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밀양 송전탑에 대해서 말이다. 밀양 송전탑이 어떻게 되었든, 자신과 무관한 일이므로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은 것이 현대인이다. 우리가 접하는 생활고로 죽거나 혹은 무척 어려운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내가 가장 증오하고 싶은 인간이 바로 나만 잘 되면 된다거나 혹은 자신의 우리한 떡밥만 찾는 인간이다. 물론 인간은 이성을 따르기 전에 본성적인 이익에 따른다.

 

인간이 비록 사회적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해도 결국 사회적이기 전에 동물이다. 동물적 본능이 결국 인간을 하나의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만든다. 최소한 동물은 자기 종족에 대해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공격하거나 죽이지 않으나, 인간은 서로 죽이기를 한다. 만인 대 만인이라는 인간형의 투쟁의식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닌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던 시절,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어느 정도 동의 하였으나, 반대한 부분이 민주주의적인 요소에서 이성을 중시한 그로서 정치적 참여권을 전 국민참여적인 민주제가 아니라 귀족적 민주주의로 하기를 바란 것이 있었다. 분명 나는 그것을 반대한 이유가 일종의 계급의식에 따라 부르주아만 정치참여권에 해당된다는 인식이 잘못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나 역시 정치권에 대한 참여에서 제한을 두는 것이 맞다고 여겨진다. 정치적인 행보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프랑스인권선언문에서 개인의 자유나 이익을 침해되서는 아니되나, 오직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공공사업이란 것이 진정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들며, 정치적 입장에서 정경유착이란 부분이 계속 뒤따라오며, 특히 지역감정에 따른 이분법적인 형태에서 전혀 무관한 것에도 아전인수격인 파렴치한 정치인들을 볼 수 있다.

 

가령 지역사회에서 개발하거나 유치한 사업이나 행정계획이 국회와 무관하고 시의회나 구의회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좋은 일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 막상 행정적 절차나 업무진행은 그 담당기관이나 부서 혹은 밑에 고생하는 말단이란 점이다. 관료주의적인 부패한 사고방식이 바로 이런 점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올바르지 못한 정치인을 나오지 못하도록 해야 하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그런 정치인이 나와도 여전히 표를 준다는 사실이다.

 

지역감정이란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올바른 정치적 참여를 위해서는 투표권을 제한하는 게 바르다는 점이다. 자치 민주주의국가의 대의 속에서 그것은 특혜와 이권을 부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심정이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투표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투표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차를 이행하여 그것에 만족해야 하는 점이다. 까막눈 할머니나 혹은 무조건 1번이나 또는 정치인의 부도덕함을 보지 않고 당락만 보고 결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국가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토크빌의 말처럼, 정치인에 대한 선거, 출마, 지정 등을 선거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해야 하는 점이다. 투표할 권리를 남용하는 것만큼 위험한 발상은 없다. 선거를 할 수 있는 시험을 보되, 시험에 합격하면 5년 동안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시험을 보지 않으면 투표를 시행할 수 없다. 또한 투표권을 가지고 투표하지 않으면 남은 기간동안 투표권을 회수하고, 5년의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시험1회를 유보한다.

 

시험문제는 기본적으로 헌법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 대한 의식과 국민에 대한 의무와 자격, 그리고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소양이 필요하다. 존 롤즈의 <정의론>을 시작하여 <만민법>이란 정치적 자유주의 국가사회에서 지식인이 가지야할 시민윤리의무를 적은 도서가 있다. 칸트주의에서 비롯한 정치적 자유주의에 도달은 결국 이성의 자유라는 점이다. 이성의 자유가 없는 현실에서 내가 제기한 담론은 무리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정착되어야 어느 정도 나라가 발전을 할 것이다.

 

기본소양과 윤리의무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어설프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나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말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자유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다. 한국에서 그것조차 어려운 세상이니 참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론은 "모에를 얻는자 만이 세계를 구한다!"처럼 마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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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할라스의 <동물농장>과 러시아혁명

   

 

1. 서론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사용된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처음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제작된 OVA(Original Video Animations), 또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는 만화와 게임, 최근에 흥행하고 있는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콘텐츠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필요한 시나리오를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콘텐츠를 이용하는 것만 아니라 신화 및 설화, 역사 및 소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특성상 실사영상과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제한이 없으며, 실사영상으로 보여줄 수 없는 부분까지도 보여줄 수 있으므로 다양한 콘텐츠, 신화 및 설화, 역사 및 소설 등을 이용하여 제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효과적으로 제작한 작품이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영국작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토대로 제작한 작품이다. 작품 특성상 주요등장인물들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농장의 돼지, , , 양과 같은 동물이란 점에서 마치 동물이 인간처럼 말을 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 미학의 독특한 방식을 볼 수 있다.

1999년 미국감독 존 스티븐슨의 <동물농장>의 경우 영화로 제작하였으나, 이보다 45년 전 1954년에 제작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 표현력이 더 좋다는 점이다. 하지만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 제작되던 시기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전에 제작된 작품이고, 존 스티븐슨의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 후에 제작된 점에서 원작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본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 체계에 대한 모순과 부조리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면 만든 풍자적인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더불어 스탈린 체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3대 소설이다. 이중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다른 작품에 비해 분량이 적은 것과 풍자적으로 묘사하여 재미를 준 점이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의 소설을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과 동시에 서사의 전개와 결말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본 리뷰는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비교하면서 작품에서 보이는 러시아혁명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본 리뷰 본론에서 작품에 대해 다룰 목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물농장 혁명과 외양간전쟁

둘째, 나폴레옹과 스노볼의 대립

셋째, 풍차전쟁과 동물농장 혁명

 

2. 본론

2-1 동물농장 혁명과 외양간전쟁

매너농장의 농장주인 존스가 동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매너농장의 동물들이 불만을 느낀다. 이때 매너농장의 최고 연장자인 메이저 영감이 농장 안의 모든 동물을 소집하여 자신이 죽기 전의 유언으로 매너농장에서 동물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현실을 지적하고, 여기에 대해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이저 영감이 죽은 후에 매너농장의 존스는 계속 동물들을 돌보지 않게 되자 매너농장의 동물들이 불만에 쌓여 결국 스노볼의 지휘아래 존스를 몰아낸다. 존스는 자신이 매너농장에 쫓겨난 이후 다른 농장주와 함께 다시 찾아오나 스노볼이 지휘하는 동물들에 의해 다시 쫓겨난다.

