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하는 것은 기술(記述)이 아니라 매핑(mapping)이다. 이번에 읽어 본 진중권 교수의 <생각의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어제 책을 한참동안 읽으면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국제적 형상과 더불어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것을 매체할 수 있는 미디어 그리고 소통, 이 모든 것은 시시가각으로 변하고 있다. 진중권 교수의 에세이는 그런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딱히 이게 정답이다 내지 오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이 현재 이렇게 되었는데, 왜 그런 것일까? 라는 의문과 동시에 근본적 원인을 고찰한다. 다소 문학적인 서술보단 간단한 에세이로서 맺은 이 도서는 철학적 사유를 깊숙하게 들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으로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노려한다. 만약 사회적 문제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 때 철학이란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 접근하기 불가하다면 철학이 무슨 의미로서 작용하는가?

 

물론 심각한 것을 다루기에 가끔 어려운 내용과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지사한 일이다. 사람이란 정말이지 너무 간단한 존재이면서도 너무 난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눈은 너무 가까이 가서 볼 수도 멀리서 볼 수만은 없다. 외과의사가 환자의 몸에 박힌 유리파편을 꺼내려 하는데, 너무 멀리 있으면 그 위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고, 너무 가까이 들이대면 보이는 것은 유리파편이지 환자의 몸이 아니다.

 

환자의 몸에 있는 유리파편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선을 두어야 한다. 만약 관찰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치료에서 너무 멀리 있다면 환부를 정확하게 메스를 댈 수 없을 것이고, 너무 앞에 있으면 메스를 가까이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메스가 환부에 닿기 전에 의사의 얼굴에 메스가 영광의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기술(記述)이란 것은 글로서 나타내는 문자문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문자문화에 의거하여 살아갈 수 없다.

 

이른바 영상문화가 대두된 이미지의 세계가 출현했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신문이나 책에 의거하여 전달되기 보다는 오히려 TV나 컴퓨터로서 전달된다. 특히 내 손안의 정보매체인 스마트폰의 기술혁명은 우리에게 그 이전에 분리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화를 고정적인 주체에서 활동적인 주체로 변모했다. 진중권 교수가 언급한 영도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러하다.

 

이때까지 정해진 매체나 정보에 의존할 수 없던 대중이 이제는 대중들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여 공유하고 퍼뜨린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주주의란 바로 소통을 향한 움직임이나 문제는 그 방향이 너무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유용하게 먹힌다는 것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안티 파시즘에 대한 테제에서 결국 안티 파시즘마저 강력한 파시즘으로 전도된다. 프랑스혁명에서 루이왕족을 단두대에 보내는 것과 각종 반란과 내란을 해결한 당통이 왜 자기 발 스스로 단두대에서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생각의 지도>에서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진 인물 이름이 나온다. 레온 트로츠키, 대표적인 레닌을 이은 러시아 혁명가로서 191710월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자다. 물론 추후에 관료주의적인 일국사회주의국가를 말한 스탈린에 의해 추방되고 암살되던 자가 초반에는 좌파혁명가에서 막상 정책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오는 우파적인 활동도 한다. 결국 지나친 극단은 해결하지 못함은 반증한다. <생각의 지도>에서 이런 현상과 오늘날의 매체와 대중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에 살아가는 대중들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어지게 된 의지로 살아간다. 왜일까? 다소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사는 나로서도 극단적 상황은 싫어한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중시해도 그것이 여론몰이와 더불어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 대해 판단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지, 그 판단의 주체성을 컴퓨터 키보드의 Ctrl C + V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미 예전에도 진중권 교수도 지적한 조심해야할 신문사가 이미 모든 국민들의 눈을 자극하는 시점에서 괴벨스의 환상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신화처럼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색깔론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다. 진중권 교수는 1989년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이 유럽에 미친 영향까지 직접 본 사람이다. 답답하게 30일 휴가를 보내는 구공산권 노동자보다 오히려 좋은 차를 끌고 40일 동안 여행하는 서유럽 노동자에서 누가 행복해 보이는가?

 

물론 유럽의 경우 식민지라는 착취경제로 통해 이득을 봤기에 그것이 가능한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착취할 나라도 없으며, 평생 중국에게 착취당하다가 말년에 일본에 착취하다 이제는 자국민을 착취한다. 인간의 문명은 자연에 대한 착취 즉 노동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쿠데타이든 어느 곳에서는 석탄과 석유가 나와야 했고, 빵과 포도주가 나와야 했다. 노동으로 이루어진 곳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현재 모습이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망가한 것은 인간이 자연만을 파괴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까지 파괴하고 착취한 점이다.

