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의 재탄생 -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
장동석 지음 / 북바이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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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항상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에 대해 이율배반적으로 태도를 보인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진실로 원한다. 그것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억압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영화제목이 생각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도덕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도덕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를 혼돈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도덕과 윤리는 전혀 다르다.

 

윤리는 타인의 기준에서 보는 것이고, 그 타인이라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이다. 소외된 이웃 특히 고아, 노인, 노동자, 미혼모,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그리고 오늘도 열심히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까지 말이다. 윤리라는 단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자를 위한 가치이다. 에토스란 단어가 그런 것을 말하지 도덕이란 단어는 에토스보단 차라리 나는 파토스에 가깝다고 본다. 그것은 입장이다. 누구의 입장인가? 바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이다.

 

<금서의 재탄생>,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은 그야말로 그런 파토스보단 에토스에 치중한 도서이다. 따라서 내용 자체가 온건하기보단 차라리 불결하고 저항적이고 도전의식이 팽배하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헌법을 생각하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많이 인용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나 1776년 미국 독립기념을 생각하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덕치의 공포정치를 실현하여 결국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린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사회계약론>을 위대한 성서처럼 들고 다녔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사회계약론>은 엘리트 지식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전체가 봐야 정답일 것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다보면 루소가 당시 <사회계약론><에밀>을 내고서 얼마나 힘든 삶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존재조차도 무시되고 파리 시민에게 철저하게 조롱을 당하고, 그의 망가진 모습은 루이왕가의 큰 화젯거리였다. 루소의 서적부터 금지된 서적으로 나온 것이 과연 우연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하나의 모든 이론적 도서이다. 헌법의 토대가 루소의 사상이란 점을 보면, 루소가 가진 사상이 얼마나 현대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적대시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마저 루소의 사상이 미쳤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프랑스혁명의 전철을 잊지 않았다. 루소가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란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에 남긴 루소의 재산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루소가 당시에는 금지된 도서의 주인이었다. 당시 왕정사회이고 루소는 왕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부터 국가권력이 발휘된다고 하는 민주공화주의자였다. 그의 도서는 불온서적이 되는 이유는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지금의 루소의 사상이 민주주의의 기초인데도, 오히려 불온서적처럼 보인다. 내가 가장 한국사회에서 한심한 꼴이 좌우 이데올로기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으로 통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왕정복고주의를 원하는 정당을 지롱드파이고, 자유주의를 원한 정당을 자코뱅당이라고 했다.

 

문제는 자코뱅당은 항상 자리를 좌측에 차지했다. 지금에서 말하는 좌파가 이때부터 유래했다는 점이다. 좌파라고 하면 무조건 나쁘게 보는 시각에서 원래 민주공화국의 시초가 프랑스혁명에서 좌파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적 상황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지금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과연 국가의 전복할 과격한 도서인가? 의문하는 자는 대한민국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헌법 그것은 인권을 위해 인간이 살아가면서 최소한으로 생존이 가능하게 만든 법이다. 그러나 그 헌법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 루소가 살던 루이왕정이나 혹은 보나파르티즘이 도래한 19세기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죽어 있는 평화보단 위험한 자유를 원하는 루소의 사상이야 말로 우리에게 자유를 말하는 척도이다. 이래서 <금서의 재탄생>은 상당히 아슬아슬 위험한 곡예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나간다.

 

왠지 대중문화에 결코 거론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거침없이 담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에 대해 진단에서 우리는 그 근본원인을 찾아보기보단 있는 그 자체로 본다. 결과론적 선택에서 실적 유무 상벌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왜 생기고 벌여지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지정하는 슬로건인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단어는 너무 적절한 표현이라 더 이상 바꿀 수가 없다.

 

폭력이 하나의 사회적 미학으로 되는 순간 그 사회는 파시즘의 천국이 된다. 파시즘이 판을 치는 곳에는 인권이나 평등이나 자유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나치가 유럽의 광기를 일으키던 시절에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살아있던가? 여기서 빅브라더는 단순히 그 소설만의 빅브라더만이 아니다.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압하고 처벌하는 것이 빅브라더의 영원한 정치적 통치기술이다. 끝에 2+2=4가 아니라 5라고 혼자 대답하는 스미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란 인간의 의식마저 없는 세상이 되는 곳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한다. 대화와 소통이 억압된 공간에는 표현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처럼 성적인 부분에 억압이 심하면 그렇다. 나 역시 그런 공간에 자라왔기 때문에 가끔 이런 저런 성적 애기를 하는 것을 잘 모르겠다. 가끔 결혼한 분들이 많은 모임에 가서 대화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란다. 아직 조금 순진한 면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

