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하면서 단순명료한 것이 인생이란 것이다. 내가 그 누구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지금 그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활동으로 본다면 학생이라면 공부를, 직장인이라면 일을, 백수라면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항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놓여 있고, 그 위치에 있으면 다시 새로운 목표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목표의 굴레 안에서 계속 회전하고 만다. 우리의 인생은 빌딩 건물 안에 들어갈 때 자동문으로 들어갈 수 없거나 혹은 손잡이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어렵다.

 

360도로 회전하는 회전문 안에서 투명유리로 너머 보이는 출입구 안만 보다가 다시 계속 돌고 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위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면,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요소로 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기 쉬워도 그 정의에 대한 과정과 흐름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즉 결과로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도 그 결과 안에서 진행된 프로세스나 구조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최근 내 친구와 통화하면서 있은 일이다. 내 친구는 자영업자이고, 나는 월급쟁이다. 내 친구는 요새 경기가 어려워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나는 그 원인을 두고 과소소비에 대하여, 물가의 증가에 대한 인플레이션, 그 원인은 화폐의 유통이 지나치고, 특히 부동산이 근본적으로 심하다고 했다.

 

지대가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세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대의 상승만큼 이익을 내야하며, 그 이익이 결국 소비자로부터 나오나, 지금 경기가 좋지 못함이 연쇄적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런 나의 분석에 너무 그런 쪽으로 가지 않고, 복합적이지 않느냐에 물론 그것을 염두하다고 있다고 했으나, 적어도 내가 주장하는 논리는 너무 협소하고,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복합적으로 다양한데, 그것을 어떻게 명료하게 나올지에 대해 혹은 그런 거시적인 요소에 눈을 두는 것보다 미시적인 게 옳지 않느냐고 이야기 들었다. 거기에 대하여 내 친구도 알겠지만, 개인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나, 사회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점과 이렇게 구조적인 분석을 들어가면 이해하기 어렵고,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조건을 생각하면 사실이고, 한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전체의지가 하나의 당위성을 만들어내지만, 사회적인 재화와 화폐에 대한 수요자로서 찾아가는 사람은 결국 한정적으로 될 뿐이다. 국가의 운영에서 세금의 부족에 따른 세수의 증가, 소비세 증가에 따른 부가가치세 증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기업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현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요약하여 말하자면 소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우리가 소비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바라는 만족을 위해서다. 그 만족감에서 누군가 이런 곳에 가고, 이런 상품을 사고, 이런 것을 보지만, 이에 달리 다른 자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새로운 상품과 기호의 소비는 언젠가는 자신의 경제력과 시간조차 갉아먹는 해충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까지 경제학적인 고찰과 사회구조적인 요소, 더 나아가 친구와 있었던 일과 개인에 대한 생활과 삶에 대한 인생고민, 전혀 고리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져있으며, 충분히 우리는 조금 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학생이 공부하는데 왜 공부하는지 물어보면, “좋은 대학교 가려고요”, 좋은 대학가면 무엇이 좋은데 물어보면, “좋은 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 돈을 벌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돈으로 친구와 재밌게 놀거나 여행하거나 사고 싶은 것을 사려고요.”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결혼이나 가족을 위한 여러 가지 목적들이 있을 것이나, 결국 우리는 즐거움 인생을 위해 일을 하고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시간만큼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그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종언의 종착점이 있기에 우리는 시작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연속에서 우리 시간은 매일 24시간이란 물리적으로 공통된 조건이 부여된다. 그런다고 모든 사람이 그 24시간이 같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는 사람과 밤늦게까지 커피숍에 일하는 사람, 심지어 술집아가씨조차도 다 24시간을 주어져도 전부 다른 24시간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 각각 다르기에 우리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거기에 따른 자신의 삶을 꾸며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만족하지 않고 불행한지 물어본다면 과연 어떨까?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자연주의자에 가까운 인간이라 지금의 삶이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밥을 굶는 사람, 전쟁에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나와 비교하면 참 어리석을 것이다. 사람의 행복의 기준을 그렇게 극단적인 요소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극단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고, 비교한다면 대기업 총수 2세 내지 3세 역시 비교한다면 그럴 말을 하는 사람도 기가 찰 것이다. 누구나 자시만의 논리가 있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로서 다가가면 납득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한국 경제문제, 그리고 해외 정치현황을 논해도 사람들에겐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물론 나도 그럴 것이나, 적어도 그 입맛 맞는 이야기에 대한 근본을 찾아가기 않는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는 한국은 포스트모던이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그 과정이 되어야할 모던의 시대는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모던적인 요소, 즉 계몽주의에 대한 한국의 접촉 기회는 없다. 계몽주의 정신은 지식인으로 한정되고, 그 지식이 뿌리 내려 퍼지기 전에 이미 모든 주관이 객관이 되는 포스트모던이 되었다. 극우성향이 비윤리적 사이트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당위성을 외치는 이유 없이 그런 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소유자나, 혹은 나처럼 다소 부정적이고 불만의 눈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삶에 항상 휘둘리며 살아간다. 학생은 정해진 시간 안에 교실에서 억지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고, 공장노동자는 딱딱한 자세로 계속 동일한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 같은 자세로 같은 일을 계속 하면 인간은 기계를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인간이 된다. 시간관념이 무척이나 지루해지고, 더 심해지면 시간관념조차 없어져 버린다. 어째보면 공장노동자가 아니지만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맞이하는 나 역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제1의 지루함,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시간을 그저 소모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성에서 하나의 상황을 부여한다. 지루함이 느끼는 인간은 소외의식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육체적으로 부담이 온다. 지루한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오는 증세는 신경쇠약증세 내지 노이로제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에 깊이 빠져든다. 자신의 무력함을 순간적 자극으로 그 간극을 채우려는 것이다.

