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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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하면서 단순명료한 것이 인생이란 것이다. 내가 그 누구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지금 그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활동으로 본다면 학생이라면 공부를, 직장인이라면 일을, 백수라면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항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놓여 있고, 그 위치에 있으면 다시 새로운 목표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목표의 굴레 안에서 계속 회전하고 만다. 우리의 인생은 빌딩 건물 안에 들어갈 때 자동문으로 들어갈 수 없거나 혹은 손잡이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어렵다.

 

360도로 회전하는 회전문 안에서 투명유리로 너머 보이는 출입구 안만 보다가 다시 계속 돌고 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위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면,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요소로 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기 쉬워도 그 정의에 대한 과정과 흐름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즉 결과로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도 그 결과 안에서 진행된 프로세스나 구조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최근 내 친구와 통화하면서 있은 일이다. 내 친구는 자영업자이고, 나는 월급쟁이다. 내 친구는 요새 경기가 어려워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나는 그 원인을 두고 과소소비에 대하여, 물가의 증가에 대한 인플레이션, 그 원인은 화폐의 유통이 지나치고, 특히 부동산이 근본적으로 심하다고 했다.

 

지대가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세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대의 상승만큼 이익을 내야하며, 그 이익이 결국 소비자로부터 나오나, 지금 경기가 좋지 못함이 연쇄적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런 나의 분석에 너무 그런 쪽으로 가지 않고, 복합적이지 않느냐에 물론 그것을 염두하다고 있다고 했으나, 적어도 내가 주장하는 논리는 너무 협소하고,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복합적으로 다양한데, 그것을 어떻게 명료하게 나올지에 대해 혹은 그런 거시적인 요소에 눈을 두는 것보다 미시적인 게 옳지 않느냐고 이야기 들었다. 거기에 대하여 내 친구도 알겠지만, 개인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나, 사회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점과 이렇게 구조적인 분석을 들어가면 이해하기 어렵고,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조건을 생각하면 사실이고, 한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전체의지가 하나의 당위성을 만들어내지만, 사회적인 재화와 화폐에 대한 수요자로서 찾아가는 사람은 결국 한정적으로 될 뿐이다. 국가의 운영에서 세금의 부족에 따른 세수의 증가, 소비세 증가에 따른 부가가치세 증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기업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현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요약하여 말하자면 소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우리가 소비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바라는 만족을 위해서다. 그 만족감에서 누군가 이런 곳에 가고, 이런 상품을 사고, 이런 것을 보지만, 이에 달리 다른 자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새로운 상품과 기호의 소비는 언젠가는 자신의 경제력과 시간조차 갉아먹는 해충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까지 경제학적인 고찰과 사회구조적인 요소, 더 나아가 친구와 있었던 일과 개인에 대한 생활과 삶에 대한 인생고민, 전혀 고리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져있으며, 충분히 우리는 조금 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학생이 공부하는데 왜 공부하는지 물어보면, “좋은 대학교 가려고요”, 좋은 대학가면 무엇이 좋은데 물어보면, “좋은 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 돈을 벌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돈으로 친구와 재밌게 놀거나 여행하거나 사고 싶은 것을 사려고요.”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결혼이나 가족을 위한 여러 가지 목적들이 있을 것이나, 결국 우리는 즐거움 인생을 위해 일을 하고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시간만큼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그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종언의 종착점이 있기에 우리는 시작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연속에서 우리 시간은 매일 24시간이란 물리적으로 공통된 조건이 부여된다. 그런다고 모든 사람이 그 24시간이 같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는 사람과 밤늦게까지 커피숍에 일하는 사람, 심지어 술집아가씨조차도 다 24시간을 주어져도 전부 다른 24시간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 각각 다르기에 우리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거기에 따른 자신의 삶을 꾸며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만족하지 않고 불행한지 물어본다면 과연 어떨까?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자연주의자에 가까운 인간이라 지금의 삶이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밥을 굶는 사람, 전쟁에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나와 비교하면 참 어리석을 것이다. 사람의 행복의 기준을 그렇게 극단적인 요소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극단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고, 비교한다면 대기업 총수 2세 내지 3세 역시 비교한다면 그럴 말을 하는 사람도 기가 찰 것이다. 누구나 자시만의 논리가 있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로서 다가가면 납득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한국 경제문제, 그리고 해외 정치현황을 논해도 사람들에겐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물론 나도 그럴 것이나, 적어도 그 입맛 맞는 이야기에 대한 근본을 찾아가기 않는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는 한국은 포스트모던이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그 과정이 되어야할 모던의 시대는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모던적인 요소, 즉 계몽주의에 대한 한국의 접촉 기회는 없다. 계몽주의 정신은 지식인으로 한정되고, 그 지식이 뿌리 내려 퍼지기 전에 이미 모든 주관이 객관이 되는 포스트모던이 되었다. 극우성향이 비윤리적 사이트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당위성을 외치는 이유 없이 그런 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소유자나, 혹은 나처럼 다소 부정적이고 불만의 눈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삶에 항상 휘둘리며 살아간다. 학생은 정해진 시간 안에 교실에서 억지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고, 공장노동자는 딱딱한 자세로 계속 동일한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 같은 자세로 같은 일을 계속 하면 인간은 기계를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인간이 된다. 시간관념이 무척이나 지루해지고, 더 심해지면 시간관념조차 없어져 버린다. 어째보면 공장노동자가 아니지만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맞이하는 나 역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제1의 지루함,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시간을 그저 소모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성에서 하나의 상황을 부여한다. 지루함이 느끼는 인간은 소외의식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육체적으로 부담이 온다. 지루한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오는 증세는 신경쇠약증세 내지 노이로제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에 깊이 빠져든다. 자신의 무력함을 순간적 자극으로 그 간극을 채우려는 것이다.

 

인간은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이성의 존재로 되겠지만, 이들에게 이성이란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만 볼 것이다. 감성이 메말라져 가기에 늘 머릿속은 흥분상태이며, 다른 누군가와 충돌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보여준다.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았기에 잠재적인 공격성향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지나친 피로와 무기력감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자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의 사회에 살게 되면서 자연적 조건을 상실했다. 루소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로 되길 바라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사회계약론>의 저술동기도 그렇고, <에밀>에서 에밀조차 자신의 판단력으로 사물을 판단하나 사회 안에서의 인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삶은 자기 스스로의 자연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연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유는 왜 필요한가? 더 나아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통해 생각해보자, 마르크스는 노동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그 자체의 지나친 시간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어차피 물질로 가득한 문명사회에서 기술의 유지와 혜택이 없다면 인간은 1분 1초로 제대로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 노동시간을 줄여 자기만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가 영화에 대한 글을 적는 것이라, 누구나 그것이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다. 바로 여가시간의 활용이고, 그 여가시간으로 통해 인간이 즐기고 싶은 취미와 취향,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먹고 자고 더 나아가 성욕을 지나,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점이다. 동물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본능 이외의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문화여가생활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여가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면, 바로 인간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가령 당신이 집안 내지 회사일로 장거리 출장을 가는데, 그 시간은 출장으로서 일을 하고 있으나, 그 시간 동안 상당히 지루할 것이다. 운전대만 붙잡고 몇 시간 동안 운전하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러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옆 자라에 대화상대를 나두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운전에 집중하더라도 그 지루함은 이길 수 없다. 귀로 통해 전달되는 신호가 결국 지루함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음악도 계속 듣고,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다시 지루해진다. 인간은 본능적인 생존조건과 싸우는 시간을 지나 이제 지루함이란 시간을 싸우는 것이다. 반복하여 강조하나, 그 투쟁이 되는 지루함이란 시간은 매일 24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도 없이 계속 싸워야 한다. 그 종지부는 인간의 죽음 외에는 없다. 인간의 죽음은 무엇이든지 굴레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라 개인은 여기나, 안타깝게도 그 개인의 주변은 계속 이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일한 것은 죽음이고, 죽음과 같은 취침 역시 한계가 있다.

