덤 앞에서 우는데, 모두 호랑이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시아비, 지아비, 아들 그러나 정작 호랑이 없는 곳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관리들이란 점에서 왠지 모르게 다산 정약용이 늘 지적한 이야기가 다시 내 기억 속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남아메리카의 혁명가이던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자신의 사촌 형과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한다. 2사람은 본래 의과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남미의 현실을 보면서 사람을 고치는 의사보단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세상을 고치는 것에는 자신의 미약한 힘에서 아무 것도 될 수 없었고, 결국 총을 잡아야 했다. 백광현은 조선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환자를 고치는 것보단 그 고칠 수 있는 사람을 고쳐야 했다.

 

권력에 비틀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다시 권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조에서 마의 백광현이 보여주고자 하는 정치적 입장은 당파를 초월한 인간중심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인간중심적인 발언은 백광현이 대왕대비의 병을 낳게 하면서도 백광현 집에 물품들이 선물 온 것을 가지고 트집만 잡던 백관들의 한 소리가 생각난다. 비겁한 자들은 평소에 백성을 위한 게 아니라 꼭 시기적 상황에서 외치니 참 이런 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하며 차는 내 자신의 아쉬움만 더해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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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본 에반게리온 해독 - 한국 최초의 본격 애니메이션 해독서!
키타무라 마사히로 지음, 곽형준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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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번에 읽게 된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 그리고 꿈을 좇다>를 잡은 순간 어디서 낯익은 이름이 나왔다. 라이트노벨을 전문으로 번역하는 곽형준씨가 이 책의 번역을 맡은 것이다. 노블엔진이 영상노트와 같은 회사라는 점에서 곽형준씨가 이번에 번역한 에반게리온 해독에서 과연 나는 이 책이 제대로 해독했는가에서 점수를 그래 높게 주지 않고 싶다. 작가인 키타무라 마사히로의 프로필을 보니 그는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1990년대 일본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되자 거기에 빠진 인물이다. 같은 작품을 극장에 가서 몇 번이나 다시 보고 또 보고를 분명히 애니메이션을 비평하는 것을 취미로 둔 나로서는 존경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세에 대해선 존경을 보내도 그 접근에서는 상당한 오류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에 대한 정립이나 전개성은 매우 정확하고 치밀했다. 심지어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도 언급했다. 에바0호기에 나오코 박사가 들어갈 가능성에서 말이다. 그리고 상관도표로서 그린 인류보완계획 5가지 루트 역시 좋은 내용이었다. 전반적으로 스토리나 인물에 대한 형식적인 조건은 매우 좋아도 그 내부의 텍스트 해독은 점수로 따지면 10점 만점에 3점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방법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영상기호학에서 정신분석에 대한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영역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은 심층적인 영역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분석이 잘못된 것은 작가 본인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인간 내면의 심리로 통한 갈등과 문제를 다룬 점은 분명하나, 그 대상 접근 방법에서는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 괄호 안의 5가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입문에서 인간이 가진 2차 성징기 까지의 구도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요소로 되는 이유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인간의 죽음과 삶, 그리고 가족과 자아라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우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캐릭터들은 모두 14세로 생식기를 갖춘 사람들이다. 레이는 복제인간이라는 점과 생리를 하지 않음에 생식기를 가져도 생식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스카는 자신의 월경에서 자신이 어른으로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카지에 대하여 어른의 사랑을 요구한다.

 

