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미학은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 너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담론은 너무 일부만이 소유한 영역이다. 그런 연유는 한국이란 나라는 철학적 담론에서 매우 약하다는 점과 철학적 요소도 하나의 암기식 내지 고형화하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철학이란 것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문제이나, 오히려 그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이유인지 한국에서 미학을 이야기하기란 참 어렵다.

 

 

美學이란 것은 미라는 것 즉 아름다운 것을 다룬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현대사회는 너무 어지럽다. 왜냐하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가? 아니라면 무엇이 더 옳고 그른 것인가? 라는 의문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진중권 교수가 적은 <현대미학강의>에서 진중권 교수가 가장 추천하는 문학가 및 사상가인 발터 베야민부터 그렇다.

 

 

발터 벤야민은 탁월한 문학비평가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정치철학적으로 미친 영향도 크다. 그가 적은 문학론 이외에 영상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유효한 영향을 미친다. 단지 그의 관점은 다소 긍정적이나 현실은 부정적으로 흐른 편이다.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 이미 세계 1차 대전을 경험하고, 게다가 벤야민은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실망감에 자살을 택한다. 지식인의 고뇌는 언제나 시대적으로 처해진 운명인가? 그런 벤야민이기에 우리는 그가 적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담론할 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의 담론에서 우리 인간에겐 예술이란 하나의 상징적인 도구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에서 그가 같은 주제를 하나만으로 각각 다른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하나로서 존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석상을 보면 그것은 여러 개가 존재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원본으로서 가치를 부여받는다. 실존적으로 존재하기에 변화하지 않기에 니체의 <비극의 탄생>으로 따지자면 아폴로적인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폴론적인 예술이 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존재해야 한다. 변화무쌍하고 소멸이 되어 다시 새로운 것이 탄생해야 한다. 소멸의 미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상이다. 영상은 원본이 실제 있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원본의 가치를 수행할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사진관에 가서 카메라 앞에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 사진은 이미 죽은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지 살아있는 시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발견은 우리에게 죽은 시간의 발견이다. 살아있는 시간은 결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물론 영상물로 통해 인간의 시간이란 비가역성에서 가역적인 부분을 소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그 자체로는 비가역을 탈출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영원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으나, 그 영원한 이야기를 소비할 인간 개인에게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세계에선 TV 속의 연예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영원 불구한 존재이다. 가령 오드리 햅번이란 명배우는 나이가 들어 아름답게 서거했지만, 젊은 시절 <로마의 휴일>의 공주의 모습은 영원하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의 항상 글래머한 섹시한 스타일은 늘 기억한다. 그녀에 대한 오마쥬에서 많은 여자연예인들이 밑에 바람이 부는데, 원피스 치마를 누르고 있다. 자신의 속옷이 노출되지 않기에 말이다. 사실 생각하면 처음부터 자신의 속옷이 노출되기 부끄러우면서도 그런 장치 위에 올라간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보여주려고 하면서도 보여주지 않은 페티시즘의 연출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계속 먹히고 있다. 이것 역시 예술이 없다고 보는가? 따지고 보면 영상이란 것은 계속 존재하고 복사되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할 수 없다. 내가 애니메이션 오타쿠라고 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DVD-CD를 보고 있다.

 

 

그러면 나는 분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을 원본으로 보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구매한 DVD-CD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인지 사본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을 카피한 복사원본조차도 원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영상매체로 통해 한 가지만 있다는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다수들이 볼 수 있는 무한의 관찰이 가능하다. 영상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따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평가로서 되는 길을 열어준다. 신화적으로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리오타르의 거대 서사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기술력의 발전을 매우 크다.

 

 

따라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기술 발달로 통한 분산적 영역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그런다고 하여 발터 벤야민은 그동안 우리 인간에게 가해진 억압이란 공간이 모두 해체될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돌고 도는 새로운 과정에 들어가는 역사 내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미학이란 것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 담론이 일부에게 열린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가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나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본 기억에서 그는 영상이 다수의 대중을 접하기에 파시즘을 위한 도구, 즉 프로파간다로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의 담론에서 보드리야르에게 가면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한다. 우리가 보는 걸프전이란 그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몽타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기사 그런 요소는 이미 베트남전쟁에 십분 발휘하지 않았는가? 베트남전쟁보다는 베트남전쟁을 소재한 영화가 오히려 더 베트남전쟁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뮬라크르의 계속 이어가는 시뮬라시옹에서 절대적인 숭고함을 탈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시뮬라크르로 통해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숭고함을 심어준다.

