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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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이상한 사람의 정신인지 혹은 낯선 사랑의 정신인지? 아무튼 제목으로 봐서는 분명히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에서 학원물과 연애물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라이트노벨이지만, 라이트노벨로 하기에는 뭔가 큰 갭이 보인다. 작가인 마미야 나츠키는 어떤 인물인줄 모르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관점과 시각은 분명 이 작품 표지에 나오는 소녀인 사이케테이 리코로 대체된다. 사이키델릭이란 정신에서 그 말을 살짝 바꾸어 사이케테이, 즉 사이키한 인물로서 리코를 등장시킨 것이다.

 

역시 제목부터 정신이란 것을 내세울 때부터 조금 이상했지만, 막상 책을 열어보니 역시 그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책 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그의 제자이자 배신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란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신분석에 대해서 논하자면 기라성 같은 존재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구조주의에 영향을 끼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목인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의 소유자는 리코가 되는 것이고, 그녀는 마치 프로이트와 융을 꺼내면서 일러스트 표지 주인공 중 하나인 유우진을 자꾸 파헤치고 꺼내려 한다.

 

가령 이것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파리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되어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만든 라캉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물론 라캉에 대한 것은 구조주의 내지 후기구조주의를 소개하는 책으로 만나고, 대략적인 이론만 봤을 뿐이나, 그가 치료하는 방법 중에 환자의 뺨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뺨을 맞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면 그 치료는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서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즉 어느 문제대상이 감추고 있는 그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라캉이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적인 방법으로 리코는 유우진의 방어기제적인 요소를 간파하여 그의 벽을 허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인이란 별명과 함께 상당히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유우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문제로서 파괴한다. 기존에 갇혀있는 유우진의 고립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는 리코의 관계에서 리코의 정이라면 유우진의 반이고, 그 둘의 대립은 합으로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는 셈이었다. 그 부정을 부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리코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에 대한 재생이고 회상이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알 수 없는 깊은 아픔을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그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어 해소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 곯아 썩는 것이 인간이다. 육체적으로 세포가 균에 침식당해 몸이 곪아 가고, 정신적으로 더욱 고립되어 극단적 행위를 하게 된다. 유우진의 자살충동은 바로 정신적인 고립에서 발생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리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가령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다.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남자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인간은 근친에 대한 터부의식과 반드시 근친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가족에 대하여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유우진이 부모를 잃은 것은 8살, 그의 누나인 유우키는 초반에는 16살이고, 후반에는 17살이다. 작가가 실수한 것인지 번역과 편집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남매는 아직 마음이 여릴 때 부모를 잃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유우진는 누나인 유우키에 대해 친누나이지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우키는 달랐다. 그녀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도 잘 돌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유우진에게 어머니를 대신한 유우키 자신이 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대체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직장 상사와 불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면, 반대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서 된 것이다.

 

하지만 누나인 유우키가 아버지 같은 직장상사에게 마음이 빼앗기면 어머니 같던 누나 유우키를 잃어버린 것처럼 유우진은 질투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종말은 비극적인 살인사건과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유유키의 친구이며, 리코의 친구이자 부활동교사인 마호 역시 이 사건을 두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드러나기 싫은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유우키의 죽음에 대해 마호 역시 유우진에 대한 죄의식과 깊은 슬픔이 남아있었기에 리코는 유우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그 악몽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유우키를 대신하여 리코라는 이름을 유우진에게 넣어 주려고 했다.

 

결국 유우키는 가족이란 이름의 누나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누나(선배)로 대체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오토마톤처럼 유우키는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보였다. 유우진은 자신의 존재를 두고 실존주의적 모습은 세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와 분리되어 있기에 고독을 추구하는 한 마리의 늑대와 같았다. 그렇지만 유우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서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를 추구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간 누나처럼 자신도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코가 유우키의 죽음을 모방하여 유우진의 트라우마를 부수려 했다.

 

유우키는 유우진을 사랑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점과 그 유우키의 죽음에서 얻은 고통의 사슬을 끊고, 리코라는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서 상당히 인용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있었다. 기인처럼 문학가이자 시인인 괴테의 명언을 남기는 리코에서 리코가 보여주는 행동은 결국 유우진의 사슬을 끊어주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모하던 로테의 집에서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베르테르는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말한 사슬과 리코가 말하는 사슬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슬이란 말은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온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여 있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고 말이다. 리코가 유우진에게 계속 말하는 사슬은 결국 유우진이 세상을 살아가야 인생의 자유고, 그 사슬은 유우진의 고뇌에 자리 잡은 누나의 죽음이고, 그것을 이겨낼 방법은 사랑이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다보면 문학, 영화, 철학, 정신분석에서 나온 내용들을 많이 인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재미를 넣은 경소설이지만, 보통 일반 시중에 나온 왜만한 소설보다 더 깊이 내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때에 따라서는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는 순간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Blue>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Blue>라는 영화는 프랑스 삼색기에서 푸른색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다룬 것으로 여자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스스로 고립하기로 한다. 혼자만의 방랑 속에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바람피운 여자는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인 남자가 여자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나,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같이 남편이 남긴 악보를 정리하던 중에 서로에 대해 사랑하면서, 여자주인공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인간은 본래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감정을 두고 원시시대의 인간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즐겼다면, 사회가 생기면서 사랑은 인간의 사회성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슬이란 존재는 인간의 도처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 사슬을 끊을 방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란 점이다. 고립된 유우키는 자유보단 방종에 가까웠으며, 그것은 자유보다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지만 감옥은 유우키만 것이 아니었다. 유우진에게 말은 건네주는 이안과 유이, 유이는 과거 중학교 시절 어떤 여자아이를 왕따 시키는 집단에 속해있었다. 당시 유우진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자 반대표로 억지로 끌려나와 유우진에게 협박적인 말투를 내뱉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 공포를 맛본다. 인간을 속박하는 사슬은 도처에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인간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되는 비이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은 정신분석에 대한 내용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가는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연애 카운슬러로 활동하는 마호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자크 라캉이 남긴 말 중에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와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가 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그런 명제에서 리코는 항상 튀는 행동을 한다. 자신이 여자임에도 여자인 리코를 좋아하는 엔마 사나의 지나친 장난에서 리코는 옷이 물에 젖어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만약 보통 여자라면 가슴을 가리고 수줍은 얼굴로 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당당히 자신의 몸매를 뽐내는 그녀는 참 특이하였다. 아니라면 엔마 사나가 아방가르드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리코 자체가 아방가르드, 즉 반미학적인 전위성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우진을 구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사회성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규격화 일반화 획일화를 강요한다. 상대방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다른 언행을 보여주면 바로 낙오시키거나 차별한다. 이런 것을 두고 집단주의의 한계성인가? 자신들이 옳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틀려야 하고, 어긋나야 한다. 인간은 겉으로 예외의 존재를 부정해도 속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야지 자신들이 단합되어 정의의 이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이안은 제대로 헤쳐 나오지 못했고, 유이는 그들의 일부가 되어 유우진을 공격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사고방식을 부수는 색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사랑으로서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책 제목이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아닌가 싶다. 1권에서 유우진에 대해 리코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를 사회적 존재로 변모시켰다. 남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유우진에서 2권에서는 유우진의 새로운 인생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성세대 관념적으로 매우 위험한 부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유우진 옆에 계속 머문 이안과 리코 옆에 계속 있던 사나에 대해서다. 리코 친구 사나는 남자처럼 행동하나 사실 여자였고, 이안은 남자인 유우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안은 감정적인 모습이 드러내고, 사나는 매우 차갑고 냉혹한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융이란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 있고, 여성성 안에도 남성성이 존재한다. 이안이나 사나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상대적인 성별에 대한 심리적 왜곡이 내재되어 있다. 라이트노벨이라도 환상과 마법, 공상과학을 배제된 평범한 학교공간에서 다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다소 과장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이야기에서 차용된 모티브들은 분명 지금이라도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고 있을법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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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소를 읽는다 - 자유와 평등, 다시 시대의 광장에 서다
김기의 지음 / 다른세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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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루소를 읽는다>를 읽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연구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은지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이 서적을 집필한 작가도 그렇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루소가 제시한 그 사상이 정말 옳았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루소는 기독교를 믿었지만, 기독교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반계몽주의자였으며, 자연주의자였다. 오히려 신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던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기보단 그 민중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광인이 되어야 했고, 불안감에 미쳐 의심병에 걸려야 했다. 루소가 그런 힘든 상황에서 잃지 않은 것은 당시 도시 빈민과 시골의 농민에 대한 인간애였다. 그의 인간애적인 모습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이성과 문명이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혹은 아닌지를 밝히는 연구에서 루소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고 배고픔에 허덕인다고 했다. 지금처럼 예술이 누구나 혼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위용과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물자를 낭비해야 했다.

