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코 패스> 1기에서 분명 코가미 신야가 정신분석자 겸 범죄심리학자인 사이가 죠지의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코가미 신야는 가상의 마키시마 쇼코를 자신의 내면으로서 대화를 나눈다.
그의 대화에서 자아를 가진 코가미 신야와 자신의 가상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마키시마 쇼코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변증법적인 논리로서 대화를 이어간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시작한 파놉티콘, 사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흔히 겪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이해하기란 어렵다.
인간은 평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대부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인간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어느 일정 틀을 부족하면 사회적 비적응자로 판단하고, 그 이상으로 되면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한다. 인간의 능력이 과소하면 문제지만, 그 이상으로 되는 경우 배타적인 대상으로 된다. 인간의 재능이 때로는 남들에게 차별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경우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 니체는 평범한 인간들의 도덕의 정의를 지루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토크빌이 주장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보편적인 인간은 과연 판단력의 한계성이 어디까지인가? 분명 밝힐 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한 의지에 대한 설명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여 모은 의지를 일반의지라고 한다. 이에 반해 개인적인 이익을 대중들이 하나의 연결성으로 이어질 경우 바로 그것은 전체의지다. 그래서 일반의지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체제도의 목적이나, 대부분 민주주의는 일반의지보단 전체의지에 의존하고, 그런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난해한 경제적 이익이란 점이다.
자유에 대한 정의와 철학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자유라는 것은 정치, 사상, 철학 등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사실 대부분 신자유주의국가에서는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판단력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판단력을 크게 좌우할 이익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결국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 누군가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가?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가령 한국경제가 어렵다고 하여, 물가가 상승하여 서민경제는 어렵고, 임금을 제대로 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내지 부동산의 거품은 계속 올라간다.
계속되는 부동산의 투기열풍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중되고, 그 토지 내지 건물에 임대받는 자들은 부동산 거래가격 상승에 따라 지대나 임대료가 올라가고, 그에 따라 다시 상품이나 인건비 모두 상승한다. 이런 연쇄적인 반응에서 본다면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공리주의 이상은 현대의 자유주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벤담이 영국인이란 점에서 영국의 마지막 고전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로 넘어가면서 그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다른 길을 찾아간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모든 utility 즉 공공성을 가질 이익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이고, 존 스튜어트 밀은 상대방의 차이에 주안점을 두었다. 양적인 공리주의와 질적인 공리주의란 바로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사실 전자의 경우 다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같은 조건을 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조건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차이점을 인정함으로서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평등은 없다는 것에 의해 불평등이 심각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지, 누구에 대해 그 공정함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지적하는 바로 이런 공리주의 이상이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려고 하나, 문제는 시발라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잠재적인 요소를 하나의 데이터 통계로 나타내 그들을 계속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잠재범죄자로 격리할 것인지, 더 나아가 처벌로 통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시스템에 의해 관계를 맺어지게 되는 점이고, 인간의 관계성이 서로 외면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시빌라의 의지로서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판단력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의지가 아니라 시빌라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선택하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빌라의 침식아래 인간의 선택점은 계속 수동적인 인간으로 되게금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진 세계인 즉 스펙타클에 의해 모든 것을 움직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왜 파놉티콘이 중요한가? 파놉티콘은 거대한 원형탑에서 소수의 감시자가 360도로 모든 사람을 감시할 수 있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은 감시당하는 자는 자신이 현재 감시자로부터 통제받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파놉티콘의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감시당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감시의 체제가 하나의 편리함으로 대체된다.
<사이코 패스>2기 8화에서 카무에 대한 추적에서 조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시빌라 시스템이 파놉티콘 시스템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점이고, 파놉티콘은 경제와 교통을 통제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18세기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계급은 이미 상승하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하여 19세기 혁명의 시대는 왕정시대에서 의회민주주의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1차 및 2차 대전으로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존재는 계몽으로서 자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계몽에서 멀어진 존재로 보았다.
근대 이후 탈산업 시대에 도래에 따라 인간은 점점 물질적 문명에 길들여져 가는 것에서 자신들의 삶을 감시와 처벌로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경제와 교통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는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 인간이다. 교통이란 것은 물리적으로 인간이 직접적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개인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목적지를 알고, 실시간으로 그가 어디에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완벽한 감시가 되는 점이다. 또한 경제라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산하여 소비할 수 없다.