 

 

벤야민이 기대한 것이 결국 독일의 나치에겐 유효한 선전수단이 되었다. 그런 점은 스탈린주의 소비에트연방이나 그것을 비웃는 소설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에서 신랄하게 보여준다. 복제가 가능한 예술품이란 점에서 절대적인 영역이 아니라 보편적 영역의 전환은 다른 문제를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적인 철학자로서 예술을 벤야민처럼 쉽게 다루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듯 하다. 혹은 예술이 너무 범람하기에 미술평론가, 미술전문가, 하다못해 큐레이터나 감정사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예술이 예술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적 가치만 가진 게 아닌가?

 

 

게다가 모더니스트의 예술은 기본 예술에 대한 파괴다.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 예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파괴하기 위해 예술을 한다. 반예술적인 예술이 결국 예술을 파괴하면서 다시 예술로 대체하고, 기존의 예술은 대중들이 상징성을 아방가르드 예술이 부여받는다.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반예술적 행위들이 결국 대중화가 되었다. 누가 도서를 전시한 서점에 책표지를 일반 종이가 아니라 종이를 손상시키는 사포로 만들면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하지만 이 역시 어떻게 하리, 사포로 만든 책표지들이 계속 생산되었다. 상황주의자들은 그만두게 된다. 전위적 실험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피카소가 그린 많은 기이하고도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은 기존 미술과 어긋난 태도이나, 그런 아방가르드의 요소마저 하나의 예술로서 가치를 부여받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관찰조차도 제대로 반기지 않은 한국조차도 마르크스주의자인 피카소의 그림이 미술교과서에 당당히 실린다. 코미디인지 아니면 그저 바보들의 향연인지? 미적인 영역에서 대중들은 그것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부분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대중들을 속박하는 숭고한 예술에 대한 파괴가 결국 그 자체가 숭고하게 되는지 아니면 자본주의 시장에 팔려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방가르드의 반예술이 결국 대중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있어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하이데거식으로 보자면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예술품이나 도구라 다행이지 물화된 인간에게 호모사케르라는 소외된 인간은 존재하는 실존적 존재와 이름이 있어도 존재성을 부여받지 못하니 말이다. 미학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가치보단 부정적 가치의 발견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나치의 파시즘에 이어 스탈린이 펼친 개인을 과학주의란 억압에서 집단화시키는 점이나, 또는 자유의 나라라고 여긴 미국에 가서도 자유의 비례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자본에 비례한 점에서 절대적인 인간의 유토피아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토피아의 부재가 예술로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재를 알리기에 유토피아적인 영역으로 된다. 현실의 부정성에서 미는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로테스크는 아도르노에게 부정의 부정의 또 다른 부정이다.

 

 

미학이 기존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시작하여 헤겔에서 찬, 반, 합이란 변증법을 아도르노는 다른 식으로 본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잘못되게 되어 다시 안정으로 가는 것은 영화서사에서 종종 보는 일이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위기로 빠져 또 다른 부정적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정의 미학은 여기서 다다이스트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베이컨은 인간의 형상을 무시한 상태를 그려 인간의 존재성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것은 서구철학에서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근원이 되는 불교철학과 비슷해 보인다. 불교에서 이렇게 말하지? <색즉시공, 공즉시색> 있는 것은 없음이요,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실존성이 있을까? 없을까? 중용의 덕을 강조하는 불교이나 그 돌고 도는 의문은 절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의 손가락처럼 원을 그린다. 그러고 보면 벤야민이 말한 역사적 테제와 유사하지 않은가? 차라리 돌고 도는 것에서 발터 벤야민이 논한 인간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처럼 그것은 멈추지 않더라도 멈추지 않기에 오히려 다시 볼 수 있는 게 아닌지 말이다.

 

 

현대미학을 이룬 것은 단순히 절대적 상징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와 문화, 인간을 지배하는 스펙타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논하게 한다. 중요한 점은 미학은 미의 미학만이 아니라 추의 미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기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가장 추한 사람이 될 것이다. 파시즘의 미학은 자신(들)의 절대적 미가 있다는 자부심이다. 그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미화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 인터넷은 폭력의 시대가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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