 

인간이란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남녀의 관계에서 비롯되나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육체적 관계와 그것을 뛰어넘은 정신적, 심리적 안정감을 나와 타인에 대한 유대감을 향상한다. 또한 그것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기도 하고, 견문을 넓히기도 한다. <1984>의 스미스 역시 자신의 동물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아니 같이 염소같이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를 야유할 때 뭔가 통하는 여자와의 일탈을 원하는 것에서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욕망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금지된 도서>에선 물론 조지 오웰의 <1984>를 다루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나와 큰 호평을 받았던 <동물농장>도 나온다. 스탈린이 당시 2차 세계대전 시에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견제세력이기에 처음에 자본주의국가에게 큰 호응을 받았으나, 조지 오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파시즘으로 물든 공포정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지배한 소비에트 연방이 공산주의 국가이라 하나, 거긴 공산당만 존재하고 공산주의는 없다.

 

<금서의 재탄생>에서 아직까지 한국에서 다루면 안 될 도서인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도 다룬다. 문제는 막상 2사람이 저술할 때는 소비에트연방이나 중공처럼 헛된 것만을 주입한 게 아니라 현실의 자신을 보는 거울로서 보란 것이다. 예전에 <중국을 읽다 1980~2010>에서 중국의 기념일에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보면 참 부끄럽지 않은가 싶다. 진짜 마르크스주의의 가르침이라면 그들이 하는 행동은 탈선을 너무 심하게 해서 더 이상 오기가 힘들 정도다.

 

세계적으로 고전이자 유럽 철학과 사상에서 위의 도서는 지금도 나오는 것인데, 한국에선 팔지도 못했다. 지금은 서점에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도서이나, 왠지 불온서적처럼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사회가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까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제대로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유럽 중세시기에 기독교 문화이면서도 성경조차 평민에게 금지된 영역이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고, 지식이 곧 권력을 승계하고 권력은 지식을 통제했다. 언어로서 이미 모든 것을 속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만든 성경을 만든 사람은 죽은 후에 다시 시체가 훼손되고, 영어로 된 성경을 읽은 영국인들은 처형당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 문화에서 영국인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나 오히려 제재 대상인 것이다. 금서의 지정은 결국 도덕이란 이름이 좌우한다. 도덕은 그 사회의 법칙이고 규제다.

 

그것을 만드는 자는 법칙과 규제를 억지로 만들고 자신들은 뒤에서 뭐든지 누리는 초권력적인 존재이다. 빅브라더는 인류의 역사에서 멈추지 않고 생기던 자들이다. 단지 얼굴과 국적만 바꿀 뿐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서적들은 이미 오래전에 나온 고전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너무 외설적이라 판매 불가 된 사례가 기억나는데, 성적인 욕망에 대한 표현과 열정조차도 금지되어야 할 곳에서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버드런트 러셀이 이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말이다. 오히려 금욕주의만 강요하기에 변태적인 성범죄가 일어나고, 특히나 그 대상이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손이 뻗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최근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까지 당한다. 성적 약자는 더 이상 여자만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까지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철학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조차도 철학이 사라지기 시작한지 옛날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그럴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한 도덕이라는 거짓된 억압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겐 그런 철학이 모두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까? <금서의 재탄생>을 읽는 순간 이 책조차 금서목록에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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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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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은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 너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담론은 너무 일부만이 소유한 영역이다. 그런 연유는 한국이란 나라는 철학적 담론에서 매우 약하다는 점과 철학적 요소도 하나의 암기식 내지 고형화하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철학이란 것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문제이나, 오히려 그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이유인지 한국에서 미학을 이야기하기란 참 어렵다.

 

 

美學이란 것은 미라는 것 즉 아름다운 것을 다룬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현대사회는 너무 어지럽다. 왜냐하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가? 아니라면 무엇이 더 옳고 그른 것인가? 라는 의문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진중권 교수가 적은 <현대미학강의>에서 진중권 교수가 가장 추천하는 문학가 및 사상가인 발터 베야민부터 그렇다.

