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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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에 대한 리뷰를 적으면서 아직까지 구색을 갖추기가 어려운 비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평이란 것은 문학에서 다루는 분야이기도 하나 때로는 사회나, 정치 그리고 그것을 많은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영상매체 즉 미디어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비평이란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단순히 인상이나 상징적인 장면이나 행위, 단어나 사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판단력에 의해 사고하고 다시 언어로서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부분을 글로 이루어진 활자본보다는 주로 영상매체, 거기다가 음향까지 입혀진 멀티미디어로 접촉한다. 물론 대부분 기사거리나 구경거리는 영상과 소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보단 영상에 더 큰 정보력을 보여줄 수 있다. TV에 나오는 뉴스앵커나 혹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아가씨와 아줌마들이 열광하는 드라마조차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소리는 계속 이어지지 않으나 영상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소리로 전달되는 인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으로 영상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영상과 소리에서 영화감독 칸단스키는 인간의 감정을 좌우하는 것이 소리가 크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작용하는 소리로는 그 전달력의 지속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소리는 물리적 에너지를 가지는 파동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파동이 멈추는 공간에서 소리라는 에너지는 사라지고, 인간의 청각에 의해 더 이상 소리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진 기억이란 공간 안에 저장된다. 물론 그 저장 공간이 디드로의 <백과사전> 전부를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해도, 결국 소리라는 에너지는 기억의 관념에서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망각의 동물이고, 방금까지 들은 소리의 강력함에도 어느 순간 망각하여 잊을 수 있다. 왜 그럴까? 당신이 운전대를 잡고 시내도로를 주행하는데, 뒤에 매너가 전혀 안 보이는 사람이 계속 경적 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분명 보통 사람들이라면 짜증이 밀려오고 때에 따라서 범죄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 차가 다른 길로 가거나 앞지르게 되어 다시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에 집중하면 그 소리에 의한 감정과 또는 그 일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게 된다. 마음 구석에는 분명 그렇게 시원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소리라는 것은 우리의 정보력에서 계속 사라진다. 어떤 만화책을 매일 1번씩 읽다보면 지겨울 수 있겠지만, 같은 노래를 하루에 1번씩 듣는다고 하여 바로 지겨울 수가 없다.

 

그것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다. 보는 것은 자신의 지식으로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에 대한 고찰에서 얼마만큼 알아보고, 그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느냐의 차이는 결국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판단의 척도 내지 기준, 상황까지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내가 주로 감상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세계의 향연이다. 이미지란 실재하지 않은 존재가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로 통해 보는 세상에서 설사 애니메이션영상이 아니더라도 실사영상조차도 모두 허구이고 가상의 세계다. 그 진실은 1895년 뤼미에르형제가 제작한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라는 작품을 예를 들면 알 수 있다. 당시 흑백필름으로 보던 사람은 진짜 기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 영화를 지금 우리가 본다면 가소로운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라는 것은 거짓의 세계이지만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미지의 세계가 결국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처럼 이미지는 거짓이어야 하겠지만, 그 자체로서 사실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누가 봐도 하나의 새로운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미지의 이율배반에서 우리는 사진의 발명과 사진이 연속촬영이란 기계적 도구, 그리고 디지털시대라는 멀티미디어 공간 구축으로 인해 진실 그 자체는 미스터리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상의 이야기가 사실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 과정조차도 더 이상 우리 대중사회는 인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나의 가상세계가 하나의 진실세계에 반영된 세계처럼 말이다. 왜 내가 드라마와 뉴스를 두고 말하는가? 가령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 작품 내에서 죽게 되면 많은 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실존하는 인물은 죽지 않았지만,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 배우가 어느 행사장에 등장하면 전광석화처럼 팬들은 그 인물에게 모인다. 그의 연기에서 그는 죽었는가? 아니면 현실에서 살아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눈에 비추는 것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아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영상장치의 발달이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장치의 발달과 인터넷의 발달이다.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미디어를 제한적인 공간에서 이제는 제한을 넘어 그 제한 없는 오픈라인이 새로운 데드라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보의 공유에서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어느 자리에서 쉽게 구하고 즐길 수 있다. 문제는 그 정보의 원전이 과연 사실과 거짓을 떠나 진실성을 가지는 것이다. 언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진실보다 공정성이라고 한다.

 

이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라는 매체를 공정성을 떠나 단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동물적인 반응은 이미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단지 인간 그 자체가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에 읽어본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 인문학>은 바로 이미지에 대한 인간사회를 다루고 있다. 이미지라는 것이 예술과 기술, 그것을 미학적으로 보는 미학자의 견해에서 단순히 예술과 미학의 <이미지 인문학>은 예술을 넘어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현실까지 파고 들어간다.

 

처음에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란 단어를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해 우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이미지가 가장 큰 파장을 준 것은 바로 사진기술의 발명과 발전과정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이미지가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를 만들어낸 획기적인 도구라고 해도 사실 사진 이전의 이미지가 엄연히 존재했다. 사실이 인간의 초상화 대신 증명사진을 내놓게 되면서 화가는 사실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넘어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진기가 나오기 전에 분명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에 대해 카메라에 의해 뽑아진 사진이 아니라 화가의 손에서 태어난 그림이다. 역대 왕의 초상이나 귀족들의 모습들은 당시로는 예술적 기능보다는 차라리 역사적 기록을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작품이 되어야 했고, 루이16세의 목을 자른 후에 내보인 바스티유 광장의 그림과, 루이의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묘사한 그림은 이젠 예술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 그림이 루이의 모습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루이는 아니다. 그리고 사진기로 오드리 헵번을 촬영해도 그 사진 자체가 오드리 헵번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흑백사진으로 나온 그녀의 모습과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면서 여전히 그녀의 매력을 느낀다.

