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본』을 읽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1
강신준 지음 / 길(도서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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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어리다고 여긴 시절, 그러니깐 대학교 다닐 때까지 세상에 대한 의문을 전혀 모르고 살적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하게 된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그것은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만화로 된 사회교양도서에 많이 버는 사람과 적게 버는 사람 모두 세금을 100만원 씩 납부하는데, 많이 버는 쪽은 “적당하군.”라고 하고, 적게 버는 쪽은 “왜 이리 많이 나왔지?”라고 한다. 결국 돈을 얼마나 버는가에서 같은 돈을 납부하는 것은 서로 간의 입장 차이와 상황적 요건이 뒤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들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후, 19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뒤흔들고, 21세기 지금도 다시 유령처럼 등장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금기 내지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철학과 사회학, 인류학에서 마르크스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푸집을 설치하지 않은 채 레미콘을 부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기본이 되는 사상에 마르크스의 위치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과 단어, 법적인 요소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하루 노동시간이 18시간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18시간의 노동시간과 그 시간이 지나친 시간이 아니라 18시간까지 제한해달라는 조건까지 따라 붙으면 충격일 것이다. 우리는 주5일에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이 기준이다. 물론 업체와 직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평일출근에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상적인 직장인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런 생활양식에 맞추어 18시간 노동은 거의 죽음을 이어지는 착취다. 1주일 시간은 164시간이다. 그 시간 중에 80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보는 것일까?

 

마르크스보고 악마 내지 나쁜 놈이라고 하는 인간조차 하루에 12시간 이상 계속 일을 한다면 마지막에 악마가 과연 누구로 보이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 세계에 미친 영향은 아주 막대하다. 세계를 뒤흔든 도서로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고 한다. 하나 더 하자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있다. <사회계약론>은 18세기 왕정시대를 무너뜨리게 한 근본이 된 책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스템과 정치적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경제적 구조는 큰 변화와 혁명을 불어오게 한다. 기존 헤게모니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흐름에 맞추지 못할 경우 결국 도태된다.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진 루이16세 같이 말이다.

 

사회가 바뀌고, 정치제도 바뀌어도 문제는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코제트다. 판틴의 외동딸로서 어머니 판틴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고, 공장노동의 수익으로 딸을 부양하기 어려워 자신의 몸까지 판다. 그래서 <레미제라블>, 불쌍하고 가여운 인간이다. 그 가엽고 삶조차 괴로운 연속인 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미래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 같은 후예들의 미래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서 그 비참함을 자신으로 마무리하려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래 쉬운 것만은 아니다. 결국 비참한 생활은 다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 사슬에 묶인 채 살아가야 한다. 그 사슬이란 후천적 불평등,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 겪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런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큰 고민이 되고, 인간 개인에게 파멸을 불러온다.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국부론>을 저술하나, 그 근본은 어느 국가에 존재하는 국민들이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경제생활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겠지만, 그 원천은 국민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국민이고, 그 노동의 가치로서 임금을 받아 우리는 생활수단으로 삶을 영위한다. 만약 그 시스템 구조가 붕괴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그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것 같은 암울한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사회경제적 불안감은 국민 생활에 큰 지장을 안겨준다. 과거에 우리의 슬로건은 흔히 말하여 과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과소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처럼 뭐든지 아끼고 절약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경제적 토대는 결국 과학기술과 장비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지가 과거 기계 1대당 100롤을 생산할 수 있다면 지금은 1,000롤을 생산할 수 있으며, 그 기계를 운영하는 사람이 과거에 5명이라면 이제는 2명으로 족하다. 그만큼 장비가 발달하면 할수록 인원은 축소되고, 생산물량은 증대된다. 그렇다면 이래 생산 된 상품이 누적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자본의 융통에서 자본을 투자하면 거기에 대한 자본이 회수되어야 한다.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되어야 하는데, 생산은 계속 지속되나 소비가 지출되지 않으면 상품은 재고물량으로 남게 되어 결국 업체는 자본의 압박으로 도산하게 된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노출된 업체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같은 작은 업체이며, 이런 업체들은 대기업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재력이나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사실상 한국에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인원이 많을까? 대기업이라도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하청이나 비정규직을 제외한다는 조건을 내세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적인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을까? 국내 경제적 민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의 근대화 내지 산업화가 가진 경제적 체계인 시대는 주요 경제적인 전략이 해외수출이었다.