 

 

발터 벤야민은 탁월한 문학비평가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정치철학적으로 미친 영향도 크다. 그가 적은 문학론 이외에 영상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유효한 영향을 미친다. 단지 그의 관점은 다소 긍정적이나 현실은 부정적으로 흐른 편이다.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 이미 세계 1차 대전을 경험하고, 게다가 벤야민은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실망감에 자살을 택한다. 지식인의 고뇌는 언제나 시대적으로 처해진 운명인가? 그런 벤야민이기에 우리는 그가 적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담론할 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의 담론에서 우리 인간에겐 예술이란 하나의 상징적인 도구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에서 그가 같은 주제를 하나만으로 각각 다른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하나로서 존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석상을 보면 그것은 여러 개가 존재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원본으로서 가치를 부여받는다. 실존적으로 존재하기에 변화하지 않기에 니체의 <비극의 탄생>으로 따지자면 아폴로적인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폴론적인 예술이 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존재해야 한다. 변화무쌍하고 소멸이 되어 다시 새로운 것이 탄생해야 한다. 소멸의 미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상이다. 영상은 원본이 실제 있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원본의 가치를 수행할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사진관에 가서 카메라 앞에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 사진은 이미 죽은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지 살아있는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발견은 우리에게 죽은 시간의 발견이다. 살아있는 시간은 결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물론 영상물로 통해 인간의 시간이란 비가역성에서 가역적인 부분을 소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그 자체로는 비가역을 탈출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영원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으나, 그 영원한 이야기를 소비할 인간 개인에게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세계에선 TV 속의 연예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영원 불구한 존재이다. 가령 오드리 햅번이란 명배우는 나이가 들어 아름답게 서거했지만, 젊은 시절 <로마의 휴일>의 공주의 모습은 영원하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의 항상 글래머한 섹시한 스타일은 늘 기억한다. 그녀에 대한 오마쥬에서 많은 여자연예인들이 밑에 바람이 부는데, 원피스 치마를 누르고 있다. 자신의 속옷이 노출되지 않기에 말이다. 사실 생각하면 처음부터 자신의 속옷이 노출되기 부끄러우면서도 그런 장치 위에 올라간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보여주려고 하면서도 보여주지 않은 페티시즘의 연출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계속 먹히고 있다. 이것 역시 예술이 없다고 보는가? 따지고 보면 영상이란 것은 계속 존재하고 복사되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할 수 없다. 내가 애니메이션 오타쿠라고 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DVD-CD를 보고 있다.

 

 

그러면 나는 분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을 원본으로 보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구매한 DVD-CD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인지 사본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을 카피한 복사원본조차도 원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영상매체로 통해 한 가지만 있다는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다수들이 볼 수 있는 무한의 관찰이 가능하다. 영상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따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평가로서 되는 길을 열어준다. 신화적으로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리오타르의 거대 서사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기술력의 발전을 매우 크다.

 

 

따라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기술 발달로 통한 분산적 영역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그런다고 하여 발터 벤야민은 그동안 우리 인간에게 가해진 억압이란 공간이 모두 해체될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돌고 도는 새로운 과정에 들어가는 역사 내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미학이란 것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 담론이 일부에게 열린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가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나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본 기억에서 그는 영상이 다수의 대중을 접하기에 파시즘을 위한 도구, 즉 프로파간다로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의 담론에서 보드리야르에게 가면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한다. 우리가 보는 걸프전이란 그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몽타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기사 그런 요소는 이미 베트남전쟁에 십분 발휘하지 않았는가? 베트남전쟁보다는 베트남전쟁을 소재한 영화가 오히려 더 베트남전쟁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뮬라크르의 계속 이어가는 시뮬라시옹에서 절대적인 숭고함을 탈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시뮬라크르로 통해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숭고함을 심어준다.

 

 

벤야민이 기대한 것이 결국 독일의 나치에겐 유효한 선전수단이 되었다. 그런 점은 스탈린주의 소비에트연방이나 그것을 비웃는 소설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에서 신랄하게 보여준다. 복제가 가능한 예술품이란 점에서 절대적인 영역이 아니라 보편적 영역의 전환은 다른 문제를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적인 철학자로서 예술을 벤야민처럼 쉽게 다루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듯 하다. 혹은 예술이 너무 범람하기에 미술평론가, 미술전문가, 하다못해 큐레이터나 감정사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예술이 예술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적 가치만 가진 게 아닌가?

 

 