 

사진과 영화로 보는 오드리 헵번의 매력은 여전히 후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던진다. 얼마 전 내가 추억의 애니메이션으로 본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OVA에서 라르고의 공주가 오드리 헵번이 나온 <로마의 휴일>을 계속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고 말한다. 가상의 세계에 있는 존재가 실제의 있는 존재를 가상으로 만든 작품을 본 것을 두고 감상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가상의 세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상은 현재 실존하는 우리나, 심지어 우리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공간조차도 또 다른 가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즉 이미지라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구성되기에 이미지라는 것은 가상의 세계이나, 계속 이어지는 영원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연예인들이 육체는 늙어가지만,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에는 나이라는 개념은 크게 다가오지 못한다. 예전의 팬조차도 자신이 늙어가는 것에 대해 인식하나, 그 예전의 자신이 좋아하던 연예인들은 아직까지 그 당시 그 모습의 영상으로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드리 헵번이 나이가 들어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우리의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의 공주님이어야 했다.

 

이미지의 모순이란 바로 우리 인간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에서 소개한 챕터 중에 최근 일어난 사회적 현상을 접목한다. 이미지가 이제는 가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현실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은 다르게 보자면 우리가 관객이 되어 계속 구경해야 하는 하나의 매체다. 이와 달리 실시간적인 이미지의 연속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부여했다. 가령 시위현장에 대한 기사를 보다보면 최근의 큰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실제 그 공간에서 일어난 상황을 알리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규모를 축소하거나 또는 그 상황이 발발한 원인과 사건전개에 따른 결과론적인 견해조차도 왜곡하거나 축소한다. 이런 문제는 미디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력이 필요하고, 그 자본의 뒤에는 권력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를 단순히 거대한 자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만든 새로운 매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팟캐스터나 아프리카 TV 내지 혹은 실시간 중계방송, 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정보가 수시로 올라오는 것을 우리는 항시 얻을 수 있다.

 

그 정보가 확실하든지 혹은 아니던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우리 스스로가 미디어의 영상과 동화되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저기에 있지 않으나 마치 저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영상매체 중에 특히 컴퓨터의 기능은 우리가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역으로 되돌려 보낼 수도 있다. 실시간으로 마이크로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마이크가 없더라도 키보드와 마우스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한다. 문제는 그 상황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관객은 자신이 마치 그 피사체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만약 그 대화가 연결되지 못한다고 느끼면 소외감에 따라 그 대화공간에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넷 공간의 소통은 즉 오프라인이란 실존의 세계가 아니라 가상이란 온라인 세계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그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돋보이게 위해 혹은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처음 본 단어나 용어 그리고 개념이 많았으나 가장 인상남는 것은 게이미피케이션이란 단어다. 영상에서 보이는 대상과 그 대상이 보는 전경이 실시간으로 이어져서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낌을 받는 점이다. 역사라는 대상을 이제까지 우리는 TV라는 매체로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 받는다면, 이제는 우리가 역사의 가운데 내지 만들어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언론정보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진실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정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진이란 영상과 그림이란 영상은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이나, 그 근본은 같아. 그것은 문자라는 텍스트가 지배하던 계몽가치관이 탈락하고, 계몽가치관 이전의 시대로 도래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늙어버린 것이 너무 세련되고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신화라는 mythos는 진실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시라는 것이 역사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도 그런 상황에 될 수 있다는 믿음 내지 가능성이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오던 비너스는 당시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여인의 몸이었을 것이다. 실재하지 않은 비너스를 한 폭의 그림에 담은 화가나 그것을 두고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여자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런 욕망이 화가의 관념 안에서 꺼냈다면, 이제는 이미지의 재구성으로 통해 계속 역으로 인간에게 흘러간다. 가상의 이야기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매개로 우리 인간들의 사고를 좌우한다.

 

<이미지 인문학>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제시된 이론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진이란 가상의 공간은 우리 인간이 그 사진이란 이야기에 빠지게 한다. 문제는 사진이란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느 각도와 방향, 조명과 배경을 두고 다른 식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최근 세월호 침몰사건이란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놓인 헌화가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대통령과 그 대통령의 이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사고로 인해 희생자 가족들과 정부기관 사이에 분명한 괴리감이 자리 잡혀 있으나, 그 많고 많은 헌화에서 왜 대통령이름이 새겨진 헌화가 찍혀 있을까? 바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조차도 어떤 이미지화된 관념 아래 지배받는 것이다.

 

단순한 포착 역시 이미지를 보게 해주는 재미가 있으나, 그 이상의 이미지는 그 이미지 바탕이 되는 이미지가 인간의 관념 아래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다. 진실과 현실적 조건보단 사실로서 만들어진 가상 뒤에 존재하는 커튼은, 오히려 커튼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전혀 다른 것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 폭력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정당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볼셰비키혁명의 지도자이면서 소비에트연방 최고위원에 올라간 레닌은 처음에 스탈린을 인정하였으나, 스탈린이 교활하고 잔인한 인물을 알면서 정치적으로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레닌이 휴양지에서 쉬고 있을 때 스탈린과 사진촬영 했는데, 그 모습이 전혀 친밀하지 못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사진을 서로 자르고 붙여 마치 두 사람이 가까운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레닌의 후계자가 바로 스탈린이기 위해서 다른 볼셰비키들을 제거하는 것처럼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 볼셰비키혁명의 새로운 신화가 되었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이 어둠>에서 나온 내용 중에 레닌(그 어른) 옆에 같이 촬영한 볼셰비키들의 사진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최후에는 레닌과 스탈린만 남는다. 거짓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실로 되어 신화적인 왜곡과 은폐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보다 예술이 우월하다고 했는가?