자신이 생산하여 소비하는 시대는 위에서 언급한 18세기로 끝이 났다. 농경산업시대에는 자신이 곡물을 생산하고, 가축을 사육하여 가족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유럽에서는 페스트나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노동인구의 감소 및 농경지의 황폐화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시장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래도 역시 중상주의 이전에 중농주의이란 점이고, 농업이 중심이 되는 것은 결국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자녀들을 계속 출산해야 하는 점이고, 그런 방식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사회구조였다.
하지만 19세기 자본주의 시장구조가 발달되고, 20세기에 기계의 발달로 대부분 산업구조는 1차인 농업에서 2차인 공업, 더 나아가 3차인 서비스로 변경되었다. 결국 자신이 생산한 식량과 재화로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품에 의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코 패스>에서 그 사회의 토대가 되는 식량을 생각하자. 인간이 없는 무인시스템이 자동으로 곡식을 키우고, 그 곡식이 사회의 운영에서 토대가 된다. 제 아무리 3차 서비스 산업이 90% 넘더라도 기본적으로 식량산업이 운영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고, 그 식량을 가공할 수 있는 2차 산업이 중간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시 그 사회는 버틸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1차와 2차 산업에 대한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경제적인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생계의 유지는 곧 소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소비는 결국 경제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경제활동이 사회생활이 되는 것이고, 경제의 흐름에서 소비자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파는지 확인함으로서 그의 식생활과 취미, 생활패턴까지 읽을 수 있다. 감시라는 것이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감시가 더 이상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더 불편한 일이 되는 것이다. 왜 시모츠키 미카는 츠네모리 아카네를 의심하고, 그녀와 관련된 것을 찾으면서 시빌라 시스템이 꾸미고 있는 하나의 계획에 다가가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카무이와 관련된 어떤 상관지점이 있고, 또한 그것은 정치적인 권력으로 통해 어떤 이익을 노린 것이다. 그 이익이란 바로 법 위에 군림하는 자 Nomos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이유가 바로 법이란 제도적인 체계가 있어서이다. 하지만 법이란 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인간의 활동에 의해 비로소 그 체계가 반영되는 것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는 우리 일상생활에 쉽게 볼 수 있다. 길거리만 지나가도 보이는 경찰, 관공서의 공무원,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헌법을 비롯한 다양한 법에 의해 활동하나, 그들이 법의 규정에 따라 움직이기 위해서는 법 위에 군림해야 하는 셈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모든 인간들의 생활을 윤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사회, 공안, 보건 행정이 복잡하게 섞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력의 연속화, 즉 인간이던 자들이 인간의 조건이 되는 육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오직 뇌로서 활동하면서 인간 아닌 인간 이상의 존재로 되고자 했다. 시빌라 시스템에 의한 면죄체질은 바로 시빌라 시스템이 가할 수 있는 처벌을 초월한 존재이다. 즉 사회통제시스템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빌라 시스템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다. 이들은 공리주의라는 이념으로 활동하나, 그 이념 뒤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통 인간에게 은폐하여 하나의 신화로서 작용한다.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체계가 아니라, 완벽한 체계로 되도록 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서 강제적인 처리방식이 보이고, 그런 방식에 허점과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런 허점과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시빌라 시스템이 군중들에게 아주 우수하고 문제없는 체계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시빌라 시스템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아이러니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를 프랑스8대학에서 언론정보 및 사회학자로 활동 중인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를 보면 상당히 적용하기 좋은 말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을 시작하여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면 더 좋은 이 책에서 인용한 문구를 생각해봐야 한다.
① 법치주의와의 갈등은 민주주의의 야만화라는 가치 퇴행을 동반한다. "악"이란 규범에서 벗어난 의심의 논리는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가한 처벌의 흔적이 지극히 정상이며 상식적임을 강조한다. 기능적인 의미와 국가이성에 반하는 모든 이는 가장 어둡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연구하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비평가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되풀이하며, 이를 통해 형성된 역사적 시각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례적으로 위급한 상황과 연결된 복잡한 관계에 대해 언급할 때 다른 방식을 찾는 것은 위기와 사회통제의 관계를 설명할 때 다른 방식을 찾는 것과 같다. 가장 먼저 여론에 대응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례적인 상황은 설득, 억압, 캠페인, 프로파간다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심리전 전문가가 규정한 '정신적인 전사'라는 용어로 설명한다면 신체의 통제를 함축한다.(페이지 6)
기본적으로 <사이코 패스>에선 집행관이 집행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시민들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범죄수치가 급격히 증가한 점에서 원인자 문제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범죄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무조건 살인을 합리화 하는 과정이 보인다. 그런 모습에 대해 일절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조차 국가의 정당성만 찾을 뿐이다. 이런 억압과 프로파간다적인 방법은 감시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시빌라 시스템은 바로 민주주의 정치체계가 아니라 단지 공리주의 체계로 추구할 뿐이었다.
