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적 조건 - 정보 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이현복 옮김 / 서광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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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동기는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철학사상 관련 도서였다. 기존의 모더니즘 이성에 의한 계몽주의보단 탈계몽주의 내지 탈근대적 사유로 통한 현대사회적 고찰과 흐름을 판단할 수 있었던 도서다. 다소 국내에서 흔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신기롭게 보였다. 그때 이 도서에서 리오타르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일본 인문학자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란 도서로 통해 다시 리오타르의 이름을 새겨들었다. 내가 우연히 리오타르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든 것은 다음의 지문이다.

 

‘커다란 이야기란’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근대국가에서는 성원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여러 가지 시스템이 정비되고 그 작동을 전체로 사회가 운영되어왔다. 그 시스템은 예를 들어 사상적으로는 인간이나 이성의 이념으로,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나 혁명 이데올로기로, 경제적으로는 생산의 우위로 표출되어왔다. ‘커다란 이야기’란 그 시스템들의 총칭이다.

 

커다란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2번 읽고 난 뒤에 그렇게 잘 이해한 편은 아니나 대략적인 흐름을 감을 잡았다. 그것은 1979년에 들어오면서 컴퓨터기술의 발달에서 시작된 담론인듯 하였다. 지금은 인터넷 세대라고 하여 가상의 인터넷으로 동네 시공간을 초월한 교류가 오고간다. 오히려 가상이란 시뮬라크르가 컴퓨터 모니터로 통해 진실의 영역을 침해한다.

 

예를 들어 나로호 발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나로호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보는 것은 근처에 발사하는 장면을 시각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거리정도이다. 아니라면 TV 영상으로 녹화되어 그대로 복사본이 다시 복사되어 원본도 없는 사본이 사본으로서 원본이 된다. 이것이 계속 시뮬라크르의 지속성으로 통해 시뮬라시옹이 된다. 물론 시뮬라시옹 개념은 장 보드리야르에 가까운 부분이나, 리오타르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담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일련의 모던 사회의 계몽이라고 하는 억압성이다.

 

거대한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왜 리오타르의 연구가 아즈마 히로키의 오타쿠 연구도서에 나왔는가?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여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유의 세계를 연구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다고 하여 안노 히데아키와 같은 애니메이션 감독 그 자신이 오타쿠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티로 불릴 수 있는 이유 역시 사유의 정리와 정의만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이미지 재생과 표현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읽으면서 다른 사상가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많은 관련이 있는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영화로 통해 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혹은 복사된 신문으로 통해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의 전달력은 예전처럼 정보를 독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한정적이기에 군중들은 듣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에 그들 스스로 이성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알게 할 수 있으나, 신문의 유통으로 따라 글의 보급은 신문이나 잡지라는 매체로 통해 글을 읽으면서 일방적인 정보가 마치 합당한 것처럼 여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성적 판단이 어긋나더라도 이성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부분은 신문이란 언론들이 공정성을 상실할 경우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든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는 대중심리를 이용한 공작행위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게다가 신문에서 기술복제로 통해 영상마저 복제되자, 영화는 곧 정치적 수단으로서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영상은 글자가 아니고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되기에 그만큼 이해도가 높고 몰입도 역시 높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영상 관람에서 파시즘이란 무서운 집단광기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1979년의 리오타르가 저술했기에 지금 2013년 현실에서 보는 인터넷이란 새로운 광기의 시작이다. 정보의 벽이 없어진 만큼 정보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못하다. 근거 없는 정보와 허위기사가 오히려 사실처럼 되어 거짓이 현실을 지배하는 구조에서 헤게모니의 정당성을 다시 발휘한다.

 

거대한 서사가 과학적 기술에 의해 신화적 요소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바뀐 것이지 사람이 바뀐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리오타르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지식과 권력은 항상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통치기술, 공작기술, 산파술, 수사적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경이 라틴어로 구성되어 있을 경우 성경에 적힌 본래의 의미는 모른 채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로서 오히려 대중들을 통치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컴퓨터가 기술을 보유하고, 대신 그 컴퓨터나 정보수단매체를 얼마나 잘 다루고 아는가에서 상품적 가치를 창출하는 점이다. 정보의 이용에서 특별히 남녀차별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일정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어린이나 청소년도 이용가능하다. 지식의 소유화에서 거대 서사로 보자면 남성중심 문화라고 볼 수 있으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바로 이런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 우리 일상생활을 들어다보아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이가 제법 있으신 분들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정보를 구하고 만들고 있다.

 

그래서 정보의 독점화란 이미 있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나, 아주 특수한 기밀 내지 혹은 국가적 업무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공개될 수 있다. 세사한 글자까지 전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정보의 유무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진보적 사회인데, 그 진보라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진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하기술이다. 보수주의적 자유주의국가라도 과학기술은 보수적 이념이나 진보적 이념과는 상관없다.

 

단지 기술이 좀 더 발전하는가? 하지 않은가? 라는 선택점이다.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리오타르가 보는 새로운 시대의 담론이다. 그것은 일부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에게 열린 민주주의적 방법이나, 토크빌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에서 열린 정보의 공정성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아즈마 히로키에게 돌아가보자.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문화에 대해 포스트모던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그 조건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영역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섬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섬은 인터넷으로 직접적이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란 매체기술의 발달이다.

 

포스트모던한 이유는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 즉 자신만의 정보를 수집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동물화에서는 생산 대신 정보의 소비에 집착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황금만능주의라는 자본을 이용하여 goods의 구입에 정신을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개인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서사에서는 전체적으로 거기에 따라야 하는 정당하지 않은 이유가 존재하므로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상황을 비추어보자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이유는 정보의 집중화가 아니라 분산화다. 정보사회의 시대에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가능해진 이유 중에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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