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4천원 인생>, 2010년 나온 도서이고, 불과 5년 전에 아주 어려운 환경에 취업한 신문사 기자들의 기록을 담은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는 개인만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결국 자기합리화 내지 자기자랑만 내세우고, 내가 되는 것에 대해 남도 될 수 있다고 하나, 그 조건이란 한 마디로 억지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천원인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찾아갔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 실사 옆에 있어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거나 않으려 했던 것을 찾아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의 현실에서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영웅적인 존재가 나와 강한 힘으로 계속 적을 싸워 나가는 파워 증가식 이야기를 싫어한다. 누군가 그렇게 강해져서 진화하여 이기는 방식은 약한 자들의 몰락은 그저 있어야 할 당연한 사실이다. 정의란 가치는 결국 주관적인 힘들이 모여 객관적인 지표를 나타낼 뿐이지, 그 정의라고 말하는 하나 그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입으로 정의를 타령하는 자들이어야 말로 제일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의 가치는 오히려 명확한 것보다 불명확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르다.

 

결국 정의의 사자는 어려운 도탄의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는 인물이겠지만, 정작 그런 인물이 우리에겐 존재하는가? 그 영웅은 자신만의 영웅이지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그가 우리의 영웅처럼 보이는 것은 TV나 신문, 각종 미디어로 장식되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영역을 과다포장 내지 은폐, 조작, 허위로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선 그것들이 흔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문제는 그런 흔한 이야기는 우리 일상에서 전혀 흔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옆을 보기보단 항상 위를 보려고 한다.

 

위를 보고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위를 보고 가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길과 계단을 보고 가야 한다. 위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결국 계단 위를 하나씩 걸쳐 가는 것이고, 그 단계를 거치어 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4천원인생>은 우리 개인의 삶 자체를 위로 가기 위해 만든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장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개인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나, 사회구조는 개인을 멋대로 농락한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마지막엔 그 무관심한 대중들에게 그 책임이 전가된다.

 

전가된 책임의 문제는 결국 타인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서 온 책임과 고통의 분담은 처음 시작은 본인의 의식부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굴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하면 간단하다. 생각하면 되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무슨 고민이 있어? 그러면 생각해보고 해결하면 되라는 충고는 매우 간단하게 타인에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고민에 대한 문제와 원인,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결과는 쉽지 않다. 여기서 결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라는 마지막 종착점이 아니라 발단의 시작점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시작점을 찾아가지 않고, 도중에 있는 이력만 보려고 한다. 시작은 눈으로 들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중간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천원 인생> 아니 그 이전의 <88만원 세대> 이야기처럼 우리는 현실의 이야기를 피해 계속 화려한 이야기와 환상만 꿈을 꾼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천원 인생><88만원 세대>들과 밀접하게 조우하고 있다. 길가다가 우리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용품을 구입하고, 배가 고프면 회사나 학교 근처 식당에 들린다. 하다못해 빌딩 안의 화장실을 가면 무수히 많은 얼굴을 만난다. 아파트나 대형건물 입구에는 경비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조차 말이다.

 

그들은 우리와 옆에 있지만 결코 옆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으로 대하는 그 자체적인 목적인 아니라 하나의 도구 내지 물품처럼 물화되었다. 따라서 물화된 인간은 자신 스스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언제나 자신의 존재적 존엄성을 가지지 못한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사슬에 의해 매여 살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는 포유류에서 인간이란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에는 어느 지역의 집안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 등에 의해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롤즈의 <정의론>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불평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불평등으로 인해 최소수혜자라는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성공이나 혜택을 받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완수할 수 없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조건은 기회의 균등이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교육이다. 정의라는 것은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피해 최소한의 손실로서 끝내는 것이라 보면 된다. 어느 이익이나 가치가 누군가에게 돌아가면 다른 누군가에게 그에 대한 역효과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효과를 받아야 하는 자와 받지 않아도 되는 자의 정당한 균등관계가 무너진 지 옛날이다. 따라서 <4천원인생>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에 의해 메우게 되는 경제적 굴레는 우리 사회의 큰 우환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문제는 인간의 시간은 늘 24시간씩 매일 채워주겠지만, 24시간이 무한대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산의 조건은 바로 생산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생산조차 재생산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4천원인생>은 후천적 불평등에 의해 시작되는 책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은 시간당 4천원에 10시간에서 많게는 15시간에 이르는 고압적 노동에 시달린다. 공장 노동자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기계부품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안전장치도 미비하고, 휴식공간이나 여유시간도 부족하다. 화장실에 가는 몇 분과 담배를 피우는 그 몇 분도 아깝다. 물을 마시고 잠시 앉아있는 시간도 아까운 것은 바로 그 11초가 생산품을 만드는 노동과정이란 점이다. <4천원인생>에서 공장노동자들은 기가 빠질 때까지 일하고, 마치 시간이 1초가 지나가는지 또는 1시간이 지나가는지 모른 채 일에 죽어라 빠진다.