② 법률적 공리주의의 창설자이자 다수의 형벌제도 개혁안을 완성했던 영국의 철학자 벤담은 처벌법으로서의 형법에 대한 실용적인 이론의 연장선에서 파놉티콘 개념을 공식화했다. '파놉티콘'은 건축양식 중 하나로 원형 감옥을 말한다. 원형 감옥의 구조는 감방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고 중앙에 감시탑이 있어 감시인이 한눈에 죄수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다. 반대로 감시를 당하는 이들은 타인과 분리된 채 개인 감방에 격리되어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을 볼 수 없다. 이 같은 공간의 조직화 방식은 사회구조 전반에 관한 계획과 연결되어 일종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벤담은 파놉티콘과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일정 수의 사람을 감시하는" 기능을 지닌 기관이라면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적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수감 시설만이 아니라 학교, 고아원, 공장, 보호시설, 병원, 군대와 같은 감금 시설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페이지 16~17)
감시의 대상은 학교, 공장, 병원, 군대, 감금시설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낙인이 찍힌 자들은 모두 격리수용시설에 갇히고,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거기서 계속 썩을 때까지 살아갈 것인지 아니라면 감시관 감시 아래 집행관으로서 더러운 일을 하는 사냥개로 남는 것에 대한 차이다. 길가에 언제나 시빌라 시스템의 눈이 작동하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감시하여 사회적 비적응자를 배제하고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사이코 패스>에서 보여주는 안정된 세계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라이스가 <서양의 문명사회와 관습>을 증명한 것처럼 ③ "내부적인 통제와 외부적인 통제의 왕래"는 점진적으로 "감정적인 삶의 제한과 규제, 즉 일종의 '자기통제' 혹은 '자기규제'에 의해 해석되는 예속화와 의존성의 강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합리화'란 "인간의 모든 심리적 체계를 일괄하는 변형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에 불과하며 자아와 초자아의 통제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충동의 통제"라고 기술했다. 이런 심리적 자기통제를 변형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상호 의존성, 인간 상호 관계의 집합 그리고 사회조직의 통합으로 이는 언제나 한정된 의미에서 행해지는 변화일 뿐이다."(페이지 17)
감시라는 것은 당연히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와 감시는 그 사회의 전반적인 당위성이 되어 하나의 도덕과 정의로서 활용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람들조차 모두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되는 눈이 된다. 뭔가 누군가 다르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상의 시선은 의심으로 변해버리며, 의심은 하나의 잠재범죄자로 보게 된다. 감시와 처벌은 단순히 감시자에 의해 움직이는 체계가 아니라 감시당하는 자까지 서로 감시해서 모두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정치공학적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의 눈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문제는 이런 점은 법적인 제도에 의해 맞춰 가는 게 아니라 문화적인 흐름까지 인용되는 것이다.