게다가 모더니스트의 예술은 기본 예술에 대한 파괴다.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 예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파괴하기 위해 예술을 한다. 반예술적인 예술이 결국 예술을 파괴하면서 다시 예술로 대체하고, 기존의 예술은 대중들이 상징성을 아방가르드 예술이 부여받는다.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반예술적 행위들이 결국 대중화가 되었다. 누가 도서를 전시한 서점에 책표지를 일반 종이가 아니라 종이를 손상시키는 사포로 만들면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하지만 이 역시 어떻게 하리, 사포로 만든 책표지들이 계속 생산되었다. 상황주의자들은 그만두게 된다. 전위적 실험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피카소가 그린 많은 기이하고도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은 기존 미술과 어긋난 태도이나, 그런 아방가르드의 요소마저 하나의 예술로서 가치를 부여받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관찰조차도 제대로 반기지 않은 한국조차도 마르크스주의자인 피카소의 그림이 미술교과서에 당당히 실린다. 코미디인지 아니면 그저 바보들의 향연인지? 미적인 영역에서 대중들은 그것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부분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대중들을 속박하는 숭고한 예술에 대한 파괴가 결국 그 자체가 숭고하게 되는지 아니면 자본주의 시장에 팔려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방가르드의 반예술이 결국 대중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있어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하이데거식으로 보자면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예술품이나 도구라 다행이지 물화된 인간에게 호모사케르라는 소외된 인간은 존재하는 실존적 존재와 이름이 있어도 존재성을 부여받지 못하니 말이다. 미학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가치보단 부정적 가치의 발견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나치의 파시즘에 이어 스탈린이 펼친 개인을 과학주의란 억압에서 집단화시키는 점이나, 또는 자유의 나라라고 여긴 미국에 가서도 자유의 비례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자본에 비례한 점에서 절대적인 인간의 유토피아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토피아의 부재가 예술로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재를 알리기에 유토피아적인 영역으로 된다. 현실의 부정성에서 미는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로테스크는 아도르노에게 부정의 부정의 또 다른 부정이다.

 

 

미학이 기존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시작하여 헤겔에서 찬, 반, 합이란 변증법을 아도르노는 다른 식으로 본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잘못되게 되어 다시 안정으로 가는 것은 영화서사에서 종종 보는 일이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위기로 빠져 또 다른 부정적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정의 미학은 여기서 다다이스트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베이컨은 인간의 형상을 무시한 상태를 그려 인간의 존재성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것은 서구철학에서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근원이 되는 불교철학과 비슷해 보인다. 불교에서 이렇게 말하지?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는 것은 없음이요,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실존성이 있을까? 없을까? 중용의 덕을 강조하는 불교이나 그 돌고 도는 의문은 절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손가락처럼 원을 그린다. 그러고 보면 벤야민이 말한 역사적 테제와 유사하지 않은가? 차라리 돌고 도는 것에서 발터 벤야민이 논한 인간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처럼 그것은 멈추지 않더라도 멈추지 않기에 오히려 다시 볼 수 있는 게 아닌지 말이다.

 

 

현대미학을 이룬 것은 단순히 절대적 상징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와 문화, 인간을 지배하는 스펙타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논하게 한다. 중요한 점은 미학은 미의 미학만이 아니라 추의 미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기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가장 추한 사람이 될 것이다. 파시즘의 미학은 자신(들)의 절대적 미가 있다는 자부심이다. 그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미화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 인터넷은 폭력의 시대가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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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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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리 폴만 감독이 제작한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영화를 보았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동시에 후에 실사영상으로 1982년 레바논에서 학살된 팔레스타인들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화면 위로 나타났다. 인간이란 언제까지 이런 비극적 학살과 파괴를 멈추지 않은 것인가? 1982년 레바논 학살에서 이슬라엘 과격단체들은 이미 국제조약에는 안중도 없이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길에 늙은 할머니는 울면서 통곡하고, 어린 아이들은 시체가 되어 주변에 파리만 맴돌고 있다. 제노사이드, 피를 말려가면서 한 종족을 말살시키는 극단적 행위에서 인류는 여전히 20세기의 극단의 시대를 거치어 21세기에도 폭력의 시대로 넘어가는가? 에릭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에서 20세기 후반의 미국과 소련의 냉소 이데올로기는 마무리되고 새로운 폭력이 등장한다. 차라리 냉전 이데올로기가 끝났다고 보는 것에서 탈(脫)이데올로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 더 견고하고 탄탄한 이데올로기가 탄생한 것이다.

 

제3국에 해당되는 팔레스타인은 냉전주의 시대에서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이슬람 문

화다. 하지만 이슬람 문화라고 하여 결코 냉전주의는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기존에 팔레스타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이 혼란의 시기가 왔다. 본래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이전에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존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보면 1948년 그 때의 혼란이 오기 전에 어느 노인은 당시 젊은 시절 유대인과 매우 친했다고 한다.

 

같이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집에도 놀러갈 정도라면 거의 친구가 아닌가? 그러나 왜 이들을 이렇게 분리해야 하는가? 냉전주의는 강대국들에게 약소국이란 하나의 전략적 도구가 된다.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를 도탄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여기에 소비에트 연방만 아니라 다른 강대국도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전쟁 후에도 내전이란 문제도 야기했다.