애니메이션 <동물농장>의 동물혁명과 외양간전쟁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러시아혁명과 내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존스는 러시아 군주인 차르이고, 메이저 영감은 마르크스, 스노볼은 트로츠키, 나폴레옹은 스탈린이다. 돼지들은 러시아 10월 혁명 시기에 주도적 역할을 하던 볼셰비키들이고, 기타 동물들은 러시아 국민들이다. 등장인물들은 매너농장의 주인과 동물이지만 알레고리적 배치로 통해 우화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최초의 러시아혁명은 1904~1905년 러·일전쟁의 피해로 인해 국가재정이 어려워지고, 물가가 올라가자 19051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생활안정을 요청하는 평화시위를 벌이고 이에 대해 군대가 발포를 하여 수 백 명이 죽고 수 천 명이 부상당하는 피의 일요일이 발생한다. 그 후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가 참전하였고, 참전한 러시아군인들은 보급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희생당해야 했다. 전쟁참전으로 러시아는 물가상승, 고용불안, 물자공급에 차질을 겪게 되었고, 이에 대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이에 대해 군대가 시민들에게 발포하자 19172월 혁명이 발발하고 차르 체제는 마감한다.

19177월 사태 후 케렌스키는 임시정부의 수상이 되면서 코르닐로프 장군을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케렌스키는 볼셰비키에게 쿠데타 제지를 요청하였고,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저지된다. 그 후에 케렌스키는 볼셰비키 및 노동자, 농민에게 강압정치를 실행하고, 191710월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한다.

애니메이션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의 혁명은 1917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하나로 일축한 것으로 2월 혁명에서 차르인 존스만 등장하고, 10월 혁명에서 케렌스키와 레닌을 상징하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레닌과 같이 주도하여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가 <동물농장>에서 동물혁명을 이끈 스노볼로 등장한다. 동물혁명 성공 존스는 이웃 농장 주인을 데리고 습격하는 장면은 외양간전쟁으로 볼셰비키혁명 이후 차르정권 시절의 귀족, 장교 등으로 구성된 백위군이 다른 국가의 지원을 받아 소비에트연방을 위협한다. 트로츠키는 군사인민위원이 되어 내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고, <동물농장>에서는 스노볼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서 외양간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2-2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대립

농장혁명과 외양간전쟁에서 승리한 후 스노볼은 동물들을 이끌고 존스의 집안에 들어간 후에 존스의 집이 살기가 부적당하고 여기고 돌아간다. 그리고 스노볼 존스가 운영하던 매너농장의 이름을 동물농장이라고 짓고, 스노볼은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에 따라 동물농장의 규칙을 만든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다른 동물들이 스노볼을 따르고 있을 때 사냥개의 새끼들을 몰래 거두어 기른다.

스노볼은 존스가 없는 동물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동물들을 이끌고 농장을 관리한다. 스노볼의 지휘 아래 농장은 잘 번창되어 가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스노볼과 다른 동물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스퀼러와 식량을 몰래 훔쳐 먹는다. 스노볼의 농장관리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스노볼은 동물농장 이외에도 다른 농장에도 동물혁명이 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비둘기들을 다른 농장에 파견한다.

스노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물농장에 있는 동물들을 소집하여 공부를 가르치려고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스노볼은 계속 동물농장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고, 동물농장의 미래를 위해 풍차계획을 준비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풍차계획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동안 자신이 몰래 감추어 기른 사냥개를 이용하여 스노볼을 내쫓고 죽인다.

볼셰비키혁명과 러시아내전 이후 트로츠키는 열악한 후진국인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경제적 진행을 위한 NEP(Novaya Ekonomicheskaya Politika)라는 신경제정책을 펼친다. 차르가 지배하던 러시아는 아직까지 농경사회가 중심이었던 점과 소비에트연방과 다른 국가 간의 군사 및 외교적 대비를 위해 공업화가 필요했다. 이때 공업화를 위해 사회주의 이념이던 소비에트연방은 자본주의적인 생산체계인 테일러주의1를 도입하고, 공업화 과정에서 기존 러시아의 부농인 쿨라크 등을 비롯한 농부의 수확물을 필요했다. 처음에 농부들에게 강제로 일정 양을 징발하였으나, 농부들의 반대로 식량을 자유롭게 팔 수 있으면서 쿨라크를 비롯한 많은 농부들이 이익을 보았다.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동물들을 직접 지휘하며 농장을 꾸리는 과정은 실제 볼셰비키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에 큰 경제적 성과가 다가왔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혁명을 반가워하지 않은 농민들은 트로츠키의 진영 반대편인 스탈린에게 지지를 보냈으며, 스탈린은 레닌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카메네프, 지노바예프와 삼두체제를 갖추었고, 트로츠키가 이들 삼두체제에 대해 비판할 때부터 정치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트로츠키가 스탈린과 최초로 엇갈린 사건은 러시아내전에서 트로츠키가 백위군과 싸우기 위해 차르 시대의 장교들을 적위군 지휘관으로 임명과 동시에 강고한 그의 태도다. 그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이 때문에 19193월에 열린 제8차 당 대회에서 붉은 군대의 가차 없는 중앙 집권화에 반대하는 군사반대파가 형성되었다. 스탈린은 이 군사반대파의 지지자였다.2