 

취침시간이 길어지면 그 역시 지루함의 연속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작가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빵이란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이고, 장미는 생존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즐거움이 되는 대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삶에서 즐거움을 빼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어느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비교하여 행복을 논하기가 비논리적인 이유는 행복은 잘 먹고 안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에게 그게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늘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원한다. 단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늘 새로운 기호만 소비할 뿐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바라는 삶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작가는 소비가 아니라 낭비를 하는 삶이 되라고 한다. 소비는 계속 소모하지만, 낭비는 어느 일정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소모하지 못한다.

 

우리 앞에 천해진미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해도 결국 접시 몇 개 안에 질리고 만다. 그러나 소비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것을 계속 찾아가고 구매한다. 어느 방송에 나온 구경거리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소원해진다. 기 드보르가 말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열렬하게 소비의 사회에 추종하는 이야 말로 가장 소외된 존재다. 그것은 자신이 그것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찾아가는 여정을 주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사회는 인간을 계속 기계처럼 예속화하고, 지루함을 선사한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시간적 절약을 선사해도, 시간적 만족을 빼앗아 버렸다. 아프리카 원주민 부시맨은 하루 몇 시간 일하고 일주일동안 일도 하지 않고 자기 여가시간에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반나절 일하고도 가난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본다. 그들이 즐기고 싶은 여가생활에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도대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지루함과 피곤함만 넘쳐 얼굴에 깊은 주름만 새겨져 갈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나와 조금 비슷한 생각을 하던 자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혁명을 일으키자고 한다면 분명 국가에 의해 체포되겠지만, 그 혁명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이런 부분은 중요하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18세기와 20세기를 흔들고 오늘 우리 현대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혁명 그 자체를 성사해도,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왜 그럴까? 답은 단순하다. 현재 상황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현재 상황을 바꾸고 난 후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주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서 인간은 고민이란 것을 다시 찾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고민하는 삶을 살기보단 쉬운 답을 찾고, 간단히 지나가는 지름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항상 우리는 같은 굴레에 빠져 회전문 유리너머로 보이는 출입구 안을 계속 들여다볼 뿐이다. 때로는 회전문에 의해 안이 보이고, 밖이 보일 것이다. 유리문 너머의 밖이 우리 현실인데,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래서 계속 돌고 도는 매일 24시간의 지옥에 살아간다. 인간에게 24시간은 평등하게 주어지겠지만, 그런다고 그 24시간이 주어지는 횟수는 균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지금에 와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나, 언제나 우리는 지루함에 의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몇 %인가? 그 일조차 하는 사람도 그 일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상태에 계속 몸을 맡기는 매너리즘으로 무장하기보단 더 깊이 자신의 세계를 파고들거나 그 옆으로 퍼져가는 것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빵을 먹은 후에 장미로 가득해질 인생이 될 것이고, 그 장미가 잘 자라면 자신에게 새로운 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길 역시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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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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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2010년 나온 도서이고, 불과 5년 전에 아주 어려운 환경에 취업한 신문사 기자들의 기록을 담은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는 개인만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결국 자기합리화 내지 자기자랑만 내세우고, 내가 되는 것에 대해 남도 될 수 있다고 하나, 그 조건이란 한 마디로 억지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천원인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찾아갔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 실사 옆에 있어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거나 않으려 했던 것을 찾아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의 현실에서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영웅적인 존재가 나와 강한 힘으로 계속 적을 싸워 나가는 파워 증가식 이야기를 싫어한다. 누군가 그렇게 강해져서 진화하여 이기는 방식은 약한 자들의 몰락은 그저 있어야 할 당연한 사실이다. 정의란 가치는 결국 주관적인 힘들이 모여 객관적인 지표를 나타낼 뿐이지, 그 정의라고 말하는 하나 그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입으로 정의를 타령하는 자들이어야 말로 제일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의 가치는 오히려 명확한 것보다 불명확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르다.

 

결국 정의의 사자는 어려운 도탄의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는 인물이겠지만, 정작 그런 인물이 우리에겐 존재하는가? 그 영웅은 자신만의 영웅이지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그가 우리의 영웅처럼 보이는 것은 TV나 신문, 각종 미디어로 장식되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영역을 과다포장 내지 은폐, 조작, 허위로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선 그것들이 흔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문제는 그런 흔한 이야기는 우리 일상에서 전혀 흔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옆을 보기보단 항상 위를 보려고 한다.

 

위를 보고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위를 보고 가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길과 계단을 보고 가야 한다. 위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결국 계단 위를 하나씩 걸쳐 가는 것이고, 그 단계를 거치어 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4천원인생>은 우리 개인의 삶 자체를 위로 가기 위해 만든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장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개인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나, 사회구조는 개인을 멋대로 농락한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마지막엔 그 무관심한 대중들에게 그 책임이 전가된다.

 

전가된 책임의 문제는 결국 타인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서 온 책임과 고통의 분담은 처음 시작은 본인의 의식부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굴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하면 간단하다. 생각하면 되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무슨 고민이 있어? 그러면 생각해보고 해결하면 되라는 충고는 매우 간단하게 타인에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고민에 대한 문제와 원인,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결과는 쉽지 않다. 여기서 결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라는 마지막 종착점이 아니라 발단의 시작점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시작점을 찾아가지 않고, 도중에 있는 이력만 보려고 한다. 시작은 눈으로 들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중간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천원 인생> 아니 그 이전의 <88만원 세대> 이야기처럼 우리는 현실의 이야기를 피해 계속 화려한 이야기와 환상만 꿈을 꾼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천원 인생><88만원 세대>들과 밀접하게 조우하고 있다. 길가다가 우리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용품을 구입하고, 배가 고프면 회사나 학교 근처 식당에 들린다. 하다못해 빌딩 안의 화장실을 가면 무수히 많은 얼굴을 만난다. 아파트나 대형건물 입구에는 경비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조차 말이다.

