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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의 재탄생 -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
장동석 지음 / 북바이북 / 2012년 10월
평점 :
인간은 항상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에 대해 이율배반적으로 태도를 보인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진실로 원한다. 그것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억압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영화제목이 생각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도덕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도덕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를 혼돈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도덕과 윤리는 전혀 다르다.
윤리는 타인의 기준에서 보는 것이고, 그 타인이라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이다. 소외된 이웃 특히 고아, 노인, 노동자, 미혼모,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그리고 오늘도 열심히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까지 말이다. 윤리라는 단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자를 위한 가치이다. 에토스란 단어가 그런 것을 말하지 도덕이란 단어는 에토스보단 차라리 나는 파토스에 가깝다고 본다. 그것은 입장이다. 누구의 입장인가? 바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이다.
<금서의 재탄생>,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은 그야말로 그런 파토스보단 에토스에 치중한 도서이다. 따라서 내용 자체가 온건하기보단 차라리 불결하고 저항적이고 도전의식이 팽배하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헌법을 생각하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많이 인용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나 1776년 미국 독립기념을 생각하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덕치의 공포정치를 실현하여 결국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린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사회계약론>을 위대한 성서처럼 들고 다녔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사회계약론>은 엘리트 지식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전체가 봐야 정답일 것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다보면 루소가 당시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내고서 얼마나 힘든 삶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존재조차도 무시되고 파리 시민에게 철저하게 조롱을 당하고, 그의 망가진 모습은 루이왕가의 큰 화젯거리였다. 루소의 서적부터 금지된 서적으로 나온 것이 과연 우연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하나의 모든 이론적 도서이다. 헌법의 토대가 루소의 사상이란 점을 보면, 루소가 가진 사상이 얼마나 현대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적대시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마저 루소의 사상이 미쳤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프랑스혁명의 전철을 잊지 않았다. 루소가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란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에 남긴 루소의 재산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루소가 당시에는 금지된 도서의 주인이었다. 당시 왕정사회이고 루소는 왕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부터 국가권력이 발휘된다고 하는 민주공화주의자였다. 그의 도서는 불온서적이 되는 이유는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지금의 루소의 사상이 민주주의의 기초인데도, 오히려 불온서적처럼 보인다. 내가 가장 한국사회에서 한심한 꼴이 좌우 이데올로기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으로 통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왕정복고주의를 원하는 정당을 지롱드파이고, 자유주의를 원한 정당을 자코뱅당이라고 했다.
문제는 자코뱅당은 항상 자리를 좌측에 차지했다. 지금에서 말하는 좌파가 이때부터 유래했다는 점이다. 좌파라고 하면 무조건 나쁘게 보는 시각에서 원래 민주공화국의 시초가 프랑스혁명에서 좌파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적 상황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지금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과연 국가의 전복할 과격한 도서인가? 의문하는 자는 대한민국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헌법 그것은 인권을 위해 인간이 살아가면서 최소한으로 생존이 가능하게 만든 법이다. 그러나 그 헌법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 루소가 살던 루이왕정이나 혹은 보나파르티즘이 도래한 19세기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죽어 있는 평화보단 위험한 자유를 원하는 루소의 사상이야 말로 우리에게 자유를 말하는 척도이다. 이래서 <금서의 재탄생>은 상당히 아슬아슬 위험한 곡예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나간다.
왠지 대중문화에 결코 거론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거침없이 담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에 대해 진단에서 우리는 그 근본원인을 찾아보기보단 있는 그 자체로 본다. 결과론적 선택에서 실적 유무 상벌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왜 생기고 벌여지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지정하는 슬로건인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단어는 너무 적절한 표현이라 더 이상 바꿀 수가 없다.