 

20세기의 약소국이란 강대국의 전쟁터였다. 혹은 그 강대국의 지배 권력을 위한 헤게모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절대적인 악이 국민들에게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좋은 하나의 수단임을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정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마키아 벨리가 군주론을 적으면서 그에게 정치에 대한 수단을 알게 해준 것은 체자레 보르지아의 정치적 방법이었다. 전에 하워드 진의 <전쟁에 반대한다>에서 체자레 보르지아의 정치적 방법을 읽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다.

 

점령한 부지에 대한 주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처음에 매우 잔혹한 군인을 보냈다고 한다. 하도 잔혹하여 주민들은 자신을 점령한 세력이 아니라 어느 개인에게 불만이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군인은 어느 날 몸이 두 동강이 난 채로 죽어 저잣거리에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의 문제도 그렇다. 테러가 일어나면 누가 했는지 왜 하였는지에 대해 조사를 한다. 그리고 테러집단의 대한 제압과 파괴는 반 테러리즘의 기본 목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 테러리즘 역시 테러리즘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안티 파시즘조차도 파시즘을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역사>에서 언급한 템페스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템페스트는 어느 인물이 반란의 폭력을 피해 낯선 땅으로 가나, 그곳에서 그들은 오히려 그 곳 원주민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에 의해 상처받은 이들이 다시 상처를 주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받은 피해의식은 각인되어 있으나 타인에 대한 폭력행위는 정당화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긴다. 오죽하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직도 구현되는 공시적인 신화의 세계에 있는가? 과학기술은 전투기가 계속 이륙하고, 초소형 무인항공기가 테러집단의 지도자를 폭사하는 기술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결국 인간들이란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적을 만드는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다. <팔레스타인>에서 놀라운 장면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비가 매몰차게 내리는 날에 어느 팔레스타인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에게 옷을 벗으라고 하면서 비를 맞도록 한다. 그것도 인상은 아주 험악하게 또한 비웃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 그 소년은 어느 기분이 들고 무슨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테러리스트의 탄생은 매우 간단한 공식이다. 테러리스트로 될 사람을 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복수를 하기 위해 극단적 수단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존 사코가 보는 팔레스타인 세계란 그렇다.

그도 팔레스타인의 과격파에 대해 다소 위험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느낀 그곳 생활을 보면 왜 그렇게 되는지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객관적이고 구조적이면서 합리적으로 보기보단 어느 일정한 시야로 보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보통 우리에게 적용된다. 존 사코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등을 돌며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거기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본다.

 

교황이 나와 세계 평화를 외치고 있으나, 정작 평화는 자신 안의 평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줘야 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혹은 프랑스대혁명에서 폭력정치로 일삼아도 결국은 프랑스대혁명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해보자. 그는 자유라는 것은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배만 아니라 타인의 배도 같이 채워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자유는 타인과 조화가 필요하고, 인간의 최소한의 생존요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그 세계는 평화롭지 못하다.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보면 생존문제가 심각하고, 조 사코 역시 화장실에 가는데, 추운 날에 그것도 비가 내리는데도 빗물을 맞으면서 대변보는 모습이 나온다. 그림에서 보이는 표현주의적 흑백들은 조 사코가 느낀 불편하면서도 참담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대부분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만나면 가족들의 비극사만 전해준다.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거나 혹은 불구자가 된다. 안타까운 부분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공격하는데, 최루탄 발사에 문 밖에 나온 아이에게 총을 쏘았는데, 그 총알이 아이의 머리에 맞았다.

 

어디에도 가도 치료받을 공간이 없고,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가야 의료장비가 있지만 몇 시간이 겨우 지난 후에야 병원에 갔고, 그나마 의사조차 오지 않아 결국 숨을 거두었다. 죽은 아이를 비오는 밤에 매장해야 하는 가족의 심정에서 그들은 복수 이외의 생각은 없다. 매장하면서 비참한 우울에 빠진 그들에게 비웃음을 날리는 군인들의 처사에 테러리스트는 처음부터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로 만들어지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조 사코가 주인공이 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본인의 모습에서 조 사코의 모습은 안경을 끼고 짧은 머리에 코가 매우 길고 입술이 두껍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 흘러온 천덕꾸러기처럼 묘사했다. 과연 그가 처음 올 때의 팔레스타인은 오해와 왜곡만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생각과는 다르다. 그것은 언론과 방송이란 미디어가 편집과 영상조합으로 충분히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의 입장을 비추어보면 분명 그것은 잘못 되었다. 하지만 민간인 마을에 떨어뜨린 폭탄과 군인들의 폭격은 그것 이상으로 나쁘다. 우리는 언제나 왜 이런 문제에 생겼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 돌아와 유대인 여자친구 2명과 만난 조 사코는 이런저런 이슬람문화와 이스라엘에 대해 이야기하나, 그녀들은 평화를 원하고 좋아하나 다른 곳에 대한 평화와 관용은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이 이럴 정도이니 극단주의자에 대한 폭력성은 말하기가 곤란한 정도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고, 폭력과 억압의 역사다. 거대한 문명사회에 보이는 위대한 업적은 그만큼의 희생이 있었다. 영웅이 존재하면 영웅을 만들게 해준 희생자가 필요했다. 우리는 아직도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신화의 세계와 단절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원래의 신화가 존재하던 곳은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보나 지금은 파괴와 은폐의 조작을 위한 신화다. 조 사코는 그런 신화적 은폐에 숨겨진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암울한 색채로 자신은 풍자적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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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토박이시군요 !!!! 몰랐네요..ㅎㅎ