이율배반적이고 질풍노도의 시기가 바로 14세다. 이전에 초등학교라는 어린 시절과 앞으로 고등학교와 사회진출이란 어른의 갈림길이다. 인간에게 다시 과거로 회귀가 불가능한 비가역적 존재에서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하고, 자신의 비가역적에 대한 회귀욕망으로 인간에겐 에로스 대신 타나토스라는 욕망이 깃든다. 따라서 작가는 바로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파일럿 선정에서 단순히 토우지를 언급한 건 큰 실수다. 그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이해하기 위해 신세기 에반게리온만 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내지 정치적 동물이다. 자신의 존재적 확인과 개성과 인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본연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교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무엇이 빠졌는가?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언급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지가 네르프에 와서 에바초호기를 타야하는 이유는 다른 인간에게 무리라고 했다. 에바초호기는 마치 신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 속에 신지의 어머니 이카리 유이의 몸과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에바초호기가 가장 불안정하면서 가장 강력한 이유는 에바초호기는 파일럿의 의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양수 속에 태아(아들)를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방어본능이다. 신의 절대적 영역보다 더 절대적인 영역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이다. 끊을 수 없는 천륜이기에 추후 내부전원이 모두 소모되어도 싱크로률이 400%가 되어 사도를 격퇴한다. 대신 신지는 어머니의 강한 모성에 엔트리 플러그에서 LCL과 동화되어 버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자에게 가장 큰 욕망인 비가역적 시간을 다시 가역적으로 돌리는 욕망을 신지는 에바초호기에서 이루게 되는 점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이카리 사령관은 평소 신지에 대해 냉대하거나 질투한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면 TVA와 극장판에서 나오지 않은 부분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카리 사령관이 신지에게 에바초호기를 타라고 할 때 신지의 멱살을 잡는 부분이다. 자기는 신지를 엄청나게 질투한다고 말이다. 신지가 에바초호기에 탑승이 가능한 이유는 본래 신지는 이카리 유이의 아들이다. 인간의 최초로 만나게 되는 인간은 어머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본래 같은 존재가 아니라 타인이었고, 어머니와 아들은 타인이 아닌 한 몸에서 분리된 존재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다.

 

단지 이 부분은 최근 발매된 만화책 12권에서 나온 내용으로 아직 작가가 이 부분을 읽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2007년 신극장판 서와 이후에 나온 파와 급에서 작가가 언급한 것은 모두 틀리게 된다. 지나친 개인적 경험에 의지한 추론은 뒤에 나올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대응이 불가하다. 가장 치명적인 영역은 바로 스기무라 토우지다. 엔트리 플러그에서 나온 그의 부상에서 코어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에서 신극장판 급의 예고에서 작가의 추론이 완전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급에서 토우지의 여동생이 등장하는데, 만약 그 여동생이 에바의 코어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면 급에 나오는 그녀는 레이처럼 복제인간인가? 그것은 전혀 아니다. 신극장판 파에서 에바3호기 탑승이 본래 TVA에서 토우지에서 아스카로 변경되었다. 만약 가족과의 인연이 없다면 싱크로를 발휘하지 못한 에바였다면 아스카가 에바3호기에 절대 탑승하지 못한다는 점과 본래 에바2호기가 아스카의 기체였는데도 파에서 마리가 탑승했다는 점이다.

 

특히 통상모드에서 마리는 아스카보다 더 뛰어난 전투를 보여준다. 에바에 숨은 모드인 비스트모드라는 것이다. 아스카가 계속 다룬 에바2호기에 아스카조차 모르고, 동경 네르프 요원도 모르던 것을 마리만이 실행했다. 거기서 작가의 오류는 이미 증명된 셈이다. 단지 나오코 박사의 0호기는 가능할지 모른다. 에바0호기가 테스트 중에 신지가 탑승하자 폭주를 일으킨다. 5화 역시 폭주를 일으키는 장면에서 에바0호기가 누구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카리 사령관에서 2번째는 레이를 노린다. 그러나 리츠코 박사는 정작 노리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혼자 이야기한다.

 

그것이 반증하는 것으로 신지가 에바0호기에 타자 아야나미 레이의 숨결을 느끼나, 계속 혼자 상상하다가 이것은 내가 아는 레이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에바0호기 심연에 위치한 것이고, 레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라 일그러진 얼굴이 나오면서 에바0호기의 침식을 파일럿을 위협한다. 극장판에서 보면 알겠으나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과 불륜관계를 저지른다. 그 이유는 어머니 나오코 박사가 이카리 사령관을 불륜대상을 삼은 모습을 보고, 자신이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주체자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과학자, 여자라는 3가지 나오코에서 여자를 택한 나오코, 여성에겐 최후의 보루는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여자였다.

