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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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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블로그 활동을 하다가 이웃 분의 포스팅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스팅 하던 주제는 서울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인상파 화가 전시회였다. 이때 전시회 주제에서 메인 그림으로 소개된 그림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장갑에 양산을 잡고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에서 <작별>이란 그림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의상에서 느껴지는 색의 미학도 그러하나 작은 손에 잡힌 양산, 게다가 살짝 접힌 손가락, 얼굴은 옆에 뺨만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상당한 품위를 가진 우아한 여성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등을 반득하게 피며, 검은 여기를 내뿜는 배를 바라보는 그 여성의 눈가에선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떠나보낸 사람은 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양산이 그런 것 같았다. 뾰쪽한 것을 잡은 여성의 손, 그것은 아마 남성의 상징인
남근인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태운 배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들을 이래저래 살펴보다, 그 아름다운 선과
색, 그리고 따뜻한 색감들은 나에게 큰 인상을 건네주었다. 미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단지 그림을 처음 보며 로코코의 탐미주의적인
요소의 여성도 보이고, 고전주의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그려진 여성들은 대부분 우아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 중에
<꿈>이란 그림이 있다. 어느 한 여성이 벤치에 책을 올린 채 정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은
없고, 단지 지금 나의 고독인지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드레스와 장갑에서 보이는 우아한 몸짓에서 어떤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낯선 거리감과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 넘친다. 책을 읽는 여자의 느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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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새겨진 어느 신문기사에서 나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란 소개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겉표지는 에스파냐 출신 화가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의 <무도회 이후>라는 작품이었다. 무도회에 권력과 재력이 있는 속물적인
인간들 사이에 있기보단 차라리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잡는 여자의 모습은 매우 도발적이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기사의
소개에 나온 사진으로 매릴린 먼로가 아주 관능미가 넘치는 육체인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것도 있으며, 역시 내가 이끌린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이 있다. 개인적으로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수 곁에서의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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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내가 읽는 것은 책을 읽는 여자에 대한 책이다. 개인적 취향보다 소중하지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를 읽으면서 생각 드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여성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이란 흔한 물건 중에 하나였지만,
19세기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흔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따라 인쇄술이 대량생산과 대량판매로 인해 유통되었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부류도 대다수의 대중보단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중산층 이상의 부류였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20세기 이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은 대다수 어느 정도 경제적 지위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본 것처럼 가난한 여성 아니 가난한 남성 그 모든 사람들이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으로 정착되던 시기는 아직 130년도 되지 않았다. 독서를 하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사색을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시간적 여유, 공간적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런 조건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물론 이것조차도 호혜일 수 있다.
여자들이 왜 책을 읽으면 위험한가? 책에는 각종 지식이 담겨있고, 인간의 사유를 넓혀 준다.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권력계층이 가진 특권이었다. 즉 인간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해도 글로서 쓰고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식으로
얼마든지 현실의 문제를 알 수 있었고, 자신의 통치를 해주는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식이 대다수 민중에게 퍼지는
순간, 부당한 현실에 반항하고 지배계층에 의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중 특히 여성에게 책은 금물의 대상이었다.
오직 볼 수 있는 것은 성경과 신학서적, 그것은 당시 중세유럽에선 신앙이 정치적인 제도와 권력을 좌우했기 때문에 종교와
신학에 대한 이념은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더 강력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만약 여기에 정치학과 사회적, 그 밖에 많은 서적들을
여자들이 읽는다면? 남성과 똑같은 수준의 지성과 이성이 생기는 것이다. 작가인 슈테판 볼만은 이런 점을 잘 지적했고, 특히나 동양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실천한 이유도 진시황 자신의 통치방법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대 지식인일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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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이 없어지면 자신의 정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책까지 불태우면 앞으로 반대할 사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책을 읽는 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음으로서 현실의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시민 내지 지식인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은 권력을 지닌 남성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여성들은 뒷전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민감한 여성들은 남녀차별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 계급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이 점점 와해되어 가던 시기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부터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혹은 근대사상과
근대정치의 틀을 만든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전 근대적인 봉건왕조시대를 넘어 이제 다른 정치체가 열린 것이다. 이때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보수보다 급진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들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자크 루소를 존경했고,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국민공회와 헌법체계를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루소의 서적인 <사회계약론> 이전에 유명한
서적으로 <신 엘로이즈> 또는 <줄리>라는 서적이 있었다.
낭만주의 문학이 도래하고, 루소를 이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열광적인 사랑과 더불어 시대적 문제를
공격한 위험한 책이었다. 귀족이나 혹은 상류계급의 여성과 그녀를 사모하는 계층이 남자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다루었으며, 끝내 이루지 못해 영원한
이별로 긴 여행을 가거나 때로는 베르테르처럼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당시 귀족이나 상류여성 또는 막
태어난 지식인 여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프랑스대혁명 여걸 롤랑 부인 역시 귀족의 아내지만, 루소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그 외에 수많은
여성들이 루소의 책에 흠모를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시기
책을 읽은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면 18세기까지 책 그 자체가 귀했다.