폭력이 하나의 사회적 미학으로 되는 순간 그 사회는 파시즘의 천국이 된다. 파시즘이 판을 치는 곳에는 인권이나 평등이나 자유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나치가 유럽의 광기를 일으키던 시절에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살아있던가? 여기서 빅브라더는 단순히 그 소설만의 빅브라더만이 아니다.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억압하고 처벌하는 것이 빅브라더의 영원한 정치적 통치기술이다. 끝에 2+2=4가 아니라 5라고 혼자 대답하는 스미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란 인간의 의식마저 없는 세상이 되는 곳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한다. 대화와 소통이 억압된 공간에는 표현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처럼 성적인 부분에 억압이 심하면 그렇다. 나 역시 그런 공간에 자라왔기 때문에 가끔 이런 저런 성적 애기를 하는 것을 잘 모르겠다. 가끔 결혼한 분들이 많은 모임에 가서 대화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란다. 아직 조금 순진한 면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
인간이란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남녀의 관계에서 비롯되나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육체적 관계와 그것을 뛰어넘은 정신적, 심리적 안정감을 나와 타인에 대한 유대감을 향상한다. 또한 그것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기도 하고, 견문을 넓히기도 한다. <1984>의 스미스 역시 자신의 동물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아니 같이 염소같이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를 야유할 때 뭔가 통하는 여자와의 일탈을 원하는 것에서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욕망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금지된 도서>에선 물론 조지 오웰의 <1984>를 다루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나와 큰 호평을 받았던 <동물농장>도 나온다. 스탈린이 당시 2차 세계대전 시에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견제세력이기에 처음에 자본주의국가에게 큰 호응을 받았으나, 조지 오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파시즘으로 물든 공포정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지배한 소비에트 연방이 공산주의 국가이라 하나, 거긴 공산당만 존재하고 공산주의는 없다.
<금서의 재탄생>에서 아직까지 한국에서 다루면 안 될 도서인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도 다룬다. 문제는 막상 2사람이 저술할 때는 소비에트연방이나 중공처럼 헛된 것만을 주입한 게 아니라 현실의 자신을 보는 거울로서 보란 것이다. 예전에 <중국을 읽다 1980~2010>에서 중국의 기념일에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보면 참 부끄럽지 않은가 싶다. 진짜 마르크스주의의 가르침이라면 그들이 하는 행동은 탈선을 너무 심하게 해서 더 이상 오기가 힘들 정도다.
세계적으로 고전이자 유럽 철학과 사상에서 위의 도서는 지금도 나오는 것인데, 한국에선 팔지도 못했다. 지금은 서점에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도서이나, 왠지 불온서적처럼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사회가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까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제대로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유럽 중세시기에 기독교 문화이면서도 성경조차 평민에게 금지된 영역이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고, 지식이 곧 권력을 승계하고 권력은 지식을 통제했다. 언어로서 이미 모든 것을 속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만든 성경을 만든 사람은 죽은 후에 다시 시체가 훼손되고, 영어로 된 성경을 읽은 영국인들은 처형당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 문화에서 영국인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나 오히려 제재 대상인 것이다. 금서의 지정은 결국 도덕이란 이름이 좌우한다. 도덕은 그 사회의 법칙이고 규제다.
그것을 만드는 자는 법칙과 규제를 억지로 만들고 자신들은 뒤에서 뭐든지 누리는 초권력적인 존재이다. 빅브라더는 인류의 역사에서 멈추지 않고 생기던 자들이다. 단지 얼굴과 국적만 바꿀 뿐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서적들은 이미 오래전에 나온 고전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너무 외설적이라 판매 불가 된 사례가 기억나는데, 성적인 욕망에 대한 표현과 열정조차도 금지되어야 할 곳에서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버드런트 러셀이 이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말이다. 오히려 금욕주의만 강요하기에 변태적인 성범죄가 일어나고, 특히나 그 대상이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손이 뻗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최근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까지 당한다. 성적 약자는 더 이상 여자만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까지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철학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조차도 철학이 사라지기 시작한지 옛날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그럴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한 도덕이라는 거짓된 억압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겐 그런 철학이 모두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까? <금서의 재탄생>을 읽는 순간 이 책조차 금서목록에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