 

그 낭비는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향수 하나를 생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했고, 치장하기 만든 가발에는 많은 식재료가 필요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어보면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루소가 바라보던 농민의 힘든 삶에서 그의 인간애적인 정신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빈민, 거지, 창녀, 도둑, 병자로 가득한 곳이었다. 모두 가난에 의해 내몰린 자였고, 누구 나하나 그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했다. 루소와 더불어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디드로 역시 그러했다. 오로지 루소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예전에 <에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정말 놀라운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죄지은 사람은 목매달아 죽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그렇지만 나도 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장발장이란 이름의 사나이는 오로지 집에서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쳤다. 그 죄로 그는 오랜 시간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조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추후에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 신분을 속이고 살아갈 때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거둘 때, 코제트의 생활은 어느 사기꾼 여관 주인집에서 제대로 된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다. 추운 날에 먼 거리까지 물을 길러야 했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런 비참한 생활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하지만 범죄자의 말로는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몸을 팔아야 하고, 남자는 몸을 버려야 했다. 오늘 날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최근에 개봉되었던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국에서 만든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먹을 식량이 없어서 걱정하고, 공장에서 감시원들의 부당한 행위에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버려진 고아, 이런 모습은 루소가 프랑스 파리에서 보던 그 장면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인 것처럼, 그 사슬이란 고리는 바로 인간의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루소가 가진 인류애적인 가치는 “아름다움을 사람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라는 말처럼 루소는 인간 스스로 인간성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루이왕정 시기에 핍박받았으며, 수구세력에 의해 그의 사상은 무참히 짓밟혔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은 논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루소의 사상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18세기 낭만주의, 19세기 관념철학과 마르크스주의, 20세기의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유명한 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보았다. 거기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면서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문명이란 세계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력으로 변화하여 만든 장소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명의 역사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고대에서는 지식을 이용한 치수관리와 화술,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물리적인 폭력과 무력을 이용한 계급, 현대는 자본이란 이름의 경제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인간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루소는 그 굴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보다 100년 전부터 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게다가 실존주의적으로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존재성까지 고민한 그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해 파고가면 갈수록 루소의 영향은 막대했다. 루소가 그렇게 원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루소는 “누구도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기의 몸을 파는 여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파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또한 산업화의 가속화로 도시는 계속 인구가 모여들고, 시골은 황폐해지며, 소득의 불평등은 이제 인구까지 감소하고 있다. 현재 부부 2인당 출생되는 자녀수는 1.2명, 여기에 사회는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국방군사력 기본이 되는 젊은 남성 수가 감소하여 비상 시 국가존립조차 위협이 되고 있다. 인구가 줄면 당연히 기업이 생산되는 상품을 소비가 축소되고, 기업의 생산력이 감소되면 그 나라의 경제가 위태롭다. 우리는 매일처럼 정치권에서 경제문제를 두고 이슈로 삼지만, 그 경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참 어리석게 보인다. 인간이 경제위에 있는지 아니면 그 아래에 있는지 구분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구의 감소는 인간이 계속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재생산되어야 하겠지만, 그 생산에 의한 2차적 생산이 부족한 이유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남성, 중앙과 지방의 경계선상에서 경제력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태어날 2세의 인생에 미친다. 교육비용의 증가, 생활에 불충분한 급여는 점차 국민생활의 질을 떨어뜨리며, 그것이 결국 인구감소로 이어진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여 민생이 사는 것이 아니라 민생이 살아야 경제가 일어나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을까? 루소는 진짜 필요한 것에 대해 너무 가치가 낮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가령 우리 인간은 의식주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과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허나 현재 우리는 식량의존국이 되었고,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노고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농민이 해당되지 않으나 적어도 쌀과 같은 식재료는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또한 인간에게 식량만큼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에 인간이 가장 하등하게 취급당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싫어하거나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바라면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여긴다. 애완동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보여주듯이 행동하는 그들의 가식과 협소한 생각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애완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기도 하는가? 물론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을 위해주는 것보다 그저 애완동물로부터 애정을 받으려하는 인간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까?

 

억지로 동물을 키워, 그들의 성기를 자르고, 혹은 강제로 수정하는 것이 동물에 대한 사랑인가?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란 오류와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어리석음에 계속 시련은 되풀이 된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기심의 공화국을 만든다.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비판한 것처럼 4대강 공사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여 어느 특정인에게 이익이 가게 한 일을 보며,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게 여겼다.

 

이미 도시사회생활에 익숙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그 공간에서도 자연의 세계를 보호하고 가꾸며, 아름다운 것들을 보존해야 하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며, 강과 개울을 콘크리트로 바르더니 강물의 수질이 악화되고, 인간이 마셔야 할 물도 오염되어 식수걱정을 하게 되었다. 잠시 이익을 보려던 것이 오히려 그것을 원상 복구하는 것으로 몇 십 배에 가까운 예산을 소모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하는 일이 모르겠다.