 

그들은 우리와 옆에 있지만 결코 옆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으로 대하는 그 자체적인 목적인 아니라 하나의 도구 내지 물품처럼 물화되었다. 따라서 물화된 인간은 자신 스스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언제나 자신의 존재적 존엄성을 가지지 못한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사슬에 의해 매여 살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는 포유류에서 인간이란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에는 어느 지역의 집안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 등에 의해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롤즈의 <정의론>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불평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불평등으로 인해 최소수혜자라는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성공이나 혜택을 받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완수할 수 없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조건은 기회의 균등이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교육이다. 정의라는 것은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피해 최소한의 손실로서 끝내는 것이라 보면 된다. 어느 이익이나 가치가 누군가에게 돌아가면 다른 누군가에게 그에 대한 역효과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효과를 받아야 하는 자와 받지 않아도 되는 자의 정당한 균등관계가 무너진 지 옛날이다. 따라서 <4천원인생>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에 의해 메우게 되는 경제적 굴레는 우리 사회의 큰 우환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문제는 인간의 시간은 늘 24시간씩 매일 채워주겠지만, 24시간이 무한대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산의 조건은 바로 생산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생산조차 재생산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4천원인생>은 후천적 불평등에 의해 시작되는 책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은 시간당 4천원에 10시간에서 많게는 15시간에 이르는 고압적 노동에 시달린다. 공장 노동자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기계부품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안전장치도 미비하고, 휴식공간이나 여유시간도 부족하다. 화장실에 가는 몇 분과 담배를 피우는 그 몇 분도 아깝다. 물을 마시고 잠시 앉아있는 시간도 아까운 것은 바로 그 11초가 생산품을 만드는 노동과정이란 점이다. <4천원인생>에서 공장노동자들은 기가 빠질 때까지 일하고, 마치 시간이 1초가 지나가는지 또는 1시간이 지나가는지 모른 채 일에 죽어라 빠진다.

 

그러다보니 정신적 파괴로 이어지고, 자신들의 입에서 거친 말과 상스러운 말만 나온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명제는 그가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 안에서 가능하다. 식당아주머니 같은 경우 잠시라도 앉을 여유가 없고, 앉아있는 것은 반찬 만들거나 양파, 마늘 등을 손질하는 경우다. 감자탕 집에 뼈다귀가 넘치나, 자신들은 뼈다귀조차 만질 수 없다. 무엇이든 인색한 주인의 방침이 그렇다. 주인은 자신의 자본력이 아닌 은행 빚에 대출받거나 건물주에 세를 들어 하기에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누가 더 경제적으로 위협에 놓여있는지 생각하면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단지 아전투구처럼 만인 대 만인이 아니라 덜 심각한 빈자 대 더 심각한 빈자들의 대립구도가 바르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식당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밑천 파먹을 수 없는 가게주인도 그러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그렇다. 물론 자재와 식료품들은 물리적으로 줄어들어가겠지만, 인간 그 자체는 물리적으로 줄어들지 않고, 시간적으로 되돌아간다. 업무의 과중은 건강에 치명적이고, 결국에 가서는 오히려 병원비가 늘어나는 형태가 된다.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조건은 노동자가 가진 것은 몸이기에 그들의 고용권한을 잡고 있는 가게점주들은 마치 종업원들은 자기 노예처럼 부린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 법적인 요식행위이지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그 자체를 지탱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일반적인 민주주의보다 더 발달된 민주주의체계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보이는 철학적 개념과 현실적 상황은 언제나 같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인민이란 개념은 국가의 설립 이전에 살던 사람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에 대부분 국가들은 봉건적인 왕국이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국가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해도 그 지역의 주민들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그래서 헌법에서 국민은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4천원인생>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4천원인생>이 아주 극소수의 개인에 불과하면 문제가 아니지만, 식당아주머니로 일하며 시급 4천원정도 받는 분들은 전국에 200만 명이란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이 일하는 이유는 본인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미래를 위해서다. 그들이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자녀 역시 가난을 이어받아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고통 받는다면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인해 인구가 계속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부족은 인구의 감소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대체할 대안이라면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변명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들을 유입한다. 하지만 집단적 배타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외국인들은 불평등한 처사에 고통 받는다. 임금도 부족하고, 심지어 온갖 욕설에 성추행 그리고 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이 병이 든다. 철학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면 고아, 외국인, 장애인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의 미소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미소를 항상 짓을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들이 숨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약자의 얼굴에 그늘이 찰수록 누군가는 이익을 볼 것이다. 뉴스와 신문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해 말만 많은 사람들은 넘치고 넘쳐 나지만, 그것에 대한 근본적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이들은 정말 부족하다. 결국은 정치적인 법률과 제도로 해결해야 하나 막상 당하는 자들도 자신의 처해진 현실을 괴롭다고 말하지, 그 근원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는 없다. 역시 지식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사회생활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오늘 하루 내가 출근하여 가는데 버스타려면 버스기사가 있어야 하고, 버스기사가 버스를 운전하려면 정비사가 필요하며, 처음부터 버스를 몰려면 버스를 만드는 공장이 필요하다. 공장이 운영되려면 철, 플라스틱, 유리, 나무 등의 재료가 필요하고, 그 재료를 만드는 공장, 그 재료의 원자재를 캐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작은 일상 하나가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오고가는지 우리는 항상 인식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언제나 하나의 일상이 되어 그것을 망각하여 누군가의 고통과 착취는 잊어지기 마련이다.

 

요새처럼 물가는 올라가고, 임금이 정체되어 취업률은 저조하고, 실업은 해결이 어려운 지경에 계속 저임금 고노동의 3D 산업에 계속 사람들은 몰려가야만 했다. 거기조차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과 근무조건이 붙는다면 문제가 없으려만, 그것이 되지 않아 문제다. 마트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 속에 있는 그들을 어째 대하고 있는가? 솔직히 나 역시 가진 여유가 부족하고, 마트에서 사는 것만 사기에 마트 상품 진열대에 있는 판매원의 이야기를 계속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불필요하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른바 진상손님, 마트뿐만 아니라 최근 아파트 수위의 자살사건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나 파탄이 났는지 다시금 알게 된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아주 성인군자나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내 자신도 과오를 저지르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실수로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멋모르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지자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서린 눈빛을 보고 부끄럽게 여긴 적이 많다. 적어도 그런 실수를 최소화하고, 줄이는 것만이 혹은 그럴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그 생각자체에서 자기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은 남에 대한 이목을 고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런 부류가 더 체면에 신경 쓴다. 자신의 얼굴을 뻣뻣하게 세우는 것을 남을 깔보는 것에서 찾는 아주 불쌍하고 어리석은 종족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런 부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돈으로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돈 그 자체로 해결이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아직까지 존재하기는 하나, 단지 너무 작고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4천원인생>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소모시켜 가고 있고, 우리는 그 소모와 착취로서 살아간다. 언제나 식당이나 청소부 아주머니를 보면 수고합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짜증을 부리지 말자.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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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 - 한복을 청바지처럼, 28살 전주 아가씨의 패션 창업기
황이슬 지음 / 라온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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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문화와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많기에 이래저래 많은 분야를 접하게 되고,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사회와 관련하여 영화와 문학,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는 sub-culture 영역까지 두루 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베이스라인이 sub-culture이고, mass-culture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라진지 옛날이고, 단지 서브컬처 내에서 mass-culture로 진입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mass-culturemass-culture로서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계속 내부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Cliche의 연속이란 점이다. 따라서 상당히 진부하고 뻔히 보이는 이야기이므로 처음에는 많은 대중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만, 자신들의 내면에는 자기들이 바라는 전형적인 패턴주의를 완성시키는 형태로 전락한다.

