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빛깔있는책들- 역사 275
한창완.박석환.전현지 지음 / 대원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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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님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 강연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강신준 교수님은 노동과 관련하여 놀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놀이를 하는 것이고, 그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바로 노동을 줄이고 개인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서평하려고 하는 <만화>에서 나오는 인류의 예술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고대 인류문명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채취와 사냥을 하던 수렵문화였다. 당연히 동물에 대한 사냥과 식물과 열매를 가지고 오면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한다.

 

인간과 동물이 가장 대비되는 점으로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놀이라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주술, 의식, 행사, 각종 절차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문화적인 요소와 분리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매일 일만 하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누적된다면 자극적인 술과 담배, 혹은 성적 쾌락을 원할 것이다. 인간이 단순한 삶을 누리게 되면 일반적인 동물과 같은 말초적 신경을 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면 말초적 자극이 아닌 다른 것도 찾게 되고, 이른바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혹은 취향을 가진다. 인간이 취미를 없다는 것은 곧 삶에서 특별한 재미를 찾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고대 인류가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벽화에 그림을 새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력과 동시에 자신들의 기록을 보여준다. 동물사냥이나 혹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곧 그것이 여가생활이고, 또한 그것이 예술로서 현대사회에서 큰 가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만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아는 만화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여가와 인간의 상상력은 눈앞의 이미지로 나타내는 하나의 미학적 가치로 보는 것이 옳다. 유럽사회에서는 이미 만화라는 것은 예술로서 인정을 받는데, 실사카메라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을 표현주의로 충분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화는 글과 그림이란 텍스트가 동시에 들어가기에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영상문화의 급진적 발달에서 문자문화는 최후의 보루가 만화라는 말도 있다.

 

만화에 담겨진 말풍선에서 글자가 들어가고, 이미지는 상황적 묘사를 하여 정보 전달력이 매우 탁월하다. 영상과 음성이 동시에 들어간 멀티미디어는 수용자로 하여금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나 비판적 사고를 멈추게 하는 한계성을 지닌다. 또한 멀티미디어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재생하기에 자기가 다시 그 자리로 되돌리는 것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된다. 대신 만화는 종이책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동시에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여 비교할 수 있다. 만화의 정보전달력은 이미 충분하다. 어린아이 교육학술지나 혹은 과학도서에서 그림첨부에서 만화의 상상력과 전달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 <만화>라는 것을 인류의 역사와 그리고 인류 속에 한국인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었나? 사실 이 책을 고르면서 우연히 블로그 이웃 분이신 박석환 선생님의 도서란 것을 알고 흥미를 가졌으나, 더 흥미를 가지게 된 원인은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계신 한창완 교수님이 같이 공저했기 때문이다.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에서 책 내용이 너무 어렵고 이론적인 영역이 너무 많았다. 일반적으로 대중들과는 전혀 소통을 나눌 수 있는 도서도 아니고, 만화애니메이션 전공자(본인은 환경공학 전공자)라도 봐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았다.

 

신문방송학 거기서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소를 반영하여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기에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알아보는 것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분석하는 하나의 텍스트이론도서로 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이외에 프랑크푸르트학파 문화연구 등의 내용들까지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도서가 아니었다.

 

덕분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 하는 취미생활을 가진 입장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만화애니메이션 기호학을 알기 위해서는 어차피 위 도서는 한 번은 지나가야할 도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서에서는 글자 위주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든 반면 이번의 <만화>에서 삽화나 이미지의 배치가 적절하게 들어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전달력을 준 것이 좋았다. 한창완 교수님 혼자가 아니라 박석환 선생님과 전현지 선생님의 공저라는 점에서 다양한 관점이 책 속에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책에서 고대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회의 유럽에서 그림과 조선은 중후기 그림이 나온다. 그림의 중요성은 당시 일반 사람들은 글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되, 글을 적을 수 없어서 지식 전달력의 한계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으로 통해 정보전달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판화나 색채로 통해 대중과의 소통과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 대신 글자의 등장은 슬로건이나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나 혹은 한국 시조를 그림에 집어넣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취미생활 내지 정신수양으로 즐겼던 방법이다. 그래도 여전히 종이라는 것은 대중에게 낯선 존재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한 것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고 볼 수 있다. <만화>에서 이도영 선생님에 대한 업적을 무척 대단히 여기는데, 그것은 시사만화 내지 항일문학에 근거가 되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은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신적 방법도 있다. 지금 지배당하는 이데올로기의 부당함을 감추기 위한 정신교육은 우리 민족혼을 잃게 하려고 했다. 이에 저항하는 방법은 대중들을 계몽하는 방법이나 문맹인이 많은 점과 어려운 한자로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점이 큰 난관이었다.