 

오로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 이기심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이끌려 새로운 사슬의 고리가 되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병이 든다. 인간성의 형성에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한 사람의 존재로 만들기보단 그저 기존의 사슬에 적합한 인간만을 만든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자신 내지 그 단체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조차 마음의 양심조차 느끼지 못한다. 최근 육군28사단에서 벌어진 구타사건이나 혹은 다른 군부대에서 일어난 자살사고나 총기사고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병폐에 빠졌는지 알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이다. 그 억압하던 자도 분명히 타인이나 혹은 어느 사회에서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보상심리는 정말 최악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현상이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오직 자연적인 인간이고, 그 자연에서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치는 바다나, 혹은 넓고 푸른 하늘, 시원한 강줄기가 흐르는 하천, 바람이 부는 넓은 평야에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하나가 된다. 모든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서도 그들이 맑은 땅과 물을 지키려한 것은 단순히 도시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갉아먹는 도시의 척박함에서 영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자연에 대한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의 문장이 거대한 강줄기처럼 굽이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다.

 

인간 역시 그 자연적 존재로 본다면 서로 다를 것도 없으나, 계속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살아간다. 강자의 논리로 하나의 정의를 만드는 것은 고대 노예를 만들고 착취하던 자들의 부조리한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루소는 “힘을 정당성으로 만드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바꾼 것이다.”라고 한다.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권리로부터 시작이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타인의 자유가 소중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등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공적재산의 영역으로 보겠지만, 최소한 존 롤즈라는 정치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소수혜자가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정치적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성공은 교육에 의해 결정되고, 그 교육은 기회의 균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공적교육이 무너진 이상 경제적 조건이 없는 자에겐 오직 같은 운명을 되풀이된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교육을 인간 스스로 살아가고, 자연에 대해 같이 살아가게 함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과정이기를 원했다. 인간이 도구로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감시와 처벌로 통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제 아무리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패륜을 저지르고, 또한 자기인생에 대한 허무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비정규직과 실직자 같은 사람들은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멀어진 세모녀의 자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삭막한지 잘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그러나 우리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처럼 계속 어둠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자신들은 벤츠에 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들은 벤츠 타이어가 밟고 지나가는 아스팔트에 불과한데 말이다. 벤츠를 타고 그저 어디에 추락하든지 또는 충돌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차를 타거나 먼 길을 걸어가는 다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눈앞에 있는 위기와 고통을 잠시 잊는 힐링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대안이 필요하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여 현실은 바뀌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해 개인적 삶은 바꿀 수 없으나,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삶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으로서 끝이 나지만, 사회의 문제는 각자의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안 일어날 것이란 믿음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실에서 언젠가 그 칼날은 자신의 목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기에 계속 비극은 되풀이고 매일 새로운 소극이 탄생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이나, 인간의 이성 내에 윤리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기심(利己心)이고, 인간은 감정(感情)을 가졌다고 하나 거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無情)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개인보다 더 못한 야만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개인들은 자신들의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이상 문제를 삼지 않지만, 문명과 미개의 중간단계인 야만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 잠을 충분히 자더라도 멈추지 않고 약탈과 착취는 반복한다. 진심으로 문명인 혹은 이성적 인간이라면 타인을 공격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배운 가르침에서 "의무와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타인의 불행 속에서 자기 이익을 찾는 일은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타인의 불행에 빠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경제적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실은 마치 야만의 사회처럼 보인다.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루소가 제시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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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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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인물은 독일 근대문학의 거두를 지나 독일 그 자체를 나타내어주는 대문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독일이란 국가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 비해 언어적 표현력이 떨어지는 국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언어는 마치 산 위에서 흐르는 강물이 계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강물은 거대한 하천이 되어 바다와 마주하는 연안과 같은 느낌이다. 거대한 물결이 강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오고, 그 강물을 받은 바다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거대한 파도가 반대로 올라가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을 삼킬 것 같은 기복이 찾아온다.

 

괴테라는 대문호의 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이 뛰며, 그의 글을 정체되어 있지만, 그의 글을 읽는 나의 머릿속에는 큰 영상이 올라온다. 일단 출판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괴테는 Strum und Drang라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중심지였다. 그의 글은 낭만주의이었고, 계몽사상과는 전혀 다른 글이었다. 괴테가 논하길 볼테르로서 한 시대는 끝이 나고, 루소로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한 것처럼, 괴테는 자신의 손에는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영혼 속에서는 루소가 있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19세기의 유럽에서 루소의 사상이 문학적으로 움을 튼 것이었다.

 

그런 낭만주의적인 글이었는지, 또는 괴테가 루소를 무척이나 동경했는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순간 루소가 생각났다. 처음 베르테르가 주무관 집에 방문하였는데, 그 집안은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서 제일 큰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동생의 수는 여덟 혹은 아홉 정도 보였다. 그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로테 옆에 앉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가 우드토 백작부인에게 열광하여 그것에 대한 사랑과 좌절로 인해 <신 엘로이즈>를 만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마음과 열정적인 감정과 그리고 숭고한 이상을 가진 베르테르는 안타깝게도 로테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사모했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은 괴테가 아마 2번의 사랑에 실패한 이력이 있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가장 처음 사랑한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괴테가 처음 약혼한 여성과 약혼이 파혼되어서 그런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베르테르가 땅 속 깊이 사랑하던 여인의 관을 묻은 것 같은 것이다.

 