 

단지 유이의 경우 그 남자가 남편에서 아들인 게 차이였다. 나오코는 본래 이카리 유이를 증오하고 질투했다. 이카리 사령관을 좋아했기에 유이 사망 후에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실험 당시 유이의 죽음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실험 중에도 신지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그런 나오코의 신체적 일부가 에바0호기에 이식이 가능하다. 네르프의 중추명령계통인 마기 원본과 동시에 사본들도 다른 네르프 기지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점이다. 그런데 왜 나오코는 에바0호기에서 폭주를 일으킨 것인가? 나오코는 유이의 복제인 레이에게 마녀라는 말을 듣고 1번째 레이를 교사시킨 후에 자살을 한다.

 

따라서 신지가 에바0호기에서 본 레이는 처음에 2번째였다가 1번째였기에 폭주한 것이다. 나오코가 에바0호기에서 자신이 저주하는 유이를 잊지 못하는 이카리 사령관과 그리고 유이의 복제인 레이를 무척이나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한 신지가 탔을 때 나오코는 자신의 남자를 가로챈 리츠코에 대한 분노가 살인 충동을 느낀 것이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영역이 아닌 무의식적 기질에서 발동한다. 리츠코의 대사에서 “남녀 관계는 로직이 아니다”라는 것이 나온다. 결국 이성이 아닌 자신 안의 무의식적 기질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작가의 실수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작품이 있다고 하나, 그 무의식에 대한 해석은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지나친 상징주의적인 추론 역시 문제였다. 레이가 처음 부상으로 한 쪽 눈에 붕대를 감았는데, end of eva에서도 붕대를 감은 것을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싶다.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에바2호기가 롱기누스 창에 머리를 맞고 한 쪽 눈을 다친다. 즉 이것은 공격에 의한 재발이지 상징적 요소로 결부하기엔 우연의 일치가 너무 지나친 점이다.

 

게다가 최초로 신지가 성적욕망을 품은 대상은 이성적으로 미사토다. 처음 에바초호기에 탑승할 때 그 안에 어머니가 있다는 생각도 못했고, 폭주로 인해 모든 기억이 없다. 단지 자신의 무사함을 확인한 에바초호기의 눈빛만이 인상적이다. 미사토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미사토가 신지의 얼굴을 가까이 다가갈 때 카메라 로우앵글에서 미사토의 큰 가슴과 신지의 부끄러운 표정을 대비시킨다. 신지가 미사토의 가슴을 보고 성적으로 호기심과 더불어 당황함을 보여준다.

 

다음은 레이인데, 레이의 나체를 6화에서 신지가 목격한다. 아스카는 신지의 방에 와서 옆에 눕거나 또는 미사토의 흉내 내기를 위해 신지와 키스하는 장면에서 신지의 무의식적 성적욕망은 미사토, 레이, 아스카로 연결된다. 문제는 신지는 레이가 유이의 복제이기에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 즉 윤리적 문제가 있기에 성적욕망을 품을 수 없었고, 미사토는 카지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성적욕망 대상이 될 수 없었다. end of eva에서 처음으로 자위하는 신지는 아스카의 가슴을 보고 나서이다.

 

자위행위에서 대상의 전이는 아스카로 결정된 것은 인간이 언어를 배우면서 사회적 관계로 통한 윤리의식의 획득이라 볼 수 있다. 책 전반적으로 보아도 프로이트, 융,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이 없었다. 지나친 경험적 추론이 이 도서의 큰 한계점이고, 다소 연역적 검토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다른 이론을 무시한 자신만의 이론을 내세워 독자적 해석은 좋은 시도라고 보이나 국내에서 발간된 각종 애니메이션 도서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하나의 학술적 개념으로 두고 연구한 도서를 읽으면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은 너무 미진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단지 이제 입문하거나 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너무 내용이 난해한 점을 고려한다면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서적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알기 위해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만 알면 안되는 것처럼 다른 관점과 분야로 통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인간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가고자 하는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이 작품 내 깊숙하게 깔려 있다. 단지 모두가 죽음에 대해 열망할 때 그곳에서 유이만이 에바로 인간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즉 이카리 유이는 모든 인류보완계획에서 주체가 되는 초호기 속의 생명의 환원과 동시에 새롭게 삶을 부여하게 하는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이중적 존재다. end of eva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에게 습격당하기 전에 제레의 위원들에게 “사람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한 에바 시리즈입니다.”이라고 한다. 결국 제레처럼 신이란 형이상학적 존재로 인간이란 존재를 소멸하기 보다는 인간이 에바로 통해 새롭게 인류를 건설하자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이카리 유이가 에바초호기에서 몸과 마음이 살아있는 이유다.

