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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 - 한복을 청바지처럼, 28살 전주 아가씨의 패션 창업기
황이슬 지음 / 라온북 / 2014년 8월
평점 :
개인적으로 나는 문화와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많기에 이래저래 많은 분야를 접하게 되고,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사회와 관련하여 영화와 문학,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는 sub-culture 영역까지 두루 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베이스라인이 sub-culture이고, mass-culture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라진지 옛날이고, 단지 서브컬처 내에서 mass-culture로 진입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mass-culture는 mass-culture로서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계속 내부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Cliche의 연속이란 점이다. 따라서 상당히 진부하고 뻔히 보이는 이야기이므로 처음에는 많은 대중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만, 자신들의 내면에는 자기들이 바라는 전형적인 패턴주의를 완성시키는 형태로 전락한다.
따라서 유행에서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한 간극의 차이가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그 형태에 따라 이야기가 파생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파생의 원천은 sub-culture 영역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중오락물 내지 예술로서 바라본다면 기존의 mass-culture로 통해 전혀 새로 보일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콘텐츠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 속에서 돌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가 언제나 같은 이야기로 무색해지는 이유는 바로 mass-culture의 한계성이고, 그 mass-culture의 간극을 채우기 sub-culture를 도입하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 중에 <식객>이나 <내일도 칸타빌레>는 한국의 웹툰과 일본의 만화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내일도 칸타빌레>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내지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OSMU라는 one source multi use는 바로 저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클래식이란 장르는 극히 대중적이지 못한 점과 그것을 만화로 제작한 것은 매우 maniac적인 요소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작품 내 전개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고 재미를 유도하며, 클래식이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의 sub-culture 잠재력의 무서운 점은 mass-culture에서 나오지 않은 잠재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하나의 상품이란 콘텐츠를 유발한다.
따라서 21세기 산업구조는 더 이상 20세기의 공장에서 바쁘게 돌리는 산업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탈(脫) 산업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post-modern이란 점에서 기계적인 요소보단 차라리 기계적 요소보단 이미지의 대두와 이야기의 감성이 우리의 시장을 형성된다.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나 하다못해 식당에서 죽어라 고생하시는 아주머니들도 드라마를 본다. 우리는 휴식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여가 내지 취미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취미라는 것은 문화산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본주의 시장구조와 매우 밀접할 수 있다.
단지 자본이란 점은 경제적 조건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조건, 사회적 조건, 정치적 조건, 지역적 조건 등이라는 다양한 인자들이 따라 붙게 되는 마련이다. 문화자본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거나 혹은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문화자본에 투여할 수밖에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가 자신의 지갑만 두둑하게 하는 것 외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는 단지 그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기호들로 가득하다. 프랑스 사회철학자 보드리야라는 인간의 상품에 대한 가치에서 현대 사회는 기호로서 이루어져 있고, 기호 그 자체가 상품인 셈이다.
기호는 단순히 메이커 이름, 기업이름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조차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가 탈(脫)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산업구조에서 결국 새로운 가치를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미지 메이킹이란 점이다. 상품의 가치는 대부분 비슷한 기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냉난방공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우리나라 에어컨 기계가 어느 회사가 더 좋고 나쁨을 확실히 말 하기가 어렵다. 정보력과 기술력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우리는 결국 어느 회사로, 어느 상품으로 또는 누구를 통해 신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복입고 홍대 간다>를 저술한 황이슬 씨의 책은 21세기 탈(脫) 산업화된 사회구조에서 대표적인 성공한 CEO다. 한국이란 사회에서 본인의 가정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경제상황, 가정에서 여러 자매와 같은 방을 사용한 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정해진 패턴에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소녀라는 점에서 많은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그녀는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성공했고, 자신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성공이야기와 자기계발서는 정말 싫어하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베이스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뒤에 있는 배경이나 조건이 은밀히 따라 붙었다. 혹은 시대적인 조건이 있었다. 갑자기 재료의 공급이 급증하거나 또는 상품의 가치가 급작스레 올라가거나 독점에 의해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되거나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황이슬 씨는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이란 점을 이용했고, 이것을 자신의 생활에서 접목하여 일으킨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과 능력을 치하해도 정작 그녀의 베이스라인에 대해 생각했을까 의문해본다.
조금 짧게 지나가는 말이나 그녀는 지금으로 말하면 조금 게임 오타쿠인 점과 대학동아리에서 코스튬 플레이를 할 정도로 sub-culture에 어느 정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mass-culture는 이미 한계에 차여 있어서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와도 구조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게임을 했다는 점, 그 게임으로 통한 아아템 수집과 게임적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현실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점이다. 이야기를 붙이고 떼는 실력은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나온 유감 없는 손놀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잠재력과 노력은 칭찬하나, 한편으로 조금 아쉬운 점은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마란 점이다. 세상에 힘든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연히 계기를 통해 발견하여 큰 성공을 가진 자는 극소수다. 그녀가 언급한 것처럼 어느 대단한 강사나 상업인이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쳐 왔다. 하지만 그 실패는 기회의 공정한 부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황이슬 씨의 노력은 개인적 공부만 아니라 독서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서에서 니체로부터 칸트, 루소, 키케로 같은 기라성 같은 이름이 나온다.