로테와의 사랑은 해설서에 나온 것처럼 2번째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 자신과 알고 지낸 남자의 약혼녀라는 점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에게 슬픔과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이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로테, 사실 괴테가 2번째로 사랑한 여인의 이름은 샤를 로테 부프라는 점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히로인의 이름은 곧 괴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것이고, 괴테는 마음을 죽인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이란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체나 영혼이나 서로 다름없다는 점에서 육체적 베르테르의 죽음은 정신적 괴테의 죽음을 승화시킨 것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괴테가 선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삶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또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열정과 도취가 숨을 쉬고 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는 1774년에 출시된 점을 보면, 아직까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계몽주의라는 이성적 인간과 그에 반대되는 반계몽주의 또는 낭만주의는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과 감정 앞에서 무엇이 우선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괴테의 작품의 낭만주의는 루소의 <에밀>에서 표현한 것처럼, 베르테르가 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과 솔직한 모습을 두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로테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순수하고 선한 아이들이 로테의 손에서 자애롭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서로 장난치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베르테르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서 보여주는 것이 자연적이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베르테르는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흠뻑 취하기도 하고, 마을에 처음에 올 때 마을 어린아이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베르테르는 높은 귀족집안의 아들은 아니지만, 집안 자체가 일반 농민보다 신분이 높았기에 베르테르를 처음 본 아이들은 두려워하거나 경계했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자, 어린 아이들은 모두 베르테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또한 베르테르는 마을 우물가에 어떤 처녀가 물을 기르러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물통을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란 점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테르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베르테르의 그 자연적인 감정이란 바로 단순히 괴테가 베르테르로 통해 위험하고 허무하며, 애타는 사랑만 적은 것이 아니었다. 소설 내에서는 순간적으로 베르테르로 보는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베르테르가 사랑하던 로테는 사실 이미 알베르트라는 혼약자가 있었고, 베르테르는 로테를 너무 사랑하기에 잠시 그 마을에서 잠시 떠난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공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백작을 알게 된다. 그 백작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으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고, 베르테르와 마음이 맞았다. 또한 베르테르는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인 B를 만났는데, 그 B양은 마치 로테와 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그리고 우아한 마음까지 가졌기에 베르테르는 B양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자신과 친한 공작과 같이 무도회에 갔으나, B양은 베르테를 보고도 안절부절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백작도 난처한 표정을 지은 후에 베르테르에게 미안하다면 무도장에서 집으로 가길 부탁했다. 그 이유는 당시 공작이 살던 사회는 귀족들의 상류계급 문화가 존재했고, 베르테르는 그곳에 합당하지 못하여 배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베르테르는 거기서 나온 것이 홀가분했고, 그런 사람들이랑 있는 것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하지만 B양의 불친절함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 이유는 B양은 원래 귀족집안의 후예고, B양과 같이 사는 숙모는 그런 베르테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베르테르로 보는 귀족사회에 대해 그들이 무능하거나 재력이 없거나 또는 교양이 없어도 단지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그것에 안주하여 교만 방자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 간의 평등이 되지 않았지만, 평등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베르테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평등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역시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좋은 친구로 여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이성적 지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성보다 자연적인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자면 알베르트는 기존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루소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대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사실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정만 비판할 뿐 그 외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프랑스 정치권력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대안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성적인 지배에서 권력은 지식을 동반하고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므로 지식이 없는 평민들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말싸움에서 베르테르는 인간의 감정에 의한 극단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말에서 “절도는 물론 죄악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으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해야 하나요, 벌을 주어야 하나요? 놀아낸 아내와 그 원수 같은 유혹자를 격분한 나머지 죽인 한 남편에게 누가 맨 처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도취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몸을 맡긴 처녀에게 누가 맨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냉혹하기 짝이 없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계측기일지라도 필시 감동되어 그에 대한 형벌을 보류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인간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단순히 자신의 욕심보단 정열에 의해 몸을 던지 인간을 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런 사람을 두고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자살에 대해서는 위대한 행위에 비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나약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지지 않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걸 나약함이라고 말하는 거요? 표면만을 보고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오.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 당신은 그들을 감히 약자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무거운 짐짝을 척척 운반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통이 터지 나머지 여섯 명이나 상대해서 보기 좋게 때려 눕히는 사람을 약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봐요 인간의 노력이 힘이라면 어찌하여 이러한 극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베르테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물결에 움직인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남을 위해 싸우고, 특히나 폭군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궐기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맨 첫 장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난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

 

괴테의 마음 즉 영혼에 루소가 숨 쉬는 이유는 바로 저런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적 성향이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열정적인 사나이고, 자연을 사랑하고 찬양하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인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는 강렬하고 아름답고, 보는 내내 마음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나오는 문체는 아직까지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하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낭만과 낭만주의의 낭만은 다르다. 그 시대의 낭만은 자신의 진실을 몸과 마음으로 다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굳은 결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만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 TV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위해 비싼 차를 끌고 와서 성대한 이벤트는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의 자본력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진정한 낭만주의는 베르테르처럼 자연을 찬양하고, 시를 열정적으로 부를 수 있으며, 거짓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는 진정 베르테르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고, 혹은 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베르테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의 죽음이 애절한 것은 베르테르의 하인이 보여주던 행동이었다. 주인인 베르테르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저 여행을 가기 위한 나그네처럼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 발길을 옮기고, 자신에게 소중한 장소에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댄다.

 