 

그래서 만화라는 매체는 대중들에게 어렵지 않게 재미를 주면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예전에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발간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대표적인 한국 문학평론가이신 김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다.” 그것은 만화가 우리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매체가 아니라 스스로 진화하여 나오고 즐기는 문화라는 점이다. 최근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만화작가들이 전문적인 만화가보다 웹툰으로 통한 아마추어 작가들이 시시각각 나오고 있다. 특히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과 같은 작품은 매우 성공한 점과 웹툰이란 하나의 매체를 만화책으로 발간하거나 영화, 연극으로 재편성하기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26년>의 흥행은 웹툰을 통한 스토리텔링의 개발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외에 많은 웹툰 작가들이 등단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독특한 아이디와 소재라고 볼 수 있다. 만화라는 표현주의적 매체를 더욱 상상력을 집어넣음으로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만화문화가 이렇게 잘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문사 폐간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처음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등과 같이 독립운동가에 의해 만들어지다 추후 친일파가 신문사를 운영함에 따라 퇴색된 것이 아쉽다.

 

<만화>라는 도서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본천황 생일에 도가 지나친 찬양과 태평양전쟁 참전을 조선인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배제된 점에서 민족지라는 설정을 다소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을 이해했는지 군사정권 때 만화가 탄압의 대상인 점과 그것으로 만화문화가 위축된 것 역시 다루었다. 예전에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콘텐츠학과의 박인하 교수님과 김낙호 선생님의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에서 해방 이후 한국전쟁, 휴전, 군사정권과 대통령직선제와 일본문화 개방까지 다양한 역사적 흐름을 잡았는데, 한국에서 만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것과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역시 <만화>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국내 문화산업을 보면 다소 취미생활을 위한 사회적 여건이 부족하다. 인간에게 취미생활을 부여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인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감수성이란 중요하다. 인간은 이성과 같이 감정을 가진 존재다. 즐거움과 슬픔은 인간이 평생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다. 감정을 느끼기에 사랑도 하고, 타인에 대해 공감도 한다. 공감이란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감성적 현대인이다. 어떻게 보면 자극적인 미디어에 의해 즉 이미지가 매개가 되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우리 현대인들의 감성은 자기 스스로의 감성이 아니라 주어진 감성에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만화>를 다 읽은 후에 한 번 표지를 살펴보았다. 앞 쪽에는 많은 만화들이 서로 편집되어 배치되어 있었고, 후면에는 오로지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만 존재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참 좋아했다. 기존 모더니즘적인 미적 가치에서 이 작품은 주인공의 모습을 크게 탈피했다. 멋있고 훌륭하고 강한 존재보단 오히려 나약하고 버림받고 심지어 인생의 큰 좌절을 한 자들이 모인 것이 외인구단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소외된 자였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은 포스트모던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치의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맛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의 만화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고정된 틀과 고정관념에 갇혀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움에 요동을 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비록 마지막에 까치와 엄지가 광인이 되었으나,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켜가면서 미친 듯이 웃으며 서로 포옹해주는 2사람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들은 분명 정상인이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나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다. 한국에서 바로 만화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공포를 가진 외인구단으로 보인다. 기존의 틀에 메이지 않고 계속 꾸준히 새롭게 등장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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