생리학자 프란츠 요제프 갈은 인간과 기능과 성향은 모두 인간 내부인 두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두개관찰법으로 통해 두개골 두피표면을 조사했다. 그가 조사한 인간들의 두뇌는 감옥, 보호소, 구제원, 고아원, 군대 같이 시체를 손쉽게 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가 두개골을 관찰하여 두뇌의 소유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골상학을 정립하였다 ④ 같은 두개골 관찰로 통해 인간에게 27가지의 기능 혹은 27개의 핵심적인 기관이 존재하며 이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여기에는 결혼에 대한 성향, 살인에 대한 성향, 소유에 대한 성향, 비축하고 저장하려는 성향, 절도 성향, 형이상학적 정신과 영혼의 깊이와 관련된 기관, 정의와 비리의 감정, 선과 시정을 관할하는 융기부, 헌신의 기능 혹은 새로운 현상을 수용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 확고부동함과 관련된 기능, 참을성의 기능, 인내심의 기능, 완강함의 기능 등이 있다. 갈은 그가 완성한 새로운 규칙은 단순히 인간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의학적 연구, 도덕, 교육 그리고 입법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의 규칙은 훗날 형법 개혁에 일조하게 된다.(페이지 21~22)
<사이코 패스>에서 처음 인간의 심리를 체크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시점은 어디일까? 분명히 작품에서 언제 어디서부터 라기 보단 단지 과거 베테랑 형사 마사오카 젊은 시절에 없었던 시빌라 시스템이란 점에서 감시체계가 사회적으로 적용된 시기는 작품 내에서 20년 내외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반에 어떻게 하면 인간의 심리를 확인할 수 있는가? 도미네이터의 눈으로 본다면, 인간의 범죄수치를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초과학적인 기술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불안하고, 그의 심리적인 요소에서 무의식적인 요소까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공과 맥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뭔가 불순한 생각이거나 불안하다면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내지 뇌의 활동범위가 스캐너의 검사대상에 해당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도 인간이 침착한 상황에서 범죄를 계획하는 것이라면 상당히 난해한 부분이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인간의 통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미 인간의 유형별 데이터가 모집된 점이고, 그런 데이터에 의해 적용되거나 판단될 수 없는 자들이 이레귤러이고, 그들은 시빌라 시스템에서 처리가 불가능하기에 시빌라 시스템의 일원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선택점은 바로 골상학의 시작지점처럼 통계수치화 되지 않은 인간이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바로 골상학이 시작한 통계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⑤ 범죄수사를 목적으로 생체측정기술이 최초로 적용되면서 이 같은 생각은 집단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1885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교정학회에서 프랑스 법무부 소속 교정 시설장은 "개인등록증"처럼 개개인의 인체 측정 정보가 담긴 "신분증명서" 발급을 옹호했다.(페이지 23) 7년이 흐른 뒤,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범죄인류학회 참석자들은 "단지 재범자의 신분 식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신분을 빠르고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인체 수치 측정 수치 시스템을 도입하고 보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바람을 드러냈다.(페이지 23)
문제는 이런 감시체계가 반드시 <사이코 패스>에만 적용된 게 아니라 이미 19세기부터 인간의 감시를 위해 체계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이코 패스>만 인간을 스캔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기술이 부족해도 그에 버금가는 사회적 구조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것을 해서 누가 이익을 보는 것인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 관료주의와 만날 경우 공동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관료들은 기술로서 국민을 통제하고, 기업은 그 통제로 통해 상품을 판매하거나 특혜를 가지며, 그 이익을 관료들과 분배하는 것이다.
가령 지리학적으로 길가의 도로가 계속 정비되고, 구획이 일정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길가의 시민들의 통제가 쉽고, 교통의 통제가 쉽다는 것이다. 복잡한 길이라면 교통의 통제범위에서 벌어지고, 감시대상자들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리고 거리가 구획이 되면서 기존 살던 사람들은 퇴거된 후에 새로운 건축물이 올라가고, 도로가 확장된다. 거리는 차를 가진 자들이 편안하게 다니고, 백화점과 상가에는 좋은 상품이 많이 올라온다. 골목안의 가난한 자들은 집을 잃고, 재래시장의 소멸로 생계를 위해 계속 변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변두리에 거대한 건물인 아파트 안에서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어 같이 옆에 있어도 서로 분리된 존재로 각인한다.

감시와 통제는 최종 목표는 모든 것을 감시자로부터 감시할 수 있는 기술과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시당하는 자들이 서로 감시하여 사회적 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유사해 보인다. 서로를 감시하고, 어떤 감정이나 특이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만약 한다면 내부고발로 통해 그 사회에서 제거된다. 속전속결로 제거되는 감시사회에서 가장 좋은 감시체계는 내부의 감시다. 사생활의 영역은 감시의 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 경제활동과 교통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란 내부의 감시를 더 초월한 감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평소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관찰하여 확인할 수 있다면? <감시의 시대>에서 테러리스트 검거에서 수만 가구의 세금납부 현황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카드로 결재하거나 또는 계좌이체 하는 사람 이외 누가 현금으로 결재했는가? 그리고 그 결재대상자는 얼마나 자신의 집에서 거주했는지, 금액은 어느 정도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같은 규격의 집에 거주하는 사람과 지불하는 금액이 유사할 것이나, 특이하게 높거나 낮다면 의심이 강하다. 다행히 검거대상자는 테러리스트이겠지만, 하다못해 독재자나 군부정치가 심한 곳이라면 분명 암울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다. 감시대상자가 특정 범죄자가 아니라 불투수 대다수의 인간이라면 그것만큼 위험한 사회가 없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