이후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직책에서 쫓겨내고, 1927년 소비에트 당위원회에서 강제 출당시켰으며, 1929년 강제로 해외로 추방한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이 사냥개를 이용하여 스노볼을 강제로 내쫓는 것은 공권력과 소비에트 당위원회를 장악하여 트로츠키를 내쫓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은 사냥개에게 쫓겨나 바로 죽는 것처럼 나오나, 실제 트로츠키가 사망한 것은 19408월 멕시코에서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한다.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은 동물농장의 식량과 경제 그리고 현실을 고려하여 일에만 몰두하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뒤에서 몰래 키운 사냥개에게 암살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조지 오웰의 원작에서는 스노볼은 암살되지 않고 추방당했으며, 나폴레옹은 동물농장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스노볼과 스노볼의 첩자들이 꾸민 계략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2-3 풍차전쟁과 동물농장 혁명

동물농장의 주인이 된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의 추종자이자 심복이 된 스퀄러는 스노볼이 존스를 데리고 오려는 배신자라고 말하며, 스노볼이 준비한 풍차계획이 자신이 만든 것처럼 동물들에게 말한다. 동물들은 풍차계획을 위해 언덕 위에 풍차건축공사에 동원되었으며, 돼지들은 동물들을 감시하면서 새벽부터 늦을 밤까지 감시한다. 동물들의 식사는 예전보다 양과 질이 줄어들었으나 이에 반해 돼지들의 식사의 질과 양은 좋아졌으며, 게다가 존스의 침대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동물들이 힘들게 일을 해도 농장의 물자는 부족하고, 이것을 알게 된 윔퍼는 나폴레옹과 돼지가 좋아할만한 물건을 들고 온 후에 계란을 가지고 간다. 나폴레옹은 외부와 물자교환을 시작했으며, 물물교환이 되는 물자는 암탉의 계란이어서 암탉들은 불만을 품는다. 불만을 품은 암탉과 몇몇 동물들이 나폴레옹에게 반항하자 나폴레옹은 이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반역자로 몰아 처형시킨다.

동물혁명이 일어난 뒤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축사에서 메이저 영감이 알려준 노래를 부르자 나폴레옹은 혁명이 끝이라며 그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만약 부르면 사형에 처한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독재 아래 동물농장은 외부와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윔퍼가 계속 동물 벌자 다른 농장의 주인들은 모두 질투한다. 다른 농장주는 동물농장에 다시 공격하러 왔으며, 동물들은 이에 반격을 가한다. 그 와주에 존스는 언덕 위에 풍차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파괴시킨다.

풍자전쟁 이후 풍차재건축을 위해 다시 동물들은 일을 시작했으나, 많은 동물들이 죽고 다쳤으며, 이 중 힘이 센 말 복서가 풍차전쟁의 후유증으로 쓰러지자 나폴레옹은 박스를 윔퍼에게 팔아넘기고 술을 받는다. 몇 년 후에 나폴레옹이 운영하는 농장은 꾸준히 다른 동물들은 착취당하고 있었고, 돼지들은 계속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다른 농장의 돼지들은 나폴레옹이 운영하던 동물농장에 방문하여 연회를 즐기고 있으며, 이 모습을 바라본 당나귀 벤자민은 돼지들이 모두 매너농장의 주인이었던 존스처럼 보였다. 벤자민이 이 사실을 다른 동물들에게 알리자 동물들은 모두 돼지들이 모여 있는 저택으로 들어가 혁명을 일으키면서 막은 내린다.

스탈린은 트로츠키 축출 이후 기존의 볼셰비키와 프라우다 신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처음에 신경제정책인 NEP를 실시할 때 농민의 입장을 지지하던 그가 1930년대부터는 오히려 쿨라크를 비롯한 농민들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한다. 스탈린은 소베이트연방에서 최고 권력을 지게 되면서 처음에 러시아혁명을 주도하던 볼셰비키에게 우호적이었으나 뒤로 가면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숙청을 시도한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이 동물에게 고된 노동과 착취를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만이 나타나듯이 스탈린도 그런 불만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모스크바재판이라고 공포정치로 통해 정치적 대숙청을 시작했다.

이때 재판에서 스탈린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두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였으며,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도 자신에게 반항하던 동물에게 존스와 스노볼 같은 존재라며 처형시킨다. 동물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키고, 나폴레옹과 주변 돼지들이 계속 특권을 누리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윔퍼라는 외부 상인과 교역을 시작한다. 본래 조지 오웰의 원작에서는 물물교환은 프레데릭이란 농장주고, 그는 독일나치였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코민테른3에 제시했다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제시했다.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위해 1939년 독일 소비에트연방 불가침 비밀조약을 맺었으나, 2년 뒤인 1941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나치는 소비에트연방을 침공하여 소비에트연방에 큰 피해를 준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는 동물들이 프레데릭과 그의 수하들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많은 동물들이 죽고 다치는 피해를 보았으며, 풍차도 프레데릭에 의해 파괴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동물농장>에서는 다른 농장주에게 동물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풍차는 프레데릭 대신 존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존스로 묘사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9172월 혁명 이후 왕에서 쫓겨나서 19187월 러시아내전에서 암살당한다.

러시아혁명사와 더불어 본래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상이한 내용으로 애니메이션에서는 전개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나폴레옹을 비롯한 돼지들은 계속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많은 동물들은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동물농장> 결말에서 동물혁명이 다시 발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원인은 박스가 풍차전쟁에서 부상당한 후 힘든 노동을 하는 도중 쓰러지는 것을 벤자민이 목격하면서부터다.

나폴레옹이 박스를 동물병원에 치료해주는 게 아니라 윔퍼에게 팔아넘겼고, 몇 년이 지나도 힘든 노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다른 농장의 돼지들이 동물농장에 모여 연회를 베푼 것을 벤자민이 보고 동물농장과 다른 농장의 동물에게 알리고, 모두 돼지가 있는 존스의 저택에 공격하는 것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다른 전개방식이다.