아침에 일어난 하인은 죽어가는 베르테르를 보자 부둥켜 않고, 알베르트와 로테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하면서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베르테르는 하인과 사용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것을 소설 내에서 알 수 있으며, 자기가 죽기 전에 가난한 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주기도 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달리 이성적이지 않지만, 인간을 사랑하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런 베르테르이기에 로테라는 여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보면 베르테르는 미래인에게 가까운 유형이었다.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과 서로 친분을 나누고, 비록 약혼했지만, 로테가 진심으로 베르테르를 사랑했었고, 용기가 더 있다면 알베르트의 약혼을 파기하고 베르테르와 같이 사랑할 선택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는 광기에 젖은 베르테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슬픔은 겉으로 보자면 로테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격렬한 키스를 나누려했지만, 그마저 무산되어 다시는 로테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슬픈 각오에서 베르테르는 시대적 벽에 갇혀 절망한 것이다. 베르테르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로테의 어머니는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고, 자신은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로테와의 재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격발한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소설은 누구나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설레겠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천할 각오는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그리고 그 낭만주의적 이상을 향하던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엄청난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위대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에게 격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죽음, 그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낭만주의 화풍이 강력한 이 그림에선 민중이 봉기하여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전진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외침은 보는 내내 내 귀에 들린다. 그 그림에서 여신의 뒤에서 권총을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베르테르가 선택한 것은 자연적인 인간이고, 알베르트가 선택한 것은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베르테르, 그의 죽음이 비극적이기에 낭만적이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냐하면 베르테르의 사랑이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기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서평을 적고 있을 때 영화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s를 들어서인지 마음에서 격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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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 (특별한정판) - 요희전기 2,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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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를 이은 요희전기다. 일단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작가인 크레파스라는 인물은 동양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점과 그가 적은 글을 본다면 깊은 조예성과 더불어 부실한 요소도 같이 있다는 점이다. 즉 라이트노벨이란 특성이 경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서사를 가지고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문자서사에 만화나 애니메이션 포스터와 같은 일러스트를 첨부함으로써 라이트노벨이 만화와 같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라이트노벨의 주요 특성 중에서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 설정이 미소녀 하렘이란 Cliche이다. 주인공 남자 주변에 많은 여자가 존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많은 여자들이 그에 대한 애정공세를 멈추지 않는 것은 내키지 않다. 왜냐하면 문학의 시작점은 바로 신화라는 것이다. 신화(神話)란 신이란 존재를 내세우나, 그것은 정말 신이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에 잠재된 욕망 내지 억압심리로부터 탄생한 캐릭터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만큼 좋은 현대적 신화는 없다. 그 캐릭터는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나 남이 하고픈 이야기를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이므로 누군가 거기에 자신 내지 혹은 남의 이야기를 끼워 넣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자신의 욕망과 억압에 비롯된 하나의 왜곡이라면, 그 왜곡되어버린 이야기가 타인도 역시 같이 빠져갈 수 있다. 그래서 미소녀 하렘 계통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자기 현실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갇혀 자위하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다고 이런 장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방식이 하나의 대세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점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고, 너무 부족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적당한 선에서 여러 가지의 종류가 다양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콘텐츠로서 라이트노벨 장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작품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렘 요소 내지 또는 미소녀 캐릭터와 이벤트적인 요소에서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조금 지나쳤다고 할까? 아니라면 부드럽게 이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흔히 성적 묘사에 대해 논하자면 문학에서도 충분히 그런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문자서사가 영상서사로 변모될 때 문자서사 안에 있는 베드신 내지 성적으로 강렬한 모습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볼테르의 <캉디드>에서 캉디드가 사모했던 퀴네공드 양은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나 그녀는 무척 순진했다. 하지만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세가 퀴네공드 가문의 하녀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하고 싶어 캉디드와 성행위를 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혹은 20세기 대표적인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성행위를 나누는 모습이 소설에서 나온다. 그러니깐 단순히 라이트노벨이나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이 선정적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인류가 만들어온 많은 문학에서 성적행위나 묘사 등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단지 문학에서 그런다고 해도 문학과 만화적 속성이 섞여 있는 라이트노벨이란 특성이 그런 성적 묘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듯하다. 불의 공주라고 불리는 국가 화선의 공주, 유하는 자신이 화선의 황녀이면서도 화선을 떠난 이유는 권력다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용병단은 화선에게 고용되었으며, 그 용병단은 월하라는 국가의 1번째 공주인 월영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2번째 공주인 월린이 황녀의 자리를 물러받아 레지스탕스와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하와 월린의 만남은 서로 적이면서 어떻게 보면 같이 운명을 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유하가 월하의 국가를 구해주는 대신 월린은 유하의 하녀가 되어야 했다. 유하는 기가 세고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나, 그 성격에는 지나치도록 심각한 편집증적인 정신병이 보였다. 유하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알고 있으며, 자신의 가족들이 언제나 피로 물든 권력다툼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 만큼 유하의 삐뚤어진 성격은 월린에게 대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 내지 혹은 두 개를 월린의 입에 넣는다는 점이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월린이 유하의 손가락이 들어오고 나서 뺀 후의 장면이 책 중간 흑백 일러스트로 나오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여자와 남자가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게다가 월하는 자신의 큰 가슴 위에 자신의 두 손목을 올리고 있을 정도였다. 노골적인 성적묘사가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의 가장 큰 오류이지 않나 싶다. 적어도 이 책은 19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서사적인 흐름을 읽고 세계관과 인물에 대한 갈등과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리뷰의 목적이기도 하나, 적어도 리뷰 한다는 것은 비평적 관점을 배제해서는 안 되므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표지나 일러스트가 다소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부각하여 모에속성을 노리는 것을 두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책 내용에서 그런 노골적인 요소는 좋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Critical한 비평은 독자로서 분명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반응해줘야 할 의무인 것 같다. 어째든 책의 내용을 읽어보자면, 이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우선 월하의 국가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 것은 없다. 단지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국가이고, 월하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상징성인 월린이 어떤 운명을 겪을지 모르는 작품이다. 월린이 죽거나 또는 유하가 죽거나 혹은 흑록이 죽게 되면 이 작품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그들이 끝까지 생존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의 맛이다. 적어도 이제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면, 다른 식으로 보자면 진정한 적과 그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연합세력 및 지원군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향이란 나라의 공주인 수희가 등장한다. 만약 요희전기가 국가별로 공주의 존재를 두고 작품시리즈를 붙인다면 다음 작품은 물의 공주라고 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혹은 부록에 나오는 화율의 어머니의 고향은 화령이듯이 꽃의 공주로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 내지 황녀라는 인물을 달, 불, 꽃, 물로 통해 나가는 것은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속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불을 상징하는 화선은 강력한 무력, 달을 상징하는 월하는 신비한 존재(신선), 꽃은 아름다운 자연, 물은 풍요로운 국가로서 말이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그 풍요로운 경제대국인 물의 국가 수향의 공주가 나온다. 그녀는 화선에 의해 고국은 멸망했어도, 수향의 상징성이란 수희로서 존재한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는 강력한 화선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하고, 그 군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사람은 수향이란 국가였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법처럼 수향의 군주인 수희를 만나는 것은 화선의 책략이 존재했으며, 유하의 최대의 라이벌인 태화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유하가 어떻게 하여 화선의 황궁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상세히 나오지 않으나, 단편집인 <작열 & 유하등>을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화율의 어머니인 화이는 산 채로 아궁이로 버려져 백골이 보일 정도로 타버렸고, 화율은 유하와 같이 여행 가려는 도중 유하의 수석 호위관의 책략에 의해 죽게 된다. 수석 호위관은 화이의 죽음으로 화이를 존경하거나 사모하거나 또는 측은하게 여기는 이들이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것을 알고, 화율을 꾀어내어 모두 섬멸한다. 그런 수석 호위관의 책략도 모른 채 자신의 배 다른 동생인 화율의 죽음을 모르는 유하는 돌아가면 화율에게 과자라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하에게 과자를 사주고 싶은 배 다른 동생은 사라지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잔인한 권력다툼의 상처뿐이었다.

 

황궁을 나온 황녀, 그녀가 선택한 용병생활에서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는 유하는 그 누구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흑록에게 말이다. 흑록에게 집착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흑록은 단지 죽을 곳은 찾고 있었다. 삶의 미학을 알지 못하는 흑록, 그는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누군가를 믿는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으며, 남에 의해 배신당하여 상처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철저히 자신의 마음에 벽을 쌓는 흑록에게 유하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대화나 상황설정은 매우 좋았다고 보았다. 유하가 명령을 내릴 적에 직접 흑록이 아니라 월린으로 통해 내린 점에서 말이다.

 