 

따라서 유행에서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한 간극의 차이가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그 형태에 따라 이야기가 파생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파생의 원천은 sub-culture 영역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중오락물 내지 예술로서 바라본다면 기존의 mass-culture로 통해 전혀 새로 보일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콘텐츠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 속에서 돌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가 언제나 같은 이야기로 무색해지는 이유는 바로 mass-culture의 한계성이고, mass-culture의 간극을 채우기 sub-culture를 도입하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 중에 <식객>이나 <내일도 칸타빌레>는 한국의 웹툰과 일본의 만화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내일도 칸타빌레>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내지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OSMU라는 one source multi use는 바로 저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클래식이란 장르는 극히 대중적이지 못한 점과 그것을 만화로 제작한 것은 매우 maniac적인 요소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작품 내 전개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고 재미를 유도하며, 클래식이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의 sub-culture 잠재력의 무서운 점은 mass-culture에서 나오지 않은 잠재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하나의 상품이란 콘텐츠를 유발한다.

 

따라서 21세기 산업구조는 더 이상 20세기의 공장에서 바쁘게 돌리는 산업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탈() 산업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post-modern이란 점에서 기계적인 요소보단 차라리 기계적 요소보단 이미지의 대두와 이야기의 감성이 우리의 시장을 형성된다.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나 하다못해 식당에서 죽어라 고생하시는 아주머니들도 드라마를 본다. 우리는 휴식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여가 내지 취미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취미라는 것은 문화산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본주의 시장구조와 매우 밀접할 수 있다.

 

단지 자본이란 점은 경제적 조건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조건, 사회적 조건, 정치적 조건, 지역적 조건 등이라는 다양한 인자들이 따라 붙게 되는 마련이다. 문화자본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거나 혹은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문화자본에 투여할 수밖에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가 자신의 지갑만 두둑하게 하는 것 외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는 단지 그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기호들로 가득하다. 프랑스 사회철학자 보드리야라는 인간의 상품에 대한 가치에서 현대 사회는 기호로서 이루어져 있고, 기호 그 자체가 상품인 셈이다.

 

기호는 단순히 메이커 이름, 기업이름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조차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가 탈()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산업구조에서 결국 새로운 가치를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미지 메이킹이란 점이다. 상품의 가치는 대부분 비슷한 기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냉난방공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우리나라 에어컨 기계가 어느 회사가 더 좋고 나쁨을 확실히 말 하기가 어렵다. 정보력과 기술력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우리는 결국 어느 회사로, 어느 상품으로 또는 누구를 통해 신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복입고 홍대 간다>를 저술한 황이슬 씨의 책은 21세기 탈() 산업화된 사회구조에서 대표적인 성공한 CEO. 한국이란 사회에서 본인의 가정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경제상황, 가정에서 여러 자매와 같은 방을 사용한 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정해진 패턴에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소녀라는 점에서 많은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그녀는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성공했고, 자신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성공이야기와 자기계발서는 정말 싫어하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베이스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뒤에 있는 배경이나 조건이 은밀히 따라 붙었다. 혹은 시대적인 조건이 있었다. 갑자기 재료의 공급이 급증하거나 또는 상품의 가치가 급작스레 올라가거나 독점에 의해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되거나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황이슬 씨는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이란 점을 이용했고, 이것을 자신의 생활에서 접목하여 일으킨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과 능력을 치하해도 정작 그녀의 베이스라인에 대해 생각했을까 의문해본다.

 

조금 짧게 지나가는 말이나 그녀는 지금으로 말하면 조금 게임 오타쿠인 점과 대학동아리에서 코스튬 플레이를 할 정도로 sub-culture에 어느 정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mass-culture는 이미 한계에 차여 있어서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와도 구조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게임을 했다는 점, 그 게임으로 통한 아아템 수집과 게임적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현실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점이다. 이야기를 붙이고 떼는 실력은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나온 유감 없는 손놀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잠재력과 노력은 칭찬하나, 한편으로 조금 아쉬운 점은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마란 점이다. 세상에 힘든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연히 계기를 통해 발견하여 큰 성공을 가진 자는 극소수다. 그녀가 언급한 것처럼 어느 대단한 강사나 상업인이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쳐 왔다. 하지만 그 실패는 기회의 공정한 부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황이슬 씨의 노력은 개인적 공부만 아니라 독서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서에서 니체로부터 칸트, 루소, 키케로 같은 기라성 같은 이름이 나온다.

 

하지만 루소의 이야기에서 실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었다면 자신의 성공담에 대한 비교에서 타인의 기회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녀의 실천력과 노력은 인정하나, 그렇게 하려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프로로서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팔아주는 옷을 사지 못하는 식당아주머니들은 그녀의 상품은 필요 없을 수 있겠지만, 식당아주머니나 혹은 청소부 같은 잡무를 하는 분들이 없다면 저자분이나 혹은 나,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입장도 조금 고려해보면 좋겠다는 점이다. 저자 분이 대학시절에 한복을 입을 때 처음 남에게 상당히 낯설어 보였을 것이고, 자기 자신 나름대로 좌절이나 사회적 배타성을 경험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어째든 그녀의 성공적인 한복 라이프에서 내가 처음 본 것은 역시 코스튬 플레이 문화였다. 가끔 인터넷 sub-culture계통에서 코스튬 플레이는 다른 콘텐츠를 지닌 sub-culture와 다르게 사람이 직접 활동하는 점과 의상수주와 대여로서 생계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복을 만드는 것보다 그녀가 <>이란 만화와 드라마 주인공을 코스튬 플레이 했다는 점에서 이미 놀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보여준 셈이다. 황이슬의 업적에서 가장 높은 것은 놀이 그 자체를 자신의 노동력을 부여하여 상품적 가치를 창출한 점이다.

 

앞으로 21세기 이미 산업화로 살아갈 수 없고, 계속 블루오션으로 통해 산업구조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블루오션 자체도 기존 사회적 생산구조를 토대로 하므로 블루오션이 무형의 존재로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무형의 관념이 유형의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다. 창의력을 원래부터 가진 사람이 계속되는 중고등학교의 주입식 교육은 오히려 자질 있는 사람을 억지로 망가뜨리는 결과만 나오게 된다. 자신의 열정을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과 상담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정성스레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스펙을 쌓아도 결국 1등부터 꼴찌까지 정해져있고, 대기업과 공무원도 결국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단 %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면 간단하다. 중소기업에 가거나 또는 새로운 산업체계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구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결코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 역시 아니어도 그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계발서 내지 성공담에서 가장 중요한 실수사항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순간 이미 그 사회는 붕괴 되는 것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피자집, 통닭집, 맥주가게들은 단 몇 m 간격으로 계속 줄지어 가고 있다. 소비 그 자체를 위한 가게, 누군가 생산한 후 임금을 받아 그 가게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업구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듯이 주식이나 재테크 같은 허무맹랑한 성공신화는 결국 거기서 끝이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실패와 고통이 은폐된 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분명 직접적 내지 간접적인 실패를 우리는 너무 무신경하게 피해가는 것이고, 단지 잘 된 것만 보려고 한다. 결과론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결과만 바라보지, 그 과정에서 담긴 문제나 구조를 보지 않는 것이 큰 골치다.