 

또한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사람은 생존해 가려고 하는 것에 그 존재의 의의가 있다.”라는 발언에서 제레와 네르프 사령관과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후유츠키는 12화에서 남극에 가면서 원죄가 물들지 않은 정화된 곳보단 죄로 더러워져도 살아있는 세계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나온 내용 중에서 추후 폴란드 왕이 된 로렌공작이 의회에서 발언했던 연설 중에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와 일치한다.

 

인간에게 정화된 깨끗한 이상보다는 차라리 감정들이 오고가는 자유의 세계가 좋다는 뜻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에서 루소가 부여한 일반의지란 개인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포스트 모던한 시대의 인터넷으로 통해 충분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죽음은 아무 것도 낳지 않습니다.”에서 인간의 원죄가 없는 곳은 생명도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곳은 매우 치열한 곳이기에 사람들은 서로 간에 대해 마음의 상처를 주고 받는다. AT-field 절대불가침의 영역이 생기는 점 역시 인간이 가진 고유의 특성이 있기에 그렇다. 그것이 서로 간의 죄가 되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것조차 없는 완전무결한 세상에 이미 생명은 존재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더 이상 답을 주지 않는다. 싸움이든 사랑이든 행위주체자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죽음에서 아무 것도 낳지 않는다는 이카리 사령관의 말대로 말이다. 가장 잘 알면서 신지에게 대하는 차가움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은 이카리 사령관의 행동에 분명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숨어 있다. 어차피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인간의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을 표출한다. 인간이 가진 추악함과 다정함까지 신화적으로 나온다. 작가의 가장 큰 실수는 인류가 멈추지 않은 한 영원히 신화는 살아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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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kllee2 2013-01-1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글쓴이분의 글쓴 의도가 먼지 도무지 짐작이 안갑니다. 왠지 혼자서 횡설수설 하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 쓸데없이 애니라는것에 지식을 요구해 자신의 뜻에 맞게 만들어버리고 만드는, 그런 우물효과 비슷한 방식으로 에반게리온을 해석하시고 글을 쓰신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1-16 12:31   좋아요 0 | URL
넵 그렇죠. 영상서사를 텍스트로 해석하는 기호학적인 측면이 전혀 없어서 보면서 짜증이 밀려오더군요.
 
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하는 것은 기술(記述)이 아니라 매핑(mapping)이다. 이번에 읽어 본 진중권 교수의 <생각의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어제 책을 한참동안 읽으면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국제적 형상과 더불어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것을 매체할 수 있는 미디어 그리고 소통, 이 모든 것은 시시가각으로 변하고 있다. 진중권 교수의 에세이는 그런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딱히 이게 정답이다 내지 오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이 현재 이렇게 되었는데, 왜 그런 것일까? 라는 의문과 동시에 근본적 원인을 고찰한다. 다소 문학적인 서술보단 간단한 에세이로서 맺은 이 도서는 철학적 사유를 깊숙하게 들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으로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노려한다. 만약 사회적 문제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 때 철학이란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 접근하기 불가하다면 철학이 무슨 의미로서 작용하는가?

 

물론 심각한 것을 다루기에 가끔 어려운 내용과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지사한 일이다. 사람이란 정말이지 너무 간단한 존재이면서도 너무 난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눈은 너무 가까이 가서 볼 수도 멀리서 볼 수만은 없다. 외과의사가 환자의 몸에 박힌 유리파편을 꺼내려 하는데, 너무 멀리 있으면 그 위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고, 너무 가까이 들이대면 보이는 것은 유리파편이지 환자의 몸이 아니다.

 

환자의 몸에 있는 유리파편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선을 두어야 한다. 만약 관찰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치료에서 너무 멀리 있다면 환부를 정확하게 메스를 댈 수 없을 것이고, 너무 앞에 있으면 메스를 가까이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메스가 환부에 닿기 전에 의사의 얼굴에 메스가 영광의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기술(記述)이란 것은 글로서 나타내는 문자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문자문화에 의거하여 살아갈 수 없다.

