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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앞 민박집)
최근 들어 루소의 서적들을 계속 읽다가 루소가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탄생했고, 그의 저서 중에 <사회계약론>이 1762년에 저술된 것을 알았다.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적이다. 왜냐하면 로베스피에르나 당통과 같은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이 되어준 도서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정신으로서 루소가 저술한 <사회계약론>이 나올 쯤에 한국에서도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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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앞 다신계 찻집 주치장)
그분의 이름은 정약용, 본래 그의 호가 다산(茶山)이라고 하나, 사실 사암(俟菴)으로 사용되었다.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은 귀농(歸農)이라고 했고, 미용(美庸)이라 했다. 귀농이 된 이유는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란 선비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은 사건으로 인해 시골로 귀향했으며, 이때 정약용 선생이 탄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배경은 영조시대로 서인들 중에서 특히 노론(老論)이란 벽파가 득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 역시 노론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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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앞 민박집)
어린 시절 영조 아래서 자라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슴깊이 원한을 감추고, 언제나 자신의 암살하려는 자의 위협때문에 새벽닭이 울면 잠이 들었다고 한다. 영조 역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후회로 살아왔으며, 그 자신도 후궁의 자식이란 당시 사대부사회에 대해 환멸과 동시에 권위를 찾으려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벌하려고 할 때 조선 3대 명정승인 채제공 선생이 영조의 옷자락을 붙잡고 사도세자의 구명을 간절히 바랬으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며 머리를 숙인 채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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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주인 윤단의 후손이 운영하는 다신계 찻집)
물론 사도세자는 그렇게 죽었으나 채제공은 정조의 신임을 받고 정약용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며, 정약용의 탁월한 후원자였다. 정약용은 정치적은 남인(南人)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파였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시대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면서도 실학자인 성호학파의 후예였다. 정약용 선생은 성호선생을 평생 존경했으며, 성호라는 호수 위에 다산학이란 큰 학문을 펼쳤다. 한국의 철학사상에서 모든 것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모아진다고 했으니 그 얼마나 큰 영향을 준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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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앞 민박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 다산의 자가 귀농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가? 또한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에 천연두가 만발했기에 정약용 선생 역시 천연두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이마에 점이 생겨 미용이란 이름이 생겼다. 정약용의 그런 험난한 조선시대 후기에서 정조는 조선군주의 최후의 명군이었다. 학문과 무예를 중시하고, 권력의 암흑에서 백성들의 도탄으로부터 지켜내려 했다. 나는 아직도 이계심 사건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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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구 윤서유의 집 안내표지판)
정약용 선생이 어느 시골고을의 판관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정약용 앞에 어느 사내가 길을 막았다. 그는 이계심이란 사람으로 정약용 선생이 오기 전에 판관에게 항의를 하던 주동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으로 보면 반국가적 인물이었으며, 운이 좋지 않으면 참수형에 효시까지 당할 수 있었다. 그가 목숨걸고 정약용 선생 앞에 나와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조목 10가지를 보여주며, 울분을 토했다. 정약용 선생은 이계심에게 오라를 하지 말라 지시하며 그를 옆에 걷게 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문제점을 다 해결해주었고,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만세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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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발당, 밝음이 시작하는 장소)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일화나 이야기를 듣거나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짠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계심이 아니더라도 그가 하려던 정치의 근본, 즉 백성이란 점 백성이 있기에 국가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시기와 질투 그리고 파괴의 조짐이 왔다. 