하지만 루소의 이야기에서 실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었다면 자신의 성공담에 대한 비교에서 타인의 기회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녀의 실천력과 노력은 인정하나, 그렇게 하려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프로로서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팔아주는 옷을 사지 못하는 식당아주머니들은 그녀의 상품은 필요 없을 수 있겠지만, 식당아주머니나 혹은 청소부 같은 잡무를 하는 분들이 없다면 저자분이나 혹은 나,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입장도 조금 고려해보면 좋겠다는 점이다. 저자 분이 대학시절에 한복을 입을 때 처음 남에게 상당히 낯설어 보였을 것이고, 자기 자신 나름대로 좌절이나 사회적 배타성을 경험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어째든 그녀의 성공적인 한복 라이프에서 내가 처음 본 것은 역시 코스튬 플레이 문화였다. 가끔 인터넷 sub-culture계통에서 코스튬 플레이는 다른 콘텐츠를 지닌 sub-culture와 다르게 사람이 직접 활동하는 점과 의상수주와 대여로서 생계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복을 만드는 것보다 그녀가 <궁>이란 만화와 드라마 주인공을 코스튬 플레이 했다는 점에서 이미 놀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보여준 셈이다. 황이슬의 업적에서 가장 높은 것은 놀이 그 자체를 자신의 노동력을 부여하여 상품적 가치를 창출한 점이다.
앞으로 21세기 이미 산업화로 살아갈 수 없고, 계속 블루오션으로 통해 산업구조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블루오션 자체도 기존 사회적 생산구조를 토대로 하므로 블루오션이 무형의 존재로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무형의 관념이 유형의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다. 창의력을 원래부터 가진 사람이 계속되는 중고등학교의 주입식 교육은 오히려 자질 있는 사람을 억지로 망가뜨리는 결과만 나오게 된다. 자신의 열정을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과 상담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정성스레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스펙을 쌓아도 결국 1등부터 꼴찌까지 정해져있고, 대기업과 공무원도 결국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단 %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면 간단하다. 중소기업에 가거나 또는 새로운 산업체계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구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결코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 역시 아니어도 그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계발서 내지 성공담에서 가장 중요한 실수사항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순간 이미 그 사회는 붕괴 되는 것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피자집, 통닭집, 맥주가게들은 단 몇 m 간격으로 계속 줄지어 가고 있다. 소비 그 자체를 위한 가게, 누군가 생산한 후 임금을 받아 그 가게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업구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듯이 주식이나 재테크 같은 허무맹랑한 성공신화는 결국 거기서 끝이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실패와 고통이 은폐된 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분명 직접적 내지 간접적인 실패를 우리는 너무 무신경하게 피해가는 것이고, 단지 잘 된 것만 보려고 한다. 결과론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결과만 바라보지, 그 과정에서 담긴 문제나 구조를 보지 않는 것이 큰 골치다.
다행히 이 책에서는 과정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었다. 평전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은 아름다운 옷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외래문화에 치여 한국문화는 이미 소외되어 가고 있다. 교회라는 기독교종교를 가진 황이슬 씨가 한복문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에 어찌 보면 나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것은 항상 가만히 웅덩이 속에 고인 물처럼 있으면 안 된다. 고인 물은 썩어 들어가고, 결국 그 처리비용과 인력에 더 큰 적자를 남기게 된다. 새로운 흐름과 과거의 산물을 적절하게 발전해 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산업에서 새로운 아이템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인 한복의상 sub-culture은 아니지만, 한국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하위적인 문화로 되었다. 조선시대에 한복은 당연한 것이나 지금의 시대는 한복은 당연한 게 아니다. 상품의 기호성은 결국 그 자체로 당연한 게 아니라 당연하지 않았던 게 당연한 것으로 되는 것에서 가치를 눈에 뜬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나, 자동차 중에서 벤츠 자동차가 매우 고급이다. 벤츠라는 상품이 본래 가진 내구력과 안정성 등과 같은 기계적인 조건이 갖춘 것은 분명하지만, 벤츠라는 상표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되는 것이다.
TV에서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나는 운동화를 신는 것이 아니라 Nike를 신는다고 말이다. 그런다고 나는 이런 것들이 당연시 되는 사회라도 꼭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품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상품을 유출하여 이익이 되겠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의 노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IBM의 횡포에 맞선 apple사의 기계도 결국 많은 노동자들의 착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겉만 보지 말고, 그것을 이루는 구조로서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결국 성공이란 왜 그런지 보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맞는 틀을 찾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열쇠는 열정이 필요하나 모든 게 열정만으로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점이다.
황이슬 씨의 책에서 그녀의 성공은 많은 베이스라인이 동원된 것이고, 그것을 위한 경제적 조건은 열악해도 시간적 조건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시간이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시작하는 점에서 그 노동을 하는 시점이 중요한 것 같다. 황이슬 씨에게 상담해오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고 여겼다. 능력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역시 생계부담이 없는 시절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놀이, 예슬 그리고 상상력이 원활히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말이 있듯이, 상상력으로 통해 새로운 세상은 구현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앞을 만들기 위해 체계를 개선해야 하나 계속 앙시앵레짐 같은 구체제에 물들어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놀이가 하나의 예술과 상품이 되는 순간, 기계로부터 계속 잠식당하는 우리의 일자리를 다른 쪽으로 대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