 

다행히 이 책에서는 과정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었다. 평전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은 아름다운 옷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외래문화에 치여 한국문화는 이미 소외되어 가고 있다. 교회라는 기독교종교를 가진 황이슬 씨가 한복문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에 어찌 보면 나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것은 항상 가만히 웅덩이 속에 고인 물처럼 있으면 안 된다. 고인 물은 썩어 들어가고, 결국 그 처리비용과 인력에 더 큰 적자를 남기게 된다. 새로운 흐름과 과거의 산물을 적절하게 발전해 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산업에서 새로운 아이템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인 한복의상 sub-culture은 아니지만, 한국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하위적인 문화로 되었다. 조선시대에 한복은 당연한 것이나 지금의 시대는 한복은 당연한 게 아니다. 상품의 기호성은 결국 그 자체로 당연한 게 아니라 당연하지 않았던 게 당연한 것으로 되는 것에서 가치를 눈에 뜬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나, 자동차 중에서 벤츠 자동차가 매우 고급이다. 벤츠라는 상품이 본래 가진 내구력과 안정성 등과 같은 기계적인 조건이 갖춘 것은 분명하지만, 벤츠라는 상표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되는 것이다.

 

TV에서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나는 운동화를 신는 것이 아니라 Nike를 신는다고 말이다. 그런다고 나는 이런 것들이 당연시 되는 사회라도 꼭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품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상품을 유출하여 이익이 되겠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의 노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IBM의 횡포에 맞선 apple사의 기계도 결국 많은 노동자들의 착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겉만 보지 말고, 그것을 이루는 구조로서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결국 성공이란 왜 그런지 보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맞는 틀을 찾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열쇠는 열정이 필요하나 모든 게 열정만으로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점이다.

 

황이슬 씨의 책에서 그녀의 성공은 많은 베이스라인이 동원된 것이고, 그것을 위한 경제적 조건은 열악해도 시간적 조건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시간이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시작하는 점에서 그 노동을 하는 시점이 중요한 것 같다. 황이슬 씨에게 상담해오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고 여겼다. 능력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역시 생계부담이 없는 시절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놀이, 예슬 그리고 상상력이 원활히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말이 있듯이, 상상력으로 통해 새로운 세상은 구현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앞을 만들기 위해 체계를 개선해야 하나 계속 앙시앵레짐 같은 구체제에 물들어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놀이가 하나의 예술과 상품이 되는 순간, 기계로부터 계속 잠식당하는 우리의 일자리를 다른 쪽으로 대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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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본』을 읽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1
강신준 지음 / 길(도서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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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어리다고 여긴 시절, 그러니깐 대학교 다닐 때까지 세상에 대한 의문을 전혀 모르고 살적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하게 된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그것은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만화로 된 사회교양도서에 많이 버는 사람과 적게 버는 사람 모두 세금을 100만원 씩 납부하는데, 많이 버는 쪽은 “적당하군.”라고 하고, 적게 버는 쪽은 “왜 이리 많이 나왔지?”라고 한다. 결국 돈을 얼마나 버는가에서 같은 돈을 납부하는 것은 서로 간의 입장 차이와 상황적 요건이 뒤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들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후, 19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뒤흔들고, 21세기 지금도 다시 유령처럼 등장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금기 내지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철학과 사회학, 인류학에서 마르크스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푸집을 설치하지 않은 채 레미콘을 부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기본이 되는 사상에 마르크스의 위치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과 단어, 법적인 요소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하루 노동시간이 18시간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18시간의 노동시간과 그 시간이 지나친 시간이 아니라 18시간까지 제한해달라는 조건까지 따라 붙으면 충격일 것이다. 우리는 주5일에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이 기준이다. 물론 업체와 직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평일출근에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상적인 직장인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런 생활양식에 맞추어 18시간 노동은 거의 죽음을 이어지는 착취다. 1주일 시간은 164시간이다. 그 시간 중에 80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보는 것일까?

 

마르크스보고 악마 내지 나쁜 놈이라고 하는 인간조차 하루에 12시간 이상 계속 일을 한다면 마지막에 악마가 과연 누구로 보이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 세계에 미친 영향은 아주 막대하다. 세계를 뒤흔든 도서로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고 한다. 하나 더 하자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있다. <사회계약론>은 18세기 왕정시대를 무너뜨리게 한 근본이 된 책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스템과 정치적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경제적 구조는 큰 변화와 혁명을 불어오게 한다. 기존 헤게모니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흐름에 맞추지 못할 경우 결국 도태된다.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진 루이16세 같이 말이다.

 

사회가 바뀌고, 정치제도 바뀌어도 문제는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코제트다. 판틴의 외동딸로서 어머니 판틴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고, 공장노동의 수익으로 딸을 부양하기 어려워 자신의 몸까지 판다. 그래서 <레미제라블>, 불쌍하고 가여운 인간이다. 그 가엽고 삶조차 괴로운 연속인 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미래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 같은 후예들의 미래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서 그 비참함을 자신으로 마무리하려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래 쉬운 것만은 아니다. 결국 비참한 생활은 다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 사슬에 묶인 채 살아가야 한다. 그 사슬이란 후천적 불평등,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 겪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런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큰 고민이 되고, 인간 개인에게 파멸을 불러온다.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국부론>을 저술하나, 그 근본은 어느 국가에 존재하는 국민들이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경제생활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겠지만, 그 원천은 국민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국민이고, 그 노동의 가치로서 임금을 받아 우리는 생활수단으로 삶을 영위한다. 만약 그 시스템 구조가 붕괴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그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것 같은 암울한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사회경제적 불안감은 국민 생활에 큰 지장을 안겨준다. 과거에 우리의 슬로건은 흔히 말하여 과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과소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처럼 뭐든지 아끼고 절약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경제적 토대는 결국 과학기술과 장비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지가 과거 기계 1대당 100롤을 생산할 수 있다면 지금은 1,000롤을 생산할 수 있으며, 그 기계를 운영하는 사람이 과거에 5명이라면 이제는 2명으로 족하다. 그만큼 장비가 발달하면 할수록 인원은 축소되고, 생산물량은 증대된다. 그렇다면 이래 생산 된 상품이 누적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자본의 융통에서 자본을 투자하면 거기에 대한 자본이 회수되어야 한다.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되어야 하는데, 생산은 계속 지속되나 소비가 지출되지 않으면 상품은 재고물량으로 남게 되어 결국 업체는 자본의 압박으로 도산하게 된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노출된 업체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같은 작은 업체이며, 이런 업체들은 대기업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재력이나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사실상 한국에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인원이 많을까? 대기업이라도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하청이나 비정규직을 제외한다는 조건을 내세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적인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을까? 국내 경제적 민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의 근대화 내지 산업화가 가진 경제적 체계인 시대는 주요 경제적인 전략이 해외수출이었다.