 

바로 은폐, 왜곡, 억압의 이야기가 왜 지금도 가상의 세계인 이미지로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다가오는 정보를 말이다. 정보의 거짓에 대해 의심하기 보다는 그 거짓에 대한 폭로 내지 비판이 음모론이 되고, 음모론 자체가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나는 꼼수다>에서 거짓과 사실을 떠나 절대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부정이 결국 대중에게 하나의 긍정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되어 계속 그 정보력의 가치가 긍정으로 갈수록 탈정치적인 놀이가 정치를 두고 놀았다면, 이제 그 놀이 자체가 정치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세계가 끝난 후에 이미지라는 가상의 이야기가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에 거짓임에도 알거나 혹은 거짓조차 몰라 가상의 영역이 현실로 침투할 경우 형이상학이란 meta-physics의 한 단계 위에 있는 pata-physics라는 형이상이상학으로 변모된다. 처음에 내가 제기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조차 생각하면 완벽한 pata-physics이다. 실사영상은 적어도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원본과 전혀 무관한 사본을 만듦으로서 파생실재로서 존재하나, 만화와 애니메이션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부재다.

 

pata-physics란 가치로 본다면 2013년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인 PISAF에서 가수 데프콘이 가이낙스와 카라에서 활동하던 사다모토 요시유키라는 만화가에게 장인어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맡은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아스카라는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나 가상으로 만들어내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그리고 게임으로 접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해준 셈에서 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아스카란 인물은 실존하지 않으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스카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이른바 moe라고 하여 실존하지 않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에게 마음이 끌리는 현상으로 실존하지 않아도 마치 존재하듯 대하는 것이야 말로 완벽한 pata-physics가 아닐까?

 

그렇다면 pata-physics 세계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과 실사영상에 의해 조작된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과 무엇일까? 결국 우리 인간들은 이미지에 의해 구성받게 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 대해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부여하거나 그로테스크 요소보단 충격적인 사실을 가상의 사진으로 통해 세계에 알리기도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에서 <네이팜탄 소녀>이란 사진이 반전운동의 계기가 된 점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사실적인 요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20세기 중반부터는 바로 이미지의 세계로 통해 우리의 인식과 삶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또한 사진이란 사실성에서 이제는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로 도입하여 사진이란 단순히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왜곡과 조작의 영역으로 간 것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진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게 해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우리 인간의 신체 안의 조직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으로 볼 수 없었지만, 현미경의 발명으로 미생물을 발견하고, 유전자구조까지 발견하여 유전자공학까지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전자구조를 발견해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의 영상으로 보고, 그 유전자구조 조차도 가상의 이미지로 봐야 했다.

 

일상 자체가 이미지로 의해 현실적 조건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수술실의 bed 위로 메스를 대지 않으면 뼈의 골절을 제대로 찾지 못한 시절이 있는 반면 지금은 MRI나 CT 영상기기로 통해 뜯어보지 않은 채 영상으로 판독한다. 디지털기기의 이미지가 결국 우리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존재해주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 “나는 가상이다. 고로 존재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사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 그 자체만의 사실이란 점에서 <이미지인문학>은 미학적인 시선으로 단순히 예술을 넘어 사회라는 그 자체를 보게 해준다. 진실의 공간이 가상의 이야기로 변질될 때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술이란 세상을 광학적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그 광학에는 사진기술이나 방법, 그리고 그 의도와 무의식적인 요건들이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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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6
임진주 지음, 임애주 원작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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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나는 대략 10권 정도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 등장인물 중에서 도대남을 비롯하여 안승호 같은 남자들이 등장한 만큼 더 등장할만한 독특한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이번에 보인 <금지소년> 6권은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연재종료가 되었다. 만화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 작가의 후기에서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약 2년이란 시간동안 선보인 <금지소년>의 종료는 그저 임애주, 임진주 자매의 다음 작품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작품의 종료되었지만, 작품에 대한 그 자체적인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갈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6권에서 전혀 끝나기가 전체적인 서사에서 어울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주말에 포푸리 카페에서 포푸리소녀로 활약하는 나운이의 모습이 그렇게 억지로 흘러가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작가가 보인 개그요소는 상당히 기발한 위기모면과 엽기적인 상황 그리고 나운이의 동생인 나솔이의 음흉한 속내였다. 그런 조건들이 붙어있었기에 <금지소년>의 재미는 충분히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금지소년> 6권에서 그런 무리한 종료라는 무리수는 이야기 흐름이 억지스럽게 만든 만큼 마무리가 다소 어설프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작화구조에서 본다면 <금지소년>은 기존 한국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부여한 것 같았다. 아니 일본 만화책에서도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못한 요소도 보였다. 작품을 보면 만화 칸과 칸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보이는 클로즈업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만화 1칸에 들어가는 얼굴의 표정이 아주 풍부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인물은 마은성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나운이와 신류아의 표정이 가장 두드러진 것 같았다. 이야기의 전개로 풀어나가는 것이 어려운 만큼 작화에서 많은 노력이 보인 것이다. 수영장에 입수하는 비키니의 신류아가 물에서 나온 후의 머리모양이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은성의 만남에서 옛날 생각을 하면서 나운이와 대화하는 신류아의 표정은 매우 풍부했다는 점이다.

 

1권부터 생각해본다면 전형적인 포커페이스로서 겉은 요조숙녀인 인기만점 여학생이나 속은 매우 오만하고 냉정하다. 그런 신류아가 나운이의 만남과 더불어 점점 사람이 바뀌어가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체 흐름이다. 신류아의 회상과 신류아 자신에 대한 고백에서 그녀는 본인을 자각한다. 옆에 아무도 없는 화려한 자신의 모습에서 진정한 친구들을 찾았다는 점이다. 진짜 친구는 도저히 비켜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몸과 마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을 말이다.