본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442월 탈고를 마쳤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비에트연방은 독일과 계속 전쟁 중이었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과 다른 농장주들이 서로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는 모습에서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1954년에 상영된 점을 고려하면 19537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의 모델이 된 스탈린은 19533월에 사망한 점에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미소 냉전시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존스의 농장에 모인 돼지들은 나폴레옹처럼 독재로 통해 국민을 괴롭히는 공산권 국가의 지도자로 묘사한다. 결국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냉전시기에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자들이 지배자로 있던 소비에트연방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연방 연합국도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독재정치로 인해 대다수의 죄 없는 국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므로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다시 혁명을 일으켜서 돼지들을 타도해야 하는 점에서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당시 공산국가의 체계 전복을 원하고 있었다.

 

3. 결론

<동물농장>의 서사적인 구분으로 나누면 발단과 전개는 동물혁명과 외양간전쟁, 위기는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대립, 절정과 결말은 풍차전쟁과 동물혁명이다. <동물농장>의 서사에 맞추어 실제 러시아혁명사로 따지자면 발단과 전개는 볼셰비키혁명과 러시아내전, 위기는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정치적 대립, 절정과 결말은 1936년부터 1938까지 이루어진 대숙청과 2차 세계대전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의 전쟁이다. 물론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원작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실제 러시아혁명사와 차이점이 존재한다.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체계에 대해 우화적으로 묘사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방과 공산권 체계에 대해 우화적으로 묘사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모두 풍자적인 작품이란 점에서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풍자는 무엇보다 당대성의 서사 장르이다. 풍자가 물어뜯고 비꼬고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은 그 풍자가 생산되어 나온 당대 사회의 실존인물, 사회 환경과 제도, 이데올로기, 사건, 편견, 같은 것들이다. 당대의 것들에 대한 비판, 공격, 회화화가 아니라면 풍자는 사실상 무의하다. 풍자는 동시에 약자의 서사이다. 이 약자는 권력보다는 진실의 편에 서고자 하기 때문에 궁지로 몰리는 약자다. 약자의 이야기이므로 풍자가 두들기는 대상은 권력을 쥔 부당한 강자, 지배 세력과 이데올로기, 지배적 제도와 관행이다.4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약자란 나폴레옹을 비롯한 돼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동물들이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약자는 동물을 비롯하여 스노볼의 모델인 된 트로츠키도 포함한다. 결말이 상이하더라도 차리즘에 의해 억압당하던 러시아 국민이 결국 스탈린주의에 의해 새로운 억압이 대체되는 모습이 나온다. 또한 동물과 인물을 알레고리적인 배치에서 비단 그 동물들이 상징하는 인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폴레옹이 존재할 수 있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이란 이름은 프랑스대혁명에서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킨 나폴레옹 1세보단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인 루이 보나파르트에 더 가까워 보인다. 독재자 1인이 행정부를 통제하여 국가를 지배하는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동물농장>에서 보이는 나폴레옹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나폴레옹과 돼지들은 존 할라스만의 <동물농장>이 아니라 새로운 알레고리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4. 참고문헌

존 할라스, 한창완 역, 존 할라스 유럽 애니메이션 이야기, 한울, 1999.
조지 오웰, 도정일 역, 동물농장, 민음사, 1998

조지 오웰, 정희성 역, 1984, 민음사, 2003

조지 오웰, 오증자 역,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0

아이작 도이처, 김종철 역,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5

아이작 도이처, 한지영 역,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아이작 도이처, 이주명 역,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 역, 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1997

레온 트로츠키, 김성훈 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레온 트로츠키, 정민규 역, 레닌 이후 제3 인터내셔널, 풀무질, 2009

스티브 스미스, 류한수 역,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출판사, 2007

카를 마르크스, 최형익 역,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비르투, 2012

그레고리 엘리어트, 이경숙 역, 알튀세르, 이론의 우회, 새길, 2012

<동물농장>(Animal Farm, 1954, 존 할라스)

<동물농장>(Animal Farm, 1999, 존 스티븐슨)

<트로츠키 암살사건>(The Assassination Of Trotsky, 1972)

 


 

  1. 테일러의 경영체계는 일관작업 배치 매뉴팩쳐와 대량생산의 초기 발전에 조응하는 것이고, 노동에 대한 감독과 극단적 노동자 훈련과 기계와 같은(규칙적인) 반복 작용(공정)으로 노동의 전화, 노동 분업의 극단적 정교함이 특징이고, 상품의 생산 시간 단위의 최소화를 목적으로 한다.
  2. 스티브 스미스, 류한수 역, 『러시아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출판사, 2007, p66
  3. 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어인 comintern으로서 제3 인터내셔널로 국제 노동자연합이 아닌 공산주의 국제연합으로 1917년 10월 혁명을 주도한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창건했다.
  4. 조지 오웰, 도정일 역,『동물농장』, 민음사, 1998,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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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모든 법의 기초를 말하자면, 아니 모든 법을 행하는데 선위에 두는 것이 바로 헌법(憲法)이다. 헌법이란 그 모든 법을 만든 것에 원인이요, 행위이며,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바탕이 되는 근본이다. 그런 헌법이 유린되고, 자학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평화가 있는 민주자유공화국이 아닌 곳이 된다. 자유공화국이란 말은 독재가 무척이나 기승을 부리고 있는 북한에서도 사용하고,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전까지도 해당된다. 소비에트란 단어가 평의회란 뜻이고, 소비에트 당에는 그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 러시아혁명이었으나, 스탈린의 독재관료주의가 들어서면 소비에트는 무서운 감시경찰이 달라붙은 독재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그런 독재적인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20세기에 존재했듯이 독재국가가 비단 거기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않을 시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 변호인은 그런 독재정치에서 살아가던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눈물과 아련한 추억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는 “시는 (개인에게)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영화 <변호인>은 시학에서 말하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의 주인공이 변호인 송우석 변호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서 보이는 그 감동과 더불어 그들이 주인공을 누구로 만들고 싶은 것이냐는 철학적 질문이다.