만화애니비평 2013-03-19 22:28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ㅋㅋ
 
굿모닝 버마 - 금지된 자유의 땅 버마로 간 NGO 부부의 버마 견문록 카툰 클래식 12
기 들릴 지음, 소민영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프랑스 만화작가가 그린 <굿모닝 버마>를 읽으면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작가인 기 들릴인 자신의 아내와 미얀마로 떠난다. 아마 작품 내내 아내의 업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으나, 그의 아내는 원래 의사인 모양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 프랑스지부에서 말라리아나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동남아시아에 의료봉사를 가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금지된 자유의 땅 버마로 간 NGO 부부의 버마 견문록이라고 말이다.

 

딱히 버마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보단 그저 만화가 기 들릴이 자신이 직접 버마에서 체류하면서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특이한 것은 과도한 그림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매우 안정된 구도로 나누고, 페이지마다 구분한 칸을 보면 일정한 사각박스로 그려 넣었다. 보통 한 페이지당 6칸으로 나누거나 조금 많으면 중간에 칸을 늘려 7칸이고, 최대한 늘리면 15칸에 이른다.

 

때문에 작품을 보면 조금 뭔가 모르게 잔잔한 수면을 흘러가는 것처럼 느낀다. 매우 안정된 구도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뭔가 극적인 상황을 부여하기보단 그 미얀마란 장소에서의 작가 일상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건이 아직도 현대에 남은 미얀마를 이야기하고 있다. 제일 인상깊은 것은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부분이다. 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우고, 그러기 위해 일본에 협력한 척하다가 일본에게 대항한다.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결국 암살되었으나, 미얀마에선 영원히 추앙받는 영웅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독재군부가 오면서 그의 업적은 최대한 숨겨지고, 그의 딸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감금행위는 노벨평화수상자를 죽이지 못하고 굴레의 속박에 가둔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 같다. 자유의 표현과 정당한 비판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세상이 아니다. 법과 규제가 엄한 반면 군부독재 부패인지 그곳은 매우 타락한 모습이 넘치는 것 같았다.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람들,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 물 문제도 포함되고 말이다. 과도한 노동착취에 대가로 받는 것은 마약주사라는 것이 참 특이했다. 광산에서 보석을 캐다가 죽어도 아무도 구출하지 않고 그저 다른 광으로 가서 계속 채취한다고 한다. 보석이라도 혹시 감출까 싶어 입안과 코 안까지 검사하고 여자들은 자궁까지 검사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병이 많다는 이야기에 <굿모닝 버마>는 굿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이 왠지 아이러니컬 하다.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굿모닝 베트남>이란 영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굿모닝일까? 내가 어린 시절에 존재한 영화, 그렇게 동남아 지역의 굿모닝은 왠지 굿모닝을 맞이하고 싶은 욕구가 들 것이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으나 욕구는 다른 점이다. 삶의 욕망은 욕심을 말하나 삶의 욕구는 기본적인 것을 말한다. 만화작가인 기 들릴은 약간 머나먼 곳에 폭탄테러 소식도 듣고, 최근 1년 동안 사고가 나지 않은 항공사의 비행기를 탔다. 타면서 비가 새어 승객좌석에 떨어지고,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미얀마란 곳은 아직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듯이 기술의 발전이 두려운 것인가? 국가의 인터넷 회선을 2개 회사가 장악하나 그곳은 독재자와 독재자의 아들이 운영한다. 모든 국가적 사안에서 국가에 조금이라도 비판이나 거슬리는 태도는 가만두지 않는다.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물로이거나와 다른 나라 기사인 내용이 비판적 내용이 나오면 검열대상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TIME 잡지가 막상 미얀마에선 가위로 오리고 오려서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 들릴이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서 조지 오웰이 19세에 인도경찰로 근무한 지역에 갔다고 하는데, 그 조지 오웰이 <1984><동물농장>을 적어 파시스트와 경찰국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런데 최근에 아웅산 수치를 만난 어느 분도 만만치 않은 <1984>의 빅브라더와 같은 포스를 풍기는데, 글쎄다. 모르겠다. 시선과 관점은 다르니 아마 미얀마에서 아웅산 장군의 그림을 내놓지 못하나 많은 국민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지 않을까 싶으나, 어째든 미얀마에서 자유로운 향기는 느끼지 못했다.