만약 단순히 흑록과 명령을 내리는 것과 작전을 위해 대화하는 사이가 되어버린다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사이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월린이 중간에서 중재하던 모습에서 이 작품은 1권에서 삼각관계적인 요소에서 월린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3권에서 어떻게 변할지 혹은 수희와 그녀의 비서인 연서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흑록에게는 유하가 모든 것이란 점이다. 흑록은 1권부터 나오지만 아버지는 월하의 장군이나 전쟁에서 죽고, 자신은 월하가 패배하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용병 생활하는 내내 망해버린 월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시당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즐거움과 희망을 품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이 흑록의 현실이었다. 그런 흑록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이다. 제목처럼 불의 공주로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흑록으로 통해 인생의 전환점은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혹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에서 말이다. 부록에서 등장하는 <작열 & 유아등>에서 수향의 고아로 태어나 뒷골목의 이리처럼 살아온 희는 아무런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망해버린 수향, 그리고 버려진 고아, 자신이 주변을 인식할 때 자기가 눕고 있는 침대자리에 어떤 여자가 남자를 안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게를 전전하다 결국 뒷골목의 창녀촌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각종 허세와 거짓, 그리고 도둑질과 싸움질, 그에게 주어진 삶은 항상 피 냄새와 빛조차 외면하는 그림자였다. 화선의 용병이 될 때, 상대 가리지 않고 싸움만 즐겼으며, 전투에서는 미친 듯이 총과 칼을 쏘고 휘둘렀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어깨에 메어진 큰 가방이었다. 그 가방 속에는 이때까지 용병활동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이다. 돈이 가방을 다 채우고 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피 냄새를 맡았을까? 그는 사나운 이리였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좋았다. 단지 칼로 심장을 찌르고, 총으로 상대방의 뇌수를 박살내면 말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항상 유령과 같이 잠재되어진 무의식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는 수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수향에 대하여 원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수향에 대해 미워하고 싫다는 것은 그만큼 수향에 대해 마음속 깊이 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가 자신의 그늘로부터 나오기 위해서는 수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그는 수향에 대해 겉으로는 부정해도 속으로는 내심 수향에 대한 애증관계에 사로잡힌 것이다. 마지막에 수향의 왕이 도피생활하면서 자기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은거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이때까지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수향이 그토록 증오만 하고 살았지만, 그 증오의 정점이 되어야 할 수향의 군주는 오히려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끝까지 화선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싸웠던 것이다. 이때까지 그 누구에게 진지하지 않았던 희는 왕이 없는 허물어가는 왕궁에 거수경례를 하고, 그 마을을 침범하는 용병 출신 산적을 치러 간다. 거기서부터 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간 것이다. 전쟁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터전을 잃거나 또는 타인의 터전을 모조리 부수거나 빼앗는다. 그런 전쟁이란 정치적 함의가 무력으로 동반될 때 그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한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이때까지 가진 것을 모두 소멸하게 만들고, 혹은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다른 방식으로 채우게 된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흑록이나 또는 부록에서 보인 희, 그들은 화선에 의해 고국을 잃고, 삶의 가치도 잃었다. 그런 만큼 요희전기에서는 전쟁이란 공간에서 던져진 인간의 삶을 역경과 위기 속에서 보여줄 것이다. 언제나 유하를 믿지 못한 흑록이 유하를 믿을 수 있던 것은 그녀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과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내부의 갈등이 외부의 위기로부터 극복하는 것이라는 Narrative라는 전형적인 서사적 속성은 다음 3권부터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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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작가 뷔히너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은 연극대본으로 제작되어 독일 및 프랑스 등과 같은 유럽에서 연극으로 펼치다 최근 한국에서 연극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단지 그 기사를 제작한 신문사와 <당통의 죽음>이 가진 의미적인 가치를 생각하면 너무 판이한 점을 생각하면 답답하나, <당통의 죽음>이 연극으로 나온 점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당통의 죽음>에서 잘 판단하는 부분은 세계 3대 혁명 최근에 일어난 것이 바로 러시아혁명이다. 그런데 이 러시아혁명의 원초적인 정신이 프랑스 대혁명이란 사실이다.

 

아서 쾨스틀러의 소설인 <한낮의 어둠>은 러시아혁명을 이룬 주인공이 스탈린의 공포정치 아래 숙청되는 것을 아주 디스토피아하게 그린 작품으로 작중에서는 포템킨함정에서 혁명을 일으킨 수병도 같이 처형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을 내쫓고 농장을 독재로 차지한 나폴레옹이 한 대사 중에서 "이제 혁명은 끝이다!"라는 것과 같다. 혁명의 배신적인 요소를 지켜본다면 트로츠키나 로베스피에르 내지 당통은 그 혁명에서 선구자이기도 하나 최고의 배신의 쓴 맛을 본 자이다.

 

영화 <당통>은 연극 <당통의 죽음>을 가지고 만든 작품으로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보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영화는 당통을 객관적으로 보는 요소가 강하고, 연극의 대본은 주관적인 요소 즉 당통의 심리적인 요소를 많이 부각한다. 요절한 천재인 전혜린 교수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전혜린 교수가 독일에 유학하던 시절, 뭔휀에서 머무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독일에서 본 <당통의 죽음>이란 연극에서 당통의 죽음으로서 허무주의한 니힐리즘에 대한 요소와 더불어 실존적인 담론을 제기한다. 죽음으로서 살아있는 육체는 멈출지언정, 프랑스대혁명을 일구고 지킨 영원한 혁명가로서 당통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이다.

 

당통의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가? 로베스피에르가 선도하여 실행한 공포정치에서 그의 무서운 무기는 국민공회로 대변되는 재판이다. 그 재판에서 판사가 망치를 두드리는 순간 목이 하나 떨어진다.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진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그렇게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회의적인 요소가 나온다. 프랑스 여성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롤랑 부인이 단두대 아래 죽을 때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라고 외쳤다. 롤랑 부인의 죽음에서 보이는 프랑스대혁명은 역사적으로 큰 진보와 더불어 퇴보를 일으켰다.

 

헌법의 기본 중에 기본에서 민주자유공화국에서는 입법, 행정, 사법이란 3개 그룹으로 나누는데, 그것이 몽테스키외라는 계몽주의 사상가의 <법의 정신>에서 시작된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전 시킨 이들이 디드로, 볼테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장 자크 루소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인권선언문을 읽다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제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직접 나오지 않는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찾아보면 그런 내용이 그대로 따라하듯이 보여준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는데, 그 원류는 미국독립혁명 내지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이다. 헌법을 고수하는 것은 보수주의적이나, 헌법의 정신은 진보주의적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나는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저런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헌법의 기초와 계몽주의철학에서 비롯된 자유주의 사상을 제대로 담론 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당통>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런 호칭을 붙인다. OO 시민이라고 말이다. citizen이란 것과 동시에 people에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mass라는 대중과 다른 의미로 부여된다. 존 롤즈의 <만민법> 내지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자유주의 철학대서를 읽게 되면 시민이란 것은 서울시나 부산시에 사는 시민보단 정치적 참여에서 하나의 발언권과 동시에 의무와 권리를 내포한 자들이다. 즉 시민이라고 불리 자격이 있는 부류는 그 자체 하나하나가 정치인이 되어서 정치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지식과 인품이 갖추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에서 파리 시민들은 시민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 무지한 농민이고, 글을 읽을 줄 몰랐으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혁명의 원초적 에너지가 될 수 있어도 혁명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바꿀 수 있으나, 현재를 보고 미래를 움직일 판단력은 없었다. 그런 군중적인 요소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다. 토크빌의 <앙시애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으면, 프랑스혁명은 계몽주의사상가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도한 게 아니라 프랑스 하층민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궁핍과 국가제정의 위기였다.

 

특히나 미국독립전쟁에서 영국의 견제를 맡은 프랑스로서는 제정적 위기가 닥친 것이다. 러시아혁명사의 원인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선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1905년 피의 일요일처럼 러일전쟁 이후 물가상승, 자원부족, 식량위기로 인한 생활의 경제적 문제였다. <당통>이란 영화 역시 그런 생계라는 부분에서 당통이 생각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여자와 한 번 잠도 자지 않았다."라고 말이다.