 

판사가 재판과정에 묻는다. 아니 검찰과 경찰에 변호인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변호인 송우석은 대답한다. “넵,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다. 이 문구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하여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프랑스 혁명가들이 내세운 인권선언문 중에 나오는 단어와 일치한다. 우리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이미 220년 전에 프랑스에서 시작한 그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모든 주권과 권리는 국민 혹은 인민으로 나온다는 근대정치에서 모든 군주제로부터 민주제로 이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라는 사람이 지은 서적이름인 <법의 정신>처럼 법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법은 바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 사람 중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법이다. 헌법이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 만든 법은 오로지 국회의사당에서 의결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다. 헌법이란 국민이 모두의 의지로 만든 즉 일반의지로서 탄생한 존엄한 존재이다. 그래서 장군이 와도 서울시장이 와도 심지어 대통령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 헌법이다. 헌법을 유린한 자는 역사라는 무거운 이름 아래 그 오명을 새기게 되며, 19세기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는 프랑스의 역사상에서 아주 더러운 역사로 남았다.

  

쿠데타에 의한 의회진압과 그리고 국민에 대한 공격은 그것은 곧 자신이 국민의 대표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주인으로서 활동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비합적인 폭력으로서 쿠데타가 아니라 하나의 합법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불법이라면 누구에게 그 부당함을 제기하는가? <변호인>이란 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변호인들이 아니다. 배우 송강호 씨가 연기한 송우석이란 변호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변호하고자 하는 그 대상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문제는 그 주인공들은 너무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며,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벅찬 사람들이란 말이다.

 

길가에 지나가는 할머니, 학교를 가는 학생들, 그리고 소주잔에 한숨을 기울이는 아저씨들, 이 모두가 <변호인>이란 영화에서 내세우고 싶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단지 삶에서 보이는 주인공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지독하게 가난한 삶, 그리고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가면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 이들이 바로 변호인들이 만들고 싶은 주인공이다. 시학에서 언급한 영웅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현재 혹은 현재 이전에 살아간 사람들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에서 우리의 삶은 우리라는 국민주권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것도 국민을 위한 것이나, 법이란 결국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야 한다. 법에 의한 행위에서 변호인이 약자를 돕고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는 것은 인권변호인이 아니라 변호인 자체가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알기 위해서 법을 하기 위해서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란 단어가 필요하다. 철학이란 윤리적인 상대주의적인 사유와 논리적인 이성으로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가끔 그게 어긋날 때도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말을 자주 어른들에게 들었다. 그것도 내 나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인 시절에 말이다. 말 함부로 잘못하면 어디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반병신이 된다고 말이다.

 

삼청교육대라는 무서운 곳을 나는 그 시대 아주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알았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고, 점점 크면서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광주학살을 들었고, 6월 항쟁의 뜨거운 부산과 그것이 시발점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까지도 말이다. <변호인>이란 영화는 겉으로는 픽션이란 영화로 위장하나, 실은 실제의 역사를 근거한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하나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전했는가에서 결국 법의 정신을 되묻는 영화가 된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송강호 씨를 <변호인> 이전에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만났으나, 영화스케일이나 자본력, 연출력과 각본은 분명 <설국열차>가 위라고 말할 수 있으나, 영화 그 자체는 <변호인>이었다.

   

카메라 앵글을 보면 단조롭기 짝이 없는 full-shot과 close-up이 이래저래 쓰인 작품이나, 그것이 하나의 장점이 되었다. 특히 <변호인>에서 카메라 앵글을 extreme close-up을 많이 사용한다. 그것이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크게 전달했다. close-up이란 작중의 등장인물의 표정과 심리상황에 대해 관객에게 거기에 동화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그런데 close-up을 지나 extreme close-up을 사용하는 부분에서 동화를 넘어 하나의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내었다. 작품 내의 송강호 씨의 연기는 감동을 넘어 하나의 승화를 이룩한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홀로 고시에 붙은 상고출신 변호사가 힘든 생활 끝에 유명한 변호사가 되어 부를 누리려는 중에 국밥집 아들의 고문에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장면은 주인공의 새로운 전환에서 우리가 말할 수도 없었고, 생각조차 떠오르기 싫은 지난 날의 아픔이 다시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분노와 증오보단 그것을 넘어가길 바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경감이란 고문전문 경찰을 보면, 그가 과연 가해자인 것은 분명하다.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는 하나의 폭력은 국가주의와 관료주의 그리고 전체의지라는 루소가 제기한 <사회계약론>처럼 바르지 못하다.

  

그는 말한다. 나의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셨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냉전시대의 산물이고, 냉전시대의 피해자이며, 그것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었다. 피해심리로 인한 보상심리는 자신의 폭력성을 휘두르는 것이 하나의 정의로 되었다. 폭력이란 불법이기도 하나, 그것이 정당화 되어 수단도구가 되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정의가 된다. 죄가 없는 자라도 죄를 만들어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그 공으로 통해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 내어 하나의 당위성을 보여주게 된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과연 주인공의 존재성에서 헌법 제1조 제2항의 조목을 떠올린다면 누가 과연 주인공이란 의미를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서거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토대로 각본을 짠 것이다. 유시민이 엮은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부산상고 출신은 맞고, 대전에서 판사를 맡았으며, 변호사를 부산에서 개업하여, 슬하에 첫째가 아들 둘째가 딸은 분명하다. 부림사건에서 변호를 처음 맡아 시민운동가로 활동했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최루탄을 맞은 것도 사실이다. 다른 점은 국밥집에서 몰래 먹고 도망친 곳은 부산이 아니라 울산 쪽이고, 변호를 맡게 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란 점이다.