 

인간은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이성의 존재로 되겠지만, 이들에게 이성이란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만 볼 것이다. 감성이 메말라져 가기에 늘 머릿속은 흥분상태이며, 다른 누군가와 충돌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보여준다.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았기에 잠재적인 공격성향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지나친 피로와 무기력감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자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의 사회에 살게 되면서 자연적 조건을 상실했다. 루소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로 되길 바라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사회계약론>의 저술동기도 그렇고, <에밀>에서 에밀조차 자신의 판단력으로 사물을 판단하나 사회 안에서의 인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삶은 자기 스스로의 자연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연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유는 왜 필요한가? 더 나아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통해 생각해보자, 마르크스는 노동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그 자체의 지나친 시간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어차피 물질로 가득한 문명사회에서 기술의 유지와 혜택이 없다면 인간은 1분 1초로 제대로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 노동시간을 줄여 자기만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가 영화에 대한 글을 적는 것이라, 누구나 그것이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다. 바로 여가시간의 활용이고, 그 여가시간으로 통해 인간이 즐기고 싶은 취미와 취향,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먹고 자고 더 나아가 성욕을 지나,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점이다. 동물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본능 이외의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문화여가생활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여가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면, 바로 인간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가령 당신이 집안 내지 회사일로 장거리 출장을 가는데, 그 시간은 출장으로서 일을 하고 있으나, 그 시간 동안 상당히 지루할 것이다. 운전대만 붙잡고 몇 시간 동안 운전하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러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옆 자라에 대화상대를 나두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운전에 집중하더라도 그 지루함은 이길 수 없다. 귀로 통해 전달되는 신호가 결국 지루함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음악도 계속 듣고,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다시 지루해진다. 인간은 본능적인 생존조건과 싸우는 시간을 지나 이제 지루함이란 시간을 싸우는 것이다. 반복하여 강조하나, 그 투쟁이 되는 지루함이란 시간은 매일 24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도 없이 계속 싸워야 한다. 그 종지부는 인간의 죽음 외에는 없다. 인간의 죽음은 무엇이든지 굴레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라 개인은 여기나, 안타깝게도 그 개인의 주변은 계속 이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일한 것은 죽음이고, 죽음과 같은 취침 역시 한계가 있다.

 

취침시간이 길어지면 그 역시 지루함의 연속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작가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빵이란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이고, 장미는 생존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즐거움이 되는 대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삶에서 즐거움을 빼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어느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비교하여 행복을 논하기가 비논리적인 이유는 행복은 잘 먹고 안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에게 그게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늘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원한다. 단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늘 새로운 기호만 소비할 뿐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바라는 삶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작가는 소비가 아니라 낭비를 하는 삶이 되라고 한다. 소비는 계속 소모하지만, 낭비는 어느 일정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소모하지 못한다.

 

우리 앞에 천해진미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해도 결국 접시 몇 개 안에 질리고 만다. 그러나 소비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것을 계속 찾아가고 구매한다. 어느 방송에 나온 구경거리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소원해진다. 기 드보르가 말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열렬하게 소비의 사회에 추종하는 이야 말로 가장 소외된 존재다. 그것은 자신이 그것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찾아가는 여정을 주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사회는 인간을 계속 기계처럼 예속화하고, 지루함을 선사한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시간적 절약을 선사해도, 시간적 만족을 빼앗아 버렸다. 아프리카 원주민 부시맨은 하루 몇 시간 일하고 일주일동안 일도 하지 않고 자기 여가시간에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반나절 일하고도 가난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본다. 그들이 즐기고 싶은 여가생활에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도대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지루함과 피곤함만 넘쳐 얼굴에 깊은 주름만 새겨져 갈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나와 조금 비슷한 생각을 하던 자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혁명을 일으키자고 한다면 분명 국가에 의해 체포되겠지만, 그 혁명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이런 부분은 중요하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18세기와 20세기를 흔들고 오늘 우리 현대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혁명 그 자체를 성사해도,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왜 그럴까? 답은 단순하다. 현재 상황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현재 상황을 바꾸고 난 후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주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서 인간은 고민이란 것을 다시 찾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고민하는 삶을 살기보단 쉬운 답을 찾고, 간단히 지나가는 지름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항상 우리는 같은 굴레에 빠져 회전문 유리너머로 보이는 출입구 안을 계속 들여다볼 뿐이다. 때로는 회전문에 의해 안이 보이고, 밖이 보일 것이다. 유리문 너머의 밖이 우리 현실인데,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래서 계속 돌고 도는 매일 24시간의 지옥에 살아간다. 인간에게 24시간은 평등하게 주어지겠지만, 그런다고 그 24시간이 주어지는 횟수는 균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지금에 와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나, 언제나 우리는 지루함에 의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몇 %인가? 그 일조차 하는 사람도 그 일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상태에 계속 몸을 맡기는 매너리즘으로 무장하기보단 더 깊이 자신의 세계를 파고들거나 그 옆으로 퍼져가는 것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빵을 먹은 후에 장미로 가득해질 인생이 될 것이고, 그 장미가 잘 자라면 자신에게 새로운 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길 역시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