 

이른바 영상문화가 대두된 이미지의 세계가 출현했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신문이나 책에 의거하여 전달되기 보다는 오히려 TV나 컴퓨터로서 전달된다. 특히 내 손안의 정보매체인 스마트폰의 기술혁명은 우리에게 그 이전에 분리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화를 고정적인 주체에서 활동적인 주체로 변모했다. 진중권 교수가 언급한 영도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러하다.

 

이때까지 정해진 매체나 정보에 의존할 수 없던 대중이 이제는 대중들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여 공유하고 퍼뜨린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주주의란 바로 소통을 향한 움직임이나 문제는 그 방향이 너무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유용하게 먹힌다는 것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안티 파시즘에 대한 테제에서 결국 안티 파시즘마저 강력한 파시즘으로 전도된다. 프랑스혁명에서 루이왕족을 단두대에 보내는 것과 각종 반란과 내란을 해결한 당통이 왜 자기 발 스스로 단두대에서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생각의 지도>에서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진 인물 이름이 나온다. 레온 트로츠키, 대표적인 레닌을 이은 러시아 혁명가로서 191710월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자다. 물론 추후에 관료주의적인 일국사회주의국가를 말한 스탈린에 의해 추방되고 암살되던 자가 초반에는 좌파혁명가에서 막상 정책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오는 우파적인 활동도 한다. 결국 지나친 극단은 해결하지 못함은 반증한다. <생각의 지도>에서 이런 현상과 오늘날의 매체와 대중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에 살아가는 대중들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어지게 된 의지로 살아간다. 왜일까? 다소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사는 나로서도 극단적 상황은 싫어한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중시해도 그것이 여론몰이와 더불어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 대해 판단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지, 그 판단의 주체성을 컴퓨터 키보드의 Ctrl C + V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미 예전에도 진중권 교수도 지적한 조심해야할 신문사가 이미 모든 국민들의 눈을 자극하는 시점에서 괴벨스의 환상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신화처럼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색깔론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다. 진중권 교수는 1989년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이 유럽에 미친 영향까지 직접 본 사람이다. 답답하게 30일 휴가를 보내는 구공산권 노동자보다 오히려 좋은 차를 끌고 40일 동안 여행하는 서유럽 노동자에서 누가 행복해 보이는가?

 

물론 유럽의 경우 식민지라는 착취경제로 통해 이득을 봤기에 그것이 가능한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착취할 나라도 없으며, 평생 중국에게 착취당하다가 말년에 일본에 착취하다 이제는 자국민을 착취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에 대한 착취 즉 노동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쿠데타이든 어느 곳에서는 석탄과 석유가 나와야 했고, 빵과 포도주가 나와야 했다. 노동으로 이루어진 곳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현재 모습이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망가한 것은 인간이 자연만을 파괴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까지 파괴하고 착취한 점이다.

 

그러다보니 인간 내면에 쌓인 폭력적 기질은 당연히 성냥갑 옆의 다이너마이트처럼 위태롭다. 인간의 아이러니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지식인들의 역할에서 대중들은 지식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삼는다. 가령 가장 잘못된 정보가 과학과 공학을 배운 입장에서 여름철 녹조현상이 기온이 높아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대중들의 지식이다. 하지만 전공분야로 들어가면 수온보다는 하천에 유입된 영양염류인 질소와 인이 문제다.

 

만약 수온이 계속 높은 곳의 하천과 호수는 모두 녹조현상으로 인간이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야 한다. 녹조의 성상은 질소, , 탄소. 산소, 수소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복합체다. 유기물에서 수온의 역할은 반응을 빨리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질역할을 한다. 구체적이거나 혹은 논리적인 사고와 좀 더 광범위한 시선을 가진 지식인이 대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은 좋으나 대중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 현대이다.