 

그래서 연기를 맡은 송강호 씨의 입장에서 참으로 어려운 연기가 되어야 했고, 100%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치한 송우석의 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카메라의 연출효과가 매우 저조한 것을 알 수 있는 이유가 처음 영화를 상영할 때 광고가 없이 한 점과 엔딩이 흐르는 화면에서 지원한 스폰서가 거의 부족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미장센은 <설국열차>에 비해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 배경이나 소품을 보면 주막을 제외한 배경은 부산 위주로 했다. 부산 수영구 수영만 요트경기장 옆의 방파제, 영도 영선동의 산을 깎아 만든 집들, 부산에 살다보면 그런 곳을 가끔 들릴 때가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가난한 시기의 모습이 아직도 나는 보고 있다. 게다가 국밥집에서 몰래 음식을 먹고 도망칠 때 송우석이 바닷가 앞에서 토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은 영락없는 영도다리 아래의 선착장이다. 그래서 영화는 카메라의 현란함과 컴퓨터그래픽의 화려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본적인 카메라의 연출에 의존한다. 그래서인지 인상깊은 장면은 송우석 변호사가 고교동창에서 기자를 하던 친구와 싸울 때이다. 그의 어지러운 정신과 정신적 과도기에서 카메라를 over shoulder shot를 보일 때, 송우석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어지럽게 보인다.

 

 

또한 다른 인물이 송우석을 바라보는 화면은 close-up으로, 송우석이 바라보는 때에는 over shoulder shot으로 처리한다. 카메라 앵글에서 송우석 관점으로 보는 세상이란 과연 어느 것이란 말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제일 인상 깊은 카메라 무빙워크는 법정에서 아무도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혼자 헌법의 권리를 변호인으로 말하는 광경이다. walking out-side란 기법으로 피사체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것이다. 낯선 법정, 울고 있는 학생들의 가족들, 실제 재판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과 심한 비인격적 행위로 법정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실제 모델인 된 인물이 겪은 일 때문에 나는 올해 2번을 울었다. 그것도 같은 날에 말이다. 알고는 있지만, 이른바 “원진 레이온” 사건에서 이황화탄소(CS2)라는 독가스를 마신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장애판단을 받았다. 문제는 회사에서 산업재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그 노동자와 가족들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당시 그는 휠체어를 타고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그 노동자를 보고 차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봉고차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노동자의 딸이 울면서 달려와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라는 모습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죽고 “원진 레이온” 희생자가 추모하는 모습이다.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도 역시 선원이었고, 힘든 노동조건에서 귀가 난청이 되고, 열 때문에 피부가 손상입고, 심하게 다쳤다. 그런다고 아무 말도 없이 일만 했지만, 육체는 상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계속 보고 자랐다. 그러면서 힘이 없으면 그저 숙여 살아가는 것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울화통이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아직도 무서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에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어떻게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마지막으로 고문에 대한 장면이 인상 깊다. 고문이 전체 영화의 70%를 차지하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이란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같이 고문하는 자마저 고문당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의 파괴에서 폭력, 수조에 얼굴에 담구기, 얼굴에 헝겊을 두르고 고춧물을 뿌리기라는 비인격적 고문은 볼 때마다 불편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나,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었다는 점이고, 특히나 전기고문과 같이 인간을 반불구자로 만드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국민에게 행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정당하다고 믿는 자들로부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처럼 정의란 단지 폭력에 의해 정당화 되는 가장 비열한 이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19세기 철학자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1793년 여름, 프랑스대혁명의 여걸이며, 장 자크 루소를 사모했던 롤랑 부인이 단두대 아래에 사라져가기 전에 이런 말을 외쳤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작품에서 차경감이 고문하던 진우에게 묻는다. 너의 사상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진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실존주의”라고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의 실존은 결국 개인에 대한 그 자체의 자유이다. 자유가 없기에 우리는 실존적으로 자신의 주인조차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헌법은 일반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지로서 반영된 법이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이 없다. 국가란 무엇이며,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 <변호인>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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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2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진레이온 이야기' 늘 만애비 님에게 듣는 소리이지만 들을 때마다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12-24 12:43   좋아요 0 | URL
다른 것은 모르나. 어제 글쓰면서 원진레이온만 생각하니 울컥하여 눈물이 나덥니다. 노무현대통령의 서거만큼 더 슬픈 게 저런 현실이 아직까지 지속되는 점이죠
 

 

최근에 신작들을 보며 느낀 바가 과연 저 작품이 의미하는 바에서 너무 미소녀 모에 내지 노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좋은 지적과 참고가 된 철학교수 김용석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서사라는 스토리에서 읽어내는 담론으로 통해 어느 이데올로기를 찾아볼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최근 종용한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를 현재 보고 있는데, 본인은 애니플러스에서 감상하고 있으므로 1주일 정도 늦게 보고 있다.

 

이번주에 아마 12화 마지막을 하는데, 작품 내용을 전반을 보면 용자가 되지 못한 남자 1명에 다수의 미소녀들이 모여 그것도 몸매가 좋아서 걸을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릴 정도이다. 몸과 가슴이 별개로 움직이는 작화에서 너무 성적인 부분을 강조하지 않은가에서 우리나라 심의등급으로 18세 미만은 금지이니 아마 그럴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난무한 점에서 이런 작품들을 무한히 까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점이다.

 

얼마 전에 용사 이야기에 대한 작품에서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용자와 마왕이 손을 잡는 <마왕용자 마오유우>,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왕인 <알바뛰는 마왕>, 그리고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까지를 보면 기존의 용사와 마왕이란 존재에 대한 헤게모니 관계가 해체되어 버린 점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계기는 어디서 나올까?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마든지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꼭 그렇게 여길 수도 없다.