 

공주와 기사에 대한 관계에서 <금지소년>은 공주(신류아)와 공주(포푸리 소녀), 혹은 로미오(신류아)와 줄리엣(포푸리 소녀)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분명 남녀의 신체적인 성적인 구분이 되어 있으나 사회적인 위치에서 보이는 행동에서는 남녀의 자리는 서로 뒤바뀌기도 하나 원래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푸리 소녀는 계속 포푸리 소녀로 남아있어야 했다. 포푸리 소녀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신류아의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은 포푸리 소녀가 마은성의 싸움에서 쉽게 들킨 것이 아이러니했지만, 변태로 몰린 나운이를 위해 신류아는 은성에게 “남들이 뭐라 하든 저 녀석은 제가 본 남자들 중에서 가장 멋진 남자예요.”라고 한다. 남자 중에 남자, 가장 멋진 남자라면 남자의 가치는 도대체 어떤 것에 의해 매겨질 수 있을까? 부유한 영애인 신류아와 가난한 고학생인 나운이의 관계에서 작품은 처음에 온달 콤플렉스(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어로 여자가 신분이 낮지만 남자가 여자에 의해 성공하는 남성의 욕망)로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결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운이는 그 어떤 경제적인 조력을 신류아에게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통해 받은 티켓이나 쿠폰으로 신류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류아가 부유한 집안의 영애일뿐, 신류아라는 인간 그대로 봐준 것이다. 물론 신류아가 긴 검은머리와 날씬한 키와 멋진 몸매를 가진 아이돌 같은 소녀다. 과거의 가족에게 있던 비극이나 혹은 남에게 미움을 산 것을 생각하면 신류아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무의식 속에 뿌리박힌 공격적인 태도, 항상 신류아는 나운이에게 강압적으로 행동했다.

 

사디스트적인 신류아, 마조히스트적인 나운, 하지만 두 사람이 깊은 공감이 이루어진 이유는 서로만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남자를 벗어나기 위해 포푸리 소녀가 필요한 신류아, 어느 순간 나운이에게 의존하는 순간, 신류아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친절을 베풀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벽에 가두어 외톨이이던 신류아가 세상과 이어지는 교량은 포푸리 소녀인 점에서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고, 인간은 서로 위로해주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얻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항상 웃거나 놀 때만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 드러낼 수 없는 깊은 좌절과 허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람을 말이다. 물론 신류아만이 그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언제나 학업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동생을 돌본다고 자신의 삶에 아무 것도 없던 나운이는 신류아라는 검은 태양을 만나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작품은 전형적인 서사적인 패턴이 정해져 있기에 다서 진부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책을 보면서 작가가 패러디(풍자적 모방)나 페스티쉬(유희적 모방)를 잘 넣은 것이 보인다. 가령 포푸리 소녀의 월급이 없어진 것에서 <명탐정 코난>이란 만화를 인용하고, 포푸리 소녀가 항상 두 손에 음식을 들고 가는 것은 <란마 1/2>에서 샴푸라는 소녀가 음식을 들고 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생활형 개그에서 도대남의 집에 가서 누가 더 구두쇠인지 겨루는 장면도 많이 나올 것 같은 설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작화를 보면, 포푸리 소녀가 분명 여장남자이라도, 완벽한 여자의 몸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1권부터 시작하여 6권까지 지켜본다면 포푸리 소녀의 골반은 남성의 형태가 아니라 여성의 형태로 계속 작화되어 왔다. 작가의 작화에서 포푸리 소녀 이외에 정상적인 수영복을 입은 남성들은 일반적인 남성들처럼 다리형태가 일자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용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은성에게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서 힘겨워하던 나운이 앞에 신류아가 나타날 때, 2사람은 옆에 있지도 않은 포푸리 소녀의 모습을 본다.

 

포푸리 소녀는 나운과 신류아의 손을 서로 잡고 둘의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자로서 나운이는 또 다른 자아인 포푸리 소녀의 존재를 받아들인 점에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 성적인 위치에서 포푸리 소녀가 마은성을 비롯한 옆에 있던 남성들에게 강한 유혹을 왜 펼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분들이 특이하게 여겨진 것은 신류아가 로미오 복장을 할 때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기개를 보여준 것처럼 포푸리 소녀는 여자보다 더 여자다운 유혹으로 다른 남자들을 유혹한다.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란, 바로 남자가 바라는 여자이기 때문에 포푸리 소녀는 충분히 남자가 좋아할만한 행동으로 남자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설정에서 작가가 바로 자매라는 점에서 다소 과감한 표현을 했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작가의 과감한 표현력은 6권 맨 뒤의 후기 2번째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운이의 꿈에서 나운이는 여자가 되고, 신류아는 남자가 되어 행복한 커플 모습으로 나온다. 악몽에서 깬 나운이는 안심하나, 꿈에서 등장한 커플은 “후후후 꿈이 아니지롱” 하며, 반전을 이어간다. 작가는 내심 남녀의 입장이 바뀌거나 혹은 백합 또는 BL장르가 은근히 내비추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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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2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6-12 23:09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美學에 대해 생각하면 일단 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미의 미학, 추의 미학, 그 사이에 줄달라기 하는 세상만사의 존재적인 가치에서 美라는 것은 결국 양이 크다는 (羊 + 大) 의미이다. 이에 대해 판단하면 아름다운 것의 시초는 제사에 대한 가치, 제사라는 것은 의식으로 통해 신과 의간을 연결한다고 하나, 신이란 존재로 통해 인간의 공통적인 무의식을 엮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양이 크면, 제사에 바치면 좋은 제물이고, 아름다운 것은 제사에 동원되는 희생양의 가치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자면 사회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이 미학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으면 합목적성에 대해 판단하여 그 가치에 부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대해 연구하는 미학을 영문단어로 표현하면, 우선 영어로 보면 estetics이다.