 

해외수출로 외화를 모우고, 외화유치로 통한 자재구입, 산업시설 유치가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시장규모가 해외가 아니라 국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미 무역을 하는 세계시장에서 어느 나라에서 어느 상품이 나오고, 그것이 어디로 수출되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전에는 국내에서 생산했다면, 이제는 해외에서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당사자에게 판매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재화와 상품은 해외만 사업대상지로 볼 것인가? 아니다. 결국 해외에 간 기업도 국내에 모태가 되는 계열사로서 활동하는 것이고, 국내기업이 상주하지 않으면 한국기업이란 의미가 없다. 국내에 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야지 재고를 조정할 수 있으며, 상품적인 요소를 더 새롭게 변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국내시장이 계속 위축되어 결국 과소소비로 이어지고, 과소소비가 시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이런 문제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에 의해 조작된 공산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만들어져서 판매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다고 모든 것이 팔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필품들은 어떻게든 삶에서 제외할 수 없는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많은 기업들은 생필품들만 파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상품이 나와 팔리지 않는다면 산업이 발전할 수 없으며, 산업이 결국 문화적인 요건도 담당하므로 문화적 콘텐츠 역시 축소된다. 물질적인 토대로 생활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곧 국민생활이 어렵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국가경쟁력까지 저하된다. 국가경쟁력 저하로 소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간접세가 줄어들고, 그 보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악수를 두고, 그것은 국가부채의 증가와 더불어 그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적 고리는 끊이지 않게 되고, 결국 국민생활 수준 하락, 인구감소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은 이런 문제에 직면했고,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거기에 따른 산업들이 위축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결국 시장규모가 축소하고,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상품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에서 마르크스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하나, 처음부터 마르크스의 실험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사상적 체계와 학문적 연결성을 우린 너무 늦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문제를 기존 경제학의 입장에서 도저히 문제가 되는 실마리조차 풀 수 없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옳다”라고 말하는 현실도피이상자의 헛소리만 나올 뿐이다.

 

문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보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또한 그런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만든 도서다. 19세기 유럽에 불어 닥친 대공황은 유럽은 큰 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희생되었다. 그 문제를 만든 것은 희생된 자들과 전혀 무관했다.

 

그 문제를 바로 찾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나, 그 문제의 근본을 알면 추후에 다른 방도가 떠오른다는 점이고, 그 원인을 찾아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발생되면 심하면 심했지, 그 이상 호전될 기미는 없다.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읽는 것은 마르크스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성한 <자본>이 어떤 도서인지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에 대해 아주 친절한 방법을 안내하는 책자이다. 처음 자본 Ⅰ~Ⅲ까지 읽는 것은 3,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어려운 책을 무작정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본>을 읽으면 단순히 경제학만 거론되는 게 아니다. 문학과 철학, 각종 인문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본>을 읽는 것은 경제학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정수가 담긴 인문학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단히 접근하는 순간 큰 산과 깊은 바다를 만나 쩔쩔 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추천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과거 강신준 교수의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보다 더 자세하고 이해하기 좋게 만든 도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의 자칭 진보라고 말하는 분들이 한 번 다시 고민할 것들이 있다.

 

과거 경희대학교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다보면 자칭 좌파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점을 거론한다. 그것은 술집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기만 하는 좌파에 대해서다. 기본적으로 좌파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할 때도 그렇고,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할 때도 그렇다. 근본적 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결국 결과에 대한 가십거리만 늘어놓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지식인에 대한 조롱으로서 표현하자는 좌우도 아닌 좌우라는 존재들의 한계는 결국 자신들의 행위에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말할 수 있다면, 그 뒤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고,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계속 종알거리기만 할 것이다. 강신준 교수가 가장 중요한 말은 변증법이다. 변증법에서 현실적 토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적 토대로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실패한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의한 것이다. 삼부회 조직 이후 왕정을 무너뜨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고, 시민혁명이라고 해도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그저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현상을 보듯이 무작정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해도 그것을 통째로 뒤집는다고 해도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인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그 이후 1799년 브뤼메르18일 같은 일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변증법적으로 거쳐 서서히 고쳐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혁명은 모든 것을 뒤집어도 결국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바로 그 토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판단의 혁명이 사실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다고 국가와 사회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부정적인 요소를 토대로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시대에서 희생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희생이 싫다면 더 큰 희생이 다가오고, 그보다 더 큰 희생을 우리의 미래들이 짊어가는 일들이 생긴다.

 

역사란 늘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제 아무리 개별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항상 뭔가 일정한 규칙과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새로운 인물이 나올 뿐이지, 인간이란 근본적인 본질이 크게 비켜나가지 않는 점을 각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인지하여 <자본>을 읽는다면 당장은 아니나 조금씩 변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무조건 단결과 투쟁을 외쳐도 결론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고, 문제의 골만 깊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와 고통 그리고 희생이 뒤따른다. 그것은 비록 남의 일이고, TV에서 보이는 하나의 Show라고 여겨도 언젠가 당신이나 혹은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마치 점쟁이가 “당신은 아주 위험한 일이 닥칠 겁니다.”라는 엉뚱한 미래주의 같은 게 아니라 현실 사회구조로서 통해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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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투 2016-02-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을 읽지 않고 생태를 말하고, 자본을 빠뜨리고 진보를 말하는 것은 우물도 없는 사막 상태에서, 가마솥도 만들지 않는 살림살이에서 숭늉을 복제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에 산다면 마땅히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
 

PISAF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갑니다. 이번 PISAF 행사는 여유롭게 시간을 잡고 즐기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무실 업무가 있어서 3박 4일에서 2박 3일로 끝나게 되었네요. 오늘 2박을 보내고 3일차는 지방에 내려가서 사무실 출근합니다. 그래도 강연 내용을 제대로 듣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한 직접 사회자, 발제자, 토론자로 나오신 교수님과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건국대학교 김윤아 교수님, 공주대학교 이화자 교수님, 한림대학교 권재웅 교수님 등과 인사를 나누었으니 다음에 또 만나면 술 한잔 하면 되죠.

 

 

이번 학술대회 포럼에서 아시아 애니메이션에 대한 가능성을 계속 탐구하는 것인데, 예전부터 PISAF에선 이런 큰 테두리 안에서 계속 연구하려 했습니다. 작년에 업무로 인해 가지 못했으나 대략적으로 국내·외 교수진들과 연구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단지 이번 특징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과 신보 아키유키 감독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나온 것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우선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과 <사이비>에서 저는 <돼지의 왕>은 영화관에서 보았으나 아직 <사이비>는 보지 않았습니다. 전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학원이란 공간이 폭력으로 얼룩지는 것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란 말처럼 학교폭력은 단순히 문제학생보다는 우월주의에 의한 차별에서 태어난 것이죠. 문제아로 찍힌 철수를 보면 가만히 있으면 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나름 가정환경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2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들과 계속 싸우다가, 자살을 하게 되는 모습이 나오죠. 겉으로는 학원폭력과 가난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한 것에 대한 최후의 발악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이면에는 다른 친구가 그를 옥상에서 밀어 강제로 추락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연하신 연구자 발제에서, 그분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에서 네티즌의 리뷰를 보았으나 근원적인 영역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물론 그 리뷰어 중에 한 사람은 저도 마찬가지나). 그것은 억압받은 피지배층의 연대는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서 연대는 불가능하고 연대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결과는 부정적이란 사실입니다. 그 원인은 어느 문제에 봉착할 때 그 근본 지점을 하나씩 풀어가기보단 그저 빨리 회피하고 싶다는 인간의 급성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돼지의 왕>에서 철수를 밀어 죽인 이유는 철수가 극단적 태도를 버린 것에서 시작하죠.

