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學에 대해 생각하면 일단 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미의 미학, 추의 미학, 그 사이에 줄달라기 하는 세상만사의 존재적인 가치에서 美라는 것은 결국 양이 크다는 (羊 + 大) 의미이다. 이에 대해 판단하면 아름다운 것의 시초는 제사에 대한 가치, 제사라는 것은 의식으로 통해 신과 의간을 연결한다고 하나, 신이란 존재로 통해 인간의 공통적인 무의식을 엮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양이 크면, 제사에 바치면 좋은 제물이고, 아름다운 것은 제사에 동원되는 희생양의 가치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자면 사회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이 미학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으면 합목적성에 대해 판단하여 그 가치에 부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대해 연구하는 미학을 영문단어로 표현하면, 우선 영어로 보면 estetics이다.

 

거기에 반하여 귀엽다는 것은 cute 내지 charming으로 표현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beautiful과 뭔가 다르다. 결국 estetics이란 미학은 단순히 앞의 영문단어와 달리 외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외적 영역과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미학에 대해 살펴보면 미적 가치는 외재미에 대해 분명 포함하고 있어야 하나 내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

 

<판단력비판>에서 장 자크 루소의 <학술과 예술에 대하여>를 참고하여 저술한 동기는 결국 미학이란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어야 하나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코스튬 플레이에 대한 최근 동향을 보면 estetics적인 가치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cute 내지 sexy, charming만을 추구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문제는 미의 가치가 단순히 이분법적인 가치에 의해 추와 미를 두고 추를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지는 추의 미학이야 말로 진정한 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근 코스튬 플레이의 이미지를 보면 여전히 미의 미학만 추구하기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게 아쉽다.

 

단순히 미소녀 캐릭터에 맞춘 외모나 몸매, 의상과 분장은 모델로서의 여성으로 매력적일지 모르나. 자신의 존재를 소멸하고, 대신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흉내내어야 하는 모델로 본다면, 신화의 네러티브에 의존하는 욕망에 충실하다. 여러가지 기원이 있겠지만, 문화인류학적으로 고대 전사를 추모하거나 또는 그들의 정신 내지 의지를 가지기 위해 후대의 인간들이 앞세대의 인간들을 따라하는 행동을 한다.

  

코스튬 플레이는 결국 동경심 내지 존경심이 바탕이 되겠지만, 인간에게 이분법적인 관념에 의한 적용에서 좋은 것만을 추구하기에 미의 미학에 접근하려고 한다. 하지만 미의 미학에서는 예술이 없는 것은 비판적 요소로 통한 비판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우리편이 멋지고 좋기에 적을 무찌른다. 신화적 요소가 다분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결국 그 신화란 실제의 역사를 은폐하고 허구 내지 거짓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현실에서 표현하지 못한 욕망이 신화에서는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되기도 하나, 그것으로 인해 절망으로 빠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서 라이오스를 죽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운명이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신화이나, 많은 신화에서 이분법으로 나누어진다.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적은 대다수고 아군은 소수이나, 막상 그 소수의 아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다.

 

신화적 날조로 통해 현대적인 미디어는 실제의 판단력을 은폐하고, 절대적인 허구적 가치를 우위에 둔다. 코스튬 플레이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영웅적인 존재다. 소수의 존재들이 다수의 악을 저지하나, 세상은 악이 딱하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이라고 여기는 적들조차도 자신에게 정의가 있다고 한다. 결국 폭력이란 수단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영웅의 폭력성이야 말로 하나의 정의가 되는 셈이다.

 

적은 대다수라고 했지만, 가상의 이야기지, 그 안의 이야기에 담론에 빠지는 사람들은 대다수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결국 하나의 정의이고, 그들의 신화적 욕망에서 그렇게 되고자하는 욕망에서 코스튬 플레이어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자면 estetics적이 요소에 대한 아름다움이란 없고, 단지 beautiful 내지 cute만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을 보는 순간 예쁘고, 귀여운 것에 의존하게 된다. 일어로 따지면 가와이이로 이어지는 셈이다. 일본에서 우츠쿠시라는 단어가 있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극장판으로 만든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감상하면, 거인 여성인 멘트라 한 전사에게 지구 파일럿이 우츠쿠시라고 한다. 자신보다 몇 십배나 큰 거인전사여성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cute 내지 beautiful이 아니라 estetics로 보는 게 맞다.

 

estetics이란 미학은 철학의 칼로 예술을 고찰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철학적 지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보이고 열린다. 내 한계로 보자면 아직 길은 멀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넘어오며, 예술적 비평이란 일정한 틀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새로운 것으로 통해 다른 관점을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에 대한 퀄리티 논쟁에 대해 따지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가이다.

  

전에 진중권 교수가 시네21에서 비평가는 누구인가에서 미학적 가치가 없는 코스튬 플레이 문화는 구입자로서 비평가일 것이다. 결굴 자본력에 의한 카메라, 외재미에 의해 정해지는 모델의 구조에서 말이다. 비싼 것이므로 찍을 것이고, 예쁘고 귀여우므로 찍힌다. 그 자체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겠지만, 미학적 요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어렵다.

 

20세기에 들어오면 비평의 논리에 급진적 변화가 생긴다. ‘작품이 기존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작품이 기존의 규칙을 얼마나 일탈했느냐’가 비평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예술문화다. 과거의 비평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판정했다면, 현대의 비평은 작품이 얼마나 ‘새로운지’를 판정한다. 저마다 새로움을 표방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새로움이 어느 것인지 가려내는 안목. 그것이 현대의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된다.

출처 : 시네21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1558 

 

진중권 교수의 발언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미학적 관계에서다. 기존 20세기 이전까지는 얼마나 부합되는 것이라면 20세기 중반에 나타나가 소멸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반미학에서 이제는 탈미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로코코 시대의 그림이나 낭만주의 운동의 그림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그것만 물고 늘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로테스크적인 요소에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그것은 새로운 판단으로 이어져 우리가 미쳐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준다.

 

공각기동대 카미야마 켄지 버전의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을 소재로 촬영한 이웃의 사진을 보고 전에 내가 환호감을 느꼈는데, 어제 밤에 잠이 안와(6월 1주 휴일에 너무 잠만 잔 게 원인) 다른 블로그의 글이나 그림 등을 보면서 다시 본 후 생각 좀 정리했다. 그 분의 사진에 결코 cute나 beautiful을 내세우지 않았다. 단지 공안9과에서 근무하는 요원의 모습만 등장할 뿐이다. 요원이 어둠을 토대로 도시에서 공안업무를 하니 카메라 앵글도 재미있었다.

 

왼쪽보단 오른쪽에 치중한 앵글, 피사체가 중앙이 아니라 하단에 치중한 앵글 등은 작품 상황에서 요원이 행동하는 작전이 매우 긴장감이 넘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도시배경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피사체를 주변인물로 설정하는 것은 매우 작품성격에 합당하다고 본다. estetics적으로 본다면 사진 이미지 속의 구도, 조명, 동작, 배경, 소품 등과 같은 미쟝센을 보면 작품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사이보그는 얼굴의 표정이 없고, 단지 명령만 수행할 뿐이다. 언캐니한 등장인물로 통해 어둠의 도시를 촬영한 코스튬 플레이어와 사진사 분에게 대단함만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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