 

분쟁지역 주변에 말라리아 모기로 죽는 사람이 수천명인데, 미얀마 정부에선 매우 어려운 절차로 대응한다. 군부대가 모든 것을 장악해서 그럴까? 기 들릴의 그림에서 사실 그 군부 사람들도 왠지 친숙하게 그리는 것이 흥미롭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중심적 이야기는 작가의 아들인 루이스다. 루이스와 같이 밖으로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고 아는 척을 하겠지만, 루이스를 대동하지 않으면 모두 외면한다.

 

대신 물을 서로 쏘아대는 축제에선 기 들릴에게 쏘는 물총 세례는 참 아름답다. 쉴 새 없이 뿜어대니 말이다. 날이 너무 더우니 물을 뿌려도 금방 마른 것처럼 보이나 우기가 금방 닥치기에 비가 자주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복사용지가 놓인 프린트기에 형광등을 놓아 습기를 날리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그래도 미얀마 주민들은 많이 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렇게까지 거친 표현은 없다. 단지 군부의 횡포는 계속 좌절하는 NGO 활동은 인상이 새롭다.

 

사실 모든 활동에서 직접 그곳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동이라고 했는가?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하여 좁은 장소에 냄새나는 불쾌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점은 작가가 미얀마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승객들이 자든 말든 TV는 항상 켜져 있고, 소리는 최고로 ON이다. 먼지가 많아 얼굴을 숙이고, 내리는 순간 추워서 고생했다는 작가의 경험에서 미얀마란 과연 더워 에어컨이 없으면 안되지만, 그 에어컨가지 사람잡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 너무 덥다보니 낮에 나가는 것은 무리이고, 전기가 계속 공급되지 않아 에어컨을 켜면 전기스위치가 내려가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서 전염병이 많이 심각하다. 타미플루 백신 역시 인상 깊다. 마약치료제 말고라도 전염병 백신은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이미 다 팔려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전 세계 NGO에게 요청하자 미얀마로 날라온 백신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감동이 왔다.

 

지구 전 인류에 대한 인류애는 나에게 그다지 깊은 편은 아니나 문화인류학 관련 도서를 보면서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자연과 동화된 문명이 파괴되거나 원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혹은 그들이 만나지 못한 전염병에 죽어가는 부족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아마도 끌로드 레시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같이 어느 한 철학자 겸 인류학자의 관찰수기록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물론 <슬픈 열대>는 남아메리카와 같으나 미얀마와 같은 동남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적 역사에 놓여있다면 기 들릴은 그것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역사적 사건으로 현실의 조건이 구성된 상황 아래 기 들릴의 미얀마 기행기는 그들의 문화에서 보이는 친숙함과 경외감, 한편으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여기저기 살짝 녹아있다. 늘 더위와 비, 그리고 불편한 교통이었으나 그런 악랄한 추억이 있기에 이런 만화도 나온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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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적 조건 - 정보 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이현복 옮김 / 서광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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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동기는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철학사상 관련 도서였다. 기존의 모더니즘 이성에 의한 계몽주의보단 탈계몽주의 내지 탈근대적 사유로 통한 현대사회적 고찰과 흐름을 판단할 수 있었던 도서다. 다소 국내에서 흔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신기롭게 보였다. 그때 이 도서에서 리오타르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일본 인문학자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란 도서로 통해 다시 리오타르의 이름을 새겨들었다. 내가 우연히 리오타르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든 것은 다음의 지문이다.

 

‘커다란 이야기란’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근대국가에서는 성원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여러 가지 시스템이 정비되고 그 작동을 전체로 사회가 운영되어왔다. 그 시스템은 예를 들어 사상적으로는 인간이나 이성의 이념으로,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나 혁명 이데올로기로, 경제적으로는 생산의 우위로 표출되어왔다. ‘커다란 이야기’란 그 시스템들의 총칭이다.