 

거기에 반하여 귀엽다는 것은 cute 내지 charming으로 표현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beautiful과 뭔가 다르다. 결국 estetics이란 미학은 단순히 앞의 영문단어와 달리 외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외적 영역과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미학에 대해 살펴보면 미적 가치는 외재미에 대해 분명 포함하고 있어야 하나 내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

 

<판단력비판>에서 장 자크 루소의 <학술과 예술에 대하여>를 참고하여 저술한 동기는 결국 미학이란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어야 하나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코스튬 플레이에 대한 최근 동향을 보면 estetics적인 가치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cute 내지 sexy, charming만을 추구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문제는 미의 가치가 단순히 이분법적인 가치에 의해 추와 미를 두고 추를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지는 추의 미학이야 말로 진정한 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근 코스튬 플레이의 이미지를 보면 여전히 미의 미학만 추구하기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게 아쉽다.

 

단순히 미소녀 캐릭터에 맞춘 외모나 몸매, 의상과 분장은 모델로서의 여성으로 매력적일지 모르나. 자신의 존재를 소멸하고, 대신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흉내내어야 하는 모델로 본다면, 신화의 네러티브에 의존하는 욕망에 충실하다. 여러가지 기원이 있겠지만, 문화인류학적으로 고대 전사를 추모하거나 또는 그들의 정신 내지 의지를 가지기 위해 후대의 인간들이 앞세대의 인간들을 따라하는 행동을 한다.

  

코스튬 플레이는 결국 동경심 내지 존경심이 바탕이 되겠지만, 인간에게 이분법적인 관념에 의한 적용에서 좋은 것만을 추구하기에 미의 미학에 접근하려고 한다. 하지만 미의 미학에서는 예술이 없는 것은 비판적 요소로 통한 비판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우리편이 멋지고 좋기에 적을 무찌른다. 신화적 요소가 다분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결국 그 신화란 실제의 역사를 은폐하고 허구 내지 거짓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현실에서 표현하지 못한 욕망이 신화에서는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되기도 하나, 그것으로 인해 절망으로 빠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서 라이오스를 죽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운명이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신화이나, 많은 신화에서 이분법으로 나누어진다.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적은 대다수고 아군은 소수이나, 막상 그 소수의 아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다.

 

신화적 날조로 통해 현대적인 미디어는 실제의 판단력을 은폐하고, 절대적인 허구적 가치를 우위에 둔다. 코스튬 플레이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영웅적인 존재다. 소수의 존재들이 다수의 악을 저지하나, 세상은 악이 딱하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이라고 여기는 적들조차도 자신에게 정의가 있다고 한다. 결국 폭력이란 수단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영웅의 폭력성이야 말로 하나의 정의가 되는 셈이다.

 

적은 대다수라고 했지만, 가상의 이야기지, 그 안의 이야기에 담론에 빠지는 사람들은 대다수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결국 하나의 정의이고, 그들의 신화적 욕망에서 그렇게 되고자하는 욕망에서 코스튬 플레이어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자면 estetics적이 요소에 대한 아름다움이란 없고, 단지 beautiful 내지 cute만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을 보는 순간 예쁘고, 귀여운 것에 의존하게 된다. 일어로 따지면 가와이이로 이어지는 셈이다. 일본에서 우츠쿠시라는 단어가 있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극장판으로 만든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감상하면, 거인 여성인 멘트라 한 전사에게 지구 파일럿이 우츠쿠시라고 한다. 자신보다 몇 십배나 큰 거인전사여성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cute 내지 beautiful이 아니라 estetics로 보는 게 맞다.

 

estetics이란 미학은 철학의 칼로 예술을 고찰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철학적 지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보이고 열린다. 내 한계로 보자면 아직 길은 멀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넘어오며, 예술적 비평이란 일정한 틀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새로운 것으로 통해 다른 관점을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에 대한 퀄리티 논쟁에 대해 따지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가이다.

  

전에 진중권 교수가 시네21에서 비평가는 누구인가에서 미학적 가치가 없는 코스튬 플레이 문화는 구입자로서 비평가일 것이다. 결굴 자본력에 의한 카메라, 외재미에 의해 정해지는 모델의 구조에서 말이다. 비싼 것이므로 찍을 것이고, 예쁘고 귀여우므로 찍힌다. 그 자체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겠지만, 미학적 요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어렵다.

 

20세기에 들어오면 비평의 논리에 급진적 변화가 생긴다. ‘작품이 기존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작품이 기존의 규칙을 얼마나 일탈했느냐’가 비평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예술문화다. 과거의 비평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판정했다면, 현대의 비평은 작품이 얼마나 ‘새로운지’를 판정한다. 저마다 새로움을 표방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새로움이 어느 것인지 가려내는 안목. 그것이 현대의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된다.

출처 : 시네21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1558 

 

진중권 교수의 발언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미학적 관계에서다. 기존 20세기 이전까지는 얼마나 부합되는 것이라면 20세기 중반에 나타나가 소멸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반미학에서 이제는 탈미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로코코 시대의 그림이나 낭만주의 운동의 그림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그것만 물고 늘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로테스크적인 요소에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그것은 새로운 판단으로 이어져 우리가 미쳐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준다.