 

가령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로 해체주의 철학을 강의한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그 책이 논하고자 하는 취지만 알면 간단하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바로 위의 마왕들의 소재에서 자본의 국경이 없다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마왕용사 마오유우>에서 여자인 마왕은 자본주의 기본적인 대량생산 체계에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을 전파하고, 오히려 상업적인 전략으로 통해 연합세력을 모운다. <알바뛰는 마왕>의 경우 마왕이 오히려 햄버거가게의 점원이 되어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마지막인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용자나 마왕이나 모두 점원으로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국경은 바로 마족과 인간의 경계지점에서 발생하는 대립구간이나, 이 구간에서 모두 자본이 뛰어넘는다. 생각해보면 "자본을 국경을 초월한" 것처럼 생산체계가 과거 미소냉전 체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가 모두 초월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작품들은 다르게 보는 것이 정석이다. 볼만한 게 아니라 보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전후맥락이 필요한 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러시아 역시 자본주의국가체계를 도입했고, 자본주의국가체계에서도 기존의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이고, 중공 역시 국가자본주의가 시장경제자유주의를 병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자면 제일 유치한 작품이란 너무 입맛에 적당히 칠해진 작품일 것이다. 과거에 <케이온>과 <Beck>에서 개연성과 입맛성을 생각했는데,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이데아적인 세계에 많은 것을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보다는 그 문제 자체를 없애고 해결하는 것이 목적을 둔다.

 

 

결국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인해 작품성에 논지를 두고 본다면 어설픈 논리만 나오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그런 문제를 아주 이상하게 꼬집은 작품이다. 마왕이 죽고 죽은 마왕의 딸이 마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서 분명 마왕의 딸이 인간계로 온 것에서 순탄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필연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는 사실에서 진장한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악이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성이다. 과거 미소냉전에는 단지 이데올로기만으로 판단할 수 있으나, 이데올로기가 탈 이데올로기되었다고 해서 그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용사란 평화를 지키고 인명을 구하는 숭고한 임무이나, 그것은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오는 경우다. 결국 인간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삶을 지키는 것에서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용사가 필요하지, 그게 완료되면 용사란 그저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용사는 상당한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으며, 오히려 마왕이 있어야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다. 순간 작품을 보며 우리 사회를 보게 된다.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기, 아니라면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자를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구조를 말이다.

 

라울의 예전동료들은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진 자다. 그런 자들이 장기적인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헤게모니적인 근거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피노를 악마의 군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작품의 피노는 그저 어린애같은 어리광만 피우는 미소녀 마족이다. 그런 피노가 악으로 되는 것은 악으로 되게 만드는 외압적인 요소가 크다. 이런 점을 파악하고 리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세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표면적 구조와 달리 내면적 구조 혹은 차용하는 구조까지 같이 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작품에 대한 고찰이다.

 

작품을 내가 보는데 있어서 항상 검토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요소이다. 가령 아래의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낭만주의 화풍에서 1830년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여신의 존재에서 그녀는 자유의 여신이기도 하나, 다른 존재에서 보면 최고의 마녀이다. 가령 <마법소녀 마도카 미기카>에서 큐베가 마도카는 최고의 마법소녀이면서도 최고의 마녀가 된다고 했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그 상징적 존재가 가장 위대하면 가장 최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절대왕정에서 루이16세는 태양왕의 후손이나, 1793년에는 자신의 의지보단 주변의 상황에 의해 목이 잘리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다면 루이16세가 포악하고 나쁜 왕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의 취미는 열쇠 자물쇠 만들기(장 자크 루소를 그토록 비웃어도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의 책에 따른 영향이 반영)고,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을 염려했다. 하지만 이미 주변에 장악한 봉건귀족의 이권놀이에 더 세금을 거두지 못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혁명은 루이16세가 나쁜 왕이 아니라 힘없는 왕이었고, 경제적 구조로 일어난 혁명이다.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피노를 다시 돌아보자.

 

피노는 아버지가 난폭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고, 힘이 약한 마족을 괴롭히는 것도 부당하게 여긴다. 마왕의 딸이면서 전혀 일반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생각조차 않고, 오히려 시장경제자유주의에서 긍정적요소만 바라보고 있다. 그 가치는 분명 도덕적인 상인윤리를 바탕하는 조건이다. 주변 사회의 약자인 노인에게 친절하고, 어린아이와 친하게 지낸다. 누가 보아도 좋은 성품을 지닌 왈가닥 소녀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하나의 상징적 희생양이 되길 바란다. 왕은 가장 훌륭한 상징이면서도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새 마왕과 용자의 관계를 다시 봐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용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아버지 살해가 정당화 할 수 있는 신화적 이야기로 생각했다.

 

마왕은 나이가 많고 이미 구체계의 지배자고, 용사는 신세계의 지도자이다.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면 공주와 결혼하여 왕위를 이어가거나 혹은 왕위를 이어가지 않아도 왕국의 모든 병사가 대항해도 용사에게 이길 수가 없다. 용사란 신세계에서 새로운 질서이며, 체계이다. 왜 우라노스가 자신의 남근을 크로노스에게 베였겠는가? 제임스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에서 어느 남자가 나무 아래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겠는가? 그 나무 아래 남자는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살해자는 왕이 되고, 몇 년 뒤에 다시 살해당한다. 잘 기억하자. 우리나라 왕족도 가뭄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희생양이 되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용자물이나 용사이야기가 그저 뻔한 이야기만으로 보는 게 좋지 못한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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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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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시절인가?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도서가 처음으로 나온 것 같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다시 1권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왜 이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고 학생들에 추천도서로 선정했는 알 수 있었는데, 내가 다닌 중학교는 불교재단이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기본적으로 불교유산이 상당히 많다. 유흥준 교수는 불교신자보단 문화재를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사학자이다. 본래는 미학을 전공했으나 문화미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미적인 감각으로 통해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은 불교문화에 상당히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가령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들어왔는데, 정치제도적인 구조에서 본다면 원래 한국은 고대정치관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즉 임금이 제사를 직접 지내는 자라는 점에서 건국신화로 통해 보면 그들이 왕으로서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이데올로기 관점을 내세운다. 가령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소유하고, 게다가 무술과 학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당시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중국 역사 중에 삼국지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서 제후들이 왕으로 갈 수 있는 이유는 왕 자체가 하나의 장수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유비라도 황족이라고 하나, 그는 황건적과 동탁, 조조 등처럼 강력한 적과 라이벌을 싸운 하나의 장수이다. 장수로서 무예와 문예가 어울려진 점에서 고대 정치적인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왕은 하나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장수라는 점이다. 왕이 직접 전쟁에서 지휘하고, 선두에서 적을 무찌르며, 정사를 직접 관여한다. 그러나 국가제도가 안정되고 왕의 영역과 권력이 넓어짐에 따라 왕이 직접 전선에 나가거나 혹은 지휘하는 것보단 휘하에 장수로 통해 실시된다. 그러나 만약 그 장수가 왕과 같은 출중한 무예와 지략이 있다면 왕에게 큰 위험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말에 모든 군주의 몰락은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장수들의 반란이다.