 

그러다보니 정신적 파괴로 이어지고, 자신들의 입에서 거친 말과 상스러운 말만 나온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명제는 그가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 안에서 가능하다. 식당아주머니 같은 경우 잠시라도 앉을 여유가 없고, 앉아있는 것은 반찬 만들거나 양파, 마늘 등을 손질하는 경우다. 감자탕 집에 뼈다귀가 넘치나, 자신들은 뼈다귀조차 만질 수 없다. 무엇이든 인색한 주인의 방침이 그렇다. 주인은 자신의 자본력이 아닌 은행 빚에 대출받거나 건물주에 세를 들어 하기에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누가 더 경제적으로 위협에 놓여있는지 생각하면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단지 아전투구처럼 만인 대 만인이 아니라 덜 심각한 빈자 대 더 심각한 빈자들의 대립구도가 바르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식당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밑천 파먹을 수 없는 가게주인도 그러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그렇다. 물론 자재와 식료품들은 물리적으로 줄어들어가겠지만, 인간 그 자체는 물리적으로 줄어들지 않고, 시간적으로 되돌아간다. 업무의 과중은 건강에 치명적이고, 결국에 가서는 오히려 병원비가 늘어나는 형태가 된다.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조건은 노동자가 가진 것은 몸이기에 그들의 고용권한을 잡고 있는 가게점주들은 마치 종업원들은 자기 노예처럼 부린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 법적인 요식행위이지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그 자체를 지탱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일반적인 민주주의보다 더 발달된 민주주의체계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보이는 철학적 개념과 현실적 상황은 언제나 같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인민이란 개념은 국가의 설립 이전에 살던 사람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에 대부분 국가들은 봉건적인 왕국이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국가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해도 그 지역의 주민들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그래서 헌법에서 국민은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4천원인생>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4천원인생>이 아주 극소수의 개인에 불과하면 문제가 아니지만, 식당아주머니로 일하며 시급 4천원정도 받는 분들은 전국에 200만 명이란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이 일하는 이유는 본인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미래를 위해서다. 그들이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자녀 역시 가난을 이어받아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고통 받는다면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인해 인구가 계속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부족은 인구의 감소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대체할 대안이라면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변명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들을 유입한다. 하지만 집단적 배타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외국인들은 불평등한 처사에 고통 받는다. 임금도 부족하고, 심지어 온갖 욕설에 성추행 그리고 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이 병이 든다. 철학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면 고아, 외국인, 장애인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의 미소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미소를 항상 짓을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들이 숨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약자의 얼굴에 그늘이 찰수록 누군가는 이익을 볼 것이다. 뉴스와 신문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해 말만 많은 사람들은 넘치고 넘쳐 나지만, 그것에 대한 근본적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이들은 정말 부족하다. 결국은 정치적인 법률과 제도로 해결해야 하나 막상 당하는 자들도 자신의 처해진 현실을 괴롭다고 말하지, 그 근원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는 없다. 역시 지식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사회생활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오늘 하루 내가 출근하여 가는데 버스타려면 버스기사가 있어야 하고, 버스기사가 버스를 운전하려면 정비사가 필요하며, 처음부터 버스를 몰려면 버스를 만드는 공장이 필요하다. 공장이 운영되려면 철, 플라스틱, 유리, 나무 등의 재료가 필요하고, 그 재료를 만드는 공장, 그 재료의 원자재를 캐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작은 일상 하나가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오고가는지 우리는 항상 인식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언제나 하나의 일상이 되어 그것을 망각하여 누군가의 고통과 착취는 잊어지기 마련이다.

 

요새처럼 물가는 올라가고, 임금이 정체되어 취업률은 저조하고, 실업은 해결이 어려운 지경에 계속 저임금 고노동의 3D 산업에 계속 사람들은 몰려가야만 했다. 거기조차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과 근무조건이 붙는다면 문제가 없으려만, 그것이 되지 않아 문제다. 마트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 속에 있는 그들을 어째 대하고 있는가? 솔직히 나 역시 가진 여유가 부족하고, 마트에서 사는 것만 사기에 마트 상품 진열대에 있는 판매원의 이야기를 계속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불필요하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른바 진상손님, 마트뿐만 아니라 최근 아파트 수위의 자살사건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나 파탄이 났는지 다시금 알게 된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아주 성인군자나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내 자신도 과오를 저지르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실수로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멋모르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지자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서린 눈빛을 보고 부끄럽게 여긴 적이 많다. 적어도 그런 실수를 최소화하고, 줄이는 것만이 혹은 그럴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그 생각자체에서 자기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은 남에 대한 이목을 고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런 부류가 더 체면에 신경 쓴다. 자신의 얼굴을 뻣뻣하게 세우는 것을 남을 깔보는 것에서 찾는 아주 불쌍하고 어리석은 종족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런 부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돈으로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돈 그 자체로 해결이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아직까지 존재하기는 하나, 단지 너무 작고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4천원인생>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소모시켜 가고 있고, 우리는 그 소모와 착취로서 살아간다. 언제나 식당이나 청소부 아주머니를 보면 수고합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짜증을 부리지 말자.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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