 

공각기동대 카미야마 켄지 버전의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을 소재로 촬영한 이웃의 사진을 보고 전에 내가 환호감을 느꼈는데, 어제 밤에 잠이 안와(6월 1주 휴일에 너무 잠만 잔 게 원인) 다른 블로그의 글이나 그림 등을 보면서 다시 본 후 생각 좀 정리했다. 그 분의 사진에 결코 cute나 beautiful을 내세우지 않았다. 단지 공안9과에서 근무하는 요원의 모습만 등장할 뿐이다. 요원이 어둠을 토대로 도시에서 공안업무를 하니 카메라 앵글도 재미있었다.

 

왼쪽보단 오른쪽에 치중한 앵글, 피사체가 중앙이 아니라 하단에 치중한 앵글 등은 작품 상황에서 요원이 행동하는 작전이 매우 긴장감이 넘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도시배경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피사체를 주변인물로 설정하는 것은 매우 작품성격에 합당하다고 본다. estetics적으로 본다면 사진 이미지 속의 구도, 조명, 동작, 배경, 소품 등과 같은 미쟝센을 보면 작품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사이보그는 얼굴의 표정이 없고, 단지 명령만 수행할 뿐이다. 언캐니한 등장인물로 통해 어둠의 도시를 촬영한 코스튬 플레이어와 사진사 분에게 대단함만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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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도서모임서 만난 친한 사람들이랑 만나 저녁시간을 보냈다. 내가 마신것은 크루져 블루 보드카 아니 맥주인가? 알콜도수가 5도이고 330미리리터에 내가 한병반 넘게 마신다고 취할 리가 없는 양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내 몸에 취기가 오른다. 날이 약간 습하고 찬바람이 부는 초여름, 오오츠크해의 냉한 여름기운은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내 뱃속에 알콜로 적신다.

이유 없이 오늘 Gary moore의 블루스기타가 귀를 뚫고 내 뇌를 강타한다. blues를 들으며 온갖 잡생각이 난다. 지난 시간 그 속에서 멍청하고 어리석고 비참한 나를 말이다. 물론 태초의 블루스 사운드에 내 기분따위는 하늘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리 무어의 기타소리는 왜 그리도 내 속을 긁어대는지! Blues guitar는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안에는 인생이 녹이있다. 씁쓸햐고 싱거우며 때론 깊은 짠맛을 낸다.

아니 블루스음악엔 세상의 모든 물맛이 있다. 내가 맛보지 않은 에비앙, 독일과 스위스의 석회질이 가득한 물, 북극의 차가운 얼음, 인간이 살 수 없는 깊은 해저의 소금물까지! 블루스는 단지 그 자연에 존재하는 물 그 자체다. 한순간의 위선이나 거짓은 블루스의 맛을 우려내지 못한다.

곡우에 그 이른 새벽녁에 일어나 어리고 어린 차나무의 잎의 향긋하고 떫은 맛이 블루스에서 난다. 잎이 아닌 귀로 음미하나, 그 맛은 차의 맛처럼 달고 쓰고 짜며 때로는 쓰고 상큼하다. 미스터 기타 크레이지 게리 무어를 추모하며, 이 글을 게리 무에게 바친다.

 

위 글은 집에 오면서 내가 모바일폰으로 작성한 글이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적고 싶은 글은 서울 교육감에 대한 내용이다. 고승덕 변호사! 내 친구 중에 승덕이란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동창에 중학교 동창에 고등학교에서 잠시 멈추다가 대학 졸업 이후 다시 재회한 내 친한 친구 중에 하나와 같은 이름이다.

 

고승덕 변호사 그의 이미지와 얼굴은 좋은 인상으로 남았지만, 지금 그 분의 따님에 대한 과거에 의해 아마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기나긴 상처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글을 남기는 것은 그분의 아내의 형제이신 분이 트위터에 올린 글에 대한 비판이다.

 

왜냐하면 교육감은 나만의 아이, 내 주변의 아이들을 사랑해서만 가능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오덕들이 오타쿠라는 단어가 생기게 해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시작한 마크로스 시리즈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와 내 주변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퍼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승덕 변호사는 분명히 자신의 현재 아이와 자신의 주변 가족과 친구들의 아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

 

지만 교육감은 자신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사랑해야 한다.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저 기본에 불과하고, 그것을 만족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교육감이란 위치는 포인트 자체가 벗어난 것과 같다. 과연 나만의 주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아이들을 사랑했는가? 단지 그 질문은 고승덕 변호사보다 그분의 처제가 되는 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분명 처제분의 트위트 글을 보아서는 고승덕 변호사는 자신의 소유 아래서의 아이들과 주변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는 범인류애적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선거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일반의지가 아니라 전체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반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일반의지로서 보여준 것이 투표가 과연 몇 %일까 궁금하나, 진정한 일반의지라면 생각해야 한다.

 

교육감이라면 우리나라 교육법을 존중해야하고, 우리나라 교육법에서는 홍익인간 정신을 키워 인류애적인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세계인류의 연합인 UN의 가치는 커녕 자국의 인류애조차 짓밟는 한국에서 과연 교육의 가치란 무엇일까?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교육의 가치는 중요하다. 교육에게 모두에게 열려야 보편적인 기회의 균등이 주어진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역대 인물 중에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변호사가 되거나 혹은 군인이 되어 그 길을 얻은 자도 있다.