 

정보의 과잉에서 타격인가? 인간이 가진 지식과 판단력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한다. 그런 것은 정치사회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 하리라는 사실을 책 본문에 나온다. “지금 군중이 지식인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차가운 관찰자의 측면이다. 자신을 이미 계몽된 존재로 여기는 군중은 공공연히 지식들의 그런 정서가 재수 없다.’고 말한다. 이 현상은 나에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을 던진다. ‘만보객이라는 지식인상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고 지적 기회주의자가 되어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과 완벽히 한 몸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만보객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인의 이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참고로 당통을 단두대에 보낸 인물은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로베스피에르라는 법학자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고 혁명을 외친 그가 당통을 죽였을 때 가장 루소가 가르친 교훈을 배반했고, 결국 그도 혁명의 배반인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 아래 사라졌다. 문제는 그가 사라지기 전의 대중의 모습이다.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의 분위기는 군중들의 심리로 공격성이 엄청난 점이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빵과 포도주이겠으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시작보다는 단두대에 목을 죽음과 키스하게 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거기에 몰리게 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빵인가?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정의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n개의 정체성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고 내 스스로가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 문구가 있다.

 

당신은 국가주의자인가? 민족주의자인가>? 페미니스트인가? 주체사상가인가? 신자유주의인가? 민주주의자인가? 사람에게 색깔을 입히고 딱지를 붙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빨간색이건 무지개빛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이 뱉은 말과 벌인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패거리라는 장벽 뒤에 숨는 비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문구다. 뒤에 숨어 치사하게 패거리를 이용하여 정의의 편인 듯 보이려는 속물적 근성은 그 누구라도 피해가기 어려운 치명적 매력이다. 사유와 사고는 유동적이야 하는가? <생각의 지도>는 바로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만큼 기본적인 부분을 망각하면 안되는 점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한 개인이 조선총독부의 관리에서 해방 후의 미군정에서 전쟁에서는 북한군에서 전쟁 후에는 한국 정부에서 일한 사람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 없는 노예로 계속 살아가는 인간들의 한계성인가?

 

여전히 주인 없는 노예들에게 자신의 이성과 감정보다는 위의 패거리 장벽 뒤에 숨기가 가장 편하다. <생각의 지도>mapping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가 어려울망정 자신이 살아가려고 하는 최소한의 일생생활의 변화 정도는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의 보면 그는 진보적인 인물임에도 양쪽 라인에서 많은 공격을 받는다. 자기 스스로를 진보라고 외치는 자들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유물론과 관념론을 계속 대립하여 충동한다면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

 

최근에 진중권 교수의 사상적 배경이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쪽에 간다는 주변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정의론>,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읽어보면서 롤즈의 철학은 극단적 영역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러 가지 공유하고 인정하는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다.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에 가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퍼부어도 이성의 성인이라고 불린 밀은 마르크스에 대해 그런 발언에 대한 보복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했다. 자유주의자이면서 공리주의자고 경제학자이면서도 윤리학자 그리고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밀에서 보면 패거리처럼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패거리들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점이다.

 

생각의 자유로운 mapping이 가능하려면 어디에 갇혀있기만 해서는 안 되나 솔직히 말해 인간의 정체성에서 개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icon이 필요한 것은 필수불가결적인 요구사항이다. 추후 이것과 연계하여 icon을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거기에 머물 수만도 없다. 결론은 스스로 mapping을 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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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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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중세에 대한 유럽이란 좋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는다. 중세에 대하여 유럽이란 세계는 마치 암흑기가 도래하는 시기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경우는 전투적 메시아주의라는 극단적인 행동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스콜라 철학 이후 기독교가 신플라톤주의적인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지배관념이 도래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 대한 관념은 현실적 영역을 초월하여 정치와 사회, 문화까지 섭렵했다. 십자군 전쟁은 바로 기독교문화의 유럽에서 보인 거대한 지배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신의 성지를 찾기 위해 이교도를 섬멸하고 예루살렘을 탈취한다는 명목은 분명히 자신들의 가치 안에서 성스럽고 위대한 업적이나, 평화를 찾는 것이 곧 침략과 전쟁이란 점에서 모순이 성립된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의 적을 사랑하는 것인데, 너의 적은 모조리 죽여라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물론 서로 간의 신념이 존재하기에 전쟁은 그 만큼 치열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런 무서운 형태로 돌출이 되어도 나름 이 시기에도 인간들이 살아가는 맛이 있었다.