 

커다란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2번 읽고 난 뒤에 그렇게 잘 이해한 편은 아니나 대략적인 흐름을 감을 잡았다. 그것은 1979년에 들어오면서 컴퓨터기술의 발달에서 시작된 담론인듯 하였다. 지금은 인터넷 세대라고 하여 가상의 인터넷으로 동네 시공간을 초월한 교류가 오고간다. 오히려 가상이란 시뮬라크르가 컴퓨터 모니터로 통해 진실의 영역을 침해한다.

 

예를 들어 나로호 발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나로호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보는 것은 근처에 발사하는 장면을 시각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거리정도이다. 아니라면 TV 영상으로 녹화되어 그대로 복사본이 다시 복사되어 원본도 없는 사본이 사본으로서 원본이 된다. 이것이 계속 시뮬라크르의 지속성으로 통해 시뮬라시옹이 된다. 물론 시뮬라시옹 개념은 장 보드리야르에 가까운 부분이나, 리오타르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담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일련의 모던 사회의 계몽이라고 하는 억압성이다.

 

거대한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왜 리오타르의 연구가 아즈마 히로키의 오타쿠 연구도서에 나왔는가?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여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유의 세계를 연구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다고 하여 안노 히데아키와 같은 애니메이션 감독 그 자신이 오타쿠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티로 불릴 수 있는 이유 역시 사유의 정리와 정의만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이미지 재생과 표현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읽으면서 다른 사상가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많은 관련이 있는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영화로 통해 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혹은 복사된 신문으로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의 전달력은 예전처럼 정보를 독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한정적이기에 군중들은 듣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에 그들 스스로 이성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알게 할 수 있으나, 신문의 유통으로 따라 글의 보급은 신문이나 잡지라는 매체로 통해 글을 읽으면서 일방적인 정보가 마치 합당한 것처럼 여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성적 판단이 어긋나더라도 이성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부분은 신문이란 언론들이 공정성을 상실할 경우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든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는 대중심리를 이용한 공작행위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게다가 신문에서 기술복제로 통해 영상마저 복제되자, 영화는 곧 정치적 수단으로서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영상은 글자가 아니고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되기에 그만큼 이해도가 높고 몰입도 역시 높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영상 관람에서 파시즘이란 무서운 집단광기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1979년의 리오타르가 저술했기에 지금 2013년 현실에서 보는 인터넷이란 새로운 광기의 시작이다. 정보의 벽이 없어진 만큼 정보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못하다. 근거 없는 정보와 허위기사가 오히려 사실처럼 되어 거짓이 현실을 지배하는 구조에서 헤게모니의 정당성을 다시 발휘한다.

 

거대한 서사가 과학적 기술에 의해 신화적 요소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바뀐 것이지 사람이 바뀐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리오타르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지식과 권력은 항상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통치기술, 공작기술, 산파술, 수사적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경이 라틴어로 구성되어 있을 경우 성경에 적힌 본래의 의미는 모른 채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로서 오히려 대중들을 통치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가 기술을 보유하고, 대신 그 컴퓨터나 정보수단매체를 얼마나 잘 다루고 아는가에서 상품적 가치를 창출하는 점이다. 정보의 이용에서 특별히 남녀차별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일정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어린이나 청소년도 이용가능하다. 지식의 소유화에서 거대 서사로 보자면 남성중심 문화라고 볼 수 있으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바로 이런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 우리 일상생활을 들어다보아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이가 제법 있으신 분들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정보를 구하고 만들고 있다.

 

그래서 정보의 독점화란 이미 있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나, 아주 특수한 기밀 내지 혹은 국가적 업무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공개될 수 있다. 세사한 글자까지 전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정보의 유무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진보적 사회인데, 그 진보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진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하기술이다. 보수주의적 자유주의국가라도 과학기술은 보수적 이념이나 진보적 이념과는 상관없다.

 

단지 기술이 좀 더 발전하는가? 하지 않은가? 라는 선택점이다.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리오타르가 보는 새로운 시대의 담론이다. 그것은 일부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에게 열린 민주주의적 방법이나, 토크빌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에서 열린 정보의 공정성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아즈마 히로키에게 돌아가보자.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문화에 대해 포스트모던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그 조건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영역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섬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섬은 인터넷으로 직접적이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란 매체기술의 발달이다.

 

포스트모던한 이유는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 즉 자신만의 정보를 수집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동물화에서는 생산 대신 정보의 소비에 집착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황금만능주의라는 자본을 이용하여 goods의 구입에 정신을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개인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서사에서는 전체적으로 거기에 따라야 하는 정당하지 않은 이유가 존재하므로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상황을 비추어보자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이유는 정보의 집중화가 아니라 분산화다. 정보사회의 시대에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가능해진 이유 중에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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