 

하지만 지금에서 가난한 농부나 노동자의 아이들이 그런 길로 가는 항로는 과연 존재할까? 성공한 자만이 성공을 해줄 수 있는 주장은 나름 납득이 있으나, 그러면 거기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나? 안타깝게도 이런 기회나 방법조차 이미 박탈된 자도 많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란 중요하다. 그것에 의해 성공한 자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의 방법과 결과는 너무 단순하고 개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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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즐거운 살인>이란 책을 소개받았을 때,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제목 자체가 소설과 같아 보여, 마치 살인이나 미스터리 혹은 탐정물에서 나올 것 같은 제목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문학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문학에 대한 도서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사회학적인 요소로 통해 인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더불어 범죄가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고, 그 뒤에는 범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추리 및 탐정소설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도 보여주었다.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만화의 기원을 대해 먼저 다루고 싶은데, 그 이유는 만화의 시초가 거의 당시 풍속에 대한 민중의 시선 내지 또는 풍자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만화의 시초에서 당시 사회의 그림을 보면 특이한 것이 사형에 대한 장면이다. 사형 이전이나 사형 집행 순간 또는 사형이후의 모습이다. 사형에 대한 그림으로 내가 생각나는 것은 루이16세가 바스티유 광장에서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는데, 그 루이16세의 목을 어떤 남성이 잡고 군중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인상 깊은 장면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혁명 이후의 성난 민중들이 왕비의 지인이던 어느 귀족부인의 잘린 목을 창으로 꽂아 왕비에게 보여준 그림이다. 예술이란 것이 결국 당시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시 그리는 사람들에겐 예술이란 관념이란 보단 하나의 재미 내지 기록에 가까웠을 것이다.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어느 대상을 그리는 것은 신성한 인물임을 부여하기 위해 예술작품이 태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대혁명 전에 로베스피에르가 삼부회 소집이후 입헌제를 여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거나 또는 위에 언급한 루이16세의 처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테니스의 코트의 서약은 미술가가 미술로 그린 것이나 당시에는 기록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러나 지금에 보는 그 그림은 위대한 문화재일 것이다. 그렇듯이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적 상황이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문화나 제도, 그리고 우리 인간이 즐기는 문학이나 예술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이나 예술운동에서 로코코에서 낭만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기는 것 역시 시대에 따라 흘러가는 하나의 조류다. <즐거운 범죄>에서는 바로 그런 문학의 흐름에서도 범죄에 대한 문학에 대해 저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은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문학이나 혹은 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생활을 변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생활 그 자체가 문학이나 문화라는 것을 변모시키는지 다소 난해한 요소가 있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본다면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와 달리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 즉 이미지가 매개된 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생활은 이미지에 의해 즉 있지도 않은 가상적 존재에 의해 현실적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즐거운 범죄>를 작가의 의도가 어떠한들 초반에는 문화유물론적으로 간다면 후반에는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의 도입에 따라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대혁명 시대를 거론하는 이유는 당시는 자본주의 도래하던 시절로,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제 아무리 능력과 자산이 있어도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봉건주의라는 모순 아래서 그들이 열어갈 수 있는 시대는 한계적이다.

 

또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맨 처음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일화처럼 다미엥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당시 봉건사회의 범죄자들은 범죄자로 취급당하기보단 오히려 민중의 대변자로 통하기도 했다. <즐거운 살인>에서 목록을 보면 영웅에서 악당으로 혹은 악당에서 영웅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인간은 개인에 결정에 의해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에 인간은 그 사회의 거대한 조류에 부딪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있지만, 그런 요소도 사회적인 조건에 부합되어야 움직이는 것이다.

 

범죄로 인해 교수형이 처해진 사람이 광장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설파한다. 그는 왜 이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광장 앞의 많은 군중들은 그에 대해 어떤 때에는 조롱과 비난을 퍼붓기도 하나, 때로는 교수대를 탈취하여 범죄인을 구하기도 한다. 범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단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 범죄의 단죄보다 더 큰 범죄자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당시로서 분명 납득이 가는 상황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계몽주의사상가의 지식에 의해 일어난다고 해도 그 힘의 원동력은 파리의 성난 군중이었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은 1789년, 1830년, 1848년, 1871년에도 이어진다. 혁명의 원동력이 일어난 것이 분명 계몽주의철학에 의해서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이전에 중요한 것은 민중의 생활에서 보인 비참함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게 되면 절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식량을 구할 수 없기에 저지른 생계형 범죄이고, 그 대가는 아주 긴 교도소 수감과 수감 이후의 감시다. 감시의 대상은 일을 할 수 없고, 또 다시 범죄의 길로 빠진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을 보게 되면, 사드가 만든 이야기도 하나, 당시 권력층의 부패나 하층농민들의 생활을 다소 알 수 있듯이 누가 더 나쁜가에서 개인의 존재보단 오히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범죄소설이 처음에는 개인적 원한이나 증오, 이익을 위한 하나의 개인적 영역이었다면, 시대가 흐르면서 범죄자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단지 붙잡혀야 할 존재, 모든 소설의 시점은 탐정 내지 일부 영웅이다. 중요한 점은 작가가 잘 지적한 것처럼 탐정이나 주인공인 사람은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탐정업무나 추적하는 것은 평소 자신의 생활이 업무로 인해 자기 하루일과가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범죄자는 처음에는 그런 대상을 피해 도주하겠지만, 결국 상황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경우 주인공의 시점은 자베르 경감을 비롯한 경찰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자인 장발장에게 부여된다. 장발장이 처해진 시점은 비참하고 억울하며,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이다. 장발장은 항상 세계에 대해 증오를 가지게 되나, 자신을 용서해준 신부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걷는다. 하지만 자베르 경감의 추적에서 결국 둘은 만나고, 장발장은 자베르를 헤치지 않고, 오히려 용서로서 그를 대해준다. 그래서 자베르는 자신이 믿은 법의 정의에 모순을 느껴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범죄라는 것이 왕정시대에는 개인의 이기심 내지 원한, 질투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자본주의 시대로 오면서 범죄는 단순히 생계에 대해 이루이지고, 개인적 목적이 아니라 생계에 대한 문제이었기에 결국 범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조직성을 띠게 된다. 마피아의 구성에서 그들이 범죄자로 된 이유는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서였으나, 그 생계 부분이 해결되면서 거대한 범죄조직으로 형성된다. 당초 피난민 내지 외국군에 의해 억압당하던 원주민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이런 대립구도는 계속 세력 확장으로 이어지고 결국 범죄조직은 자신의 생계가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범죄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에서 집단적으로 이어지면 그들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인 폭력으로 동원하게 된다. 미국이 밀주법을 시작할 무렵 범죄조직들은 밀주 내지 혹은 밀주가 어려울 경우 마약, 매춘 등에 손을 대었으나, 추후에는 합법적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범죄조직이 공공사업, 건설사업, 식품산업 등 많은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법은 제대로 된 방법이기보단 기존 시장체계에 들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이거나 로비가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가령 일본군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 중에 하나가 자국의 경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헌병과 야쿠자가 결탁하여 조선인들의 상업을 고의로 방해한 점이다. 범죄조직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등에 업을 때 심각한 폭력이 이제는 폭력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이런 방식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에 동원되고, 이제는 합법적인 기업도 범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온다.