 

지금의 인간들처럼 개인의 이익과 탐욕을 중시하기보다는 개인의 명예와 긍지를 중시했다. 귀족정신이란 높은 자리에 있는 자로 하여금 더욱 더 금욕과 신앙심을 높이게 했으며, 그것으로 통한 당시 백성들에게 보인 행동들은 하나의 의식이고 관례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온 인간이기에 죽어서도 통곡의 밤을 이루는 도심에서 이들에게도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삶의 의미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강요하지 않을 상황이, 그 시대에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당시의 인간들은 너무 상상력이 뛰어난 것일까? 감정의 열정이 살아있는 것일까? 중세에서 이성과 신앙을 중시한 만큼 그들의 열정은 묘한 뉘앙스로 풀어간다. 기독교 문화에서 어느 상징적인 현상이나 대상을 다른 존재와 겹쳐 보는 상징주의 삶은 매우 독특했다. 가령 어느 성인들이나 특별한 사건을 소재로 인원을 맞추는 것이다. 순결의 백합과 더불어 종교적 관념을 위한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리사는 빵과 포도주였다.

 

예수님의 성체의식에서 빵은 예수님의 몸이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라 생각해보면 빵은 분명 인간이 섭취해야할 칼로리를 지닌 탄수화물 덩어리다. 그리고 포도주는 인간의 기분을 좋게 하면서도 의식적인 행사를 가지는 도구다. 그리스 시대에 디오니소스라는 포도주의 신에서 서양인들에게 포도주란 신성한 도구일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문화와 그리스사상은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사상적 전개를 맞았으니 말이다.

 

이성적 스콜라철학이 인간에게 다른 형태의 연애를 제공한 점 역시 특이하다. 민네라는 궁정 안의 연애역사들은 남편이 있는 귀족부인에게 사랑을 구원하는 것이 참 특이하다. 남편이 있는데도, 어떤 남자가 찾아가면 그 집의 남편은 다른 여자가 있는 집으로 가야 하는 점에서 성적으로 문란한 것인지? 아니면 그 문란함을 극복할 정도로 이성적이었는가? 라는 점이다.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에서 서구의 역사는 남성이 정치와 사회 통제권을 가지고 있어도 나름 귀족부인들은 남성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체스라는 게임이 도입된 유럽사회에서 킹과 퀸, 나이트, 비숍, 록, 폰 이 있지만, 가장 강력한 말은 퀸이었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서 퀸이 가장 강력한 점은 왕은 남자라고 해도 밑에 있는 남자들은 여왕보다 낮다는 점이다. 나이트처럼 빠르고 강력한 기사들은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목숨 거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점에서 오히려 이때의 여성들의 대우가 좋았다는 점이 놀랬다. 어떤 신사적인 귀족은 지나가는 여성에 대해 모두 경의가 담긴 인사를 보낸다. 우연히 한 젊은 여성에게 경의를 담은 인사를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창부였다고 한다.

 

주변에 모두 창부에게 그런 경의를 보여 주냐는 말에, 그 귀족기사는 “난, 정숙한 여자 한 명에게 실수로 인사를 빠트리기보다는 열 명의 창부에게 인사를 하는 쪽을 택하겠네.”라고 했다. 왠지 모르게 게오르크 뷔히너의 작품 <당통의 죽음>이 조금 생각난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한창 피를 뿌릴 때 여기에 환멸감을 느낀 당통이 창부와 같이 뒹굴어대는 행동을 한다. 창부 역시 당시 착취 대상이나 한편으로 모멸의 대상이다.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 박애 정신을 주창한 당통이 창부와 노는 점과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눈 밖에 난 이유로 단두대 아래 목이 잘린다.

 

그러나 결국 그 창부는 프랑스혁명 전후 상황이 바뀌어도 달라진 게 없다. 가난이란 죄는 계속 억누르고 배고픈 배는 해결할 수 없다. 최근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의 여자주인공 역할 역시 그란 것처럼 나온다. 이때나 저때 모두 현실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모두 보지 않고, 엉뚱한 부분으로 해결하는 점은 여전한 건 분명하다. 성적인 담론이 나온 김에 신플라톤주의의 엉뚱함이 나온다.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에서 여자들에 대한 더러움을 말한 것이 나오는데, 이 책에도 소개된 점이 특이했다.