 

고려의 왕건 역시 장수이고, 발해의 왕 대조영 역시 장수이며, 조선의 이성계 역시 장수이다. 그런 위험한 정치관계에서 불교의 유입은 왕권의 강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부처나 보살을 왕족이나 귀족에 비유하고 중생을 피지배계급자에게 부여함에서 왕권강화와 더불어 지배체계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크게 번창하고, 숭유억불이던 조선시대에도 왕족이나 많은 양반들도 불교사찰에 큰 지원을 주었으며, 게다가 중으로 출가한 왕족에 학문의 명성이 뛰어난 승려도 많았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혹은 학문적이든 철학적이든 어느 것이라도 후세에 다르게 되면 다른 모습에서 접하게 된다. 당시 매우 신성한 종교적인 요소가 깃든 불교 내지 여러가지 제도의 산물이 지금에서도 강한 종교적인 주술적 도구로 되거나 혹은 예술품 내지 골동품, 더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로 승급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한다. 신성한 것으로 탄생된 문화재는 당시로는 큰 종교적 위력을 가진 상징적 존재이나, 지금은 종교보단 오히려 문화재로서 예술과 문화로서 접근한다.

 

그런 문화의 숨결이 우리에겐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 나름일지도 모른다.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 주변에 넓린 문화재가 얼마든지 많으며, 우리는 사소한 것이 있는데도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여기는 점이다. 거기다가 단순히 보러 온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조형적인 미까지 더 설명하니 이 책은 문화유산에 대한 시각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이다. 한국문화의 한계성에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 스토리텔링을 살리기 위해 역사를 알고, 문화를 알고, 그 현장에 가서 채취와 온기 그리고 그 미학적 감각을 맛보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스토리의 발단이다.

 

사소한 돌 하나에 담긴 이야기와 그 공간에서 생긴 사람들의 시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별개로 보이나, 그 물질적 존재는 우리에게 아직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제일 1번의 고향은 남도기행이고, 남도 중에 큰 답사지는 바로 강진과 해남이다. 강진이면 누가 어떻게 유명한가? 유흥준 교수도 역시 먹물을 먹은 사람이고, 먹물들을 만드는 지식인이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한국에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믿거나 혹은 되고 싶은 자들이 뽑는 한국 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계신다.

 

물론 나 역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지식인이 되고싶었던 지금이나 지식인이 되는 것과 전혀 무관한 20살 전후 시절에도 그 분을 가장 존경했다. 어려운 다산학에 대해 유학으로서 대하는 것은 나의 역량으로 불가하나, 그 분의 업적과 사상을 들여다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보다 약하고 힘든 농민과 백성을 보면 분노하고 탄성을 했던 그 어진 도량, 특히 애절양이란 시는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을 찌른다. 군포세를 내지 못해 소를 빼앗긴 농민이 관아의 폭정에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고, 아낙네는 자신의 성기를 들고 관아에 가서 군포세 면제를 요청하나 비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리고 그 갈대밭의 아나넥의 우는 모습을 본 다산은 그 시를 강진에서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강진이 우리 국문학에서 큰 빛을 내었는가?

 

하지만 그 빛은 빛이 나서는 안 될 빛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아무런 힘 없이 바라보던 귀향당한 정치인의 비참에서 태어난 시였다.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리, 실제로 나도 그 곳에 가서 다산초당도 가고, 혜장스님과 초의선사가 서로 왕래가 있던 백련사(만덕사)에 가보았다. 다산초당에서 보는 강진포구는 아름답지만, 마음에서 우려나오는 그 분에 대한 마음에서 아픔이 스며든다. 강진에서 다산초당을 지나 그분의 외갓집인 해남 녹우당도 나오고, 그런 후에 경주가 나온다.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유흥준 교수가 경주를 알기 위한 3가지에서 신라의 미학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본래 예술문화를 보면 단조로움과 소박함이 시작이라면, 후에 갈수록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신라는 불교문화를 가장 늦게 받았고, 같은 시기에 백제보다 건축기술이나 귀금속 제조기술이 낮았다. 하지만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문화의 유입으로 신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석탑과 사찰의 미는 아주 화려하고 아릅답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보이는 건축기술은 세계를 모두 놀래키고, 에밀레종의 울음소리는 매우 아름다워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은 아예 없다는 일본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리의 문화는 아름다고 위대한 것이 많다. 자치 하면 민족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나, 급격히 산업화가 된 한국에서 전통문화의 씨앗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런 책은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서적인 것이다.

 

그런 반성과 사유의 내용이 은근슬쩍 들어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군사독재의 아픔들이 아름다운 강산에 남겨 천박함을 아쉬워하던 유흥준 교수의 글에서 우리가 과거를 보고 현재를 알아가고,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도 던진다. 그런 의미답게 유흥준 교수도 자신의 집필의 실수를 혼쾌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여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메모도 잊지 않는다. 해외의 문물경험도 좋으나, 한국의 미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다. 물론 모더니즘이란 엘리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한계성은 있겠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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