책을 생산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 책을 얻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한정적이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곧
특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곧 그의 지식의 보고이며, 또한 그의 지식은 권력이기도 하다. 어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소설의 등장과 보급은 엄청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처음 보고 놀랐지만, 18세기 전후로 책 1권이
보통 가족들이 2주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치란 점에서 책이 귀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단 번에 알았다. 하지만 이제 책은 점점
보급되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여성들은 처음에 내부 활동만 하게 되면서 순종적인 인생을 강요받다 어느 순간 그 내부 생활에서
책으로 통한 여가생활을 가지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존 지배계급과 그 지배계급에 의해 다시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층)남성과 남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한 이유는 아마 그런 기존의 이념에 순응적으로 따라가는 여성이 아니라 거기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책을 읽는 여성들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자신으로서 있는 모습이 많다. 곧 나는 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의지와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후기에도 그런 진보적인 남녀관계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문학가 엘케 하이덴라이히는 여성의 자율적인 인간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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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여자들은 표지의 글처럼 책과 나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빈 자리가 없다고 하나, 막상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엘케 여사의 글을 보면 책을 읽는 여자는 남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근대사회나 근대사회에서나 남녀의 결혼문화에서 여성에게 결정권은 없었고, 그저
시대의 도덕에 따라 흘러간다. 이제는 그녀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은 기사에선 이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책 읽는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녀들은 좀 더 영리해지는 것도, 이기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돼야 한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여자들은 결국 책을 읽는 남자, 아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고, 책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얻은 그 무언가를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뭔가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잘 지적하다시피 21세기 시대는 영상의 시대다. 문자문화의 이전 시대는 종교의 관념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배했지만, 다시 이제
이미지의 세계가 인간의 관념을 지배한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의 흐름에 부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의 항로를
찾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확실히 밖에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여자들은 뭔가 색다름이 있어 보인다. 물론 책이라고 하여 수험서 내지 교과서,
자기계발서 같은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한 책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양식,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찾아 자신만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매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개성이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중요한 것 같다. TV 내지 미디어로 익숙한 삶을 살게 된 현대인들은
도저히 각자의 개성을 알 수 없다. 흔히 미팅이나 또는 모임자리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왜냐하면 항상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이제 막 개봉한 영화를 대형극장가에서 보고, 어제 재미있는 쇼 프로그램을
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가 같은 것을 돌고 돌며 이야기하기에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야기의 형태는 다르게 진행되어도 결론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후크 송처럼 들린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취향을 읽거나 혹은 새로운 재미를 찾아 다른 분야의 서적도 읽어본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 최근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라는 책은 19세기 조선시대 북학파 및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생과 업적 그리고 서재에 대해 다룬다. 이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알았고,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방에 거주하는 내가 서울 쪽에 세미나 참석 후에 잠시 성북동 일원을 거닐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분이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로 통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 그리고 다른 재미와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서모임 때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서로 공감도 하기도 하나, 때로는 전혀 다른 반응이 오기도 한다.
그런 타인과 공감과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매력이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이 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이질적인 존재 즉 책 제목처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로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책을 읽지 않는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더욱 위험하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세상의 물결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남겨둠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을 그저 그래 다루지 않는다. 그 남자가 언제나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자신의 선택지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그녀들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가진 존재다. 프로이트가 남자들은 성욕에 빠진 존재라고 하듯이 나 역시 남자라서 성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 성욕을 가진 평범한 남자라도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성욕의 대상으로 살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있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욕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진 상대만이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인간은 한가로움을 추구해도 지루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가 보통 TV나 유행에 쫓는 여자들에 대해 눈이 갈 수 없는 것은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과
있으면 언제나 지루한 기분만 느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은 여자들만 있는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나라면 그 세계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지루함 세계에 있는 여자들은 성과 이름, 얼굴과 형태만 다를 뿐 그 속은 어느 누구 하랄 것 없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해준 분은 분명 여성인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소개해준 것에 대한 소감을 덧글로 남길 때 그분이 나에게 답변내용으로 “요즘은
정말 지성과 감성이 이성이 고루 분배된 여인은 드물죠, 그림도 그렇고. 문학 속 인물들 그렇고, 살기가 바빠서 라고 탓하면서” 말이다. 물론
여기에 기본적인 품위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이란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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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든 책을 읽는 여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그녀들이 위험하다고 하나, 그녀들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는 정신적인 교감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남자들이 단순히 그녀들을 보는 시선에서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파울로와 프란체스코>처럼 있기보단 차라리 그녀의 손에 든 책에 대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녀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될 듯하다. 물론 이 시대는 그런 그녀들이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