 

 

철수 어머니는 가난한 여성으로 생계를 위해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활동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결국 사회적 불평등과 문화적 불평등 더 나아가 근본적인 교육적 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어머니의 직업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아무 죄가 없지만, 결국 그 영향이 가는 구조에서 말이죠. 철수의 극단적 반항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가족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철수를 위해 새로운 삶을 제시하면서 철수의 삶은 다르게 전개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결국 철수의 친구가 집단 괴롭힘 내지 왕따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박탈되는 셈이죠. 그렇다면 누군가는 계속 그런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을 하나의 신화로서 승화시키는 방법이죠. 결국 철수의 죽음은 철수 친구무리를 괴롭히는 학생들의 문제로 종결지으면서 철수 친구들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납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해결은 사회구조적인 합의 내지 원만한 대화가 아니라 폭력의 극단적 수단인 죽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 극으로 몰아 파멸시키는 방법이 과연 사회적 연대로 정당한가? 그런 점에서 과거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예로서 들 수 있겠죠. 이데올로기를 떠나 흔히 말해 진보진영이라는 사람들이 자기네들 사람을 제외함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전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바로 연대라는 지점에서 <돼지의 왕>은 누군가 희생시키는 방법은 결국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또한 <사이비>는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과 그 근본적 모습에서 멀어진 인간의 외적인 형상에 대해 괴리감을 보여주더군요. 인간이 갑자기 나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가에서 평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급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원래 사람은 나쁜 것인가 아닌 것인가에서 원래 나쁜 사람이 겉으로 착한 척하는 것이라 볼 수 있죠. 도저히 논리적이지 못한 상황을 두고 비논리적인 억측으로 몰고 가는 사이비종교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을 봅니다.

 

 

인간의 얼굴이란 가면에서 우리는 2가지로 대하는 것이죠. 하나는 극단적으로 믿는 것과 하나는 극단적 배타적인 요소로 이분법적으로 세상살이를 하는 점이죠. 이런 모습은 인간의 연대에서 극성끼리 모여 배타적 자세로서 우월감을 느끼기 다른 누군가를 밟고 무시하거나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이런 방법들이 과연 올바른 연대인가? 라는 질의에서 그것은 아니고, 우리 한국사회는 이런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연대로서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는 셈이죠. 그 원인은 근본부터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장 답을 내놓는 것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되어야 하는 신화적인 은폐와 조작이 탄생하는 셈이죠.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발제한 분은 곽영빈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의 연구원이고, 토론자는 강윤주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입니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다루는 세션에서 이제 다른 작품으로 다루는 세션으로 넘어갔습니다. 2010년대 애니메이션에서 큰 흐름을 만든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나오더군요. 이 주제의 발제는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학교 인문학자인 아키코 스가와 시마다 교수님이고, 토론자는 국립공주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이화자 교수님이었습니다. 출처의 소개에서 먼저 <요술공주 샐리>부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까지라는 마법소녀의 파워를 말해주는데, 이것은 상당히 오덕적인 영역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생각 이상으로 인류학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마법소녀 내지 마녀라는 개념이 없었고, 마녀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온 개념입니다. 마녀는 추하고 못생기고 악하고 아주 나쁜 존재로 그려지며 대부분 늙은 할머니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서구사회의 논리에서 여성-남성의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여성을 하위로 두고 억압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중세유럽 고전주의 시대에 여자는 아주 불결한 존재이고, 여자의 월경은 거의 악마의 장난으로 볼 정도였죠. 그런 고전주의 시대에서 마녀의 존재는 없었으나 17~18세기 마녀사냥이 시작하면서 마녀라는 존재가 결국 사회를 좀 먹는 인간이 된 셈이죠.

 

 

마녀는 없으나, 마녀가 필요한 이유는 누군가 희생함으로서 다른 누군가 이익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또한 십자군원정 이후 급박한 재정 상태와 정치적 불안함은 마녀사냥이란 광기로서 그 반항심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겁니다. 마녀의 이미지가 일본에 넘어가면서 마법소녀로 변경되는데, 그러한 마법소녀의 존재는 일본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나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번 발표를 두고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박인하 교수님도 참 관심을 가지셨는데, 그 이유는 박인하 교수님도 예전에 논문을 저술하실 적에 마법소녀에 대한 장르연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마법소녀의 문제점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느냐 입니다. 그것은 성적으로 생물학적인 섹슈얼리티 내지 더 나아가 사회적인 젠더로서 다양한 조건이 따르기 때문이죠. 본래 일본은 2차 세계대전까지 군국주의국가로서 파시스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여성은 매우 인권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서 여성은 남성 아래서 인구생산(군인)을 위한 성적인 착취, 그리고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로 인해 산업경제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일본이 전쟁이 끝나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통해 군수물자 기지국이 되면서 경제성장을 누렸습니다.

 

 

경제성장에서 산업구조는 농업과 어업 중심이라면 옆 나라의 전쟁으로 공업화가 되어 산업구조는 기계 및 중화학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목산업(항만 및 도로)과 부동산경기가 성장하고, 특히 무역으로 인해 해양 쪽에 많은 이익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노동력의 충원, 대가족에서 소그룹인 핵가족으로 변모되면서 여성 역시 산업일선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것은 경제적 입지를 가진 것 동시에 사회에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권리가지 오른 겁니다. 일본에 1987년 일본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기존에 산업구조에서 남성만이 차지한 게 아니라 여성도 새로운 경제인구로 등장한 셈이죠.

 

 

이런 사회적 구조가 마법소녀 변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맨 처음 마법소녀들은 그저 수동적인 연애관계에서 남성의 마음에 들어야 하죠. 가정에 충실하고 소녀다운 성향과 취미, 그리고 아직 사춘기 내지 그 이전의 소녀로서 성인여성에 대한 동경심이 작용했죠. 어린 소녀의 목적은 성인여성이 되어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 결국 마법이란 여성을 남성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길들이게 되게 하는 하나의 헤게모니인 셈이죠. 그런 요소는 1970년대까지 진행되다, 1980년대 올라오면서 버블경제의 문제로 여성의 경제활동이 소비사회의 큰 축으로 대두됩니다.

 

 

서브컬처에서 미소녀 내지 로리콘 중심이 되는 남성중심 콘텐츠에서 역으로 BL, 백합 등의 여성만의 취향이 도래하고, 이것은 21세기 하위문화 시장에서 큰 축을 형성합니다. 그런 관계는 마법소녀에게 하나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고, 그저 남자의 사랑을 받는 마법소녀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이 등장하고, 갈등의 관계에 놓입니다. 즉 사회적 여성들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 지위로서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점이죠. 이전에 신체적인 요소는 성인여성이 되는 것은 큰 키와 풍만한 가슴 그리고 여성의 매력을 중시한다는 것이나, 이제는 사회적 대립구도로 등장하는 것이죠.