 

“사람은 가장 더러운 정액으로 만들어지고, 육신의 떨림으로 임신되고, 월경의 피로 자란다. 그리하여 그 열매는 아주 혐오스럽고 불순하여 자라지 않을 것이고 식물은 그것과 맞닿으면 시들어 버릴 것이다. (중략) 만약 개가 그 열매(인간)를 먹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인간에게 육체적 가치를 아예 무시한 사고방식이 보인다.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인 libido와 그것을 승화한 생명이 담긴 eros의 가치가 한 순간에 무너진다. 인간이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 것처럼 성악설적인 요소가 강한 사회적 관념으로 인간은 모두 죄를 지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정치적 문화적으로 기독교가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으로 헤게모니로 작용했기에 유럽 당시의 예술은 즐기기 위한 예술보단 하나의 상징을 나타내는 예술이 많았다.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예술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다. 가령 회화에서는 성모마리아와 예수님, 그리고 성인들의 위대한 모습과 업적을 그림을 그렸고, 의식행사에는 의상과 소품 자체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인다.

 

만약 진실한 정치가라면 허례허식부터 줄이는 것부터 중요한 것 같다. 덕분에 세금을 계속 거두어야 했고, 그만큼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부담은 과중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위대한 유물은 지금에서 보면 위대한 유산이나 당시로는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증오의 대상이다. 증오의 대상이 감탄과 성스러운 대상이 전화되는 구조에서 어리석게도 현대인들은 그것이 있다고 하여 자신들의 세계에 그러지 않을 것이란 망각을 꿈꾼다.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이나 모든 세상의 물질적 제도적 현상화에선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고, 거기에 따른 비용과 희생이 들어가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가령 사진예술에서 네이팜탄 소녀는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높은 예술적 가치를 담았으나, 그 안에는 잔인한 전쟁을 담고 있었고,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프랑크 독재정부의 민간인 무차별 살해라는 분노가 숨어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미술관에 유명작가의 작품, 특히 피카소와 같은 초현실주의자 작품을 보러 가는 사람들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기 위해서인지 그림에 걸린 벽을 보기 위해서인지 명확한 판단이 보이지 않는다.

 

예술이란 인간의 사유와 관념을 담아 넣을 수 있다. 특히 예술이 예술로서 미학적 즐거움을 누리기보단 단지 그 미학적 가치만 부여함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도덕을 반영하는 셈이다. 도덕에 대해 나는 그 시대적 흐름이고, 그 흐름은 권력자가 가진 헤게모니의 반영이다. 물론 민중문화와 counter culture라는 형태도 존재하나, 그런 것을 용납하기 어려운 시기고, 그런 사고를 하기엔 깊숙하게 뿌리내린 지나친 예절과 기독교문화는 다른 문화의 창출이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경건함과 신성함이 주류를 이루기에 아직도 우리는 유명한 유럽 교회와 성당에서 위대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보면 아름다운 예술이나 그 시대에는 하나의 종교적 의식이니 보는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지금은 예술의 흔적이 되어버린 유산과 기록에서 당대는 삶을 살아가는 치열한 한 요소이기에 르네상스 이전의 시대의 삶이란 이중적인 나사가 계속 돌고 도는 형태였다. 물론 이성을 중시한 르네상스 역시 이성만이 아닌 광기의 이성화가 된 마녀사냥에 피를 뿌렸으나, 지금도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정보를 지배하기보단 거기에 지배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면 저 시대가 더 엉뚱한 시기인지 아니면 지금이 더 엉뚱한 시기인지는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명예와 약속을 중요하게 여긴 그 시대에는 차라리 지금의 인간적 관계보다 더 의리와 신의가 있었다. 신용이 자본이라던 현대사회가 오히려 사람을 믿을 수 없기에 오히려 저 시대의 엉뚱한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그 엉뚱한 명예와 긍지 때문에 전쟁에서 죽고 패하는 결과에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도 않고 할 수 없다는 어느 분의 말씀대로 낭만적인 삶은 관조하는 것이 아름답지 함부로 실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미가 떨어지는 현대사회의 권태로움 속에 폭발하는 인간의 열정은 조금 배울 부분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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