 

미학도서를 읽게 되면 유럽의 중세를 보자면 어린 아이들은 우리와 같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작은 어른이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부모와 같은 방에서 큰 침대에서 같이 잔다. 문제는 농업기반이 주요 산업이던 시절에는 침대에서 많은 식솔을 거느릴 경우 어떤 광경이 보일까? 부모는 어린 자식이 옆에서 자고 있거나 혹은 깨어날지도 모르나 그 침대에서 계속 Sex를 하고 있던 것이다. 나이가 10대가 되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Sex를 하고 아이를 만들어 결혼하는 것이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생활이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는 대표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으로 법조인이었다. 그는 분명 아내와 살고, 아내는 어린 남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으나, 충분히 부부관계를 통해 Sex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하지 않았고, 모두 평등하게 굶는 것만 추구했지, 그 이상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과 후천적으로 나누는데, 선천적은 성별, 나이, 인종 등과 같은 생물학적 요소이고, 후천적은 경제, 지위, 문화, 정치적인 요소 등과 같은 후천적 요소다.

 

결국 후천적 요소의 배제에서 인간이 가진 욕망에 대해 철저하게 금욕주의적 요소를 추구한 것이 로베스피에르였다. 그의 이상적인 정치성향은 혁명중심이던 1794년 전까지는 좋았을 것이나 당통 사망 직후 그도 역시 테르미도르반동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서 우리는 프랑스대혁명을 시작과 동시에 종점을 찍는 비극을 볼 수 있다. 추후에 1799년 브뤼메를 18일에 나폴레옹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프랑스의 공화정은 종극을 내리고 다시 왕정 이후 혁명과 보나파르트와 부패한 왕족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에 의해 민주공화정의 위기를 맞이한다.

 

세상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란다.” 오늘날 프랑스를 비롯하여 영국, 독일 등과 같은 북유럽 내지 서유럽 국가들이 그만한 민주주의 제도와 정치적인 여력이 세계적인 국가로 부상한 것은 그에 대한 대가와 고난이 있었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미국조차도 영국과의 독립전쟁, 흑백 인종차별로 계속 이어지고, 흑백 인종을 넘어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미국도 인종차별로 21세기까지 고통을 수반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체계는 완벽한 이데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란 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제기한 공산주의 역시 완벽한 공산주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에 대하여 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하나, 러시아혁명에서 레닌 사후 스탈린에 의해 소비에트연방국가의 스노비즘이 결국 관료주의 독재국가로 전략해버렸다. 혁명의 시작과 위기에서 왜 이런 비극을 맞이하는가? <당통>이란 영화는 바로 이런 문제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귀족과 왕족, 성직자, 악덕상인의 목은 광장 위에 세워진 단두대 아래 사라져 가는데, 계속 살림이 나아지지 않는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재산과 계급 그리고 인간의 덧없는 욕망이 있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주장하고, 그것에 대해 루소는 인간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자연의 미를 따르라고 한다. 그의 저서 중에 <식물사랑>은 식물은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식물 그 자체를 관찰하고 자연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자연주의적인 관점이기에 인간이 자연에 회귀하는 것이 인간으로 살 수 있다고 봤다. 오늘날 환경오염과 자연파괴에 위기에 놓인 문명사회에서 루소의 외침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누군가 가진 만큼 누군가는 가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한계점과 용인할 수 있는 영역이 지켜질 경우 문제가 없겠지만, 하루에 빵 1개를 구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남자와 몸을 팔아야 하는 여자들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살았던 사드 후작의 서적인 <소돔의 120일>을 읽게 되면 사드가 가진 성적인 도벽과 사디즘에 대해 볼 수 있다. 당시 사드의 상상력으로 만든 소설에서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기반과 사례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실제 역사 사료를 읽게 되면 여자가 몸을 파는 것은 스스로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팔려간 여자였다. 집안에 부모에 의해 혹은 납치에 의해서였다.

 

프랑스혁명 아래 이런 여자들이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으로 가야 하나,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을 보거나 영화 당통을 감상해도 창녀의 등장은 나온다. 혁명이란 단지 정치적 헤게모니를 뒤집는 것이지 사회구조적인 뿌리를 흔들지 못했다. 혁명이 결국 식량을 증식시키거나 혹은 보급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 이전과 후나 모두 비참하고, 분노의 칼날은 언제나 그들이 살던 시절의 사람에게 향하고, 그 사람은 희생자 내지 혹은 추후에 영웅이 되어야 했다. 프랑스대혁명의 루소에 대해 생각해보자. 루소는 조국인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고, 만약 그가 돌아올 경우 영원히 체포하여 법적 대응할 수 있는 공소시효 만료가 없는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루소의 본가가 아닌 루소의 할아버지 집에 지금 제네바시민 장 자크 루소의 기념물이 있다.

 

루소가 바랑 부인을 만나던 1728년을 기념하여 1928년 200주년 기념물이 생길 정도다. 루소가 파리 시민에게 놀림을 받고, 심지어 루이16세에게 루소의 소식이 하나의 가십거리로 들어갈 무렵, 루소가 자주 산책하던 호수가 루소의 호수로 되었다. 당통은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이었으나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의해 사기꾼들과 같이 엮여 재판을 받고 단두대 아래 사려졌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전제군주라는 호칭을 받으면서 사라졌다. 역사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절친한 동지와 라이벌이었고, 그리고 위대한 혁명가로 매기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서 이 둘은 그렇게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 당통은 1794년 자유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로서 국민공회의 정치가 전제주의적 요소와 지나친 폭력적인 점은 지적했고, 국민공회는 그것을 막기 위해 데물랭의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데믈랑과 당통을 죽음으로 내몬다. 당통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죽음으로서 공화국의 종말을 예언했다. 국민공회의 권력자들은 당통을 죽여 승리를 맺었으나, 결국 진정한 패자는 국민공회가 되어야 했다.

 

영화 <당통>에서 프랑스인권선언문 제4조인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각자의 자연권 행사는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경우 말고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제약은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가 아주 인상적인데, 그것은 당통이 죽고 나서 로베스피에르는 집에서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잠을 자다가 당통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이때 로베스피에르의 아내가 방에 들어오고, 아내의 어린 남동생이 프랑스인권선언문을 외워 읽기 시작한다. 제4조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자기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진정한 패자로 되었음을 인지한다.

 

생각해보면 21세기 대부분 국가는 자유민주주의국가 체계라고 하나, 실제로 이루어지는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헌법의 정신은 자신의 권리와 더불어 타인의 인권을 존중해야할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국기가 파란색, 흰색, 적색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이 있다. 붉은 색의 색이 제일 강렬한 것은 바로 박애정신이 자유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시민의식이란 점이다. 당통에서 보면 주요인물은 국민공회와 그들의 라이벌이나, 대중사회를 보면 프랑스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은 무지했다는 점이다.