 

 

계속 여성의 학력과 경제력 성장은 단순히 내적인 영역이 아니라 외적인 영역에서 마법소녀의 역할이 대두되고, 사회적 문제나 일상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법소녀가 등장하게 되죠. 그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점에서 마법은 환상이라도 그 환상의 공간에서 욕망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 환상적 공간으로 통한 사회적 문제해결이란 새로운 경로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만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경우 전사로 나온 미소녀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턱시도가면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히로인 우사미의 모습에서 여성은 혼자의 힘이 아니라 남자의 힘이 없으면 큰 위기해결을 하지 못하는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마법소녀들은 남성사회의 기존 이데올로기에 대한 긍정 내지 수호라는 헤게모니로서 움직였다면, 이번에 등장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존의 마법소녀들은 기성사회의 수호라면 이번에 등장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마법소녀들은 대다수를 위한 마법소녀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특히 극장판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의 악마화는 결국 마법소녀의 공식을 파괴한 셈이었죠. 아쉬운 것은 마법소녀의 강력한 힘과 매력을 보여준 것은 좋으나, 교수님이 의도한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한 점, 발제자이신 스가와 교수의 발표를 하면서 통역자분이 이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점, 토론을 맡으신 이화자 교수님도 일본어가 아주 유창하나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질의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으나 일반적인 마법소녀에 대한 내용이었고, 이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를 두고 근원적인 요소로 가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마법소녀 장르에서 상당히 안티테제로서 큰 전환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큐베하고 계약한 소녀는 소울잼을 받음으로써 그 힘으로 마녀를 제거하나, 막상 그 일을 하면 할수록 더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논문이 영어로 되어 문체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고, 게다가 발표자의 시간문제로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는 질문했죠. “기존의 마법소녀는 기존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것이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그런 구조에서 벗어납니다.”

 

 

통역하신 이화자 교수님은 제 말을 스가와 교수님에게 전달했지만, 제가 전달한 내용보단 강연한 내용을 비슷하게 말하더군요. 제가 일어나 영어를 잘 하지 못하여 어떤 말을 정확하게 한지는 파악하지 못하나 제가 원한 질의는 아니었습니다. 일단 제가 교수님에게 마도카의 팬이란 점, 또한 제가 오타쿠란 점을 밝혔습니다. 게다가 교수님의 발표용 프린트물을 넣은 바인더 자체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그림이 새겨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매우 기쁜 표정을 짓더군요.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요일 발표당일은 시간적 여유로 제가 다른 분과의 저녁약속으로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나왔지만, 금요일 다른 강연에서 그 교수님이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직 미숙하나 영어와 일어를 섞으면서 교수님에게 질의를 드렸죠. 제가 주목하는 것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마법소녀 내지 마녀가 된 존재에 대한 점이죠. 우선 그 이전의 마법소녀로 활동한 중세의 아가씨, 클레오파트라, 성녀에서 마녀로 된 잔 다르크의 경우는 인류문명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이란 점입니다.

 

 

이에 반해 마도카를 비롯한 5명의 소녀는 문명화를 지나 도시의 마천루 전경처럼(직접 그 장면을 교수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본주의 현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이죠. 문명에 대한 역사적 관찰에서 결국 문명의 전쟁은 누군가 타인을 약탈하여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착취로부터 시작입니다. 그 전쟁에서 문명화를 겪었다는 점에서 현대는 전쟁보다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타인을 착취합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현실에서 상당히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무기력한 인간들이 마녀에게 홀린 것이란 점은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자리 잡은 자기파괴가 삶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자연의 착취를 할 수 없으면 그 착취의 대상은 인간으로 변한다.” 것처럼 인류의 문명화란 결국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큐베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속임수로 보일 수 있으나, 큐베는 그런 인류문명에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대변하는 관념적 존재인 겁니다. 큐베는 큐베 그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큐베로 매개되어 보인 것입니다. 흔히 군중의 전체의지에 따른 이기심이 하나의 정당한 권위를 얻을 경우,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어느 약자는 희생당하고, 그 희생양은 처음에 숭고한 존재로 비추어지다가 어느 순간 희생당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 소녀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로 되는 겁니다. 왜 마도카가 모든 마녀를 없애도 이상한 존재들은 계속 등장할까요? 마녀라는 존재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부작용을 대신 액막이용으로 사용되다가 그런 매개체가 사라지게 되어 새로운 악령이 출현한 셈이죠. 교수님께 또 이야기 드린 것인 산업화와 도시화는 환경을 파괴하고, 그것이 발푸르기스의 밤이 된 것이라 말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태풍이 와도 토네이도 같이 내륙에서 발생하는 돌풍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토네이도가 간헐적으로 발생하여 피해를 주는데, 일본에서 슈퍼 셀이 발생하는 경우가 다소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토네이도와 같은 돌풍이 발생하려면 열에너지와 더불어 수증기가 필요합니다. 기상정보를 참조하면 토네이도 평지 같이 바람의 흐름이 더딘 곳에서 자주 일어나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는 산을 없애고 평지를 늘리며, 바람의 흐름을 막습니다. 흔히 바람길의 조성이 있는 이유는 도시의 공기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결국 열이 빠지지 못해 열섬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열섬현상은 일반적으로 같은 기온조건이라도 3~4도가 더 높습니다.

 

 

공기의 정체, 높은 열, 그리고 습기가 많은 일본에서 고기압의 정체가 결국 지표면에 공기압이 증가되어 이것이 하나의 회전운동으로 변화합니다.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판단하자면 도시화와 산업화는 대기오염과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최근 지구온난화로 태풍의 발생빈도와 위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열에너지가 그만큼 축척된 셈이죠. 그런 과학적인 부분을 말씀드리니 스가와 교수님이 매우 놀라시더군요. 문명화와 더불어 도시화, 공업화는 인간의 자연생태계 붕괴로 이어지고 결국 자연재해로 일어나죠. 일반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이고, 발푸르기스의 밤이 하나의 기상재해로서 보여준다는 점이죠.

 

 

발푸르기스의 밤이 온다고 해서 세계가 망하는 게 아니라 마도카가 사는 도시에 큰 타격을 주는 셈이죠. 이게 인간이 그동안 자연과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한 대가라는 점에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기존 마법소녀의 안티테제로서 어떻게 보여주느냐로 되겠죠. 참고로 교수님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여성의 직업을 강조했습니다. 마도카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도시형 커리어우먼, 어머니 친구는 마도카의 선생님이란 점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더군요. 약간의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로서(우리나라 여성가족부에서 말하는 개념은 전혀 페미니즘은 철학사상적으로 전혀 페미니즘이 아니에요.) 마법소녀 장르가 성장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참고적으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외에도 <케이온>을 아느냐 물어봤더니 아신다고 하더군요. 마도카도 케이온도 팬이고, 제가 이 작품에도 페미니즘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니 동의하시더군요. 대신교수님의 입에서 유리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그거은 바로 백합이었죠. 물론 동성연애로 치부하기에 분명히 지나치겠지만, 백합 요소라는 여성의 친밀한 모습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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