 

해외수출로 외화를 모우고, 외화유치로 통한 자재구입, 산업시설 유치가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시장규모가 해외가 아니라 국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미 무역을 하는 세계시장에서 어느 나라에서 어느 상품이 나오고, 그것이 어디로 수출되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전에는 국내에서 생산했다면, 이제는 해외에서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당사자에게 판매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재화와 상품은 해외만 사업대상지로 볼 것인가? 아니다. 결국 해외에 간 기업도 국내에 모태가 되는 계열사로서 활동하는 것이고, 국내기업이 상주하지 않으면 한국기업이란 의미가 없다. 국내에 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야지 재고를 조정할 수 있으며, 상품적인 요소를 더 새롭게 변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국내시장이 계속 위축되어 결국 과소소비로 이어지고, 과소소비가 시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이런 문제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에 의해 조작된 공산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만들어져서 판매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다고 모든 것이 팔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필품들은 어떻게든 삶에서 제외할 수 없는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많은 기업들은 생필품들만 파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상품이 나와 팔리지 않는다면 산업이 발전할 수 없으며, 산업이 결국 문화적인 요건도 담당하므로 문화적 콘텐츠 역시 축소된다. 물질적인 토대로 생활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곧 국민생활이 어렵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국가경쟁력까지 저하된다. 국가경쟁력 저하로 소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간접세가 줄어들고, 그 보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악수를 두고, 그것은 국가부채의 증가와 더불어 그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적 고리는 끊이지 않게 되고, 결국 국민생활 수준 하락, 인구감소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은 이런 문제에 직면했고,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거기에 따른 산업들이 위축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결국 시장규모가 축소하고,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상품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에서 마르크스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하나, 처음부터 마르크스의 실험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사상적 체계와 학문적 연결성을 우린 너무 늦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문제를 기존 경제학의 입장에서 도저히 문제가 되는 실마리조차 풀 수 없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옳다”라고 말하는 현실도피이상자의 헛소리만 나올 뿐이다.

 

문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보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또한 그런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만든 도서다. 19세기 유럽에 불어 닥친 대공황은 유럽은 큰 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희생되었다. 그 문제를 만든 것은 희생된 자들과 전혀 무관했다.

 

그 문제를 바로 찾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나, 그 문제의 근본을 알면 추후에 다른 방도가 떠오른다는 점이고, 그 원인을 찾아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발생되면 심하면 심했지, 그 이상 호전될 기미는 없다.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읽는 것은 마르크스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성한 <자본>이 어떤 도서인지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에 대해 아주 친절한 방법을 안내하는 책자이다. 처음 자본 Ⅰ~Ⅲ까지 읽는 것은 3,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어려운 책을 무작정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본>을 읽으면 단순히 경제학만 거론되는 게 아니다. 문학과 철학, 각종 인문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본>을 읽는 것은 경제학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정수가 담긴 인문학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단히 접근하는 순간 큰 산과 깊은 바다를 만나 쩔쩔 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추천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과거 강신준 교수의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보다 더 자세하고 이해하기 좋게 만든 도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의 자칭 진보라고 말하는 분들이 한 번 다시 고민할 것들이 있다.

 

과거 경희대학교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다보면 자칭 좌파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점을 거론한다. 그것은 술집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기만 하는 좌파에 대해서다. 기본적으로 좌파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할 때도 그렇고,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할 때도 그렇다. 근본적 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결국 결과에 대한 가십거리만 늘어놓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지식인에 대한 조롱으로서 표현하자는 좌우도 아닌 좌우라는 존재들의 한계는 결국 자신들의 행위에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말할 수 있다면, 그 뒤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고,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계속 종알거리기만 할 것이다. 강신준 교수가 가장 중요한 말은 변증법이다. 변증법에서 현실적 토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적 토대로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실패한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의한 것이다. 삼부회 조직 이후 왕정을 무너뜨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고, 시민혁명이라고 해도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그저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현상을 보듯이 무작정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해도 그것을 통째로 뒤집는다고 해도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인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그 이후 1799년 브뤼메르18일 같은 일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변증법적으로 거쳐 서서히 고쳐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혁명은 모든 것을 뒤집어도 결국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바로 그 토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판단의 혁명이 사실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다고 국가와 사회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부정적인 요소를 토대로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시대에서 희생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희생이 싫다면 더 큰 희생이 다가오고, 그보다 더 큰 희생을 우리의 미래들이 짊어가는 일들이 생긴다.

 

역사란 늘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제 아무리 개별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항상 뭔가 일정한 규칙과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새로운 인물이 나올 뿐이지, 인간이란 근본적인 본질이 크게 비켜나가지 않는 점을 각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인지하여 <자본>을 읽는다면 당장은 아니나 조금씩 변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무조건 단결과 투쟁을 외쳐도 결론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고, 문제의 골만 깊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와 고통 그리고 희생이 뒤따른다. 그것은 비록 남의 일이고, TV에서 보이는 하나의 Show라고 여겨도 언젠가 당신이나 혹은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마치 점쟁이가 “당신은 아주 위험한 일이 닥칠 겁니다.”라는 엉뚱한 미래주의 같은 게 아니라 현실 사회구조로서 통해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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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투 2016-02-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을 읽지 않고 생태를 말하고, 자본을 빠뜨리고 진보를 말하는 것은 우물도 없는 사막 상태에서, 가마솥도 만들지 않는 살림살이에서 숭늉을 복제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에 산다면 마땅히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