 

그러다보니 인간 내면에 쌓인 폭력적 기질은 당연히 성냥갑 옆의 다이너마이트처럼 위태롭다. 인간의 아이러니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지식인들의 역할에서 대중들은 지식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삼는다. 가령 가장 잘못된 정보가 과학과 공학을 배운 입장에서 여름철 녹조현상이 기온이 높아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대중들의 지식이다. 하지만 전공분야로 들어가면 수온보다는 하천에 유입된 영양염류인 질소와 인이 문제다.

 

만약 수온이 계속 높은 곳의 하천과 호수는 모두 녹조현상으로 인간이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야 한다. 녹조의 성상은 질소, , 탄소. 산소, 수소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복합체다. 유기물에서 수온의 역할은 반응을 빨리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질역할을 한다. 구체적이거나 혹은 논리적인 사고와 좀 더 광범위한 시선을 가진 지식인이 대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은 좋으나 대중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 현대이다.

 

정보의 과잉에서 타격인가? 인간이 가진 지식과 판단력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한다. 그런 것은 정치사회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 하리라는 사실을 책 본문에 나온다. “지금 군중이 지식인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차가운 관찰자의 측면이다. 자신을 이미 계몽된 존재로 여기는 군중은 공공연히 지식들의 그런 정서가 재수 없다.’고 말한다. 이 현상은 나에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을 던진다. ‘만보객이라는 지식인상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고 지적 기회주의자가 되어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과 완벽히 한 몸이 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만보객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인의 이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참고로 당통을 단두대에 보낸 인물은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로베스피에르라는 법학자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고 혁명을 외친 그가 당통을 죽였을 때 가장 루소가 가르친 교훈을 배반했고, 결국 그도 혁명의 배반인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단두대 아래 사라졌다. 문제는 그가 사라지기 전의 대중의 모습이다.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의 분위기는 군중들의 심리로 공격성이 엄청난 점이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빵과 포도주이겠으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시작보다는 단두대에 목을 죽음과 키스하게 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거기에 몰리게 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빵인가?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정의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n개의 정체성에 내가 가장 마음에 들고 내 스스로가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 문구가 있다.

 

당신은 국가주의자인가? 민족주의자인가>? 페미니스트인가? 주체사상가인가? 신자유주의인가? 민주주의자인가? 사람에게 색깔을 입히고 딱지를 붙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빨간색이건 무지개빛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이 뱉은 말과 벌인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패거리라는 장벽 뒤에 숨는 비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문구다. 뒤에 숨어 치사하게 패거리를 이용하여 정의의 편인 듯 보이려는 속물적 근성은 그 누구라도 피해가기 어려운 치명적 매력이다. 사유와 사고는 유동적이야 하는가? <생각의 지도>는 바로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에서 사람이 변해가는 만큼 기본적인 부분을 망각하면 안되는 점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한 개인이 조선총독부의 관리에서 해방 후의 미군정에서 전쟁에서는 북한군에서 전쟁 후에는 한국 정부에서 일한 사람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 없는 노예로 계속 살아가는 인간들의 한계성인가?

 

여전히 주인 없는 노예들에게 자신의 이성과 감정보다는 위의 패거리 장벽 뒤에 숨기가 가장 편하다. <생각의 지도>mapping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가 어려울망정 자신이 살아가려고 하는 최소한의 일생생활의 변화 정도는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의 보면 그는 진보적인 인물임에도 양쪽 라인에서 많은 공격을 받는다. 자기 스스로를 진보라고 외치는 자들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유물론과 관념론을 계속 대립하여 충동한다면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까?

 

최근에 진중권 교수의 사상적 배경이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쪽에 간다는 주변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정의론>,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읽어보면서 롤즈의 철학은 극단적 영역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러 가지 공유하고 인정하는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다.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에 가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퍼부어도 이성의 성인이라고 불린 밀은 마르크스에 대해 그런 발언에 대한 보복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했다. 자유주의자이면서 공리주의자고 경제학자이면서도 윤리학자 그리고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밀에서 보면 패거리처럼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패거리들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점이다.

 

생각의 자유로운 mapping이 가능하려면 어디에 갇혀있기만 해서는 안 되나 솔직히 말해 인간의 정체성에서 개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icon이 필요한 것은 필수불가결적인 요구사항이다. 추후 이것과 연계하여 icon을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거기에 머물 수만도 없다. 결론은 스스로 mapping을 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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