 

특히 정경유착이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고, 특히 대규모 병참산업이나 건설사업, 또는 공공사업에서 투입된 요원이 처음에 이용당하다가 오히려 제거되는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에 윌 스미스의 주연의 <enemy of the state>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불법적으로 국민을 불법도청 내지 감시를 하는 것에 대한 음모를 특수요원이 저지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로 나온다고 해도 영화 자체가 소설이란 텍스트를 문자서사에서 영상서사로 전환했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국가 내지 대규모 자본기업의 범죄를 다룬 영화는 계속 나온다. 범죄의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그 규모에 따라 소설이나 혹은 그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변화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요건에 따라 움직인다.

 

범죄소설이 초반에는 인간 개인에 맞추어졌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개인적 영역을 떠나 대규모로 이어지고, 특히 국가의 개입은 피할 수 없는 소재다. 국가 그 자체보다는 그 국가조직을 움직이는 관료들의 이익이 범죄소설의 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간의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겠지만, 그 법이 법으로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사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고, 인간의 사고를 결정짓는 것이 이성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라면 결국 국가관료 조직이 범죄조직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범죄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나 해체 이전의 소비에트연방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자신과 다른 세력이나 혹은 제3국가에 무기나 자금을 부여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백위군에 지원한 외국군이나, 베트남전의 통킹만사건,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경우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그 군부 쿠데타 세력이 다른 국가에게 군사훈련과 지원을 받은 것이다. 범죄적인 부분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 국제법의 위반이고, 폭력적 방법으로 합법적 정부를 전복하는 것 역시 불법이다.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것이나, 폭력적 수단을 가진 자들은 결코 피지배계급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력에 의한 수단에서 범죄, 스릴러 소설은 이제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그 중간에 등장하는 요원과 스파이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스파이물의 특징은 자국의 주인공이 다른 국가에 의해 자국의 위험을 지키기 위해 투입되므로, 상당히 내용이 보수적이란 점이다. 이런 범죄소설을 보면 결국 죄라는 것을 다루게 된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이 당시 사회의 비판적인 견해를 다룬 작품이 있지만, 대부분 범죄소설에서 등장하는 범죄인들은 특수한 이익이나 목적을 가진 점이다.

 

개인적 영역에서 이렇다면 집단적 영역에서는 범죄가 하나의 사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실제로 폭로나 수사에 의해 국가가 범죄를 일으키거나 용인하는 경우가 분명한 사실이다. <즐거운 살인>에서 미국 항공기제작 기업인 록히드 마틴이 일본 정치인에게 거액의 뇌물을 준 점에서 뇌물의 수여자는 단순히 그 정치인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사실이다. 국가 내지 대규모 범죄가 하나의 스펙타클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은폐되어야 할 조건이고,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미디어의 장악 내지 미디어의 왜곡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영국비밀첩보기관을 소재로 한 007 시리즈는 국가차원의 지원과 대규모 자본, 그리고 첨단기술과 주인공의 마초적인 요소와 더불어 로맨틱한 모습은 남성으로 하여금 동화의식을 여성으로 하여금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유발한다. 특히 범죄소설의 경우 단순히 괴도에 의한 절도, 미치광이의 살인을 지나 대규모 집단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단학살까지 일어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범죄소설은 매우 인기가 많아진 장르이고, 많은 대중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대중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소비로 통해 동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적인 과정의 축적은 외면한다.

 

소설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인 만큼 자신도 그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이야기에 빠져 자신 안의 가려진 살인충동을 소설로서 풀어내는 심리적 작용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실은 부조리함이 숨어있고, 처음에 등장한 범죄에서 범죄자는 단순한 물욕이나 질투에 의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내지 반항이다. 그런 비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여전히 하층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고통을 받는 점이다. 범죄의 대상이 처음에 개인적 동기에서 이제는 국가적 비리와 부조리라면 이제는 그가 비화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예전에 이런 농담 같은 유머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군가 아프면 그 치료 수단이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 기도하면 되요 → 약을 드세요 → 수술하면 되요 →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어떻게 보면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결국 부정의 부정에 따른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식물의 뿌리 대신 다시 기도로 이어지니 어느 것이 딱 옳다고 할 수 없으나, 최초의 이야기가 되돌아오는 것은 분명하다. 범죄구조가 자본주의사회 이향에서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모순에서 자본화로 통해 개인의 물욕, 이제는 자본주의 그자체가 앙시앵레짐으로 대체되었다면 범죄이야기 역시 바뀔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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