정약용 선생은 기본적으로 성호학파였고, 그 중에서 급진적인 편이었다. 만천 이승훈, 광암 이벽, 선암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성인으로 모실 정도로 큰 업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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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발당)
문제의 시초는 1791년 정약용의 이종사촌인 윤지충과 그의 사촌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사르는 죄로 참수가 되는 일이 생겼다. 당시 윤지충의 가계에서 조선 중기 문신인 고산 윤선도가 있었다. 노론세력에서 고산 윤선도는 최강의 적이었다. 예송논쟁에서 노론 거두 우암 송시열과 말다툼하여 귀양살이를 밥먹듯이 한 윤선도의 후예는 노론 입장에서 반드시 칠 적이었다. 그날의 사건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한국의 천주교성인 목록은 생성되었으나, 당시 그 집안은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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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발당)
그 윤지충의 목이 잘린 곳에 현재 전주 정동성당이 위치해있다. 웃긴 점은 그의 친계의 조상인 고산 윤선도가 태어난 곳은 서울 명례방으로 현재 명동성당이 위치해있다. 그의 후손들은 해남 연동리 비파숲 아래 녹우당이란 가채로 이어져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천주교박해는 신해사옥과 더불어 1800년 정조의 승하,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이어진다. 정약용은 신해사옥 이후 천주교에 대해 마음을 버렸으나, 그것이 평생 자신의 꼬리를 붙잡아 따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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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매조도)
그의 주변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신유사옥과 황사역백서로 주변 친구와 친척들은 사문난적으로 되어 목이 잘리거나 귀양가거나 영영 볼 수 없는 운명의 길에서 사라졌다. 그의 귀양은 18년, 경북 장기현으로 하여 강진으로 올때까지 외로움과 괴로움의 나날이었다. 다산초당은 귀양살이 후에 한참 뒤에 올라간 곳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윤서유 역시 신유사옥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서로간의 마음을 녹이고, 정약용이 아무런 해가 없음은 강진 마을주민들이 알게된다.
이때 정약용의 외갓집의 일가가 다산초당으로 모신다. 그리고 귀향살이에서 한국의 문학, 사상, 철학, 의학, 경제학, 법학 등 모든 다산학의 시작이 이제 빛을 본 것이다. 유배지에서 그가 한 업적은 동양 한문학권에서 대단한 발전을 미쳤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귀양살이는 풀어날 기미도 없으며, 그런 와중에 자신의 막내아이가 죽는 변도 당한다. 귀향 후에도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자들도 여전했으며, 그를 예전에 아주 괴롭히던 자가 이제는 마치 안부를 물어 잘 지내냐고 묻는다.
조선의 천주교의 도래에서 메시아주의로 인한 피의 분출에서 정약용은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형인 정약종은 신유사옥에 죽어도, 그의 후손 역시 정약종에 따라 죽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한국의 메카시즘이란 공포 역시 다른 형태로 핍박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일대에서 유배지의 모습은 인상깊다. 애절양이란 시를 보면서 당시의 농민이나 혹은 남근을 스스로 베지 않아도 의미가 없는 현대사회의 청년들의 모습이 서로 겹쳐 보인다.
예전에 내가 대학을 다닐 적에 천주교재단의 소속이었는데, 그곳에서 다도동아리 회장 활동을 했다. 학교 뒤에 수녀원엔 다도를 하신 수녀님도 계셨다. 그런다고 내가 천주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전통사상인 무속신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신화학에 대한 도서를 읽어보면서 신화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래저래 보고 있는 것이다. 차문화에 대한 인물로서 조선시대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딱히 차를 발전보단 차로서 어떻게 인물들이 서로 문화를 교류했는가이다. 아직도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귤동마을에 위치해있다. 귤동마을은 당시 귤이 어느곳에서 안나오고 제주에서 나오나, 강진 귤동마을에서 나오고, 그 귤동마을에 야생차가 많이 서식하여 다산이라 불렀다. 자연의 정취를 좋아하는 정약용 선생이 그래서 다산이란 호를 사용했다.
예전에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 초당은 초갓집이었다. 60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보수와 화재의 문제로 기왓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초당은 아직도 귤동마을의 선비인 윤단이란 사람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정약용 선생이 좋아한 다산의 야생차를 달아 만드는 일을 하고 찻집 다신계를 운영중이다. 예전에 맛본 적이 있는데 참 맛있었다. 은은한 녹차의 향이 울려퍼지는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 우리 사회에 들어가기를...