 

계몽주의적인 요소가 지금도 21세기 한국과 미국, 유럽 등과 같은 많은 국가에서 적용된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 정치제가 바로 18세기에서 다 만들어진 정치적 체계이다.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혁명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초점이다. 그러나 막상 장 자크 루소가 누군지 혹은 그의 서적을 읽어본 자는 얼마 없다. 당시 시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이자, 근대 민주주의 아버지, 심지어 마르크스와 같은 혁명가의 아버지 역시 루소다. 괴테는 손에는 셰익스피어지만, 머리에는 장 자크 루소였고, 루소를 알려면 칸트를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계몽주의사상에서 계몽주의 철학가이자 계몽주의를 비판한 루소에 대해 본다면 칸트의 말처럼 계몽은 누군가 깨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어 나오는 것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을 지지한 파리 시민들은 후에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1세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넘치던 로코코와 같은 탐미주의 내지 낭만주의가 지나간 시절이나, 아직도 계몽주의 사상가에 의해 빚을 지고 산다. 그런 21세기와 당통이 죽던 18세기는 220년이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의 유명한 문구 중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좋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루소는 현대에서 좌파와 우파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사상가이면서 열렬한 비판이 되는 사람이다. 중간이란 기착지점이 없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민주적 자유주의 내지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가 아니라 이성의 너머에 있는 인간의 본질에 의해 지배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국민 각각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는 권리 역시 이 또한 없다. 그래서 민주정이란 이름은 모순의 굴레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정치체제다.

 

<당통>에서 왕정정치가 사라져도 국가는 존치되고, 타국의 위협이 있기에 국가적 체계는 필요하다. 이때 민주정이란 이름은 민중을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등장시켰으나, 주체의 등장은 표면이지 심연의 세계까지 따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여전히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살아가고 있다. 피라는 것은 반드시 단두대 아래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체계의 근원이 되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그 자체에 도달하기 과정에 너무 많은 사회적 모순과 인습을 청산되는 그날까지라는 것이다.

 

당통의 죽음은 바로 그런 프랑스인권선언문에서 주장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서 인간의 삶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통의 죽음을 진정으로 아파했던 이는 당통을 보낸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만이 진정 혁명의 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당통>은 매우 사실주의적인 영화다. 왜냐하면 실제 있었던 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을 토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심리적 요소나 실제 했던 행동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망정 그들이 진짜 프랑스대혁명을 이룩하면서 사라져간 존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운명을 노래하는지 처음 당통이 파리의 성문으로 들어올 때 광장에 놓인 단두대가 보인다. 저 단두대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이 잘려나갔는가? 다시 단두대는 영화 중간쯤에 보인다. 당통의 운명이 저기에 달린 것처럼 말이다. 당통이 단두대 앞에 나갈 때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이상한 소음과 군중의 아우성이 들린다. 그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싱겁게 끝난다. 처형자에게 “나의 목을 자르면 군중에게 보여죠. 나는 그럴 자격이 있어.” 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는 왠지 아픔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안고 홀로 죽음을 임하는 그의 죽음은 비극적 미학의 완성이었다.

 

그가 단두대의 널빤지에 일자로 눕힌 순간 단두대의 칼날은 무거운 소리를 내고, 당통의 목이 잘리자 피가 뿜어 나오며 아래 짚단에 피가 쓰며들기 시작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위대한 혁명가의 피를 마시며 성장하는 것이다. 피를 마신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당장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 피와 더불어 또 다른 피를 함양하면서 큰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지금 그 모습을 만들기 위해 단두대는 20세기까지 존재했다. 국민공회가 주관한 혁명재판에서 자기가 만든 혁명재판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당통으로서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은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당통은 본래 부유한 법조인으로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의 경우 삼부회에서 부르주아 대표인물로 나가고, 프랑스 왕정의 제정상황을 비판하며 입헌할 것을 주장하고 그것이 되도록 선언한 테니스코트선언이 유명하다. 이후 프랑스 왕정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루이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와네트는 1799년 도주혐의 및 반란협의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들은 장 자크 루소가 살던 시절에 그를 비웃었지만, 루이16세가 죽을 때 “내가 죽는 이유는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다.”라고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국민은 자신의 국가를 배신하지 않아야 하는데, 루이는 그것을 배신하여 프랑스공화국의 국민이 아니므로 죽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정식적인 재판보단 형식적인 재판을 거치고, 당시 루이16세를 죽이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으나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루이16세는 죽고 만다. 사실 루이16세는 포악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약했으며, 국민들의 생활을 걱정했다. 하지만 개인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구조적인 흐름과 더불어 주변 정치적 영향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왕비와 귀족들의 사치와 부정축재를 억눌리지 못한 그의 실정에서 죽음의 회피란 어렵다.

 

영화 <당통>은 당통의 죽음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에서 거치는 한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상징적인 요소 즉 왕권을 올리기 위해 성직자들이 신이 왕에게 권력을 준 왕권신수설이란 이데올로기 해체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대체되는 지점이 나온다. 로베스피에르가 화실에 가서 옷을 입고 손에 올리브 잎이나 혹은 지팡이를 들며 상징적 요소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나 혹은 구체제나 상징은 필요하다. 상징을 상징하기 위해 만드는 상징적 요소나 혹은 상징적 요소를 해체하기 위해 필요한 상징이 필요하다.

 

기술과 문명의 진보와 달리 인간의 이성과 윤리적 요소는 진보하지 않음에서 이런 역사적 굴레는 피할 수 없는 업이다. 영화 <당통>은 그런 역사적 비극을 하나의 희극적 요소를 부여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18일>에서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소극)으로”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비극적으로 루이16세는 불운한 왕으로 비극적으로 죽고, 당통도 루이16세처럼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비극적으로 죽는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비극이어야 하지만, 하나의 소극으로 되어버린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만들어버린 선택에 자기발목을 잡고, 자신의 목을 자르는 결과가 된다. 강성적이나 그래도 청렴한 로베스피에르의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하나의 파시즘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소극에서 다시 비극과 같이 끝나는 것은 그도 자신에 죽음에 대해 당통처럼 무력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브뤼메르18일까지 자코뱅당이 선택한 정치란 부정부패의 연속이었다. 지롱드파와 같이 무능한 왕정을 지지한 세력과 다름없는 바가 된 것이다. 영화 <당통>은 당통의 죽음은 죽음조차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다. 당통은 그렇게 죽었지만, 당통과 같은 죽음은 반복 되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역시 당통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코미디 쇼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당통에서 가장 갈등이 되는 것은 당통과 데물랭이 운영하던 신문사에 대한 폐간과 억압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의 전제주의 정치를 비판하는 것을 감추는 것에서 혁명은 끝이 나고 있었다. 공화국의 기초에서 우리도 이런 모습이 그 당시의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어디선가 역사는 계속 되풀이 되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 반복된다. 그럴 때마다 <당통의 죽음>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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